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220)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220화(220/608)
제220화
“그게 정말입니까? 세실을 살릴 방법이 있다니…….”
라피스에게 세실을 고칠 방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카이테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같이 좋아할 줄 알았던 엔딜은 그저 바짝 굳어 있기만 했다. 좋은 소식에도 반응 없이 희게 질려 있기만 하는 것을 보니 라피스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알아본 게 분명했다. 그렇게 대놓고 계약이니 드래곤이니 떠들어댔는데 눈치채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얘가 그 혼혈이야?”
평소였다면 발끈했을 발언에도 엔딜은 얌전히 고개만 끄덕였다. 살인마를 눈앞에 둔 사람처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얼굴을 보니 평소 엘프들이 드래곤이란 종족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알 만했다. 물론 라피스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아…….”
그가 세실에게 손을 대려 하자 엔딜의 눈빛이 흔들렸다. 라피스가 무섭다고 해도 여동생을 지켜야겠다는 의지가 꺾이진 않는 모양이었다.
“시, 시큐……!”
위급한 순간이 오면 사람은 평소에 가장 의지하는 대상을 찾기 마련이다. 엔딜에게는 시큐엘이 그런 존재인지 그는 곧바로 소환을 시도하려고 했다. 본인도 정신이 없는 탓이겠지만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정령이 계약자의 감정을 가장 예민하게 느끼는 순간은 바로 소환이 될 때다. 이렇게 흥분한 상태로 부르면 시큐엘은 상대가 누군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소환되자마자 곧바로 공격태세에 돌입할 것이다. 이 좁은 공간에선 그 자체로 테러 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괜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 나는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서둘러 말을 걸었다.
“괜찮아, 엔딜. 잠깐 상태를 살펴보려는 거야.”
“……!”
그러자 빠르게 분출되던 엔딜의 기운이 멈췄다. 크게 숨을 삼킨 그가 놀란 듯이 눈을 깜빡이며 나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나의 존재를 인식한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생겨도 내가 막아줄 거라는 사실에 생각이 미친 걸까. 울 것처럼 일그러져 있던 얼굴이 서서히 편안해지더니, 파리한 안색에 핏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노골적인 안도감이었다. 누군가 나를 전적으로 신뢰해주는 건 기쁘다.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웃어주자 엔딜은 더욱 안심한 얼굴을 했다.
직후 그는 황급히 구석으로 물러나고는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공포로 마비됐던 이성이 돌아오면서 자신이 과하게 반응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도 막상 라피스가 세실의 이마를 짚을 때는 다시 얼굴이 굳어지는 걸 감추지 못했다. 요즘 극성맞은 부모들이 그렇게 많다더니, 엔딜도 기세에선 전혀 밀릴 것 같지 않았다.
긴장감이 흐르는 공기 속에서 라피스는 말없이 세실을 살폈다. 그의 손끝을 타고 흘러나온 마나가 잠든 소녀의 몸을 천천히 덮어가는 동안, 라피스는 단 한 번도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답지 않은 진지한 분위기에 왠지 더 초조해지는 기분이었다.
“어, 어때?”
잠시 후 그가 눈을 뜨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라피스는 팔짱을 낀 채 뭔가를 계산해 보듯이 손가락으로 뺨을 툭툭 두드렸다. 그의 입이 열린 건 주시하는 시선에 조급함이 깃들기 시작할 때였다.
“나쁘지 않네. 아직 성체가 아니라 변수가 있을 수도 있지만, 오히려 유연한 시기이니 틀을 바꾸기가 쉬워서 조건상으로는 유리해. 이 정도면 해볼 만하겠어.”
“정말?”
“혹시 나을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반색하는 내 옆에서 카이테인이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치료의 방식은 모르지만 일단 긍정적인 반응을 접했단 사실에 흥분한 것 같았다. 엔딜 역시 그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낫는다고 해야 하나. 그걸 낫는다는 개념으로 본다면 그렇겠지. 어쨌든 아프지는 않게 될 테니까.”
“저, 정말이에요? 세실이 건강해지는 건가요?”
헛숨을 삼킨 엔딜이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나 기뻤는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서워하던 라피스를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열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라피스가 그런 엔딜의 모습을 묘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퉁명스러운 녀석의 성격상 타박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저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외관이 워낙 훌륭하다 보니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오히려 더 박력이 넘쳤다. 말없이 주시하는 눈빛에 나까지 긴장했을 정도였다. 정면으로 감당하고 있는 엔딜은 견디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왜, 왜 그러시는지……?”
“너 저 여자애 오빠랬지? 네 동생을 낫게 하고 싶어?”
“그, 그럼요! 세실이 살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어요.”
단호한 대답에 라피스의 시선이 더 짙어졌다. 흥미로운 실험체를 눈앞에 둔 얼굴이라 참견하고 싶은 충동이 무럭무럭 일었다. 하지만 내가 끼어드는 것보다 그의 말이 이어지는 것이 더 빨랐다.
“네 동생이 겪고 있는 문제가 꽤 골치 아픈 거라는 건 알지? 이 상황을 해결하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어.”
“두 가지요?”
“그래, 하지만 둘 다 완전한 방법은 아니야. 어쩌면 둘 다 네 마음에 안 들지도 몰라. 그래도 일단 말해두는 건데, 내가 말한 방법 외에 네 동생을 고칠 방법은 더 이상 찾을 수 없을 거다. 그것만은 알아둬.”
무심한 경고에 엔딜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래도 세실을 살릴 수 있다는 희망을 접해서인지 눈빛만큼은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명심할게요.”
“좋아. 하나는 내 피를 써서 네 동생의 육체를 강화시키는 거야. 몸이 버티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니까 지금보다 육체가 강해지면 해결돼. 다만, 이 경우 몸이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도록 봉인해야 해.”
“봉인……이요?”
안 그래도 굳어 있던 엔딜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라피스는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설명했다.
“증상이 점점 심해졌지? 성장할수록 하이 엘프의 피가 강해지기 때문이야. 그나마 지금은 심하지 않아서 육체만 튼튼해지면 버틸 수 있어. 하지만 여기서 더 자라면 불가능해. 그래서 성장을 봉인해야 한다는 거야. 물론 성장하지 않는다고 해서 안 죽는 건 아냐. 주어진 수명까지만 살게 될 거야.”
“그, 그런……. 그럼 세실은 평생 어린아이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건가요?”
“맞아. 하지만 더 이상 아프진 않겠지. 모습만 어릴 뿐 생활하는 데도 큰 지장은 없어. 늙어가는 것보다는 오히려 나을지도 모르지.”
과연 그럴까. 물론 죽는 것보다야 나을지도 모른다. 당장 얼마간은 행복하기도 할 것이다. 나나 다른 정령왕들도 일평생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니, 비슷한 개념으로 보면 딱히 문제 될 건 없었다. 하지만 세실은 정령도 아니고, 육체를 지닌 인종이었다. 살아갈수록 생각의 방식과 무게들이 달라질 거고, 무리 진 사회에 속해 있으니 주변의 시선에도 영향을 받는다.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할지도 몰랐다. 그때에도 자라지 않는 자신의 몸을 괜찮다고 여길지는 알 수 없었다. 엔딜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얼굴에 망설임이 가득했다.
“……나머지 다른 방법은요?”
“그거야 뻔하지 않겠어? 네 동생의 몸 안에 흐르는 두 종류의 피 중 하나를 없애는 거지.”
“……! 그게 가능한 겁니까?”
조마조마한 얼굴로 서 있던 카이테인이 견디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끼어들었다.
“육체에서 한 종의 성분을 완전히 제거하면 돼. 그만큼 비어지는 부분은 내 피로 보완할 수 있어. 드래곤의 피는 타종과 섞여도 그저 양분이 될 뿐이니까. 종의 정체성을 위협하지 않으니 괜찮아. 오히려 예전보다 건강해질걸? 이건 예전에 집중적으로 연구한 적도 있어서 어렵지 않아. 실험에 성공한 적도 있고. 뭐, 사람을 대상으로 해 본 적은 없지만 방식은 비슷하니 어떻게든 될 거야.”
“그, 그렇다면……!”
엔딜과 카이테인의 얼굴이 단숨에 밝아졌다. 이게 사실이라면 전자보다 훨씬 효과적인 방법이긴 했다.
“단지 이 방법엔 치명적인 결함이 있어.”
물론 라피스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단점을 덧붙였다. 처음부터 둘 다 완전하지 않은 방법이라고 했으니 당연한 순간이기도 했다. 게다가 더 좋은 방법을 굳이 나중에 말한다는 건, 이쪽이 감수해야 할 것도 더 크다는 소리였다. 그래선지 설명하는 라피스도 이번엔 조금 심각한 말투였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무슨 수를 써도 성분 제거가 안 되는 부분이 있어. 이걸 해결하지 못하면 이 방법은 처음부터 진행이 불가능해. 해봤자 의미도 없고.”
“그게 뭔데?”
“심장.”
심장?
나는 반사적으로 가슴 부근에 손을 얹었다. 엔딜과 카이테인 역시 당황한 얼굴로 가슴을 문지르고 있었다. 그런 우리들의 모습을 라피스가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훑었다.
“심장은 생명의 근원이 되는 부근이기도 하지. 그래선지 까다롭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그냥 놔두고 진행해 본 적이 있었는데, 결국 심장의 흐름에 따라 다시 혼혈의 피가 생성되더군. 그렇게 되면 제거된 성분들도 다시 채워지기 시작해. 열이면 열, 몇 년 안에 전부 원래대로 돌아갔어. 즉, 지금 세실의 심장은 못 써. 인간 쪽이든 엘프 쪽이든, 새로 채워 넣을 수 있는 순혈의 심장이 있어야 해.”
“자, 잠깐…… 라피스. 그 말은…….”
당황해서 숨을 삼키자 라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엔딜을 향했다.
“선택해. 누군가의 심장을 구해올래, 아니면 네 심장을 나눌래?”
“……!”
한마디로 살인을 하든가, 희생을 하라는 소리였다. 찬물이 쏟아진 것처럼 주위의 공기가 일시에 식었다. 엔딜은 숨조차 쉬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첫 번째 방법으로 해도 상관없어. 사실 그게 가장 복잡하지 않게 이 사태를 해결하는 방법이긴 하지. 난 아무거나 상관없으니 알아서 결정해.”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라피스의 차분한 음성이 떨어졌다. 말 그대로 선택의 시간이었다. 엔딜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후자보다 낫다 뿐이지 처음 방법도 세실의 미래를 생각하면 좋다고 할 건 아니었다. 장래를 포기하고 얻는 ‘현상유지의 삶’ 또는 다른 이의 희생을 통해 얻는 ‘미래’. 어느 쪽이든 두 남매에게는 가혹한 결정일 수밖에 없었다. 엔딜은 한참 동안 세실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맺히는지 몇 번이나 옷자락을 쥐었다 푸는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결정하기 전에, 몇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요.”
“말해.”
“새 심장만 있으면. 세실은 사는 건가요?”
“그야 물론. 단순히 사는 것만이 아니라 더 이상 혼혈이라고 불리지 않게 되겠지. 어느 쪽 심장이냐에 따라 종족이 정해지긴 하겠지만.”
“그러니까, 제 심장을 주면 세실이 순수한 하이 엘프가 된다는 거죠?”
“인간 쪽을 완전히 없앨 거니까.”
“그럼 줄게요.”
“엔딜!?”
말릴 사이도 없이 떨어진 결정에 나는 당황했다. 카이테인은 너무 놀라서 목소리도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여동생을 끔찍하게 아낀다지만 설마 이렇게 선뜻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려고 할 줄은 몰랐다. 엔딜은 오히려 후련하게 웃었다.
“전 세실이 온전하게 행복하길 원해요. 그걸 위해서라면 죽어도 괜찮아요.”
“자, 잠깐만, 엔딜!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런 게 괜찮을 리가 없잖아!”
“맞습니다, 엔딜! 죽어도 괜찮다니요! 세실도 그런 건 기뻐하지 않을 겁니다!”
기겁하는 내 옆에서 카이테인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경악의 소리가 따갑게 이어지는 와중에도 엔딜은 고집스러울 정도로 라피스만 바라보고 있었다. 비장하게 굳어진 얼굴에선 결정을 바꾸지 않을 거라는 단호한 결의가 드러났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라피스가 느긋하게 웃었다.
“흐음, 꼬맹이 주제에 제법이잖아? 생각보다 강단이 있네.”
‘저 자식이 정말!’
파란을 일으킨 장본인 주제에 눈치 없이 홀로 태연한 녀석을 보자 열이 뻗쳤다. 나는 단숨에 라피스의 멱살을 잡아 내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아무리 뻔뻔한 도마뱀이라도 불시의 습격엔 약한 모양이다. 놀랐는지 조금 크게 떠진 눈동자가 보이자 이 와중에도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했다.
“그래서 뭐야! 정말 엔딜을 죽이겠다고? 그러기만 해봐, 너! 당장 계약 끊을 거야! 다시는 너랑 상종 안 할 줄 알아! 알겠어?”
“……왜 화가 난 거야, 넌. 누가 저 꼬마를 죽인다고 했어?”
“심장을 주면 당연히 죽지! 그게 죽인다는 거랑 뭐가 달라?”
“뭔가 오해하는 모양인데. 난 나눈다고 했어. 하나를 다 쓰겠다는 게 아니라고.”
“그걸 말이라고 해? 하나밖에 없는 심장을 나누길 어떻게 나눠? 설마 반으로 자르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그럴 건데?”
“이 미친! 심장이 간인 줄 알아? 재생이 되는 것도 아닌데 반으로 잘라서 이식한다고 되겠냐!”
“재생이 왜 안 돼. 네가 있는데.”
“드래곤의 피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반으로 잘린 심장을 재생시킬 정도까진 아닐…… 응?”
아무렇지 않게 떨어진 대꾸에 나는 한참 항의하던 것을 멈추고 멍청하게 되물었다.
“나?”
“그래, 너. 어지간한 신들보다 강한 치유력과 재생력을 가진 정령왕 엘퀴네스. 너 말이야.”
“…….”
생각지 못한 곳에서 기습을 당한 기분이라 말문이 턱 막혔다. 그 사이에 라피스는 슬쩍 내가 잡은 멱살을 풀어냈다. 그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걸 보면서도 나는 별다른 조치를 하지 못했다.
“심장을 제거하고 봉합하는 시간은 내 마법으로 버티게 할 수 있어. 내가 봉합을 마치면 네가 바로 치유하면 돼. 엘퀴네스의 치유력이라면 조직의 일부만 있어도 온전한 형태로 재생시킬 수 있잖아. 그것도 아주 순식간에.”
“어…… 음, 그, 그렇지?”
“그것 봐. 아무 문제 없네.”
아, 아니, 잠깐 기다려봐. 내 치유력이 하나의 심장을 두 개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거였어? 이게 정말로 아무 문제가 없는 거라고?
“물론 이것 또한 완벽하진 않아. 처음부터 완전한 방법은 없다고 했잖아. 이 경우에도 부작용은 있어.”
따져 물었더니 역시나 달갑지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럴 줄 알았다 싶긴 했지만 막상 부작용이 있다고 하니 얼굴이 저절로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