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225)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225화(225/608)
제225화
라피스를 쳐다보자 그가 두 뺨을 씰룩거렸다. 한눈에 봐도 토라진(화난 게 아니라 토라진 거다) 기색을 보니 이건 분명 나한테 항의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문제가 될 만한 일이 있었나 싶어서 차분히 지난 시간을 돌아보았지만 딱히 걸리는 건 없었다. 엔딜의 집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공간이동을 했고, 이 저택 안으로 들어온 것이 전부다. 그때까지 라피스는 일행들과 자기소개조차 제대로 나누지 않은 상태였다. 결국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들끼리 오간 대화에서 일이 터졌다는 뜻인데, 그게 뭔지 알 수 없으니 상황을 추측하기가 어려웠다.
“그냥 인사를 했을 뿐이야.”
알리사에게 시선을 보냈더니 조심스러운 설명이 돌아왔다. 심지어 라피스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아서 알리사와 시벨리우스가 먼저 말을 걸었다고 했다. 아무리 봐도 그가 화날 만한 부분을 찾을 수가 없었다.
“뭐야, 대체. 뭐가 불만인 건데?”
혼자서 백날 고민해 봤자 해결될 일이 아니었으므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감정에 솔직한 성격답게 라피스는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저 엘프 녀석이 너랑 친구라더라?”
“그게 뭐?”
“넌 목숨이 몇 개씩 되나 보지?”
이건 또 뭔 소린가 싶어서 어리둥절해하려니 라피스의 얼굴이 더 찌푸려졌다.
“네 친구는 나라며.”
“헐, 뭐라는 거야. 설마 그게 불만이었던 거야?”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자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황당해하는 주변의 시선은 전혀 신경 쓰지도 않는 듯했다.
“그래서 뭐가 사실인데?”
“당연히 너도 친구고 시벨도 친구지! 친구가 세상에 한 명만 있냐?”
“난 너 말고는 없는데?”
무시무시한 소리를 너무 당연하게 해서 잠시 사고가 멈췄다. 떨떠름해하는 기색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났는지 녀석이 뭐가 문제냐는 표정으로 맞서왔다.
“……너 3천 살 넘었다고 하지 않았나?”
“진작 넘었지.”
“근데 친구가 나 하나뿐이라고?”
“그런데?”
와, 솔직히 이건 좀 무섭다. 나는 서 있던 자리에서 성큼 뒤로 발을 뺐다. 라피스가 눈을 부라리는 것이 보였지만 이번만큼은 도저히 그에게 맞춰줄 기분이 아니었다.
“시벨, 네가 이해해. 쟤가 좀 저래.”
“음, 근데 나도 친구는 엘 너 하나뿐인데?”
“…….”
그래,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의 교우관계도 딱히 정상은 아니었지. 뒷골이 당긴다 싶더니 아무런 장식 없이 밋밋한 천장의 모습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본 모양이다. 누가 이 녀석들에게 바람직한 아동발달에 대해 알려줬으면 좋겠다. 남들이 또래집단을 형성할 시기에 대체 뭐 하고 살았던 거냐!
닮았다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이제 보니 유형이 다를 뿐 동류인 것 같다. 본모습이 짐승의 형태에 가깝다는 것까지 비슷했다. 할 수 없이 나는 라피스와 시벨리우스의 손을 하나씩 붙잡고 강제로 마주 잡게 했다. 동시에 얼굴을 찌푸린 두 녀석이 내게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들을 외면한 채 나는 빙긋 웃어 주었다.
“자, 이제 너희 둘도 친구. 이러면 나밖에 없는 거 아니지?”
“어? 어어?”
“……야.”
당황해서 혼란에 빠진 시벨리우스에 이어 라피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푸하하, 요란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렸더니 알리사가 배를 움켜잡고 발을 구르고 있었다. 목숨이 아까워서 둘 사이에 끼어들 생각이 없다더니, 정작 그 둘에게 앙심을 사는 것에는 두려움이 없나 보다.
“그래서 피 튀는 전투는 없는 겁니까?”
데르온이 자못 심각하게 묻는 말은 그냥 한 귀로 듣고 흘렸다. 대체 태어날 아이한테 뭘 그렇게 보여주고 싶었는지는 몰라도, 평범한 아이가 봐선 안 될 광경이라는 건 알겠다. 태교가 그렇게 중요하다는데, 아무래도 그에게 알을 맡겨두는 걸 다시 재고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아무튼 많이 늦었지만 정식으로 소개할게. 이쪽은 라피스라즐리, 다들 짐작했겠지만 나랑 계약한 레드 드래곤이야.”
이사나가 없는 장소에서 때늦은 소개시간이 이어졌다. 나는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일행들을 한 사람씩 가리키며 그들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시벨리우스, 알리사, 그리고 데르온. ……데르온은 전에 한 번 만난 적 있지?”
한때 대놓고 힘겨루기를 했던 상대이니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라피스는 말없이 데르온을 응시한 후, 그의 품 안에 안긴 황금색 알을 주시했다. 다시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서 적당히 넘어가지 말고 제대로 설명하라는 무언의 압력이 느껴졌다.
“……알았어. 설명할게.”
데르온과 그가 품고 있는 알에 대해 말하자면 모든 전말을 다 밝혀야 한다. 어차피 알려주려고 했던 내용이었기 때문에 나는 망설임 없이 지난 이야기들을 시작했다. 우리를 줄기차게 따라다니던 마족이 있었다는 것, 그 마족이 사실은 마신 카노스였다는 것, 그로부터 듣게 된 악신의 각성에 대한 정보까지. 모든 설명을 마치고 나니 어수선하던 관계도가 간신히 정리된 느낌이 들었다. 묘한 해방감마저 느끼는 나를, 라피스가 곱지 않은 눈으로 노려보았다.
“날 이런 촌구석에 처박아두고 넌 신나게 즐기고 있었다 이거지.”
“……도대체 어떤 부분을 어떻게 왜곡해서 보면 내가 즐기다 온 걸로 들려?”
“다른 친구나 만들고.”
“3천 년 동안 친구가 나 하나뿐이라는 네가 이상한 거라니까? 그리고 말해두겠는데, 시벨리우스는 네가 보내준 거나 마찬가지야.”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준 서클렛 속에 봉인되어 있었거든.”
“뭐? 젠장, 뭐야, 그런 얘기는 들어본 적 없어. 다른 걸로 줄 테니까 도로 물러. 야, 너 다시 들어가.”
시벨리우스를 한 손가락으로 가리킨 채 라피스가 거만한 어조로 명령했다. 하지만 애초에 될 일도 아닐뿐더러, 설령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 말에 순순히 따라줄 시벨리우스가 아니었다. 그는 시선을 피하는 걸로 무시했고, 라피스의 얼굴이 경련하듯 꿈틀거렸다. 파란색과 빨간색, 각자 가진 색만큼이나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는 관계를 보니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왠지 앞으로도 저 둘 사이에서 상당히 시달릴 것 같다는 싫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그중에서 특히 사고 칠 확률이 높은 라피스를 향해 신신당부했다.
“어쨌든 좋든 싫든 앞으로 함께 지낼 동료들이니까 모두와 사이좋게 지내. 성인이라 사람을 가려 사귄다는 헛소리는 하지 말고. 넌 특히 그런 말 할 자격 없으니까.”
“내가 왜 자격이 없는데?”
“내 친구 네 친구 따지고 있는 게 어딜 봐서 성인이냐? 요즘은 초등학생들도 그런 유치한 경쟁은 안 하거든?”
“초등학생?”
“유아기를 갓 벗어난 단계라 할 수 있지.”
“내가 유아라는 거야, 지금?”
“아니니까 잘 지내라는 거잖아. 아동 취급을 당하고 싶으면 계속 그러고 살든지.”
단호하게 대꾸하자 라피스는 기막힌 표정을 지으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납득한 기색은 아니었지만 더 물고 늘어져 봤자 내가 무시할 거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만두기로 한 것 같았다.
“젠장.”
홀로 짜증을 삼키고 있는 그를 보려니 너무 냉정하게 굴었나 싶어 미안하기도 했다. 나는 한층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근데 넌 굉장히 태연하네. 악신이 태어날지도 모른다는데 아무렇지도 않아?”
“태어나면 태어나는 거지, 내가 태연하지 않을 건 뭔데?”
“그치만……종말이 올지도 모르잖아.”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고.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염려해서 뭐해. 게다가 이미 신계 쪽에서 진상조사에 들어간 상태라며. 실패할 확률이 훨씬 더 높겠네.”
“으음, 그거야 그렇지만.”
“뭐, 마신이 직접 움직였다는 사실은 놀랍긴 해. 하지만 내가 더 열 받는 건 네가 그 때문에 한 달이나 종적을 감췄었다는 거야. 상급신의 결계는 시공간까지 건든다고 하더니. 어쩐지 위치를 전혀 짚을 수가 없어서 이상하다 했지.”
투덜거리던 그가 내 쪽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네 손의 그것도 계속 거슬렸는데. 이제야 어떻게 된 건지 알겠네.”
“응? 내 손?”
무심코 시선을 내리자 낙인처럼 찍힌 하얀 문양이 들어왔다. 카노스가 준 마신의 문장이다. 아, 그러고 보니 이게 있었지. 처음에 받았을 때만 해도 신경 쓰였는데 그새 익숙해졌는지 존재를 잊고 있었다. 라피스라면 진작 알아봤을 텐데 내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렸던 모양이다. 결국 끝까지 참지 못하고 언급하는 게 그답긴 했지만.
“마신을 만나면 만난 거지, 문장은 왜 받아? 온몸을 신의 문장으로 도배할 생각이냐?”
“……카노스가 멋대로 준 거라 막을 새가 없었어.”
서둘러 변명을 시도해 봤으나 한심하게 바라보는 표정은 지워지지 않았다. 누가 보면 내가 기념으로 문장을 모으고 다니는 건 줄 알겠다. 여기서 문장을 받은 방식까지 알게 되면 박장대소를 하고도 남겠지. 들통 나기 전에 목격자들의 입을 단속시켜 둬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이럴 때만은 라피스가 일행들과 화목하게 정보를 교류하는 성격이 아니라 다행이다 싶었다.
“그래도 문장을 받은 게 나쁘진 않은 것 같아. 위장할 수 있는 신분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흐응, 나야 아무래도 상관없긴 한데. 제대로 가리고 다니는 게 낫지 않겠어? 뭐, 너한테 평화로운 일상을 유지할 생각이 있다면 하는 말이지만.”
“이 정도는 보여도 괜찮지 않아? 얼굴에 있는 것도 아닌데.”
“손등이면 대사제도 넘볼 수 있는 수준이야. 요즘 마신전에 상급 사제가 거의 없다는 거 몰라?”
“……아, 그건 그렇네.”
얼굴이 아니니 괜찮다고 안심할 게 아니었구나.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자칫 방심했다가는 마신전에 끌려가 대신관으로 추대 당하게 생겼다. 이미 교황의 자리만으로도 충분히 골치 아픈데 여기서 일을 더 키우고 싶진 않았다.
“할 수 없지. 가려야겠다.”
빠르게 결론을 내린 후 나는 의상을 수정할 생각으로 손등까지 덮는 소매를 떠올렸다. 지금까지는 강하게 의식만 집중하면 언제든 옷이 원하는 형태로 변형됐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런 식으로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당연히 길게 덧씌워져야 할 소매가 움직이지 않았다. 장갑 모양을 떠올려 봐도 마찬가지였다.
“어라? 왜지? 안 가려져.”
“당연하지. 네 힘보다 마신의 힘이 더 강하니까.”
당황해서 허둥거리는 내게 라피스가 이유를 알려주었다. 내 의지와 힘만으로 구현되는 옷에 이런 문제가 있을 줄은 몰랐다. 상대가 그냥 평범한 신(?) 정도만 됐어도 강제로 덮을 수 있었을 텐데. 아무래도 상급신의 힘을 누르는 건 어려운 모양이다.
별수 없이 나는 배낭에서 안 쓰는 옷 한 벌을 꺼낸 후 끝자락을 적당량 잘라냈다. 의아한 듯이 지켜보던 라피스가 내 질문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어때? 이 정도 길이면 될까?”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는데. 뭐야, 그 걸레 조각은?”
“걸레 아니거든? 옷에서 잘라내는 거 봤잖아.”
“하! 천 조각이 본래 제작된 용도로 활용되지 못하면 그게 걸레지, 달리 뭐가 걸레야? 네 눈엔 그게 장갑으로 보이냐? 설마 그딴 걸 손에 감고 다니려는 건 아니겠지?”
“이게 왜? 문장을 가리기만 하면 됐지.”
손에 휘감아보니 예상대로 완벽하게 가려져 꽤 만족스러웠다. 나는 의견을 물을 생각으로 다른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다들 몹시 난처한 표정을 짓는 게, 나와 시선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건 데르온뿐이었다.
“……왠지 상당한 기시감이 느껴지는데 말이야. 너한테 심미안은 영원히 태어날 생각이 없는 거냐?”
그리고 라피스는 벌레를 발견한 듯한 얼굴로 말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목소리마저 싸늘해진 것 같다. 단순히 짜증난 정도가 아니라 정말 화가 난 것 같아서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그렇게 이상해?”
“그걸 말이라고 해? 넌 애초에 그 옷은 어떻게 만들어 입은 거냐? 가리는 기능에만 충실할 거면 그냥 천만 두르고 다니지, 왜 모양 따위를 내? 넌 문명의 발전이 그렇게 우습냐? 사람들이 장신구를 괜히 제작하고, 심심해서 의상 도안을 만드는 것 같아?”
“……알았어. 화내지 마. 다른 걸로 하면 되잖아.”
저렇게까지 끔찍해할 정도라니 진짜 이상하긴 한가 보다. 시무룩해져서(이때 데르온도 덩달아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묶어둔 천을 다시 풀어내고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그래. 그게 그래서였구나.”
“응?”
뜻 모를 말을 혼잣말로 내뱉은 사람은 시벨리우스였다. 어리둥절해져서 바라보자 그는 잠시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웃고 싶은 건지 울고 싶은 건지 모를 표정이 그의 얼굴에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왜 그러냐고 묻고 싶었지만 나보다 그의 입이 열리는 것이 더 빨랐다. 게다가 그 말이 굉장히 뜻밖이라 놀라는 것 외에 다른 반응을 보일 수가 없었다.
“저기, 엘. 내가 장갑 만들어 줄까?”
“어? 장갑?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복잡한 형태는 어렵지만 이 경우엔 손등만 가리면 되는 거잖아. 잠깐 기다려 봐. 마침 좋은 재료가 있거든. 너한테 어울릴 거야.”
그렇게 말한 후 시벨리우스는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줄자 같은 걸로 내 손의 치수를 재더니, 꺼내 든 천을 거침없이 서걱서걱 자르고는 그대로 바느질을 시작했다. 내가 본 건 그게 전부였는데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눈앞에 손등만 덮는 형태의 장갑 하나가 완성되어 있었다. 마치 마법이라도 일어난 것 같았다.
“어때?”
“괴, 굉장하다, 시벨. 가게에서 파는 상품 같아. 이런 건 어떻게 하는 거야?”
“굉장하긴. 그냥 모양에 맞게 자르고 꿰맨 것뿐인걸. 재료가 좋아서 그럴듯해 보이는 것뿐이야.”
그는 겸손하게 말했지만 아무리 나라도 범상치 않은 실력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어느 정도냐 하면, 흉악하게 일그러져 있던 라피스의 얼굴이 평온을 되찾을 정도였다. 심지어 시벨리우스를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물론 재료가 좋다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사용된 천은 연한 푸른색이었는데, 은백색의 무늬가 비늘처럼 깔려 있어 굉장히 예뻤다. 게다가 얼마나 가볍고 신축성이 좋은지 착용한 감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거의 투명할 정도로 얇은데도 속은 전혀 비치지 않아서 마신의 문장을 완벽하게 가려주고 있는 게 신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