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262)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262화(262/608)
제262화
첫 밤의 야행은 은밀한 방식으로 진행됐다. 횃불도 들지 않고 오직 하늘의 달빛과 감각에만 의지해서 이동한다는 계획이었다. 이쪽의 행로를 숨김으로써 매복하고 있는 적들에게 혼선을 주기 위해서였다.
다만 이 계획은 아군에게도 꽤 고된 방식이었다. 무난한 길만 골라 이동해 오긴 했지만 일단은 산맥 안으로 들어온 상태였기 때문에 주위는 무성한 숲만 가득한 상태였다. 밝을 때는 종류를 구분할 수 있는 것도 어두울 땐 다 비슷해 보이기 마련이다. 하물며 비슷비슷한 형태의 나무들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이런 곳에서 횃불도 없이 걷는 건 눈을 가리고 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캄캄한데 불도 없이 길을 어떻게 찾아요?”
사방이 완전히 캄캄해져 (인간의 시야로는)주위를 분간하기 힘들 정도가 되자 알리사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 질문에 싱긋 웃은 마커스 백작이 한 나무를 가리켰다. 그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 시선을 내렸더니 밑동 부근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부분이 보였다. 미리 알고 찾아보는 게 아니면 무심코 넘어갈 만큼 연약한 빛이었다. 그 빛은 앞쪽에 있는 나무들에게서도 규칙적인 간격으로 군데군데 나타나 있었다. 마치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처럼.
“……뭔가 발려져 있는 건가요?”
알리사가 이채 어린 표정을 짓자 마커스 백작이 기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뮤타라는 곤충형 몬스터의 체액이네. 어두워지면 빛을 내는 성질을 띠지. 먼저 간 정찰대가 남겨둔 거네. 우리는 이 표시만 따라가면 된다네.”
“그렇군요.”
신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길 잠시, 알리사의 표정이 묘하게 딱딱해졌다. 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게, 몹시 불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왜 그래, 알리사?”
“있잖아, 엘 님. 긴장해야 할 것 같아.”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왠지 감이 안 좋아.”
단지 예감에 불과하다고 하기엔 알리사가 말하는 감은 위력이 완전히 달랐다. 나는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그거, 예지야?”
“그건 잘 모르겠어. 그치만 지금까지 위기가 있기 전에 받았던 느낌들과 비슷해. 지금 저 빛을 따라가면 굉장히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알리사가 이런 식으로 ‘감’을 느끼는 건 꽤 오랜만이었다. 그동안 확실히 평화롭긴 했었던 모양이다. 새삼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실감이 들었다.
“마커스 백작에게 더는 가지 말자고 해 볼까?”
“이런 상황에서? 아무도 안 들을걸.”
“너한테 예지력이 있다는 걸 알리면 되지.”
“아냐, 지금도 스피어의 딸이라고 떠받들어지고 있는데 더 피곤해지고 싶지 않아. 게다가 왠지 여기서 멈춘다고 해서 딱히 좋을 것 같지도 않고.”
“그것도 감이야?”
“응. 방금 그런 느낌이 왔어.”
“흠, 진퇴양난이라는 소리구나.”
앞으로 가도 문제, 멈춰 있어도 문제라니. 몹시 곤란하게 됐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알리사가 느끼는 ‘감’은 고정된 미래는 아니다. 어떤 일이 벌어진다는 신호에 가까우니 결과가 나쁠 것이라고 미리 단정할 필요도 없었다.
“일단 이상한 점이 보이면 알려 줄 테니까, 대비하고 있어.”
“응.”
숨죽인 알리사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듣고 있던 다른 일행들도 신중한 눈으로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나 또한 정신을 집중하고 주위를 세세히 둘러보았다. 혹시 근처에 매복이 있는 건가 싶었는데 우리 군대 외의 다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있다 해도 작은 산짐승들 정도에 불과했다.
‘딱히 이상은 없는데.’
한참 이동하는 동안에도 위협이 될 만한 부분은 찾을 수 없었다. 주변은 물론 근방 지역 전부 다 살펴봐도 마찬가지였다. 긴 시간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자 일행들도 서서히 긴장을 풀어가는 분위기였다. 알리사 또한 자신의 과민반응이라 여겼는지 머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위화감을 느낀 건 오히려 엉뚱한 쪽이었다. 이건 나만 알아볼 수 있는 부분이긴 한데, 주위를 돌아다니고 있는 나이아스와 운디네의 숫자가 갈수록 많아지고 있었다. 그것도 대부분 바닥에 몰려들어 있는 상태였다. 이쯤 되면 근처에 큰 샘이나 호수가 형성되어 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져 있는 건 무성한 풀숲뿐이었다. 더 괴상한 부분은 그렇게 수많은 물의 정령들이 땅의 하급 정령인 놈들과 손을 꼭 잡고 다닌다는 사실이었다. 누가 보면 두 정령들끼리 사귄다고 오해할 것 같았다.
“여기 다른 데보다 땅이 좀 무른 것 같지 않아?”
“그러게. 비가 왔었나?”
그 영향은 보통의 사람들에게도 확연히 드러났다. 앞서 걷고 있던 병사들에게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바닥을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는 정령들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나한테 위험한 일 같지는 않은데 왠지 거슬리는 느낌이 들었다.
가끔 길을 다니다 보면 왕이 지나간다는 이유로 근처에 있는 정령들이 우르르 몰려들 때가 있다. 처음엔 그런 현상 중 하나인 건가 싶었지만 곧 그건 아니라고 판단했다. 일시적으로 몰려드는 정령들은 통일성이 없고, 마구잡이로 흩어져 있는 편이다. 그에 비해 눈앞의 정령들은 종류는 물론 숫자와 배열 간격까지 뚜렷한 규칙을 드러내고 있었다. 원래 이곳에 자리 잡은 정령이라는 소리였다. 내 짐작이 맞았다. 이곳은 분명 호수여야 했다. 그래, 물과 함께 어울리는 땅의 정령만 없었다면 말이다.
“호수……그만큼 섞인 흙인가. 아니, 이 정도면 흙이 더 많으려나.”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걸까. 알리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바로 얼굴을 굳혔다.
“백작님! 기다려요! 더 앞으로 가면 안 돼요!”
그녀의 비명소리에 깜짝 놀란 마커스 백작이 황급히 돌아보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바닥이 울렁거리는 것과 동시에 시야가 갑자기 푹 꺼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꺼진 것은 바닥 쪽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단단하던 지반이 무너져 내리더니, 다리가 끈적한 진흙 속에 파묻힌 것이다.
“우아악!”
“뭐, 뭐야!”
당황한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며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아무리 허우적거려도 그 자리를 빠져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발버둥 칠수록 점점 더 밑으로 내려가고 있는 것 같았다.
“젠장! 늪이다!”
“다들 어서 여길 빠져나가!”
“어디로? 아무것도 안 보여!”
진흙에 빠진 사람들 사이에서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 마커스 백작도 크게 놀란 듯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모두 움직이지 마라! 나가려고 할수록 더 깊이 빠질 거다!”
그의 외침에 허둥거리던 병사들이 뻣뻣하게 굳었다. 하지만 그들을 태우고 있는 말들은 당연히 명령을 알아듣지 못했고, 소란은 좀처럼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입술을 악문 백작이 옆에 있던 참모를 다급히 돌아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왜 이곳에 늪지가 있나!”
“헤수르 늪입니다, 백작님! 이 근방에서 이런 규모의 늪이라면 헤수르 늪밖에 없습니다!”
“헤수르 늪? 거긴 우리가 가려던 방향과 반대에 있는 곳이잖나! 왜 우리가 이곳에 들어온 거지? 분명 표시대로 이동했을 텐데?”
“함정입니다! 표시가 바뀐 것 같습니다!”
침통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참모는 이미 절망에 빠진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적들은 우리가 매복을 알아차리고 야행을 할 것까지 미리 예상해 두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쪽의 위치 표시를 찾아내 늪지로 향하도록 방향을 틀어둔 것이다.
딛자마자 빠지는 종류면 초반에 바로 알아차렸을 텐데, 이 늪은 어느 정도 체중이 실리면 그제야 한꺼번에 무너지는 구조인 것 같았다. 덕분에 너무 많은 인원이 갇히고 말았다. 이 상태에서 공격까지 받았다면 타격이 컸을 텐데, 불행 중 다행이랄지 적들도 이 안에 들어올 용기까지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럴 만도 한 게, 늪지 범위가 커서 근방에 숨어 있을 만한 장소가 없었다.
“그렇구나. 이건 늪지에서 보이는 현상이구나.”
물과 흙의 정령이 끈끈하게 뭉쳐 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고 있는 내게 알리사의 타박이 이어졌다.
“뭘 혼자 감탄하고 있어, 엘 님! 그걸 이제 와서 알아차리면 상당히 곤란하거든?”
“아, 미안. 나도 늪지를 제대로 본 건 처음이라서.”
“못살아!”
이미 사람들의 몸은 허벅지까지 진흙에 잠겨 있었다. 그나마 끝에 있던 자들은 단단한 부분을 찾아 빠져나가려는 시도라도 했지만, 늪 한복판에 갇힌 사람들은 이도저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움직이지 않는다 해도 속도만 느릴 뿐이지 빠지지 않는 건 아니다. 최대한 짐을 버리고 몸을 가볍게 해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침착해라!”
서로 마땅한 돌파구를 찾지 못한 채, 마커스 백작의 애탄 외침만 반복적으로 울려 퍼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점점 땅속으로 끌려들어 가는 건 엄청난 공포일 것이다. 여기저기서 불안하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 속에서 태연한 건 우리 일행들밖에 없었다. 시벨리우스와 데르온은 옷이 지저분해지는 걸 신경 쓰는 정도였고, 아스는 진흙이 신기한지 연신 찰박거리기 바빴다. 그때 라피스가 긴 창 하나를 불쑥 꺼내들더니(아공간에 있던 걸 꺼낸 것 같다.) 지면에 푹 꽂아 넣었다. 아마 깊이를 확인하려는 듯했다. 그 결과는 내 짐작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장신인 그의 신장을 훌쩍 넘을 정도로 큰 창이었는데 밀어 넣는 대로 끝없이 삼켜지고 있었다. 끝 부분까지 완전히 파묻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그가 산뜻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인간의 힘으론 못 나가겠네. 여기서 전원 몰살 확정이군.”
“……야.”
대체 어디서 저렇게 창의적으로 남의 염장을 지르는 법만 배웠는지 모르겠다. 저 녀석이 태어나 자란 배경을 심층적으로 연구해 보고 싶을 정도다. 틀림없이 정상적인 환경은 아니었겠지.
다행스러운 점은 다들 정신이 없는 와중이라 그가 한 말을 듣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단 한 사람, 바로 옆에 있던 알리사만 제외하고.
“어, 어떡하지, 엘 님? 여기서 못 나가는 거야? 모두 구하기 힘들어?”
불안한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작은 소녀를 바라보다 나는 지긋이 라피스를 노려봐 주었다. 물론 반성할 리가 없는 녀석은 뻔뻔한 얼굴로 고개를 치켜들기만 할 뿐이었다.
“저런 말 귀담아 듣지 마, 알리사. 자력으로 나가는 게 어렵다는 것뿐이야. 우리가 도와주면 나갈 수 있어.”
“그러다 엘 님 정체 드러나는 건 아니야?”
“뭐, 드러내야 하는 상황이면 할 수 없지. 근데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될 거야. 이번에도 알리사 네가 수고 좀 해야겠지만.”
“응, 할게! 내가 뭘 하면 돼?”
전원 몰살이라는 단어가 자극적이긴 했나 보다. 다른 때라면 또 혼자 눈에 띈다고 불만스러워했을 텐데 이번엔 무척이나 적극적이었다.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알리사가 기특해서 나는 가볍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일단 다들 너무 겁먹은 거 같으니까 주위 좀 밝히자. 라피스, 조명 마법 같은 거 없을까?”
“범위는?”
“사람들을 진정시키려는 거니까 늪지 전체면 좋을 것 같아. 아, 그치만 은밀하게 이동한다는 계획을 망치지 않는 선에서. 너무 밝지는 않게 해 줘.”
“어차피 근방에 아무도 없어. 들킬 것도 없는데?”
“나도 알아. 하지만 여기 사람들한테 그걸 납득시킬 순 없잖아. 그리고 주의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이런 밤중에 강한 빛이 생기면 꽤 멀리까지 보일 테고. 누군가의 눈에 띌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쯧. 귀찮긴.”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것과는 달리 라피스는 순순히 마나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빛의 구.”
그의 손바닥 위에 희뿌연 빛 덩어리가 피어올랐다. 처음에는 조금 황당했다. 밝지 않게 해달라고 주문하긴 했지만 완성된 조명이 반딧불이 빛보다 작고 흐렸기 때문이다. 주변은커녕 고작 손바닥 한 면도 간신히 비추는 수준이었다.
장난하는 거냐고 한마디 해 주려는데 곧 그의 전신에서 비슷한 크기의 빛들이 두둥실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점차 그의 주위를 떠나 늪지 전체로 퍼져 나갔다. 수십, 수백 개의 흐린 빛들이 사방에 퍼져 가는 모습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시야를 뚜렷하게 확보할 만큼 밝지 않아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엔 충분했다. 먹물처럼 캄캄한 공간을 수놓기 시작한 빛 무리에 주위를 가득 채운 고통의 소리가 잠시 멈췄다. 사람들은 혼란한 상황도 잊은 채 홀린 듯이 빛의 운무를 응시했다.
“예쁘다…….”
그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처럼 알리사가 탄성을 내뱉었다. 나 역시 그 광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하늘에 있던 별무리가 그대로 쏟아져 내린 것 같았다. 정작 이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한 장본인만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됐지? 이 정도 밝기면 이 범위 밖에선 잘 안 보일 거다.”
“어, 응. 고마워. 꽤 괜찮네.”
“내가 한 건데 당연하지.”
그다운 대꾸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적응이란 게 무섭다고, 이제 저 정도 말은 딱히 잘난 척으로 느껴지지도 않으니 큰일이다.
그때 모두와 마찬가지로 넋을 잃고 있던 마커스 백작이 황급히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늪지에 빠진 이후로 창백하게 질려 있던 그의 얼굴에 작은 희망이 떠올라 있었다. 빛의 마법을 보고 나서야 우리 일행에 이능력자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 것 같았다.
“알드레프 경! 혹시 늪지를 빠져나갈 좋은 방법이 없겠소?”
작위를 받은 이후 알리사는 새로 받은 성으로 불릴 때가 곧잘 있었다. 특히 귀족 출신들은 모두 깍듯하게 그녀에게 ‘경’의 호칭을 사용했다. 그럴 때마다 알리사는 온몸이 오그라드는 듯 어색한 표정을 짓곤 했다. 이번에도 멋쩍은 얼굴을 한 알리사가 도움을 구하는 시선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녀를 대신해서 내가 입을 열었다.
“그전에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요. 늪을 이대로 건너가는 쪽이 낫나요, 다시 돌아가는 쪽이 낫나요?”
“경로를 묻는 거라면 건너는 쪽이 더 낫소. 거리상으로는 오히려 늪을 건너는 쪽이 야콘 계곡을 지나는 것보다 더 빠르오. 건널 수 있다면 말이지만.”
“그래요? 그럼 건너야겠네요.”
거리가 더 단축된다니, 함정에 빠진 것이 전화위복이 되려는 모양이다.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더니 듣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황당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