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249)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249화(249/608)
제249화
문득 올려다보았더니 데르온이 알을 끌어안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흔치 않게 가라앉은 표정이라 나는 의아해져서 그를 불렀다.
“데르온?”
“예? 아아, 새삼 자크를 떠올렸더니 그의 생각이 강하게 나서 말입니다. 소식을 전하러 가지 못하는 게 조금은 아쉽군요.”
“자크라면, 아까 전에 말한 북 공작이요?”
“예, 그는 이번 번식기의 알을 전부 잃은 탓에 크게 상심한 상태입니다. 그가 지금 제 품에 있는 주군의 존재를 안다면 굉장히 기뻐할 겁니다.”
“굉장히 친한가 보네요. 그런 점을 신경 쓰는 걸 보니.”
“뭐, 미우나 고우나 몇천 년을 알고 지낸 사이니까요. 저 또한 그의 손에서 자라기도 했고.”
이를테면 아버지나 스승 같은 존재인 건가. 마족들 사이에서도 그런 애틋한 관계가 있을 줄은 몰랐다. 얼굴만 마주치면 싸우는 험악한 종족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조금은 선입견을 수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아이가 태어나면 함께 찾아가서 놀라게 해 줘요.”
“물론입니다. 정말 많이 놀랄 테지요.”
선뜻 고개를 끄덕인 데르온이 즐겁다는 듯 웃었다. 늘 무표정 하던 그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진 걸 보고 있으니 나까지 밝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훈훈한 분위기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일단 알을 숨기고 있었단 점에서 절 살려 두려고 하진 않을 겁니다.”
“……네?”
“진심으로 공격하는 북 공작은 짜릿할 정도로 강하죠. 지난번엔 일방적으로 화풀이를 당했지만 다음은 아닙니다. 반드시 반격에 성공해서 그 말끔한 배에 구멍을 뚫어주고 말 겁니다. 그와 대면할 날이 벌써부터 기대되는 군요.”
“…….”
선입견이긴 개뿔. 역시 내가 종족 하나는 탁월하게 잘 본 거였다. 나는 그가 안고 있는 알을 심란한 기분으로 응시했다. 저 안에서 태어날 아이가 훗날 저런 존재들이 득시글거리는 마계를 다스릴 왕이라니. 성격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마치 범죄자 양산에 가담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했더니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나는 알 위에 가만히 손을 가져다 댔다.
“넌 착하게 자라렴. 대부는 널 믿는다.”
“어헉! 엘 님! 마족에게 그 무슨 천인공노할 말씀이십니까? 착하게 자라라니요!”
기겁한 데르온이 황급히 내게서 알을 떨어트렸다. 나는 그것을 무시하고 더 또박또박 말을 건넸다.
“알겠지? 내 대자가 아무하고나 싸움질을 해대는 폭력적인 아이면 난 정말 슬플 거야. 난 네가 그러지 않을 거라 믿어. 곱고 바르고 온화한 아이로 태어나 줘.”
“아아아! 그만두십시오, 엘 님! 이건 정말 안 될 말씀입니다!”
이후 새하얗게 질린 데르온이 울면서 애원할 때까지,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덕담이란 덕담을 죄다 늘어놓았다. 알 속에 있어도 외부 영향은 받는다고 했으니까. 꾸준히 좋은 말만 들려주면 어느 정도는 내 말을 귀담아들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래 봤자 높은 확률로 무시하겠지만. 심지어 알 속에서조차 비웃고 있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크지만!
내 팔자에 평화는 무슨. 이젠 희망도 꿈도 없었다. 그래도 멈추지 않은 건 단순히 데르온을 괴롭히는 게 재밌었기 때문이다. 이런 걸 보면 나도 썩 좋은 성격은 아닌 게 분명했다.
* * *
짙은 안개가 낀 숲. 부드러운 잔디가 융단처럼 깔린 곳에 한 여인이 누워 있었다. 달빛을 머금은 듯 시리도록 하얀 피부와 조각처럼 매혹적인 이목구비. 눕혀진 상태에서도 굴곡을 알 수 있을 만큼 육감적인 몸과, 그 위를 뒤덮은 새카만 흑발. 무엇 하나 시선이 가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숲 한가운데 누워 잠들어 있는 요염한 여인의 모습은 한 폭의 유화를 담아낸 것처럼 인상적이었으나, 또한 동시에 불길한 느낌을 풍겼다. 그녀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긴 하지만 모든 사람의 환심을 사는 종류는 아니었다. 사람을 타락시키는 요부의 그것이었으며, 마녀들이 보여주는 환각에 더 가까웠다. 화려한 색과 달콤한 향으로 벌레를 꾀어내는 독초였다. 현명한 자라면 그녀의 결 좋은 검은 머리칼마저 독사의 이빨과 다름없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터였다.
이윽고 이슬을 잔뜩 머금은 풀잎이 여인의 얼굴 위에 맑은 물방울 하나를 떨어트렸다. 그러자 굳게 닫혀 있던 여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감춰져 있던 눈동자를 드러냈다. 그 눈동자는 핏물을 담아낸 것처럼 짙은 붉은 빛이었다.
“…….”
눈을 뜨고도 한동안 주위를 인지하지 못한 듯 여인은 멍한 얼굴로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이곳이 어딘가 하는 의문이었다. 그녀는 주춤거리면서 몸을 일으킨 후 천천히 주변을 훑었다. 그러나 숲이라는 사실만을 알 수 있을 뿐, 짙은 안개 때문에 보이는 것이 거의 없었다.
“깨어났나.”
“……!”
이곳에 존재하는 것이 자신만이 아니라는 건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깨달았다. 여인은 급히 고개를 돌렸고, 한구석에 검은 형체가 어른거리고 있음을 발견했다.
“……누구?”
“잘됐군. 슬슬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던 참이었다. 오늘까지 깨어나지 않으면 차라리 죽여 버릴까 했었지.”
형체가 가볍게 손을 휘젓자, 자욱하던 안개의 일부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 속에서 드러난 낯익은 얼굴에 여인의 얼굴이 얼핏 굳었다. 잘 다듬어진 훤칠한 체형, 세간에서 우아하다 평가받는 외모보다 더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푸른빛을 머금은 머리칼이었다. 마계에서 유일하게 단 한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색. 한때 그녀가 미친 듯이 갖고 싶었으나 체념했던 색이기도 했다. 여인은 그 색을 지닌 남자를 흔들리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데자크…….”
“오랜만이군, 세르피스.”
말투만큼이나 차가운 눈동자가 그녀를 훑는다. 세르피스는 몸을 가볍게 떨었다. 왜 저 남자가 내 앞에 있는 걸까.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서 머릿속이 온통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알 수 있는 건 이곳이 북쪽 영토, 카르텐 안이라는 것뿐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죠? 내가 왜 이곳에 있는 거예요?”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여전히 냉기를 거두지 않은 상태에서 데자크가 말했다. 그는 동요하는 세르피스의 눈동자를 똑바로 주시했다. 벌써 보름이 넘도록 한숨도 자지 못했다. 뜨거운 불씨를 목구멍으로 삼키고, 온몸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것을 묵묵히 견뎌내는 것만 같았던 시간이었다. 그 인내의 끝이 드디어 다가와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뭐, 뭐가요?”
“무슨 말인지는 네가 더 잘 알 거다.”
차갑게 떨어지는 음성에 세르피스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가련해 보이는 모습이었으나, 데자크는 그것에 넘어갈 정도로 허술한 남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럴수록 그녀를 응시하는 시선만 가라앉았다.
그 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강렬한 마력이 폭발하던 그날 밤에. 데자크는 따라오지 말라는 루카르엠의 경고를 어기고 결국 본성으로 향했다. 성 위를 덮어가는 검은 기류, 그 속에서 강한 압력이 쉼 없이 터지고 있는 것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느니 차라리 루카르엠의 옆에서 그를 지키다 죽으리라, 그렇게 결심했다.
하지만 도착한 그를 맞이한 건 완전히 폐허가 돼버린 본성의 잔해들뿐이었다. 왕좌가 있던 곳으로 짐작되는 부근을 간신히 찾아내긴 했으나 강한 마력이 발생한 흔적 말고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루카르엠도, 마왕 카류안의 모습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망연자실해진 그는 필사적으로 주변을 수색했다. 하지만 탐색을 거듭할수록 예감은 안 좋은 방향으로만 그를 이끌어 갔다. 가는 곳마다 마족들의 사체가 널려 있었다. 미처 붕괴를 피하지 못해 휘말린 자들이었다. 생명이라곤 풀 한 포기조차 남지 않은 장소엔 짙은 죽음의 냄새만이 가득했다. 절망만이 예견된 그곳에서 그는 차라리 아무것도 발견하지 않기를 바랐다. 저 사체들 속에서 루카르엠을 발견한다면 결코 견딜 수 없을 터였다. 이렇게 허무하게 그의 왕을 잃을 순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끝끝내 루카르엠을 찾아내지 못했다. 근처에서 미약한 마력을 느낀 건 그가 마침내 모든 수색을 체념하고 돌아서려고 할 무렵이었다. 마치 계시라도 내려지는 것처럼, 가득 쌓인 돌무더기 속에서 연약한 호흡이 느껴졌다. 무심코 지나쳤다면 결코 느끼지 못했을 정도로 희미한 반응이었다. 데자크는 돌무더기를 미친 듯이 헤집었고, 그 안에서 다 죽어가는 여인을 발견했다. 그녀가 바로 세르피스였다. 그는 직감적으로 그녀가 그 밤의 상황을 증언해 줄 유일한 목격자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데려와 치료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의식이 돌아오는 것이 오래 걸렸지만, 어쨌든 깨어났다. 이제 원하던 대답을 들을 차례였다.
“본성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네가 본 것을 전부 말해라.”
“본성이요……?”
“그래, 넌 카류안과 함께 있었던 것 아닌가? 그곳에서 루카르엠 님을 뵈었을 텐데.”
“루카르엠……?”
단숨에 털어놓을 거라 기대하진 않았으나 돌아오는 반응이 영 시원치 않았다. 멍한 표정을 한 채 앵무새처럼 자신의 말을 따라 하기만 하는 세르피스를 보며 데자크는 얼굴을 찌푸렸다.
“난 지금 너랑 말장난할 기분이 아니다, 세르피스. 협조할 의지가 없는 자를 인내심 있게 어르고 달랠 생각도 없다. 한 번만 더 멍청한 대답을 하면 그땐 네 목을 부러뜨리겠다.”
“자, 잠깐만 기다려요. 난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요.”
“모른다? 기억이 나지 않는단 말인가?”
“일단 내가 왜 이곳에 있는 건지부터 말해 줘요. 아니, 그보다 내가 왜 쓰러져 있었던 거죠?”
“그건 스스로 찾아내야 할 답일 텐데. 기억을 되짚어 봐라. 의식을 잃기 전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지?”
“의식을 잃기 전…….”
세르피스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머릿속에 먹물이 들어찬 것처럼 생각나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본성에 있었던 것 같은데. 최근엔 늘 본성에서 상주하며 카류안의 곁을 지켰었다. 부쩍 수면시간이 늘어난 그를 걱정했었던 것도 같다. 그녀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갔다.
‘아아, 그래. 루카르엠을 만났었지.’
본성에 그가 찾아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동쪽과 북쪽의 증명서를 몸에 착용한 채로. 그는 태연하게 웃으며 왕을 폐위시키러 왔다고 했었다. 평소와는 달랐던 그의 눈빛, 숨 막힐 듯이 새카만 분위기에 겁을 먹었던 것도 기억났다.
그다음에 어떻게 되었더라. 등 뒤에서 마왕 카류안이 나타나고, 사나운 두 짐승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서로 대치한 상태에서 한동안 이해할 수 없는 대화를 나눴던 것 같다. 그 시점부터의 기억은 온통 흐리다.
거기까지 떠올렸을 때, 세르피스는 멍한 얼굴로 모든 동작을 멈췄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얼굴을 엉망으로 뒤덮어가도 움직이지 않았다. 격렬한,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거친 감정이 머릿속을 장악해 간다. 끈적거리고 질척거리는 것이 달라붙은 것 같았다.
루카르엠, 아아, 맞아. 루카르엠을 만났다. 아무렴 전부 다 기억하다마다. 얼마든지 말할 수 있었다. ‘나’는 그를 흔들어 놓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고통에 차는 것을 보고 싶었다. ‘내가’ 광포한 말을 늘어놓을수록 그의 표정이 흐려지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때마다 흥분이 고조되고 짜릿한 쾌감이 가득 차올랐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나’의 승리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마족이라고 누가 그럽니까?>
쓴 물을 머금은 듯 찌푸린 얼굴로 그가 애매하게 웃었다. 그 담담한 시선이 닿는 순간 불현듯 벼락같은 깨달음이 스쳤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전율이 일었다. 몇 번이고 뒤집히고 또 뒤집혀서 이제야 겨우 붙잡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세상이 다시 한 번 뒤집혔다. 그는 정말로 마지막까지 방심할 수 없는 자였다.
아아아아, 그래. 바로 그대가!
“하,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벌어진 입술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갑자기 실성한 듯이 웃기 시작하는 세르피스를 보며 데자크는 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세르피스?”
“후후후, 후후후후. 그래. 그랬던 거였군. 좋아, 루카르엠. 당연히 그렇게 나와야지.”
“이봐, 대체 무슨 소리를…….”
가까이 다가가 손을 뻗으려던 순간 데자크는 얼굴을 굳혔다. 복부에서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시선을 내린 그는 자신의 몸에 박힌 새하얀 팔뚝을 발견했다. 그 팔을 따라 이어진 자리엔 텅 빈 얼굴로 웃고 있는 세르피스가 있었다.
반사적으로 내리치자 그녀의 몸이 훌쩍 뒤로 물러났다. 그를 꿰뚫은 손이 빠져나간 곳에서 피가 후두둑 쏟아져 내렸다. 데자크는 한 팔로 복부를 감싼 채 세르피스를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지?”
균형을 잃은 탓에 구부정하게 서 있던 세르피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마치 축 늘어진 목각 인형의 실이 당겨진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손에 흥건히 묻은 피를 느릿하게 핥았다.
“좋군. 바로 이거야.”
노래하듯이 흘러나오는 음성에 데자크는 한쪽 눈썹을 구겼다. 그를 응시하는 세르피스의 두 눈은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표정, 낯선 분위기였다.
“세르피스?”
공작이라고는 하나, 그녀는 같은 계급 내에서는 기실 막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나이 차이도 그렇지만 능력차도 상당히 큰 편이라, 그녀의 행동을 위협적으로 느껴본 적은 없었다. 특히 그녀는 본인의 유년 시절을 함께한 데자크에게 유독 약한 편이었다. 그는 엄격한 보호자였기 때문에 그의 손에서 자란 마족들은 누구나 데자크를 은연중에 두렵게 여겼다. 세르피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루카르엠에게조차 말을 놓고 함부로 굴면서도, 그녀는 데자크에게만은 시비를 걸거나, 똑바로 눈을 마주 보는 일이 거의 없었다. 지금처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취한 사람처럼 웃는 일은 더더욱 드문 일이었다.
“북 공작의 마력은 아주 특별하지. 그 마력을 담은 피를 언제고 한 번은 맛보고 싶었다. 예상했던 대로 아주 달콤한 피야.”
목소리와 말투조차 달라졌다. 음산하게 웃는 여인의 얼굴을 보던 데자크의 눈빛이 흔들렸다. 더럽고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아는 수많은 마족들 중에서, 이런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그는 낮게 이를 갈았다.
“……카류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