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240)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240화(240/608)
제240화
“뭐야, 트로웰. 왜 너까지 담담한 얼굴을 하는 거야? 흐윽……내, 내가 이상한 거야?”
서운한 마음을 자각했더니 눈물이 더 마구 솟아올랐다. 트로웰은 조금 당황한 듯,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신선하긴 하네. 이프리트 말처럼 소멸해도 다음 생이 있으니 슬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거든. 결국 어디서든 잘 살아갈 테니까.”
“그런 게 어딨어? 만나고 싶고 그리워지는 때도 있을 텐데. 나는 그렇다 치고, 두 사람은 미네르바랑 오랫동안 알아왔잖아. 함께 쌓은 추억과 교감하던 시절이 있을 텐데. 헤어지는 건 그 모두를 잃어버리는 거란 말이야. 이제 다시는 그걸 나눌 수 없는 거라고. 그건 슬퍼해야 하는 일 아니야?”
“……그래, 그렇네.”
중얼거리는 트로웰은 조금 멍한 얼굴이었다. 그러는 사이 미네르바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잔잔히 흐르던 바람마저 완전히 멈췄다. 정말 가버린 건가? 이걸로 정말 끝인 거야? 뻔히 다 지켜봤으면서도 계속 실감이 들지 않아 나는 한참이나 흐릿해진 눈을 깜빡거렸다. 트로웰 역시 사라진 장소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문득 뜻밖의 질문을 해 왔다.
“엘……. 내가 소멸할 때도 지금처럼 울 거야?”
“뭐? 그런 당연한 걸 왜 물어? 내가 우는 게 그렇게 한심하게 보여?”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새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다행이라니?”
“몰랐는데, 정령왕의 소멸이라는 거…… 굉장히 초라하네. 고독하고 쓸쓸한 기분이었는데 네가 울기 시작하면서부터 뭔가가 채워지는 것 같아서 말이야. 응. 슬퍼하는 거, 의외로 나쁘지 않네. 내가 소멸할 때도 울어준다니까 안심해도 되는 거지?”
웃으며 돌아보는 얼굴은 여전히 태연했지만 지독하게 아파 보였다. 나는 울컥 눈물을 쏟아냈다.
“지금 그런 말 하지 마! 상상하게 됐잖아!”
“아, 미안. 그치만 난 아직 소멸하려면 멀었는데?”
“그런 문제가 아니야! 늦든 빠르든 언젠가 겪어야 하는 일이란 게 괴롭단 말이야!”
“하하, 이렇게 열심히 괴로워해 주니까 난 오히려 좋은데?”
“트로웰, 이럴 때 보면 진짜 성격 나쁜 거 알아?”
“으응, 그런가? 그런데 말이야. 나 잠깐만…….”
“……?”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는데 그가 내 어깨에 이마를 기대왔다. 맞닿은 부분에서 심한 떨림이 전해졌다. 처음엔 잘못 느낀 건가 했는데 아니었다. 트로웰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트로웰?”
“……미안, 엘. 치사한 건 아는데…… 나 잠깐만 네 눈물을 빌려도 될까? 내가 흘려야 할 건 이미 옛날에 전부 말라버렸거든. 하지만 지금이라면 울 수 있을 것 같아. 그래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두 눈에서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자신조차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현상이 생소한 듯 당황스러움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그러면서도 치솟는 슬픔을 억제하지 못해 조금씩 흐느낌을 토해내는 모습이 가슴 아팠다. 나는 울먹이는 그를 끌어안고 천천히 등을 토닥여 주었다. 차마 본인 앞에서는 울지 못했던 그의 기분이 느껴져서 마음이 더 착잡했다.
“미안해, 엘. 미안해. 흐윽…….”
“괜찮아, 트로웰. 후련해질 때까지 울어. 참는 것보단 그게 더 나아.”
이 순간만큼은 이프리트도 더 이상 나무라는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오히려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니 자기도 울고 싶은데 체면 때문에 참고 있는 듯 보였다. 정령왕들의 슬픔에 동조한 정령들 또한 흐느끼기 시작했다. 한동안 주위는 훌쩍이는 소리로 가득해졌다.
그날, 나는 새로운 미네르바의 탄생을 기다리는 내내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트로웰을 다독였다. 화사한 바람의 영역은 오랜 시간 함께 해온 주인이 사라진 후에도 변함없이 아름답기만 했다. 그것이 더 서글퍼서 가슴 아픈 시간이었다.
* * *
“집회?”
엘뤼엔은 눈앞에 내밀어진 봉투를 보며 얼굴을 가볍게 찌푸렸다. 회랑의 인장으로 봉해진 봉투는 공문서를 뜻하는 금색을 띠고 있었다.
“이 시기엔 공식 집회가 없지 않았나?”
한 번도 가지는 않았지만 신계의 일정은 대부분 파악해 두고 있었다. 확인하고자 건넨 질문에 전달받은 편지를 올린 수행천사가 정중하게 답했다.
“긴급 집회라고 하셨습니다. 중요한 일이니 반드시 참석하시라고도 당부하셨습니다.”
“주최자가 누구지?”
“섀넌 님이십니다.”
명계의 신이 주최하는 집회라면 대충 무슨 용건일지 짐작이 갔다. 엘뤼엔은 담담하게 인장을 벗기고 봉투를 열었다. 안에 들어 있는 서신의 내용은 역시나 그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다만 회의 시각만은 짐작을 벗어나 있었다.
“서신을 받는 즉시 참석……인가? 불참을 알릴 시간적 여유를 두지 않으려는 거군.”
필시 만년 불참자인 자신을 의식하고 정한 방식이리라. 공문이 내려진 모임엔 불참 시 반드시 사전에 서면으로 알리게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무단으로 빠지면 징계를 받는다. 지금처럼 ‘즉시 참석’이란 문구가 들어간 경우엔 이미 서신을 받는 순간부터 적용되기 때문에 사전에 거절할 방도가 없었다. 엘뤼엔은 한숨을 내쉬며 서신을 내려놓았다. 몹시 귀찮았지만 아무래도 이번만은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나가실 채비를 돕겠습니다.”
눈치 빠른 수행 천사가 바로 겉옷을 가져왔다. 다시금 한숨을 내쉰 엘뤼엔이 내키지 않는 얼굴로 그것을 받아들일 때였다.
“엘뤼엔 님!”
누군가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엘뤼엔은 고개를 돌렸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드엘을 비롯한 여러 명의 천사들이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급하게 달려온 듯 몹시 흐트러진 행색이었다.
“다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엘뤼엔을 수발하고 있던 천사들이 당황해서 그들에게 다가갔다. 나드엘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엘에게 또 문제가 생겼나 싶어 얼굴을 굳히던 엘뤼엔은 곧 다른 천사들도 그녀와 비슷한 상태라는 점을 파악했다. 그런 점을 미루어 보아 그의 아들과 연관된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다른 의미로는 더 나쁜 상황이기도 했다. 엘뤼엔의 수행 천사들은 그와 성정이 비슷하기에(나드엘을 제외하고) 어떤 일에도 침착한 편이었다. 그런 그들이 이렇듯 격렬하게 동요하고 있다는 건 평범한 일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무슨 일이지?”
“저, 저어…… 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떨고 있는 천사들을 대표해서 나드엘이 말했다. 엘뤼엔은 두말없이 곧장 그들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천사들이 향한 곳은 궁처의 2층으로 이어지는 돌계단이었다. 뒤따라가면서 엘뤼엔은 다시금 의아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위에 있는 건 그의 침실뿐이었기 때문이다.
짐작대로 천사들이 도착한 곳은 굳게 닫힌 침실 문 앞이었다. 신에게 수면이란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 아니다. 그렇기에 침실이라고는 해도 명목상의 장소일 뿐, 이곳을 찾는 일은 거의 없었다. 천사들 역시 가볍게 순회를 하는 목적 외에는 돌아보지 않는 곳이었다.
“여기는 왜…….”
함께 따라나선 다른 천사들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내한 천사들은 답하는 대신 서로 굳은 눈빛을 교환했다. 그것이 신호였는지 나드엘이 숨을 크게 가다듬더니 눈을 질끈 감은 채 문을 열었다.
끼이익, 이음새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상아처럼 하얀 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이윽고 시야에 들어오는 광경을 보는 순간 엘뤼엔은 모든 상황을 바로 이해했다. 천사들이 왜 이곳에 왔는지부터, 그들이 충격은 받은 이유까지.
“흡!”
“허억!”
그의 얼굴이 가볍게 찌푸려지는 것과 동시에 여기저기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엘뤼엔은 차분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본래 그의 침실 안은 티 하나 묻지 않은 새하얀 색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펼쳐진 건 온통 붉은색밖에 없었다. 벽지와 바닥은 물론 가구까지 전부 붉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균일하지 않은 흔적들을 보아 누군가 피투성이가 된 채 여기저기 부딪친 것 같았다. 엘뤼엔은 굳이 이유를 멀리서 찾지 않았다. 마침 침대 한가운데 그 원인으로 보이는 것이 널브러져 있었으니까.
“…….”
그건 누가 보기에도 사람의 형태를 한 존재였다. 피에 절어 있는 상태에서도 훤칠한 체격과 새카만 머리카락만은 눈에 띄었다.
“시, 신 맞으시죠?”
나드엘의 질문에 엘뤼엔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상수를 가져와라. 가능한 한 많이.”
그의 지시가 떨어지자 굳어 있던 천사들이 급히 정신을 차리고 허둥지둥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쁘게 흩어지는 그들의 기척을 뒤로한 채 엘뤼엔은 침대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단 침입한 것으로 모자라 남의 침실을 엉망으로 만든 남자는 대(大)자로 누운 채 고요히 눈을 감고 있었다. 입가부터 가슴께까지 말라붙은 피와 채 마르지 않은 피가 지저분하게 엉켜 있는 것을 보아 꽤 여러 번 피를 토한 것 같았다.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조차 분별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엘뤼엔은 그 모습을 한동안 빤히 훑어보다가 말했다.
“일단 묻겠는데, 죽었나?”
“……아직 안 죽었어.”
그때까지 시체처럼 보이던 남자의 입에서 멀쩡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굳게 감겨 있던 두 눈이 어느새 떠져 있었다. 암흑처럼 까만 그의 눈동자를 보며 엘뤼엔은 아쉽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그거 유감이군.”
“냉정하게 말하긴. 천상수부터 가져오라고 했으면서.”
천상수는 주신의 성력으로 만들어진 성수로 신의 몸을 치유하는 효과가 있었다. 보통은 치유의 신을 찾아가면 더 빨리 해결되기 때문에 잘 쓰이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누워 있던 남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역시 엘뤼엔이야. 치유의 신한테 데려가지 않고 천상수를 택하다니.”
“남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아서 내 집에 무단 침입한 거 아니었나?”
“응, 맞아. 그래서 좋다는 거야.”
중얼거리듯이 답한 직후 그는 쿨럭, 기침을 내뱉었다. 힘없이 벌려진 입에서 붉은 피가 한 움큼 쏟아져 나왔다. 얼굴을 찌푸린 엘뤼엔이 그의 이마에 손을 대고 신력을 불어넣었다. 천상수보다는 약하겠지만 치료에 들어가기 전까지 체력을 버티게 할 수는 있을 터였다.
“자상하네, 엘뤼엔. 왠지 사랑받는 기분이야. 가끔은 이런 것도 좋은걸.”
“닥쳐. 지금 네 꼴을 보니 마왕이 금기를 어긴 건 확실한 것 같군. 네가 이 지경이 될 정도면 갔던 일은 확실히 마무리한 거겠지?”
얼마 전 마계 쪽에서 거대한 파장이 느껴졌었다. 예민한 이라면 누구의 힘인지 충분히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원인이 무엇인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할 방도가 아무것도 없었다. 유일하게 대답할 수 있는 당사자는 그날 이후로 완전히 종적을 감춰 행방이 묘연해진 상태였다. 그러자 뜻밖에 가장 귀찮아진 건 엘뤼엔이었다. 혹시 연락받은 것은 없는지, 행방을 알고 있는 건 아닌지, 최고신들이 돌아가며 그의 궁처를 기웃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늘 열리는 집회도 그 일과 연관 있다는 것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들은 엘뤼엔이 전부 다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대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엘뤼엔의 입장에선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다. 대체 왜 엄한 곳에서 시간을 낭비하나 싶었지만, 일이 이렇게 되어서야 그들의 추측이 맞아떨어지게 된 셈이다. 설마 사라졌던 장본인이 이렇게 느닷없이 그 앞에 나타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도 폐인이나 다름없는 몰골로.
“대답해, 카노스.”
“……으응?”
재촉하는 음성에 남자―카노스의 눈이 감기려다 말고 다시 떠졌다. 하지만 조금 전보다는 확연히 탁해진 눈이었다. 지금껏 강제로 버티고 있던 의식이 안심할 만한 존재를 만나게 되자 본격적으로 흐려지고 있는 것이다. 엘뤼엔은 가볍게 혀를 찼다.
“대답한 뒤엔 마음껏 기절해도 되니까 상황부터 설명해.”
“…아아, 그 일 말이지…….”
탁해진 눈빛만큼이나 기운을 잃은 목소리가 느릿하게 울렸다. 카노스는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말했다.
“반은 성공, 반은 실패.”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야. 그를 제압하긴 했어. 하지만 완전히 처치하는 건 불가능하더라고. 각성이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도록 제약을 걸어 봉인시키는 게 전부였어.”
“설마 일부러 봐준 건 아니겠지.”
“하하, 역시 그렇게 보이나? 나도 그런 거면 좋겠는데 말이야.”
“…….”
“믿어져, 엘뤼엔? 내가 고작 되다 만 신 하나 봉인했다고 이 지경이 됐다는 게. 악신이란 거 진짜 굉장하더라고. 아직 완전한 각성도 안 했는데 이런 힘을 낼 수 있다니. ……어쨌든 그 바보 같은 녀석이 탐낼 만한 힘이긴 했어. 그런 게 태어나면 신계가 발칵 뒤집히고도 남겠지. 그 녀석이 나한테 뭐라고 한 줄 알아? 자기 밑에 들어오면 신계의 한 부분을 떼어주겠대. 그걸 회유라고 하더라니까?”
카노스는 통증 때문에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연신 키득거렸다. 목소리는 밝았으나 그답지 않게 자조적인 얼굴이었다. 엘뤼엔이 한 손으로 그의 눈을 덮었다.
“떠들 힘은 남아 있는 모양이군. 알았으니 시끄럽게 하지 말고 이만 자라.”
“와, 너무하네. 들을 거 다 들었으니 이제 볼 일 없다 이거야? 우리 엘뤼엔 씨는 욕구만 채우면 후희는 모른 척하는 남자였어?”
“용건 다 끝난 김에 아예 다른 신한테 넘겨줄까?”
“……얌전히 잘게.”
실행은 대답과 동시에 이루어졌다. 비척거리던 몸짓이 멈추더니 그대로 잠잠해진 것이다. 잔다고 했지만 사실은 힘겹게 붙들고 있던 의식의 끈을 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헛소리를 하는 정신력을 칭찬해야 할지, 지독한 놈이라고 혀를 차야 할지 모르겠다. 엘뤼엔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봉인이라…….”
최악의 결과는 아니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면 봉인하는 것이 그나마 최선이긴 했다. 마신이 제약을 걸었으니 한동안은 깨지지 않을 테고, 다음 대책을 마련할 충분한 시간적 여유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임시방편인 것도 사실이다 보니 뒷맛이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사이 천상수를 가지러 간 천사들이 하나둘 돌아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가볍게 훑기만 해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지독한 부상이었다. 사람 꼴을 갖출 만큼 치유하려면 앞으로 몇 번은 더 다녀와야 할 터였다. 엘뤼엔의 입에서 이제는 습관이 된 듯한 한숨이 다시 흘러나왔다.
“어쨌거나 집회는 징계 확정이군.”
* * *
신계의 주요 집회 장소이자 공동 구역이기도 한 신들의 회랑. 지금 그곳엔 심각한 표정을 한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섀넌의 서신을 받고 모인 다양한 계층의 신들이었다. 회랑의 좌석은 전부 지정석으로, 신들이 태어나면 그 숫자에 맞춰 저절로 생성된다. 본래라면 빈틈없이 채워졌어야 할 자리였지만, 두 자리만은 비워진 상태였다. 그중 하나는 만들어진 이래 단 한 번도 주인을 맞이하지 못한 자리이기도 했다.
“엘뤼엔 님은 역시 안 오시려나 보군요.”
주최차인 섀넌이 난처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성실한 엘뤼엔의 성격상 거절할 틈을 주지 않고 참석을 촉구하면 징계를 받고 싶지 않아서라도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덕분에 회랑의 분위기가 온통 술렁거리고 있었다. 형벌의 신 엘뤼엔이 정기적으로 열리는 연회에도, 일정 회의에도 참여하지 않는다는 건 이미 유명한 사실이긴 했다. 그러나 최고신인 섀넌이 직접 주최하고 참석을 종용한 자리에까지 나타나지 않는 건 징계 여부를 떠나 명백한 실례였다. 신들은 조심스럽게 섀넌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정작 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엘뤼엔 같은 자가 오늘 집회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오지 않았다는 건 무시할 수 없는 다른 중요한 일이 생겼다는 뜻이다. 그 점에 관해서는 이오웬과 라데카도 같은 입장이었다.
“뭐, 상관없잖아. 어차피 엘뤼엔은 돌아가는 상황을 알고 있으니까.”
“그에겐 붉은 만남이 내정되어 있다. 오고 싶어도 올 수 없는 상황인 걸지도 몰라.”
천신에 이어 운명의 여신까지 그를 두둔하고 나서니 다른 신들은 불만을 품을 수가 없었다. 빈자리중 하나가 카노스의 자리라는 사실도 불참자를 함부로 폄하할 수 없는 데 한몫했다. 장내의 분위기가 산만해지자 섀넌은 가볍게 손뼉을 쳐서 자신을 주목하게 만들었다.
“자아, 그럼 오지 않으신 분의 사정은 나중에 듣기로 하고. 시간을 끌어서 좋을 이야기는 아니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공문서엔 집회의 이유가 적혀 있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목적이 궁금했던 집회였기에 신들은 모두 섀넌이 다음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섀넌 역시 그런 분위기를 사양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악신이 태어날 것 같습니다.”
“……!”
술렁거리던 주위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잠시 굳어 있던 신들이 하나둘 그 의미를 깨닫고 경악하기 시작했다. 마음의 준비도 없이 듣기엔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바, 방금 악신이라고 하셨습니까?”
중급신들 중 한 명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섀넌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 카류드리안이 금기를 어긴 정황을 포착했습니다. 관련 일로 마신 카노스가 조사를 나갔는데 지금까지 소식이 없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 몇몇 분들도 얼마 전 마계 쪽에서 발생한 강한 파장을 느끼셨을 겁니다. 그게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그의 마지막 흔적이었습니다.”
“그, 그럴 수가…….”
마신이 실종되었다니! 악신이 태어난다는 사실만큼이나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라데카가 말하길, 카노스는 남에 의해 소멸할 운명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최악의 결말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허나 위협의 불씨 또한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그러니 마냥 낙관하며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이 할 수 있는 대책을 강구하려고 합니다.”
얼빠진 얼굴을 한 신들을 향해 섀넌은 지금까지 파악한 일들을 전부 설명했다. 악신의 각성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부터, 각성 전에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 방법이라는 것 또한 충격적이었기에 신들은 재차 마른침을 삼켰다.
“악신을 소멸시키려면 상급신이 희생해야 한단 말입니까?”
“네,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상급신의 희생은 그 누가 되든 간에 매우 뼈아픈 손실이 될 겁니다. 그러나 악신이 태어나는 것만은 막아야 합니다. 모두 그 사실만큼은 동의하시리라 믿습니다.”
“…….”
주변의 공기가 고요해지다 못해 서늘해졌다. 서신을 받았을 때만 해도 가벼운 마음으로 참여한 집회였다. 갑자기 닥친 엄청난 진실 앞에 그들은 표정조차 제대로 가다듬지 못했다. 특히 희생을 강요받게 된 상급신들의 얼굴은 완전히 굳어 있었다.
“그럼, 희생자는 어떤 방식으로 정해지는 겁니까?”
“좋은 질문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지원자가 나오는 거겠지만, 지원이 없을 시엔 차선책으로 운명의 시계에 맡겨 보려고 합니다.”
그 말과 동시에 회랑 한가운데 거대한 원형의 시계가 눕혀진 상태로 떠올랐다. 형태와 바늘은 평범한 시계와 똑같았지만, 본래 숫자가 있어야 할 자리엔 알 수 없는 기하학적인 무늬와 그림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것을 본 상급신들의 얼굴이 더 굳어졌다.
운명의 시계. 라데카의 주 능력으로, 어느 조건에 걸맞은 운명을 찾거나 미래를 읽어내는 데 쓰이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시계가 가르쳐주는 운명은 추상적인 암시에 더 가깝다. 그저 조건―혹은 결과일지도 모르는 것―을 읽어내기만 할 뿐이라 듣는 사람에 따라 판단이 갈릴 수 있었다. 그래도 무작정 제비뽑기를 하는 것보다는 보기 좋은 방식이긴 했다.
“라데카. 부탁드립니다.”
섀넌의 말에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라데카가 시계 위로 뛰어 올라갔다. 그녀의 힘에 반응한 시계의 표면이 은빛으로 화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 빛에 삼켜진 라데카의 머리카락 또한 기이한 빛을 품었다. 그러자 멈춰 있던 시곗바늘이 천천히 움직였다. 시계가 미래를 읽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바늘이 움직일 때마다 그 방향에 앉아 있는 신들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잠시 후 감고 있던 라데카의 눈이 떠지며, 그녀의 입에서 첫 번째 조건이 흘러나왔다.
“고립된 채 고독한 자.”
시곗바늘이 또 움직였고, 그녀의 시선도 따라 이동했다.
“부드러운 냉혹함.”
“엄격하나 관대한 심판관.”
“고결한 지주(支柱).”
짧은 문장이 내뱉어질 때마다 신들의 얼굴은 시시각각 다양한 색으로 변했다. 정적이 흐르는 공간은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았다.
“그리고…….”
끼이익, 이윽고 기울어진 바늘이 마지막 단어를 가리켰다. 그것을 읽어내는 라데카의 눈동자가 파문이 일어나는 듯이 흔들렸다.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