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235)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235화(235/608)
제235화
“귀여운 아이로군.”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던 레이가 완전히 멀어지고 나자 대공이 말했다. 담담한 어조였으나 그 속에 서린 책망을 느끼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카리브디스는 아무 말 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대가 웬 남자아이를 거뒀다는 말을 듣고 놀라긴 했는데 설마 이능력자일 줄은 몰랐어. 저 나이에 벌써 정령과 계약을 하다니, 장래가 두려운 인재가 아닌가. 내겐 언제 알릴 셈이었지?”
“조만간 찾아뵙고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숨기려 했던 건 아니고?”
“……알고서 소환한 게 아니라 우연히 기연이 닿아 정령 계약을 했던 것 같습니다. 너무 일찍 세상에 알려지면 아이가 자만하게 될 것 같아 능력에 대해서는 한동안 불문에 부치려 했습니다.”
“아니라고는 하지 않는군.”
“…….”
바늘처럼 찔러오는 말에 카리브디스는 입을 다물었다. 무거운 침묵이 이어지자 대공은 바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대는 너무 솔직해서 탈이야. 하긴, 아이의 평온한 생활을 생각하면 지금은 잠잠한 편이 더 낫겠군. 그 정도로 저 아이를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대가 그런 배려를 한다는 게 놀랍긴 하지만 말이야.”
“송구합니다.”
“호오, 사과를 해 오다니 더 의외인걸? 이렇게 바로 인정하다니. 내가 아는 파이런이 맞나 의심스러운데?”
“……송구…….”
“하하, 사과만 할 셈인가? 농담이다, 농담. 그대를 탓하는 게 아니야. 어쨌거나 세월이란 게 정말 무섭긴 하군. 설마하니 그대가 아이를 귀여워하게 될 줄은 몰랐어. 내일 아침 해는 거꾸로 뜨겠는걸. 내 충직한 검도 드디어 안락한 삶을 꾸릴 생각을 하게 된 건가?”
“딱히 그런 건 아닙니다.”
놀리듯 짓궂은 시선이 닿았고, 카리브디스는 바로 정색했다. 충동적으로 거두긴 했으나 그건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불충한 감정의 산물일 뿐, 아이를 특별히 여기는 마음은 아니었다. 아이로 인해 자신의 일상이나 가치관이 달라졌다고 여기진 않았다. 그저 데려왔으니 그에 해당하는 책임을 지는 것에 불과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아직 멀었군. 이럴 땐 그렇다고 대답해야지. 난 좋은 현상이라고 여기던 참인데 말이야.”
대공이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카리브디스는 침묵한 상태로 가만히 그의 의중을 살폈다. 미심쩍게 쳐다보는 기색을 읽은 대공이 피식 웃었다.
“정말이야. 그대가 혼인도 하지 않고 평생 내 곁에서 고독하게 늙어가려고 할까 봐 내심 염려했었거든. 그래서 이 변화가 정말로 반가워. 드디어 그대가 무언가에 정붙일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 진심으로 안심했어.”
“……전하, 그건…….”
“내친김에 한발 더 나가 보는 건 어때? 내 조만간 좋은 혼처를 알아봐 주지. 영웅의 반려자를 꿈꾸는 소녀들에게 희소식이 되겠군.”
“아뇨,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왜?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의 아이를 데려다 키우는 것보다는 본인의 아이가 더 귀여울 거야. 그대에겐 대가족이 어울려. 어서 혼인을 해서 아이를 많이 낳아. 한 열 명 정도가 좋겠군.”
“열 명 말입니까…….”
“딸 다섯, 아들 다섯. 괜찮지 않나? 집안에 아이들이 가득하면 아주 북적북적하고 즐거울 거야. 그대의 아이들이라면 아버지를 닮아 재능도 출중할 테니 장차 제국에도 큰 복이 될 거다.”
흥에 겨워 떠드는 말이 이어지는 동안 카리브디스는 점점 더 난처한 표정이 되어 갔다. 한 여인의 남편이라든가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는 삶 같은 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자신에게 어울린다고 여기지도 않았다. 듣기만 해도 평범하고 행복한 광경에 자신의 모습을 대입하려니, 남의 이야기를 듣는 기분을 넘어 맞지 않는 옷을 껴입은 양 거북한 느낌마저 들었다.
“아, 그래. 그대의 아들 중 하나는 내게 줘. 내 뒤를 이을 후계자로 삼겠어.”
“……!”
직후 이어지는 말을 들었을 땐 뼛속까지 한기가 차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던 카리브디스는 바로 얼굴을 굳혔다.
“그건 안 될 말씀이십니다.”
“치사하게. 주군이라면서 하나도 내주기 아깝다는 건가?”
“그런 게 아니라, 후계자는 마땅히 전하의 핏줄로 하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내 핏줄이라……. 내게 남은 핏줄이라곤 이제 이사나뿐이고, 그 아이도 곧 죽을 텐데?”
“……전하께서 비를 들이시고 후사를 보시면 될 일입니다.”
“신관인 날더러 혼인을 하라?”
“대관식을 치르시면 황제가 되십니다. 신관의 신분을 벗으셔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내가 이대로가 더 좋다면?”
말꼬리를 잡듯이 질문하는 건 대공의 주된 버릇으로, 그저 상대를 곤란하게 만들려는 의도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카리브디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 해도 저처럼 한미한 이의 핏줄을 후계자로 삼으시는 건 어불성설이십니다.”
“하하, 제국의 공작이자 드래곤과 싸운 영웅. 대륙을 호령하는 소드 마스터의 핏줄이 한미하면 이 세상에 고귀한 신분이라곤 하나도 없겠군.”
“전하.”
카리브디스의 목소리가 더 깊어졌다. 세상의 모든 근심이란 근심을 전부 짊어진 것 같은 무게감이 있는 목소리에 대공은 나직이 혀를 찼다.
“이럴 때 보면 그대는 정말 미련하리만치 답답해.”
“송구합니다.”
“그 송구하다는 소리, 이제 슬슬 지겨워지려고 하는군. 뭐, 좋아. 그대의 그런 점을 높이 샀던 거니까. 재미없는 얘기는 이쯤에서 관두지. 모처럼 기분도 좋은데 망치고 싶지 않아. 요즘은 통 즐거운 일이 없었거든. 가볍게 기분전환 할 생각으로 들려본 것인데 오길 잘한 것 같아. 예상보다 더 즐거워졌어.”
“무언가 고심하시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국정에 관한 건 언제나 고심할 일뿐이지. 최근엔 받아야 할 중요한 연락이 있는데 소식이 오질 않는군. 마냥 기다리자니 초조해져서 말이야.”
대공이 푸념조로 떠드는 이야기를 카리브디스는 묵묵히 들었다. 그는 늘 주어진 명령에만 따랐고, 그것에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국의 동향이라든가 정세에 무지한 것은 아니었다. 최근의 그가 기다릴 만한 연락이라면 황제에 대한 것이나 대비 중인 전쟁에 대한 것밖에 없는데, 왠지 그에 관계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마신전 쪽의 일일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언젠가 황성에 들렸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 대공은 한창 마신관들에게 노성을 터트리고 있던 중이었다. 그 문 앞에서 웨칸 공작을 만났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사나가 클모어 공작과 합류한 것 같아.”
“……!”
그 순간 들려온 말에 카리브디스는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대공은 불쾌한 얼굴로 턱을 쓸었다.
“요즘 통 소식이 없기에 계획대로 되어 간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이렇게 빨리 해결할 줄은 몰랐어. 덕분에 재미없어졌어. 꽤 심사숙고했던 건데 생각보다 약했나 봐.”
“약하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음? 아아, 클모어 공작에게 장난을 쳐뒀다고 했잖아. 정신을 갉아먹는 저주를 썼거든.”
“저주……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마신관의 저주였지. 쯧, 정화할 방법도 거의 없는 강력한 저주라고 해서 정말 기대했는데 말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이사나를 몇 년 더 내버려두는 건데 그랬어. 2, 3년 정도 더 시간을 뒀다면 클모어 공작을 완전히 폐인으로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아무렇지 않게 중얼거리는 내용이 참담해서 카리브디스는 가볍게 눈을 감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이다 그는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전하, 클모어 공작은 백성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은 데다 전 대륙에도 그 영향력이 적지 않은 자입니다. 그런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 국제 정세에도 큰 타격이…….”
“예상대로 고리타분한 답변이군. 이럴까 봐 그대에겐 말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
“전하의 명예를 위해 드리는 말씀입니다.”
“고작 공작 하나를 없앤다고 훼손될 명예라면 없는 셈 치는 게 더 나아. 그 점을 빌미로 맞서려는 자들이 있다면 그 또한 전부 없애버리면 그만이지. 국제 정세라고 했나? 이참에 전 대륙을 통일해 보는 것도 좋겠군. 내가 못 할 것 같아?”
“전하……!”
“그만. 오늘은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그대의 입바른 소리는 따로 날을 잡아 듣도록 하지. 어쨌든 상황이 골치 아파졌어. 조만간 그대를 찾을 일이 있을 테니 준비해 둬.”
“……알겠습니다.”
강제로 저항감을 삼키느라 대답이 느려졌다. 그것을 예민하게 알아챈 대공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굳이 흠을 잡진 않았다. 그 대신 자신의 상한 기분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유희가 너무 길었군. 이만 돌아가야겠어.”
“황성까지 모시겠습니다.”
“아니, 됐어. 돌아가는 길 내내 뚱한 표정으로 불만을 표시할 게 뻔한데, 그걸 보면서 가라고? 그냥 혼자 갈 테니 따라나서지 마.”
“하지만…….”
“자꾸 두말하게 만들 셈인가?”
날카로운 시선에 카리브디스는 다가서려던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 있는 그를 다시금 경고하듯이 바라본 후 대공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멀어지는 주군의 뒷모습을 카리브디스는 복잡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자네가 지키고 싶은 건 전하의 살아 있는 몸뿐인가?>
지나간 회상 속에서 웨칸 공작이 물었다. 그 질문을 들은 이후로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미 오랜 시간 그를 괴롭혀 왔던 상념이 다시 한 번 그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지키고 싶은가?
언젠가 블레스터가 자신에게 물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 한마디를 상기하는 것과 동시에 그는 곧장 과거의 상황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아직 어리고 무력하던 자신과, 그렇기에 지키지 못했던 연약한 뒷모습이. 그것은 죽어서도 잊을 수 없는 쓰디쓴 잔상이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감정들까지 한꺼번에 솟구쳐 올랐다.
‘그래, 지킬 것이다.’
그때도 했던 다짐을 카리브디스는 또다시 되새겼다.
-그것이 퇴색된 신념이라도?
음성이 다시 묻는다. 탐색하는 어조가 마치 그를 시험하려는 듯하다. 지금 블레스터는 잠잠하니 이것은 단지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 낸 환청일 뿐이었다. 그는 굴하지 않았다.
‘설령 그렇다 해도.’
어차피 그에겐 물러설 곳도, 안주할 장소도 없다. 일평생 오직 한 사람의 등만 바라보며 살자고, 그렇게 다짐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대공은 무너지지 않아야 한다. 그를 위해 살아가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카리브디스는 손잡이를 힘껏 움켜쥐었다. 그 손에 담긴 온기를 타고 검신에 박혀 있던 투명한 보석이 스산한 빛을 품었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은밀하고 조용한 변화였다.
* * *
클모어의 상황이 어느 정도 정비되자 전쟁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 첫 상대는 바로 이웃한 영지인 루반과 아실란이었다. 그곳의 두 영주는 이미 몇 달 전부터 군사를 모아 클모어를 치려는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바 있었다. 카웰 공작이 활동을 재개한 후에는 잠시 주춤거리는 듯했으나 뜻을 바꿀 생각은 없었는지 주둔하고 있던 라센 성 안에 숨어 그대로 방어진을 구축했다. 이쪽이 상황을 정비하느라 정신없는 동안 이미 식솔들까지 전부 챙겨 들어간 모양이었다. 위협을 놔둔 채 클모어를 비울 수도 없는 일이고, 황성으로 진격하려면 어차피 거쳐야 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전투는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이틀 전 투항을 권고하기 위한 선발대가 먼저 떠났지만 돌아온 것은 불복했다는 소식이었다. 라센 성이 요새라는 점을 활용하여 버티기에 들어간 것 같았다. 결국 그 다음날 이사나와 카웰 공작이 대규모의 군사를 이끌고 출정했다. 저택 안에만 있는 게 무료했던 나와 일행들도 함께하기로 했다.
“흐음, 저기가 라센 성이구나.”
반나절에 가까운 시간을 소요하고 도착한 문제의 라센 성은 산을 깎아 만든 높은 지대 위에 세워져 있었다. 주위는 넓은 호수가 둘러싸고 있었고, 걸어서 접근할 수 있는 길은 보이지 않았다. 필요할 때만 성에서 다리를 내리는 구조인 것 같았다. 지금까지 아무도 뚫지 못했다고 알려진 명성답게 척 보기에도 공략하기 까다로운 위치였다.
성벽 위엔 화살을 장전한 병사들과 마법사들이 빼곡하게 서 있었다. 그 맞은편에서 무장한 군사들이 호수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는 중이었다. 앞서 도착해 있던 우리 측 선발대였다. 이사나의 행렬이 진영 앞에 이르자 선발대를 이끌던 지휘관이 서둘려 달려 나왔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 각하!”
“상황은?”
인사에 가볍게 화답한 카웰 공작이 말에서 내리며 물었다. 지휘관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다섯 번째 투항을 권고했으나 전부 묵살했습니다.”
“안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지?”
“라센 성은 평소에도 외부의 침입을 대비해 꽤 많은 식량을 보급해 두고 있습니다. 지난 가뭄으로 소진되긴 했겠지만 그래도 몇 달은 버텨낼 겁니다.”
“너무 길군.”
공작이 달갑지 않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어느 전투나 그렇겠지만 장기전이 되는 건 득보다 실이 더 크다. 앞으로 치러야 할 전투도 까마득한 상황이었다. 한 장소에서 시간을 너무 오래 끌면 체력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군사들의 사기까지 저하될 우려가 있었다. 게다가 이런 지형에서는 외부에서 적이 몰려오기라도 하면 자칫 한가운데 고립될 가능성도 컸다. 카웰 공작은 굳은 얼굴로 라센 성을 노려보았다. 양 진영 사이에 흐르는 비장한 공기에 병사들이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굉장하다, 물이 이렇게 많이 고여 있는 거 처음 봐. 저게 말로만 듣던 호수야?”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도 주시하는 부분이 남다른 사람은 있었다. 스왈트 제국풍의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반짝이는 눈으로 호수를 바라보았다. 이사나의 반대를 물리치고 당당히 이번 일정에 합류한 알리사였다. 사막 국가 출신다운 소녀의 감상에 일행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 보니 알폰프 제국엔 호수가 거의 없지?”
“응, 난 바다도 본 적 없어.”
“그래? 그럴 줄 알았으면 엔딜의 집에 들렀을 때 근방을 좀 돌아볼 걸 그랬네. 바로 근처에 해안이 있었는데.”
“뭐? 그게 정말이야? 에이, 진작 말해 주지.”
“미안, 다음에 다시 가 보자.”
“그래도 돼?”
“그럼 당연하지. 금방 다녀올 수 있어. 라피스가 공간이동 마법을 써줄 거야.”
“……너 요즘 날 부려 먹는 걸 너무 당연하게 여긴다?”
황당해하는 라피스의 목소리를 한 귀로 듣고 흘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카웰 공작이었다. 옆에 서 있는 그의 가신들도 곱지 않은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너무 대놓고 떠들었나? 노려보다시피 하는 강렬한 시선에 어색한 웃음을 지어 주자 그들은 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