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227)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227화(227/608)
제227화
“난 사실 마족들의 자유분방한 점을 좋아해요.”
불쑥 들려온 엉뚱한 말에 데자크는 민망해하던 것을 멈추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가능한 한 그들의 의지로 살아가길 원했어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껏 말썽을 피우고, 여기저기서 소란을 일으키고. 남의 비난을 살지언정 오늘 죽어도 후회가 없는 삶을 살아가기를요. 하지만……그래요. 생각대로 잘 되지는 않더군요.”
자조하듯 중얼거리는 입술에 씁쓸한 웃음이 걸렸다. 처음엔 카류안에 대해 말하는 건가 싶었지만 곧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데자크는 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말했다.
“저 역시 제가 원하는 대로 살고 있고, 제가 바라는 방식으로 죽을 겁니다. 그 삶에 후회할 일은 없습니다.”
“……그래요. 내가 생각한 방식과는 다르지만, 그 또한 스스로 택한 길인 건 맞겠죠.”
루카르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이 조금은 홀가분해 보였다.
“그럼 난 이만 결론을 내리러 가야겠군요.”
“저도 같이……!”
“아뇨, 뭐 구경할 게 있다고 우르르 몰려갑니까. 그냥 혼자 가겠습니다.”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는 태도에서 완곡한 거절의 기색이 느껴졌다. 데자크는 그대로 물러난 채 홀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어느 때의 광경이었을까. 걷고 있는 그의 옆으로 어린 마족 하나가 조르르 따라가는 환영이 덧입혀졌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한 어린 시절의 카류안이었다.
루카르엠은 차별 없이 아이들을 귀여워하는(비록 귀여워하는 방식이 일반적인 기준과 다를지언정)편이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히 예뻐하는 아이는 있었다. 한때 데자크가 그랬고, 본인은 꿈에서도 알지 못하나 데르온도 그랬다. 그래도 그들에게 보인 애정을 전부 합친 것이 카류안 하나에 쏟아 부었던 것만 못하다는 걸 데자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아끼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당시 루카르엠이 카류안을 향해 내준 애정은 노골적이었다. 그런 그를 자신의 손으로 끌어내려야 하는 마음이 편치는 않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해서 그만두지는 않겠지만.
데자크는 조금 전에 루카르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는 마족들이 자유분방하게 살아가길 원한다고 말했지만, 그것이 곧 모든 것을 용납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자유에는 그만한 책임이 따른다. 카류안이 어떤 변명을 하더라도, 그는 방종하게 굴고 마신을 기만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알이 파괴된 일을 보고하러 갔을 때 그가 얼마나 뻔뻔하게 웃었던가. 그때의 일을 떠올리자 다시금 이가 갈렸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부터 발칙한 구석이 많은 놈이었다. 보통 유체들은 본능적으로 카르텐의 주인인 데자크를 따르게 되어 있는데, 카류안은 갓 태어난 시점부터 루카르엠의 뒤만 졸졸 쫓아다녔다. 강한 마족을 알아보는 눈을 지녔다는 뜻이고, 그만큼 그 자신도 강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뿐이었다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가 루카르엠에게 보이는 집착은 비정상적일 정도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루카르엠이 언제 오느냐며 채근해대서 데자크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다. 루카르엠의 다리에 매달려 떼를 쓰는 모습을 보았을 땐 성체가 되기 전에 죽여 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비록 루카르엠은 그런 카류안을 매우 기꺼워했지만 말이다.
보통 마족들이 루카르엠을 대하는 태도는 두려움이나 거북함, 두 가지로 나뉜다. 그런 감정 없이 편하게 그를 따르는 아이는 카류안이 처음이었다. 아마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루카르엠은 유난히 카류안에게 관대했다. 그가 왕좌에 오른 이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태도가 달라졌을 때에도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그가 반항적이고 저항하는 태도를 보일수록 더 큰 흥미를 보이는 것 같았다. 사실 그는 고분고분하고 얌전한 마왕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카류안은 왜 갑자기 그런 식의 태도를 취하게 되었을까. 데자크는 기억을 천천히 되짚어 보았다. 투정이 많긴 했어도 애정을 갈구하는 형태였을 뿐, 대체로 카류안은 루카르엠을 매우 따르는 편이었다. 왕좌에 오르고 나서도 한동안은 루카르엠에게 응석을 부리는 태도를 버리지 못해 수하들이 매우 곤란해 했었다. 그랬던 그가 하루아침에 돌변했다.
아마도 그 시점에서 카류안이 루카르엠에게 무언가를 요구했던 것 같다.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들어주던 루카르엠도 그때엔 조금 곤란해했다고 들어서 정확히 기억한다. 그 당시 루카르엠이 마왕에게 했다고 알려진 말 역시 선명히 떠올랐다.
<전하는 아는 것을 감당할 자신이 있습니까? 그것을 얻게 되면 지금처럼 제가 반갑지만은 않을 겁니다.>
‘그래, 그렇게 말했다고 했었지.’
그래도 마왕이 고집을 꺾지 않자 루카르엠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카류안이 달라졌다. 멀리서 보기만 하면 두 팔 벌려 달려가던 그가 누구보다 루카르엠을 멀리하고 질색하게 됐다. 마치 그 말이 예언이라도 된 것처럼.
그건 대체 어떤 의미였을까. 데자크는 이제는 보이지 않는 루카르엠의 뒷모습을 좇아 숲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이미 지난 일을 너무 깊이 생각한 탓일까.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 * *
“어머나, 이게 누구실까? 늘 공사다망하신 남 공작님 아냐?”
마왕의 침소 앞을 지키고 있던 세르피스는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남자를 발견하고 나른하게 웃었다. 그녀를 바라본 남자, 루카르엠의 얼굴에도 미소가 그려졌다.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요, 세르피스. 언제부터 서쪽 영토의 여주인이 왕성의 문지기가 된 겁니까?”
“상관없잖아? 남이 뭘 하든.”
“그건 그렇죠.”
새침한 대답에 루카르엠은 선선히 긍정했다.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남자라고 생각하며 세르피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발끈하는 것도 곤란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것도 찝찝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나저나 팔이 멀쩡하네? 남 공작은 얼마 전 물의 정령왕에게 호되게 당해서 불구가 됐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소문이 잘못됐나?”
그녀는 핥는 듯한 시선으로 루카르엠을 천천히 훑어 내렸다. 느긋하게 웃고 있는 얼굴부터, 단단하게 짜 맞춘 듯한 어깨, 그 아래 부상의 흔적이라곤 전혀 남지 않은 팔까지. 마지막으로 손목에 감겨 있는 팔찌와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에 닿았다.
“……게다가 어디서 많이 보던 것들도 착용하고 있고.”
세르피스의 눈빛이 묘해지자 루카르엠은 피식 웃으며 더 자세히 보란 듯이 장신구를 착용한 손을 내보였다. 그것의 의미를 깨달은 세르피스가 얼굴을 굳혔다.
“왕에게 도전할 생각이야?”
“이해했다면 당신도 협조해줬으면 좋겠군요, 서 공작.”
“……미쳤어! 당신, 왕좌에는 관심 없었잖아?”
“지금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마왕이 될 생각이 없다고 해서 왕좌를 바꾸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그 말뜻은 명백했다. 세르피스는 크게 숨을 삼켰다.
“카류안 전하를 폐위시키는 게 목적이라고?”
“상황 파악이 빠르니 좋군요.”
빙긋 웃은 루카르엠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증명서를 요구하는 손짓이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뺀 후, 세르피스는 입술을 악물었다.
“그, 그런 일, 나는 협력할 수 없어.”
“왜요? 마왕에게 도전하는 일이야 연례행사 같은 거잖습니까? 다들 아무 때나 마음 내키면 시도하던 일이잖아요.”
“그건 다른 녀석들의 경우지! 당신은 다르잖아!”
단순히 다른 정도가 아니다. 마계에 존재하는 모든 마족들이 차례를 바꿔가며 마왕에게 도전한다 해도, 그것은 말 그대로 도전에 불과할 뿐이었다. 하지만 루카르엠의 도전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정말로 왕좌를 바꿀 수 있는 존재였다.
마계 최고령 마족이자 남쪽 영토의 주인―남공작 루카르엠.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자라면 누구든, 그가 왕좌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공작위에 머물고 있을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역대 수많은 공작들이 대련을 청하듯이 왕좌에 도전했을 때도, 그는 단 한 번도 왕과 승부를 겨루려 한 적이 없었다. 당연히 자신이 이길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왕을 끌어내리기로 마음먹으면 정말 그렇게 될 것이다. 처음부터 정해진 결과를 도전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그건 공정하지 못한 일이었다. 루카르엠도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그게 뭐가 문제죠? 어쨌든 내게도 왕과 겨룰 자격은 있을 텐데요. 오히려 지금까지 내가 가만히 있었던 게 더 이상했던 거 아닙니까?”
“그, 그건 그렇지만…… 왜 갑자기 이제 와서!”
“그거야 내 마음인걸요. 게다가 세르피스는 왕좌에 관심이 많지 않았습니까? 그 자리가 비워지는 겁니다. 당신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텐데요?”
“아니! 나는 이제 더는 왕이 될 생각이 없어. 다른 마왕을 섬기고 싶지도 않아. 내 왕은 오직 카류안 전하 한 분뿐이야.”
“이런, 정말 많이 홀렸군요.”
가볍게 혀를 차는 루카르엠의 모습에 세르피스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홀리다니, 누가 무엇에게? 납득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말이었지만 그 말을 듣자 왠지 온몸이 떨렸다. 마치 자신이 누군가를 배반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딸자식 고이 키워놓으면 애먼 놈팡이가 데려간다더니. 지금이 딱 그 심정이군요. 내 권속에서 벗어난 건 귀엽게 봐줄 수 있지만 지금은 때가 좋지 않아요. 내가 아니라 당신에게 하는 말입니다.”
“무, 무슨 소리야.”
“쓸데없이 힘을 빼고 싶지 않으니 순순히 협조해달란 소립니다.”
다시 손이 내밀어졌다. 세르피스가 뒷걸음질 치자 루카르엠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아니면 내가 당신을 죽이고 강제로 자격을 얻길 바랍니까?”
“…….”
루카르엠이 원래 이렇게 무서운 느낌이었던가? 세르피스는 그의 원래 분위기를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어떤 모습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알아왔던 존재인데도, 마치 한 번도 마주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세르피스는 마른 침을 삼켰다. 분명 자신과 똑같은 붉은 눈동자이건만, 검은 것처럼 보인다. 그 눈동자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새카만 암흑 속에 끌려들어 가는 것 같았다. 잡아먹힌다! 치밀어 오르는 공포에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그가 원하는 대로 해줘라, 세르피스.”
“……!”
예상치 못한 곳에서 들려온 음성에 세르피스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가 눈을 크게 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려 있었고, 그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까맣게 늘어트린 긴 흑발, 얼음처럼 차가운 인상을 지닌 청년은 최근 침실에서 나오는 일이 거의 없던 마왕 카류드리안이었다.
“카류안 님.”
그를 보자 안도감이 차오르면서 그녀를 짓누르고 있던 공포심이 흐려졌다. 당장 그의 넓은 품에 안겨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세르피스는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여인이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카류안을 보호하듯이 감싼 상태로 루카르엠을 경계했다.
“하지만 제가 증명서를 주면 저자는…….”
“어차피 네 힘으로는 그를 감당할 수 없다. 조금 더 쉽게 가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그, 그건…….”
“난 상관없으니 내주도록 해. 그래도 증명서를 얻으려고 시도하는 게 꽤 기특하지 않나. 그런 절차 따위는 그냥 무시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무슨 말씀을! 공작들의 증명을 받지 않고 왕께 도전하는 건 반역이에요!”
“글쎄, 그런 규칙이 그에게도 통할까 싶군. 우리 위대하신 마신께서는 자신의 대리인을 위해서라면 규율 따윈 얼마든지 바꾸실 테지. 그렇지 않나, 루카르엠?”
느긋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루카르엠을 응시하는 카류안의 눈빛은 타오를 것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루카르엠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뭐,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여기서 일을 더 키우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지금 이 정도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귀찮아질 예정이거든요.”
“하긴, 명목상의 시늉조차 하지 않으면 그대의 존재가 너무 눈에 띄겠군. 그대는 가능하면 조용히 지내고 싶겠지. 그래야 모두를 남몰래 감시할 수 있을 테니 말이야. 그게 그대가 맡은 역할이었던가.”
“잘 알아주시니 고맙군요.”
노골적으로 비꼬는 말에 태연한 응수가 이어졌다. 마주 보는 시선은 느긋했으나 그들 사이에 감도는 공기는 양쪽으로 한껏 잡아당긴 실처럼 팽팽했다. 오가는 대화를 이해하지 못한 세르피스만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두 마족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시는 김에 얌전히 지내주시면 더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이런 날이 오게 돼서 정말로 유감입니다, 전하.”
“눈치채는 게 생각보다는 늦었군.”
“그러게 말입니다. 전하가 은폐하는 것에 의외로 재능이 있으시더군요. 솔직히 조금 놀랐습니다.”
루카르엠은 다시 세르피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목적이 명백하게 드러난 행동이자, 그녀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다.
본능적으로 그 의미를 파악한 세르피스가 움찔해서 카류안을 바라보았다. 그가 허락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세르피스는 주저하며 손을 뻗었다. 이윽고 루카르엠의 손바닥 위에 붉은 귀걸이 하나가 놓였다. 그것을 공중에 가볍게 던졌다가 낚아채듯이 잡은 후, 루카르엠은 다른 증명서들과 마찬가지로 귀걸이를 착용했다.
이로써 본인의 것을 제외한 모든 증명서가 모였다. 루카르엠은 한 손으로 자신의 목을 감쌌다. 그의 손 안에 모여든 마기가 잠시 후 가시로 엮어낸 듯한 하얀 목걸이를 만들어냈다. 남(南)의 증명서이자 마지막 증명서였다.
그 순간 먼저 착용하고 있던 다른 증명서들이 목걸이와 공명을 시작했다. 검은빛을 내뿜으며 진동하더니 먼지처럼 파스스 부서져 내렸다. 가루가 된 증명서들은 한데 뭉쳐져 루카르엠의 이마 위에 모여들었고, 번지듯이 스며들어 하나의 낙인을 남겼다. 검은색 테두리만 그려진 날개의 문양. 허락받은 도전자를 뜻하는 인장이었다. 지금은 테두리뿐이지만 왕좌를 넘겨받으면 그 안에 색이 채워질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