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239)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239화(239/608)
제239화
“말도 안 돼…….”
“응? 뭐가?”
갑자기 굳은 채 신음을 삼키는 나를 일행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나는 혼미해진 정신을 가다듬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다급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저기, 미안해, 다들. 나 잠시 다녀올 데가 있어. 아마 며칠 걸릴 거야. 사람들한텐 알아서 잘 둘러대 줘.”
“뭐?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갑자기 어디를 가?”
“미안! 설명은 다녀와서 할게!”
“어이? 이봐, 엘!”
황망히 부르는 소리를 무시하며 바로 그 자리에서 공간이동을 했다. 도착한 곳은 오색의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찬란한 정원, 에바스 에덴이었다. 그곳에 홀로 서 있던 한 사람이 내 기척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밤하늘처럼 새카만 머리칼, 초콜릿을 연상시키는 짙은 피부를 지닌 소년이 날 발견하고 희미하게 웃었다. 평소처럼 다정한 얼굴이었으나, 그의 황금색 눈동자는 슬픈 빛을 담은 채 흔들리고 있었다.
“……트로웰.”
이상한 일이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를 만나면 해야 할 말들이 많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 흔한 안부의 인사조차 건넬 수가 없었다.
“어서 와, 엘.”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나를 향해 그가 한 손을 내밀었다. 그는 이미 한참 전부터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차분하게 응시하는 그의 두 눈을 보며 나는 내 예감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더불어 그가 이곳에 있는 이유 역시.
“트로웰…… 너도 느꼈어? 방금, 바람이……. 미네르바가…….”
목소리가 떨리는 걸 억누르느라 말이 드문드문 끊겼다. 맞잡은 손의 온도가 차가웠다. 트로웰은 부들거리는 내 몸을 한 팔로 가만히 끌어안았다.
“괜찮아, 엘. 아직 늦지 않았어. 배웅할 시간은 있을 거야.”
“……배웅?”
멍하니 되물었더니 그가 내 어깨 위에 이마를 댄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닿은 상태가 아니었다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만큼 미약한 움직임이었다.
“바람의 성으로 가자. 명계의 사자들이 옛 바람을 전부 가져가 버리기 전에. 그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가는 길을 지켜봐 주는 거야. ……그리고 새로운 바람의 탄생을 축하해 줘야지.”
“……!”
귓가에서 속삭이는 목소리는 아무런 감정을 담지 않은 듯이 담담하기만 했다. 하지만 우습게도 나는 그 때문에 오히려 더 이 믿을 수 없는 현실을 실감하고야 말았다.
바람의 정령왕 미네르바.
지금 이 순간, 그에게 허락된 시간이 끝나려 하고 있었다.
* * *
미네르바의 거주성인 바람의 영역은 새파란 하늘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모습이다. 적당히 기분 좋을 만큼 잔잔하게 흐르는 청명한 바람, 바닥엔 솜사탕처럼 몽실몽실한 구름이 카펫처럼 깔려 있었다. 그 외에 공간을 채우고 있는 모든 형태들도 전부 구름으로 되어 있어 마치 하늘 위에 지어진 세상 같았다. 솔직히 말하면 신계보다 오히려 더 신이 사는 곳이란 느낌이었다.
지금 그곳에 무수히 많은 바람의 정령들이 정렬해 있었다. 엄숙하게 부복하고 있는 그들에게선 평소의 활기차고 명랑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이 만든 원형으로 된 행렬의 한가운데, 새하얀 여인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도자기 인형처럼 아름다운 바람의 왕, 미네르바였다.
“미…….”
반가운 기분을 느끼기도 전에 들어오는 광경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미네르바의 옆에 다른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중 한 명은 내게도 익숙한 붉은 머리칼의 이프리트였다. 그 역시 미네르바의 이상을 느끼고 바로 정령계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처음 보는 낯선 두 명의 남자였다. 그들에게서 습지를 연상시키는 짙은 안개 냄새가 풍겼다. 이런 냄새를 풍기는 이들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명계에서 온 인도자들이다.
명계인이 정령계에 놀러 오는 일은 흔하지만 왕의 영역엔 함부로 들어올 수 없다. 그들이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경우는 단 하나, 직무에 관계된 일뿐이었다. 물론 그 직무라는 것이 삶이 끝난 혼을 명계로 인도하는 일이라는 건 말하지 않아도 당연할 것이다.
이미 실감한 사실이면서도 막상 눈앞에 그 증거가 있는 것이 보이니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가만히 숨을 삼키고 있는데 맞잡은 트로웰의 손에서 아플 정도로 강한 악력이 느껴졌다. 흠칫 놀라 바라보자 창백하게 굳어 있는 그의 옆모습이 보였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차가운 표정이었다.
“트로웰……?”
“아아, 미안. 조금 긴장했나 봐.”
퍼뜩 정신을 차린 듯, 그가 바로 손을 떼고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그러나 떨고 있는 눈동자는 감추지 못한 채였다. 속내를 쉽게 드러내는 편은 아닌데, 긴장했다는 말대로 확실히 그는 평소보다 여유가 없어 보였다. 물론 나 역시 별반 다를 바 없는 상태긴 했지만. 이렇게 동요하는 트로웰을 보게 될 줄은 몰라서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미네르바는 인도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이프리트가 우리를 발견하고 아는 척을 해 왔다.
“어? 너희들도 왔네.”
그와 함께 우리의 기척을 읽은 인도자들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미네르바 역시 이쪽을 돌아보았다. 우리가 올 거라는 예상은 못 했는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던 그가 곧 부드럽게 웃었다.
“둘 다 어서 와. 날 배웅하러 와준 거야?”
“미네르바…….”
상냥하게 걸어오는 말에도 나는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거리가 가까워지니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미네르바의 힘이 굉장히 약해져 있었다. 늘 그를 휘감고 있던 짙은 바람의 채취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혈색도 멀쩡하고 여전히 아름다운데도 불구하고 그의 존재감이 흐렸다. 마치 생기 없는 조화를 보는 것 같았다.
어디서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모를 기분에 나는 마른침만 꿀꺽 삼켰다. 이래선 안 된다는 건 아는데 좀처럼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미네르바는 그런 내 기분을 이미 알아차린 듯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더 짙어졌다.
“와 줘서 고마워. 그렇지 않아도 너희들을 보고 가지 못하는 게 아쉽다고 여기던 참이었어. 이제 이곳의 생활도 많이 적응했구나.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정말 다행이야, 엘.”
“미, 미네르바. 정말…….”
……정말 소멸하는 거야?
목구멍까지 솟아오른 말을 차마 내뱉을 수가 없어서 꾹 눌러 참았다. 보이는 모든 광경이 명백하게 상황을 알려주고 있는데, 그걸 새삼 확인해 봤자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는 나를, 미네르바가 다가와 가만히 끌어안았다. 그의 품 안에서 아직 사라지지 않은 희미한 바람의 냄새가 났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나는 입술을 악물었다.
“정말 이 날이 왔구나. 이맘때쯤일 거라곤 생각했는데 막상 헤어지려니 아쉽네. 특히 너와는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주지 못해서 미안해.”
“나, 나야말로…… 전혀 눈치채지 못해서…….”
“그런 건 마음 쓰지 마. 보통은 알아차리는 게 더 어려우니까. 전대 이프리트나 엘퀴네스는 소멸한 후에야 알았는걸. 이렇게 모두의 배웅을 받고 떠날 수 있다니, 난 정말 운이 좋은 거야.”
웃으며 답한 뒤 미네르바의 시선이 내 옆에 서 있던 트로웰을 향했다. 늘 웃고 있던 그의 얼굴에 지금은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특히 트로웰. 난 네가 안 올 거라고 생각했어.”
“……안 오려고 했었어.”
돌아온 답변은 굳은 표정만큼이나 냉담했다. 놀라서 돌아보는데 정작 미네르바는 즐겁다는 듯이 눈을 휘어 접었다.
“후후, 그래. 알고 있어. 넌 아닌 척해도 이런 이별에 약하지. 엘퀴네스 때도, 이프리트 때도. 전부 다 알고 있었으면서 일부러 배웅하지 않았잖아.”
“…….”
“그래도 나만은 보러 와주다니 기쁜걸. 네가 조금은 날 특별하게 생각해 준 것 같아서. 그게 무엇보다 기뻐.”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마. 어차피 아무래도 상관없으면서.”
트로웰은 미네르바와 시선을 맞추지 않은 상태로 낮게 혀를 찼다. 그의 퉁명스러운 말투가 왠지 투정을 부리는 것 같아서 나는 조금 숨을 삼켰다. 늘 어른스럽다고만 생각했는데, 트로웰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미네르바는 익숙하다는 듯이 웃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니 그럴 리가. 네겐 늘 고마워하고 있어, 트로웰. 내가 힘든 시절을 버텨낼 수 있었던 건 전부 네 덕분이야.”
“알긴 해?”
“당연히 알지. 네가 내 곁을 지켜줬다는 걸 어떻게 모르겠어. 네가 유희를 잘 다니지 않았던 것도, 인간들에게서 미운 부분만 찾고 그들에게만 유달리 엄격했던 것도. 전부 다 날 신경 써서 그랬다는 거, 알고 있었어.”
트로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미네르바를 올려다보는 두 눈은 초조한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미네르바는 나에게 그랬듯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가여운 트로웰. 땅의 정령왕들은 많은 것을 내다보는 힘 때문에 오히려 삶에 흥미를 갖지 못하지. 너 또한 태어났을 때부터 지독한 공허에 시달려왔다는 거 알아. 네가 살아갈 목적을 늘 필요로 했다는 것도. 그걸 지금까지는 나를 챙기는 걸로 충족시켜 왔었지.”
“…….”
“그래서 사실은 걱정했어. 내가 떠나고 나면 네가 더 이상 마음 줄 곳을 찾지 못해 허무해질까 봐. 하루하루 소멸이 다가오기를 지루하게 기다리는 세월을 보낼까 봐.”
“……그럴 리 없잖아.”
“응, 내가 보기에도 지금의 넌 괜찮을 것 같아. 그런 의미에서 엘에게 정말 고맙게 생각해.”
“으응? 나?”
갑자기 언급된 것에 놀라서 눈을 깜빡이자 미네르바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이 내 두 손을 맞잡아왔다.
“상냥하고 따뜻한 네가 와줘서 정말 다행이야. 너라면 트로웰이 무너지지 않게 붙잡아 줄 수 있겠지. 그를 잘 부탁해. 저렇게 보여도 트로웰은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라 늘 안주할 곳을 필요로 해. 부디 오랫동안 그가 애정을 쏟을 수 있는 장소가 되어줘.”
“어? 으음, 노력할게.”
“후후, 고마워. 덕분에 안심하고 떠날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말하니까 이상해, 미네르바. 꼭 영원히 못 보게 되는 것 같잖아.”
“그러게 말이야. 너도 신이 될 텐데, 나중에 언제든 놀러 오면 되지.”
당황해서 건넨 말을 이프리트가 바로 거들었다. 소멸하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신이 된 후에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최근엔 상급신이 부족해서 전부 다 신이 되는 추세라고 했으니까. 그건 아마 미네르바도 마찬가지일 거고,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응, 그렇긴 하지. 그래도 미네르바로서 너희를 보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다시 태어나면 기억은 남아 있어도 많은 것들이 달라질 거야. 엘뤼엔만 해도 엘퀴네스 때와는 달라졌는걸. 나 역시 너희가 아는 내가 아니게 되겠지.”
“그치만…….”
“아니, 그 말이 맞아.”
단호하게 말을 자른 사람은 트로웰이었다. 그는 똑바로 미네르바를 응시하며 말했다.
“새로 태어났으면 그냥 다른 사람인 거야. 전생에서 어울린 관계 따위, 옛 인연이라고 할 수도 없지. 이곳에서의 일은 잊어버려, 전부. 아무것도 돌아보지도 말고 떠올리지도 마.”
“트로웰…….”
오늘 그는 아픈 말만 하기로 작정하고 온 사람 같았다. 이번만은 미네르바도 서운했는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말려야 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트로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말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기억은 내가 할 테니까. 넌 그냥 모두 다 지우고 행복해지기만 해.”
모두가 놀란 시선으로 트로웰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 팔을 뻗어 조심스럽게 미네르바의 얼굴을 만졌다. 담담한 손길이었는데, 내 눈에는 마치 그 손이 떨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시는 남으로부터 상처 입지 말고, 배신당하지도 말고.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만 살아. 너를 아끼는 사람만 만나서, 사랑받기만 하는 삶을.”
그건 마치 세상에서 가장 감미로운 고백 같았다. 마주 닿은 두 사람의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흔들렸다. 먹먹하다는 듯 한동안 아무 말도 잇지 못하던 미네르바가 부드럽게 웃으며 트로웰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고마워, 트로웰. 마지막까지 너에게는 위로만 받고 가는구나. 넌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였어. 그것만은 잊을 수 없을 거야.”
“……잊으라니까. 그래도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내게도 넌 소중했어.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처연하게 말하면서도 트로웰은 끝끝내 표정을 흩트리지 않았다. 아마도 떠나는 사람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그 나름의 배려일 것이다. 그게 더 가슴 아파서 나는 입술을 악물었다.
“이제 가야 하실 시간입니다.”
원하지 않아도 이별의 순간은 다가왔다. 대기하고 있던 인도자들이 건넨 말에 미네르바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가 지닌 정령왕의 힘은 다음 세대의 미네르바에게 거의 전이된 상태였다. 그는 이대로 명계에 간 후 그곳에서 탄생을 준비하고 있는 다음 세대의 혼에 마지막 남은 힘을 물려주고 소멸하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정령왕의 진정한 소멸은 정령계가 아닌 명계에서 이뤄지는 셈이었다.
“아참, 엘. 네게 부탁할 게 있어.”
“으응? 무슨 부탁?”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잊은 것이 떠올랐다는 듯 그가 급하게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따라나서던 것을 멈추고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이번에 이프리트가 만든 정령검을 도와줬다고 들었어. 실은 나도 예전에 정령검을 만든 적이 있거든.”
“아…… 뭔지 알아. 블레스터라는 검 말이지?”
미네르바가 한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만든, 그가 지닌 힘의 절반이 봉인되었다는 바람의 검. 하필 이사나의 정적이라 할 수 있는 카리브디스 공작의 손에 들어갔기 때문에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왜 갑자기 그 검을 언급하는 걸까. 어렴풋이 전해 듣기론 블레스터는 미네르바에겐 상처밖에 남지 않은 과거의 산물이었다. 방금 전 트로웰이 그의 행복을 당부하던 이유와도 관련 있음이 분명한. 힐끗 돌아보았더니 역시나 트로웰은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미네르바 역시 그 표정을 보았을 텐데도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 검은 진의 봉인을 토대로 만들어졌어. 원래는 내가 소멸할 때가 다가오면 부여한 힘이 회수되면서 진의 봉인도 저절로 풀릴 예정이었지. 그런데 조금 문제가 생겼어.”
“문제?”
“힘은 회수되었는데 정작 진의 봉인이 풀리지 않고 있어. 그 애 쪽에서 돌아올 생각이 없는 것 같아.”
“본인의 의지로 남았다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니야?”
“응, 그렇긴 한데……. 그 아이의 성질이 조금 달라졌다고 해야 하나. 본인의 진짜 의지가 아닌 다른 작용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여서 말이야.”
“다른 작용……?”
그 말을 듣자 얼마 전 이프리트가 해줬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는 가만히 헛숨을 삼켰다.
“……폭주하고 있다는 거야?”
이지를 지닌 검은 마검화가 되면 폭주하기 쉬워진다고 했었다. 블레스터 역시 만들어진 지 오래된 검이니 마검화가 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아니나 다를까. 미네르바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 사실을 깨달은 지 얼마 되지 않았어. 그동안은 사람의 손이 타지 않는 곳에 있어서 잠잠했었거든. 그런데 최근에 그를 깨운 인간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빠르게 상태가 나빠지는 것 같아. 내버려 두었다간 그 애, 혼까지 타락하고 말 거야. 그럼 돌이킬 수 없게 돼.”
설명하는 미네르바의 얼굴은 죄책감과 괴로움, 슬픔의 감정으로 가득했다.
“전부 다 내 잘못이야. 봉인된 진은 날 위해 갑갑한 검 안에 깃들기를 자청했던 아이였어. 이미 많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 아이가 더 괴로워지는 걸 막고 싶어. 하지만 내가 직접 나서려던 찰나에 상황이 이렇게 돼버려서……. 엘, 염치없지만 네가 그를 도와주지 않을래?”
“상관없지만…… 왜 나한테……?”
내 입으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난 아직도 엉성한 부분이 많은 정령왕이다. 나보다는 다른 정령왕들에게 맡기는 편이 더 확실하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리둥절해져서 쳐다보자 미네르바는 씁쓸하게 웃었다.
“트로웰이나 이프리트는 그 검을 보는 것도 싫어하거든. 그들에게 뒷일을 맡기면 봉인을 풀어주기는커녕 그냥 바다 한가운데 던져버릴 것 같아서 말이야.”
“엥? 정말?”
믿을 수가 없어서 돌아보자 다들 나와 시선을 피했다. 여기서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는 것 자체가 긍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황망해서 얼떨떨해져 있는 나를 향해 미네르바가 어색하게 말했다.
“내가 해서는 안 될 일을 했어. 왕의 힘을 동일하게 나눈 검을 만들다니. 그것도 고작 인간 하나를 출세하게 만들기 위해서 말이야. 왕이 지닌 상징과 권위를 모욕한 셈이었지. 그 검의 존재 자체가 정령계의 치부나 다름없다 보니 아무도 가까이하려고 하지 않아.”
“……하지만 진은 잘못이 없잖아.”
“응, 엘이라면 그렇게 말해 줄 줄 알았어.”
미네르바가 반색하며 웃었다. 왠지는 모르겠는데, 그는 내가 지나치게 착하다는 인상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민망했지만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하기도 뭐해서 나는 곧 그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봉인을 풀어주면 되는 거지? 알았어, 그렇게 할게.”
“정말 고마워. 스스로 나오려고 하지 않는 거라 아마 조금 까다로울 거야. 쉽지 않은 일을 부탁해서 미안해.”
“아니, 괜찮아. 더 필요한 건 없어?”
“으음, 그럼 이것도 부탁해도 될까? 봉인이 풀리면 그 아이도 소멸하게 될 거야. 그 영혼이 편하게 떠날 수 있도록, 그의 마지막을 축복해 주지 않을래? 내가 하지 못하고 가는 사과도 대신 전해줬으면 해.”
“응, 알았어.”
어차피 돕기로 한 일인데 그 정도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 바로 고개를 끄덕이자 미네르바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그의 얼굴 중에서 가장 환한 표정 같았다.
“고마워, 엘. 정작 나는 아무것도 해 준 게 없는데 마지막을 핑계 삼아 너한테 너무 맡겨두고 가는 것 같아. 미안해서 어떡하지?”
“그런 말이 어딨어. 함께 한 시간은 짧았지만 넌 내게 가족이었어. 마지막 부탁이 아니었더라도 들어줬을 거야.”
웃으며 대답하자 미네르바는 더 미안한 얼굴을 했다.
“넌 정말 다정하구나. 내 삶이 조금 더 길었으면 좋았을걸. 그럼 너와 더 오래 어울릴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하고 가는 게 계속 아쉬워. 한 번도 내 수명이 짧다고 느낀 적이 없었는데, 마지막에 와서 이렇게 미련이 남게 될 줄 몰랐어.”
그는 몇 번이나 아쉽다는 듯이 내 손을 붙잡았다. 그 손길에 담긴 애정이 느껴져서 가슴 안이 뭉클해졌다. 시끌벅적한 이프리트와 트로웰에 비해 미네르바는 늘 조용했지만, 그렇기에 모두를 든든하게 지탱해 주는 느낌이었다. 그의 초연한 분위기가, 단정한 말투가 좋았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제가 있다면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이제 그 자리가 비워진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 없이 쓸쓸해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정말 가야 할 것 같아. 다들 잘 지내. 다음 세대의 미네르바도 잘 부탁할게.”
“잘 가, 미네르바. 널 잊지 못할 거야.”
한 사람씩 포옹하는 것으로 마지막 인사를 나눈 후 미네르바는 두 인도자가 내미는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들의 몸에서 짙은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완전한 이별의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우리의 왕께 작별을 고합니다! 다음 생에도 바람처럼 자유로우시기를!>
마지막을 느낀 바람의 정령들이 정렬한 상태에서 한목소리로 외쳤다. 장내의 분위기는 숙연했고, 주위를 감도는 공기조차 슬픔을 토하는 것 같았다. 그의 모습이 희미해지는 만큼 남아 있던 바람의 흔적이 지워져 가는 것이 아플 정도로 선명하게 느껴졌다. 북받치는 감정을 참을 수가 없어서 나는 두 손에 꾹 힘을 쥐었다. 어느새 차오른 눈물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후두둑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당황해서 황급히 손등으로 닦아내자 옆에 있던 이프리트가 냉큼 핀잔을 건넸다.
“뭐야, 너 지금 우는 거야? 하여튼 이런 것도 인간 같기는.”
“시, 시끄러! 슬프단 말이야! 마지막이잖아!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울지 않을 수가 있어?”
“슬플 게 뭐 있어? 완전히 소멸하는 것도 아니고 다음 생이 있는데. 그냥 어디 먼 곳으로 거처를 옮긴다고 생각하면 될 걸.”
“떠난다는 것 자체가 슬픈 거거든?”
울먹거리면서 쏘아붙인 말에 이프리트는 그냥 코웃음을 쳤다. 누가 근성부터 마녀가 아니랄까 봐 감정을 느끼는 부위가 고장 난 게 틀림없었다. 심지어 그렇게 애틋하게 작별인사를 건네던 트로웰 조차 별다른 반응 없이 태연해서 더 야속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