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217)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217화(217/608)
제217화
사정을 알게 된 일행들은 모두 세실의 상황을 안타까워했다. 원인을 알면서도 고칠 수 없다는 것에 자신의 일처럼 상심한 모습이었다.
“세실의 상태는 지금 얼마나 나쁜 거야?”
“체력은 이미 한계를 넘어섰어. 카이 씨의 성력은 이제 거의 통하지 않아. 그마나 내 치유력을 쓰면 좀 더 견딜 수는 있겠지만, 성장할수록 충돌이 커지는 거라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운이 좋아도 몇 해를 넘기기는 힘들 거야.”
“시간이 별로 없구나.”
씁쓸해져서 고개를 끄덕이자 일행들의 분위기도 같이 심각해졌다.
“혼혈이라서 아픈 거라니. 너무 안됐다.”
“나을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없는 건가? 인간이나 엘프 둘 중 하나로 고정이 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애초에 그게 가능하면 혼혈이 배척당할 리가 없지.”
알리사와 이사나가 수군거리는 말을 시벨리우스가 단호하게 잘라냈다. 쿠션을 끌어안은 채 소파에 한가득 몸을 파묻고 있는 그는 상당히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사실 그는 당장 하이 엘프의 마을에 쳐들어가고 싶어 했다. 어른들의 잘못으로 죄 없는 아이가 고통을 받고 있는데 돌봐주지도 않는 현실에 분노한 것이다. 그것을 만류한 건 카이테인이었다. 복수를 한다고 해서 고고한 하이 엘프들이 반성을 할 리도 없고, 오히려 당한 피해를 엔딜에게 전가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에서였다. 무엇보다 엔딜이 아예 일족들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할 수 있다면 자신이 하이 엘프라는 사실마저 부정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이사나는 그 점을 더욱 안타깝게 여겼다.
“그동안 혼자서 동생을 지키느라 많이 힘들었겠죠. 일족의 뜻에 반발하는 자는 그들의 사회에서 추방이라니. 하이 엘프는 고귀한 신분이라고 들었는데, 이런 폐단을 안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흥, 자기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한 위선자들이 고귀하기는 무슨. 뿌리까지 썩어빠진 쓰레기 집단이지.”
시벨리우스의 음성이 한층 싸늘해졌다. 부조리한 상황을 목격한 것이 처음인 것도 아닌데 이번 일엔 유난히 반응이 거칠었다. 그렇게 느낀 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모두 묘한 얼굴로 시벨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시벨 님, 정말 화가 많이 나신 것 같네요.”
“어? 그렇게 보여?”
“네.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세요?”
“……별로. 예전에 알던 놈들이 딱 그랬거든. 싫은 기억이 떠올랐을 뿐이야.”
그 이상의 언급은 꺼리는 기색이라 대화는 저절로 거기서 끝났다. 자세한 사연이야 모르지만, 왠지 그가 자신의 일족들에게 돌아가려고 하지 않는 이유와 연관되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엘?”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서인지 이사나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생각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라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우선은 클모어로 돌아가야지. 네 일도 뒤로 미룰 수 있는 건 아니잖아.”
“하지만, 그러면 세실은……?”
“물론 그것도 방법을 찾아볼 거야. 하지만 지금 당장 해줄 수 있는 건 체력을 회복시키는 것뿐이니까 여기에 굳이 머물러 있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나 혼자라면 공간이동도 할 수 있으니 틈틈이 들려서 상태를 살피면 돼.”
분위기를 우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일부러 더 명랑하게 말했다. 그러자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을 하던 이사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기, 그 치료 방법 말인데. 라피스 님이라면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응? 라피스가?”
“라피스 님은 뛰어난 마법사잖아. 마법의 기본 원리는 기존의 물질을 재구성하는 거라고 들었거든. 그걸 인체에도 적용한다면 종족을 바꾸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서.”
“연금술 이론이군요.”
뜻밖의 이야기에 솔깃해하는데 누군가 그의 말을 받았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데르온이었다.
“인체의 재구성은 까다로운 분야긴 하지만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폴리모프 같은 마법도 그런 원리로 이뤄지는 것이기도 하고요.”
“폴리모프요? 헉! 그러고 보니 폴리모프는 모습을 바꾸는 마법이었죠? 그걸로 종족도 바꿀 수 있지 않았어요?”
“예, 그렇습니다.”
“……!”
뭐야, 정말로 되는 거였어? 설마 정말로 긍정할 줄 몰랐기 때문에 나는 놀라서 숨을 크게 삼켰다. 아무 생각 없이 주워든 돌멩이가 금덩이라는 걸 알게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데르온의 말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겉모습뿐입니다.”
“네? 겉모습?”
“겉으로 나타나는 외형만 그렇게 보이도록 꾸며지는 겁니다. 실제로 종족이 바뀐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드래곤이 폴리모프로 인간이 되었다 해서 진짜 인간인 건 아니니까요. 세실이라는 소녀가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을 겁니다.”
“아…….”
“인체란 생각보다 복잡하고 심오한 구성으로 되어 있죠. 게다가 타고난 종은 단지 육체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신의 관할에도 영향을 받습니다. 그걸 간단히 바꿀 수는 없을 겁니다.”
“……으음, 그렇군요. 하긴, 그렇겠네요.”
희망이 보이기도 전에 분위기가 다시 무거워졌다. 오히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던 것이, 이젠 확실히 불가능하다고 선고받은 기분이었다. 의견을 꺼냈던 이사나의 얼굴도 함께 침울해졌다.
“미안해, 엘. 내가 괜한 말을 꺼낸 것 같아.”
“아냐, 조금이라도 가능성을 찾아보려는 거잖아. 앞으로도 뭐든 좋은 생각이 있다면 말해줘.”
부담을 덜어주려는 말에 이사나는 더 미안한 표정을 했다.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일단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다들 쉬어. 나머지는 내일 이야기 하자.”
황혼의 하늘은 어느새 캄캄한 어둠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이 많은 인원이 머물기엔 집이 비좁았기 때문에 침소는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시벨리우스가 따로 마련하기로 했다. 사실 요즘은 그가 만들어준 침소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다른 숙박을 이용하는 것을 오히려 더 불편해하는 상황에 이르러 있었다. 어지간한 저택보다 훨씬 안락한 환경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 침구는 만들지 않아도 돼. 오늘은 세실의 옆에서 밤을 새울 거야.”
“병간호하려고?”
“응, 엔딜이나 카이 씨나 그동안 돌아가면서 간호를 하느라 많이 지쳐 있는 것 같더라고. 두 사람에게 쉴 시간을 주고 싶어. 그러는 김에 세실의 체력도 좀 더 회복시켜 둘 생각이야. 밤새 치유력을 불어넣어 두면 한 주 정도는 편하게 지낼 수 있겠지.”
“네가 힘들지는 않겠어?”
“이런 걸로 기력이 소진되진 않아. 이래 봬도 정령왕이잖아.”
어차피 허상으로 형성된 것에 불과할 뿐, 실제로는 육신도 없는 내가 밤을 새우거나 능력을 쓴다고 해서 체력이 떨어질 일은 없다. 특히 치유력은 자연 그 자체의 힘을 활용하는 거라서 소모되는 개념도 아니었다. 시벨리우스도 뒤늦게 그 사실을 상기했는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쯤에서 적당히 대화를 마무리하고 자리를 파하려는데, 데르온이 나를 따라 일어나며 말했다.
“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엘 님. 괜찮으시다면 제가 주군을 돌봐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주군이요?”
“예, 주군에 대한 건 엘 님께서 결정하실 일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부화하실 때까지 제가 모시고 다니며 마력을 공급해드리고 싶습니다.”
무슨 소린가 했더니 내가 보관 중인 마족의 알을 두고 하는 말이었던 모양이다. 아직 부화하지도 않은 알을 향해 벌써부터 주군이라니. 황당했지만 데르온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웃을 수도 없었다.
“안 되겠습니까?”
“아, 아니에요. 지금 바로 꺼내드릴게요. 그런데 마력은 왜……?”
“마력을 꾸준히 공급하면 부화 시기를 좀 더 앞당길 수 있습니다.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최대한 빨리 성장시켜 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흠, 그것도 그렇네요.”
알인 상태로는 다루기는 편해도 돌발 상황에서 스스로 대처를 바라기가 어렵다. 지금은 우리밖에 모르고 있지만, 언제 마계 쪽에서 알의 존재를 눈치챌지 알 수 없다. 누군가 추격해 오기 전에 최대한 빨리 성장시키는 편이 나았다. 훗날 마왕이 될 아이이니 부화가 빠르면 카노스의 입장에서도 좋을 것이다.
배낭 안에서 알을 꺼내주자 데르온은 극도로 긴장한 얼굴로 받아들었다. 깨지지 않으니까 함부로 막 다뤄도 된다는 말에 동의하더니, 정작 본인이 하는 행동은 매우 거리가 멀었다. 마치 진귀한 보석을 대하듯 맨손으로 만지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이라, 배낭 안에 보관했던 게 조금 미안해질 정도였다.
“그럼 부화할 때까지 잘 부탁할게요.”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가 알을 소중하게 안아 드는 것을 웃으며 지켜본 후, 나는 배낭을 닫기 위해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안쪽에서 무언가 반짝거리는 것이 보였다. 단지 불빛에 반사된 거라고 보기엔 무시하기 힘들 정도로 강한 빛이었다.
‘뭐지?’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자세히 살펴보려다가 움찔했다. 빛을 내뿜고 있는 것의 정체가 동그란 구슬이 박힌 조각품이었기 때문이다. 한눈에도 익숙한 물건은 바로 라피스가 준 통신석이었다. 구슬에서 빛이 깜빡거린다는 것은 통신이 들어오고 있다는 뜻. 그 너머에서 이글거리고 있을 얼굴이 떠오르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엘, 혹시 그거…….”
등 뒤에서 상황을 파악한 이사나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무시할까?’ 라는 의견을 담고 바라보자 그의 얼굴이 빠르게 경직됐다. ‘그래도 후환이 없겠어?’ 라고 묻는 듯한 시선에 나는 얌전히 고개를 떨궜다.
“……왠지 큰소리가 날 것 같으니까 나가서 얘기하고 올게.”
“히, 힘내, 엘.”
연거푸 한숨을 내쉬기 바쁜 나를 이사나가 아련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영혼 없는 응원을 뒤로한 채 쓸쓸히 한적한 곳을 찾아 나섰다. 이유를 알지 못하는 다른 일행들은 그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바깥으로 나오자 짙은 습기가 밀려들어 왔다. 비가 올 것 같더니 한바탕 쏟아질 기세였다. 평소보다 더 많은 물의 정령들이 우르르 주위를 배회하다가 나를 발견하곤 황급히 고개를 숙여왔다. 덕분에 내 마음은 한층 평온해졌다. 귀신의 집에 들어가도 여럿이 함께하면 별로 겁이 안 나는 것과 비슷한 심리랄까.
집 근처를 떠나 인적이 없는 숲 안으로 이를 때까지, 통신구는 끈질기게 빛을 내뿜어댔다. 행여 중간에 사그라지면 그 핑계를 대고 돌아설 셈이었는데 누가 현실도피 아니랄까 봐 전부 헛된 희망으로 그쳤다. 집요한 자식! 나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받을까 말까 망설이던 통신구에 결국 손을 가져다 대었다.
“흠흠, 여보세요?”
『……드디어 받는군.』
신호를 받기 무섭게 들려오는 음산한 음성에 등골이 쭈뼛 섰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이렇게 살 떨리게 와 닿기는 처음이었다.
“아하하, 안녕.”
『……안녕?』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나는 급히 통신구를 내려놓은 후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안녕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지금 내가 너랑 태연하게 안녕할 군번 같냐!』
푸드드득!
느닷없는 고성에 놀랐는지 근처에 있던 새떼가 한꺼번에 날아올랐다. 집에서 멀리 벗어나길 잘했다. 하마터면 온 집 안의 사람들이 전부 뛰쳐나올 뻔했다. 탁월한 선견지명이었음에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정말 라피스구나. 이런 방법으로 연락할 사람이 그밖에 없다는 걸 아는데도 막상 받기 전까지는 막연한 기분이었던 것 같다. 이 꼬장꼬장하고 신경질적인 말투를 듣고 나니 그제야 현실감이 들었다. 예상이야 했지만 역시나. 녀석은 엄청나게 화가 나 있었다.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오랜만이라 인사한 것뿐인데.”
『오랜만이라는 건 알기는 해?』
“그거야 뭐……그동안 잘 지냈어?”
『하, 네가 보기엔 내가 잘 지냈을 것 같냐? 진상들을 떠넘겨놓고 연락도 잘 안 받더니, 이제 말없이 한 달이나 잠수를 타? 너 내가 그렇게 우습냐?』
“……미안, 본의가 아니었어.”
『아, 그러셔? 당연히 그러시겠지. 그럼 네 본의는 뭔데?』
“여, 연락하려고 했어! 진짜야.”
『그걸 누가 믿어? 이미 내가 먼저 연락한 시점에서 그런 말 해 봤자, 입가에 빵조각을 묻힌 주제에 아무것도 안 먹었다고 하는 것만큼이나 신뢰성이 없거든? 백번 좋게 봐줘서 네가 정말 그러려고 했다 쳐. 어차피 그런 생각을 한 것도 최근이겠지? 아무리 너라고 해도 설마 그 기나긴 시간 동안 생각만 하고 연락을 안 하진 않았을 테니까. 그렇지?』
“어? 어어, 으음…….”
『이제 내가 화내는 이유를 알겠냐?』
……이 녀석은 왜 이렇게 쓸데없이 말발이 좋을까. 게다가 하나같이 정곡만 찔러대고 있어서 변명의 여지가 없다.
“정말 미안. 그치만 마지막 한 달은 정말 잠수하려고 했던 게 아니야.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왜 이렇게 될 줄을 몰라? 눈감고 떠 보니 한 달이 훅 지나가 있기라도 했냐?』
“라피스, 너 돗자리 깔아라.”
『무슨 헛소리야?』
“아니, 그냥. 기똥차게 맞추는 걸 보니 점을 쳐도 될 것 같아서.”
『……검을 찾으러 간 거 아니었어? 대체 뭘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그러게 말이다.
내가 생각해도 기가 막혀서 어색한 웃음만 흘러 나왔다. 덕분에 화낼 여력마저 잃어버렸는지 괄괄하던 라피스의 기세가 한층 누그러졌다.
『젠장, 내가 말을 말아야지. 근데 너 목소리는 왜 그래?』
“내 목소리가 왜?”
『평소보다 기운이 없잖아. 누가 곧 죽기라도 한다는 듯이.』
“역시 돗……!”
『돗자리 깔라는 쓸데없는 소리, 또 하면 죽는다.』
와, 이 녀석 혹시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거 아닌가? 트로웰의 대자가 된 이유가 사실은 그와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어서라든가? 얼토당토아니한 일이라는 건 아는데, 놀라움이 크니 머릿속에서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네 행동 패턴이야 뻔하지. 넌 남의 일을 사서 걱정하는 게 특기잖아. 내 일에 대한 것만 빼고.』
내가 쉽게 말을 잇지 못하는 게 우스웠는지 라피스가 대놓고 이죽거렸다. 그대로 통신을 끊어버릴까 하다가 나는 참을 인을 새기며 간신히 견뎠다. 안 그래도 심통이 난 녀석의 심기를 건드렸다간 수습하지 못할 대참사가 일어날 거다. 무엇보다 지금 당장 그에게 확인하고 싶은 게 있기도 했고.
“저기, 라피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뭐야.』
“너는 오래 살았으니까 아는 게 많잖아? 혹시 타고난 종족을 바꾸는 방법에 대해서 아는 거 없어?”
『일단 한 번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면 되겠네.』
“……그것뿐이야?”
기대감을 담은 것이 무색하리만치 시큰둥하게 돌아온 대답에 기운이 쭉 빠졌다. 이미 불가능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 안 되는 모양이다.
“그럼 혼혈로 태어난 사람을 둘 중 한 종으로 고정하는 건?”
『그게 종족을 바꾸는 거랑 뭐가 다른데?』
“……하긴. 그렇지.”
굴하지 않고 도전한 희망은 이번에도 역시 피어나기도 전에 그 자리에서 부스러졌다. 실망이 연이어진 탓에 우울감만 더 커진 것 같았다. 라피스의 입장에서는 뜬금없는 질문만 늘어놓고 한숨만 내쉬는 내가 이상해 보이긴 했을 것이다. 기분이 상했는지 그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제대로 된 답을 얻고 싶으면 처음부터 제대로 설명해. 정확히 무슨 상황인 건데?』
“으음, 그게. 무슨 일이냐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