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210)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210화(210/608)
제210화
엘과 일행들이 파이어 버스터와 고군분투하는 그 시각, 형벌의 궁처는 주인의 부재로 중단되었던 업무가 바쁘게 재개되고 있었다.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쌓인 서류는 이미 예상했던 대로 탑을 이루다 못해 집무실 밖까지 넘쳐흐르고 있는 상태였다. 그중 대부분이 마계의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엘뤼엔의 눈빛이 잠시 살벌해졌지만(이 순간 파견된 마신의 천사들은 모두 벌벌 떨었다) 그는 늘 그래 왔듯이 별다른 불평 없이 묵묵히 일에 전념했다.
상급신으로서는 매우 드물게 성실한 그의 진면모가 이번에도 어김없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주인이 성실한 건 모시는 이들에게는 매우 큰 축복인지라 궁처의 천사들은 모두 흐뭇해졌다.
업무는 빠른 속도로 진행됐고, 흐트러졌던 일상은 금세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뜻밖의 훼방꾼만 없었더라면 계속 그랬을 터였다.
“엘뤼엔 님!”
“…….”
문을 열고 쳐들어오다시피 나타난 남신의 모습에 엘뤼엔은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깃펜을 내려놓았다. 누군가 궁처에 접근하고 있다는 건 일찌감치 느꼈지만, 침입 경보를 울려 거부의 뜻을 강력하게 피력한 참이었다.
그가 막고자 마음먹으면 어지간한 자들은 감히 그의 궁처에 들어올 엄두도 내지 못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상대는 그것을 무시하고 넘어올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들 중 하나였다.
빌어먹을 최고신.
엘뤼엔은 속으로 욕설을 삼키며 눈앞에 서 있는 명계의 신 섀넌을 노려보았다. 게다가 이번에 방문한 것은 그 혼자가 아니었다. 처음 보는 여인이 그와 함께 있었다.
여인은 어지간한 남신들보다 쭉 뻗은 장신이었다. 분홍빛이 감돌아 생기가 도는 피부, 훤칠한 키만큼이나 날카롭고 시원시원한 이목구비가 우아한 암표범을 연상시켰다. 푸른색 동공이 박힌 눈동자는 달빛이 스며든 듯이 밝은 은색. 파스텔 톤의 머리카락은 무지개처럼 여러 가지 색이 혼합되어 있었는데, 높이 올려 묶었음에도 허리 아래까지 풍성하게 흔들려 마치 거대한 모피를 두른 것처럼 보였다.
타고나기도 화려한 외향인데 하필 옆에 있는 사람이 음침한 느낌을 풍기는 섀넌이다 보니 여인의 화사함이 더욱 돋보였다. 아슬아슬하게 가린 차림이 그녀의 늘씬한 육체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지만, 전신이 단련된 탓인지 선정적이기보다는 위협적인 전사의 느낌에 더 가까웠다. 몸에서는 꽃 향이 감도는 햇살 냄새가 짙게 풍겼다.
밝고 화사한 외형, 마른 볕이 느껴지는 체향은 천의 속성 신들에게서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이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도 엘뤼엔은 그녀의 정체를 바로 알아보았다. 저 섀넌과 나란히 나타날 만한 존재라면 어차피 뻔했으니까.
“천신과 명계의 신이 이곳엔 무슨 일이지? 사이좋게 산책할 장소라면 잘못 고른 것 같은데.”
엘뤼엔은 굳이 귀찮은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어차피 방해하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쳐들어온 자들인 만큼 정중하게 맞이해 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의 불퉁한 행동에 섀넌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여인―천신 이오웬은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그녀는 오히려 관찰하듯이 엘뤼엔을 빤히 응시했다.
“당신이 바로 말로만 듣던 그 엘뤼엔이야?”
“무가치한 질문이군.”
“……싹수없는 대답을 보니 확실히 엘퀴네스 출신은 맞구나.”
웃을 기분은 아니었으나 그녀는 가볍게 웃었다. 소문이 무성한 형벌의 신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상급신이니 어느 정도 얼굴이 반반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기대 이상으로 아름다운 남자라 사실 조금 놀란 상태였다.
특히 그를 이루고 있는 색들이 그러했다. 마속성의 신들은 대개 어두운 색을 지니는 경우가 많은데, 그의 머리칼은 눈부시도록 밝은 금색이었다. 이렇게 화사한 금발은 천의 계열의 신들 중에서도 보기 드물었다. 눈동자 또한 투명한 하늘을 담고 있는 것처럼 색이 맑았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은 결코 성격이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시선을 끄는 느낌이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게 아쉬울 만큼.
‘엘뤼엔 크리노 루사테’. 마속성의 상급신이자, 형벌과 저주라는 파괴적인 힘을 지닌 신. 그리고 신계에서 가장 골칫덩이였던 제2의 마계, 바이톤의 담당자.
이오웬은 머릿속에 있는 정보를 차분히 되짚었다. 한때 멸망 직전에 치달았던 바이톤이 그가 부임하자마자 빠른 속도로 정상화된 일화는 너무나 유명해서 모르는 신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엘뤼엔이 주목을 받은 이유는 그가 엘퀴네스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정령왕들도 사정이 많이 다르진 않지만 그중에서도 엘퀴네스는 유독 신의 길을 거부하는 편이었다. 엘뤼엔이 태어나기 전까지, 많지도 않은 상급신들 중에서 엘퀴네스 출신은 마신 카노스와 지옥의 신 크라제, 단 두 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압도적으로 강한 한편 하나같이 성격이 괴팍하기로도 유명했다. 마신은 말할 것도 없고, 지옥의 신은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이라는 별칭까지 붙을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세 번째 엘퀴네스 출신인 상급 신이 태어났으니 모두의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그는 역대 최강의 엘퀴네스로 평가받는 존재라고 했다. 신들은 엘뤼엔이 무시무시한 괴물일 것이라 예상했다. 아무도 수습하지 못하던 바이톤을 부임하자마자 곧바로 평정하는 것을 보고는 더더욱 확신했다.
그러나 명성(?)에 비해 의외로 엘뤼엔은 그의 선배들처럼 두드러지는 횡포를 부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너무 조용해서 문제였다. 그는 주위의 모든 것들을 철저히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어디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신들의 연회는 물론, 중요한 회의에조차 단 한 번도 참석하질 않아 지금까지 그의 얼굴을 아는 이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완전한 고립을 택했고, 누구와의 교류도 원하지 않았다. 장난삼아 강제로 쳐들어간 마신 카노스를 성벽에 거꾸로 매달았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덕분에 아무도 엘뤼엔의 궁처를 찾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괴팍한 성격이기는 했다.
이오웬 역시 섀넌이 한 말만 아니었다면 일부러 만나러 올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속아주는 기분으로 온 것이었는데, 실제로 보니 정말이었다. 짜증을 섞어 찌푸린 시선도, 모든 것에 무감해 보이는 말투도, 빛을 담은 듯한 머리색과 눈동자마저도. 언젠가의 그를 떠올리게 만들어서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이게 그리움인지 거북함에서 기인한 감정인지는 그 자신조차 정의할 수 없었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당신, 정말 예전의 카노스랑 많이 닮았네.”
“……시비 걸러 온 건가?”
단숨에 일그러지는 얼굴을 보고 이오웬은 다시 웃었다. 닮긴 했지만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점은 조금 달랐다. 이오웬은 이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방문할 때만 해도 내키지 않은 마음이 더 강했는데, 지금은 진작 찾아오지 않았던 것이 후회될 정도였다.
“나랑 술친구 하지 않을래?”
그녀의 뜬금없는 제안에 엘뤼엔과 섀넌이 동시에 얼굴을 찌푸렸다. 엘뤼엔의 표정이 짜증에 가깝다면, 섀넌은 또 시작이냐는 탄식에 가까웠다.
천신 이오웬은 고상한 외모와는 다르게 천부적인 술꾼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거한 술자리를 만들어야 직성이 풀려서, 그녀의 지인들은 한번 붙잡히면 며칠씩 술독에 빠져 지내야 하는 일이 허다했다. 섀넌 역시 줄기차게 시달려온 희생자 중 한 명으로서, 새로운 피해자가 생기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이 달가울 리가 없었다.
하지만 다르게 말하면 그만큼 엘뤼엔이 그녀의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오웬이 술자리를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아무하고나 어울리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신들 중에는 이오웬의 술자리에 초대되는 것을 영광으로 삼는 자들이 많았다. 물론 엘뤼엔에겐 해당 사항이 없는 일이었지만.
“헛소리 말고 찾아온 용건이나 말해.”
“하하! 굉장한걸! 내 제안을 대놓고 헛소리라고 말한 신은 네가 처음이야. 왠지 점점 더 마음에 드는데?”
대화가 통할 상대가 아니다.
빠르게 판단을 내린 엘뤼엔은 말없이 섀넌을 응시했다. 그 시선의 의미를 파악한 섀넌이 어색하게 웃었다.
“으음, 죄송합니다. 우선 갑작스러운 방문을 용서하십시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그만……. 아, 그렇지만 이오웬을 데려온 건 절대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저 혼자 간다고 했는데 굳이 따라온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알았으니까, 용건.”
“……카노스를 만나고 오셨다 들었습니다.”
역시 그건가.
예상한 대답을 들은 엘뤼엔은 가볍게 혀를 찼다.
온갖 장소에서 다양한 사자(死者)가 모여드는 명계는 수많은 정보들의 창고이기도 했다. 그것을 총괄하는 입장이다 보니 섀넌은 딱히 염탐하지 않아도 주위의 소식에 밝은 편이었다. 하물며 탐색하고자 하는 상대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가 자신을 주시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정보를 접하는 속도가 빨랐다. 과연 초대 ‘바람’이로군. 엘뤼엔은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이 상황이 달갑진 않았으나 덕분에 무시하지 말라며 투덜거리던 이오웬이 조용해진 것만은 마음에 들었다. 물론 한 가지 사실은 정정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만나러 간 건 내 아들이다. 그 녀석이 아니라.”
“하지만 카노스를 만나신 것도 사실이잖습니까? 그와 단둘이 대화를 나누신 것도 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으면서 굳이 날 찾아온 이유가 뭐지? 대화의 내용까진 파악하지 못한 건가?”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아무리 저라도 거기까지 알아내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아예 대놓고 물어보시겠다?”
“……다른 때였다면 저도 이런 무례한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차마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하는 섀넌을, 엘뤼엔은 이채 어린 눈으로 응시했다. 어이없긴 하지만 차라리 솔직하게 나오니 불쾌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가 궁금해하는 내용이야 뻔했으므로, 엘뤼엔은 시간을 오래 끌지 않기로 했다.
“카노스라면 악신과 관련된 일을 조사하고 있는 것 같더군. 주술의 증거를 찾는 중이라고 했다.”
“……! 그, 그게 정말입니까? 그가 정말 그렇게 말했습니까?”
“들은 그대로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섀넌은 크게 숨을 삼켰다. 그 옆에서 이오웬 역시 뭐라 표현하기 힘든 표정을 짓고 있었다. 쉽게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기색이었지만, 그들이 원하는 대답인 것만은 분명했다. 얼굴에 화색이 감돌기 시작한 두 신을 보며 엘뤼엔은 묵묵히 당시의 상황을 상기했다.
아들의 변고를 느끼고 이동했을 때, 그를 맞이한 건 전혀 뜻밖의 인물이었다. 신계에서 사라진 이후로 행방이 묘연했던 카노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흔들고 있었던 것이다. 말갛게 웃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돌아가는 상황이 파악됐다. 엘뤼엔은 즉시 그를 걷어찼고, 앓는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카노스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너무 오래 살아서 머리가 돌아버리기라도 한 건가?”
“끄응, 오래 산 거 알면 조금은 연장자 대우를 해주지 않을래, 엘뤼엔? 혹시 하극상이란 단어 알아?”
“계속 헛소리를 지껄이면 진짜 하극상이 뭔지 알게 해주지.”
“아아, 서러워라. 이래서 먼저 태어나면 손해라니까.”
“닥쳐.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건지나 제대로 말해.”
“무슨 짓?”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뒤, 카노스는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는 듯 빙긋 웃었다.
“아아, 요즘 섀넌이 내 뒤를 캐고 다니는 그거 말이야? 그가 너한테 그렇게 말했어? 내가 악신의 각성에 일조하고 있는 것 같다고?”
“알면 해명을 해 보시지.”
“난 아냐.”
돌아온 대답은 빨랐다. 엘뤼엔이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자 카노스는 어색하게 웃었다.
“정말 아니야. 나한테 수상한 구석이 완전 많다는 건 인정하지만. 천성이 신비스러운 걸 어쩌겠어? 그렇다고 악당으로 몰아가면 섭하지. 나도 나름대로 증거를 찾는 중이었다고.”
“그럼 증거나 계속 찾을 것이지, 내 아들은 왜 건드린 거냐?”
“으음, 그것에 관해서라면 꽤나 복잡한 사연이 있는데…….”
“간단히 줄여서 말해.”
“그냥 궁금했어.”
이번에도 냉큼 뱉어진 대답에 엘뤼엔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카노스는 그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웃었다.
“한번 확인해보고 싶더라고. 본성을 잃어버린 정령왕이 온전한 힘을 되찾고 세상에 눈을 뜨면 어떻게 될지.”
“그건 네가 함부로 관여할 일이…….”
“그래도 그 아이가 널 아버지라고 여길지.”
“…….”
“마음을 준 것을 잃어버린 네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도.”
“…….”
속삭이듯 낮아진 음성은 명백한 도발을 품고 있었다. 엘뤼엔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단지 잡고 있던 멱살을 풀고 손을 떼었을 뿐이었다.
“그런 게 알고 싶으면 거울이나 봐.”
“……뭐?”
“그걸 확인할 용기가 없는 거 아니었나?”
무심한 한마디에 카노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한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그는 곧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정말 미친놈 같았지.’
다시 생각해도 불쾌해지는 기분에 엘뤼엔은 얼굴을 찌푸렸다. 물론 카노스는 그 이후 엘의 상태를 확인한 엘뤼엔으로부터 무자비하게 얻어맞았다. 그 순간을 떠올리면 엘뤼엔은 지금도 여전히 이가 갈렸다. 흔들어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 아들을 보면서 얼마나 당황했던가. 환상에 갇힌 아들이 그 안에서 겪은 험한 꼴을 생각하면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았다.
카노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바 아니지만, 그의 쓸데없는 짓거리에 자신과 아들이 휘말리는 건 사양이다. 악신에 관한 조사만 아니었더라면 그대로 끌고 돌아와 집무실에 영원히 처박아뒀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지금도 가장 한이었다.
“저어…….”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엘뤼엔은 눈썹을 들어올렸다. 섀넌이 멀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용건은 끝난 게 아닌가?”
어서 꺼지지 않고 뭐 하냐는 시선이 아직 자리에 머물러 있는 두 상급 신을 냉담하게 훑었다. 어디에서도 받아보지 못한 대접이라 섀넌과 이오웬은 서로 어색한 시선을 교환했다.
“엘뤼엔 님도 아셔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악신에 관한 정보들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들을 알았습니다.”
엘뤼엔은 집어 들려던 서류를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계속 말해 보라는 뜻이었다. 미적거리면 쫓겨날 기세라 섀넌은 얼른 다음 말을 이었다.
“일단 제물에 관한 것인데, 평범한 아이보다 이능력을 타고난 아이일수록 그 피가 각성을 앞당기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특별한 운명이나 영혼 또한 마찬가지인데, 희생된 아이들 중에 신의 영혼이 있는 걸 확인했습니다.”
“신의 영혼이라…….”
“두 명이나 됩니다. 전체 필요량을 수치화하는 건 어렵긴 합니다만, 그들에게서 얻은 힘만으로도 이미 상당수 조건을 만족시켰을 겁니다. 이대로라면 각성은 말 그대로 시간문제인 셈이지요. 어쩌면 각성을 막는 것보다 태어난 악신을 소멸시킬 방법을 찾는 것이 더 현실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설명하는 얼굴은 두꺼운 안경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조금 침울해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오웬이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투덜거렸다.
“소멸시킬 방법이라니. 애초에 악신은 주신의 권능에 맞먹는 존재잖아. 우리가 상대나 되겠어?”
“물론 어렵긴 합니다만, 각성 직후를 노린다면 아주 불가능한 것만도 아닙니다.”
“각성 직후?”
“각성 전후로는 한동안 불완전한 상태니까요. 우리 모두가 힘을 합치면 본격적으로 활개 치기 전에 움직임을 잠시간 봉할 수는 있을 겁니다. 그때가 뭔가를 시도해볼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겠죠. 문제는 그의 소멸에 필요한 조건인데…….”
“그런 게 있긴 한가?”
이번에 질문을 건넨 건 엘뤼엔이었다. 섀넌은 목이 타는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한 조건을 이루면 악신이 될 수 있듯, 반대로 일정 조건을 이루면 소멸시키는 것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물론 이 부분은 좀 더 정확히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조건은 찾아냈습니다.”
“그게 뭐지?”
엘뤼엔과 이오웬은 물론, 근처에 있던 모든 천사들까지 모두 섀넌의 입을 주목했다. 대답하기에 앞서 섀넌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 말을 함으로써 일어날 파장을 감당할 수 있을지는 그조차 자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침묵하고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결국 그는 한숨을 내쉬며 고했다.
“……상급 신 하나의 목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