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283)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283화(283/608)
제283화
“전 당분간 이곳에 있을 겁니다. 반려를 놔두고 혼자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요. 대공에게는 개인적인 빚도 있으니, 이 전쟁을 끝내는 데 도움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태자의 뜻은 고마우나 거절하지요. 자국의 일에 외세를 끌어들일 생각은 없습니다.”
“그럼 제가 이곳에 있단 사실을 본국에 알리지도 않으시겠군요. 전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다음엔 반려를 지키기 위해 카터스의 군대를 끌고 올 테니까요. 안심했습니다.”
능청스러운 대답에 이사나는 물론 지켜보는 모두의 입이 벌어졌다. 외세를 끌어들이지 않겠다는 말을 빌미로 삼아 거꾸로 협박을 가한 셈이다. 무뚝뚝한 얼굴을 한 주제에 보기보다 꽤 영악한 구석이 있는 태자였다. 이사나는 피곤한 얼굴로 미간을 꾹꾹 문질렀다.
“내 시선이 닿는 곳에 있겠다고 약조하십시오. 이 부분을 지키지 않으면 태자가 무슨 짓을 한다 해도 이곳에 머무는 걸 허락하기 어렵습니다.”
“알겠습니다. 폐하께서 한 발 양보하셨으니 저도 그 부분은 감수하겠습니다. 이런 시기에 이방인이 제멋대로 활보하게 둘 수도 없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우리의 대화는 끝났군요. 이만 물러나도 좋습니다, 태자.”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던 시간이 끝났다. 황태자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때까지 좌불안석으로 서 있던 아셀 일행들이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 역시 천근의 짐을 덜어내는 기분으로 한시름을 내려놓았다. 결과적으로는 매우 이른 안도였다. 황태자의 말이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
막 몸을 돌리던 황태자가 뭔가 생각난 듯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폐하, 정령사셨습니까?”
* * *
한순간 가슴을 철렁하게 만든 황태자의 질문은 의외로 싱겁게 마무리됐다. 이사나의 뒤를 지키고 있던 정령사 페리스가 냉큼 나섰기 때문이었다. “그 시큐엘은 제가 부른 정령입니다.” 여유롭게 상황을 수습한 그는 이미 이런 사태를 대비해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황태자가 의구심 어린 표정을 버리지 못하자 보란 듯이 그 앞에서 시큐엘을 소환해 보이기까지 했다.
상급 정령사가 본인이 했다고 주장하는데 더 추궁할 수는 없었다. 이사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림 같은 미소만 지었을 뿐 아무런 입장도 취하지 않았다. 들켜도 상관은 없겠지만, 아직 아군에게도 밝히지 않은 진실을 굳이 이런 식으로 공개할 생각은 없었을 터였다. 결국 물러난 건 황태자 쪽이었다.
“아셀, 저 정령사에 대해서 알고 있나?”
“인상착의를 보면 황실 소속 정령사인 젤로 준남작일 겁니다. 하지만 그는 바람술사라고 들었는데, 물의 정령사였다니. 제가 잘못 알고 있었군요. 어쩌면 둘 다 익힌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럴 수도 있나?”
“자질이 있으면야 가능합니다. 정령술은 타고난 부분이 가장 크게 차지하니까요.”
자리가 파한 뒤 알현 장소를 벗어난 후에도 황태자 일행은 한동안 그 부분을 수군거렸다. 일단 반박거리를 찾지 못해 물러서긴 했는데, 완전히 수긍하진 못한 것 같았다.
“황제도 정령사일 가능성은?”
“이사나 황제가 정령술을 익혔다는 정보는 없었습니다. 심지어 상급 정령사라면 일찌감치 알려졌을 겁니다.”
“역시 그런가.”
“네. 일단 그렇게 알고 있긴 합니다만…….”
“뭔가 걸리는 점이라도?”
“……황제 주변에 묘한 기운들이 맴돌긴 했습니다. 알리사 님이나 젤로 준남작에게서도 비슷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을 보면 정령의 기운인 건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황제가 준남작과 밀착한 상태였기 때문에 단순히 준남작의 힘이 미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흠.”
대화 내용이 흥미진진해서 나도 모르게 시선이 향했다. 아셀이 느낀 묘한 기운이란 정령사의 친화력에 이끌려 모여든 자연체의 정령들이었다. 평범한 사람은 알 턱이 없고, 심지어 드래곤조차도 느끼지 못하는 부분인데 과연 영안을 가진 사람답게 알아보는 눈이 범상치 않았다. 그래도 내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는 걸 보면, 시벨리우스만큼 기척에 예민한 편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이후에도 심각하게 대화를 이어가는 일행을 잠시 응시하다 이사나를 돌아보았다.
“이래저래 신경 쓰이는 일행이야. 앞으로 귀찮아질 일이 많을 것 같은데, 옆에 두는 게 방해되진 않겠어?”
“솔직히 말하면 달갑진 않아. 하지만 저렇게 나오는데 별수 없지. 라온휘젠 황태자는 추진력이 강하다고 들었어. 강제로 돌려보냈다가 정말로 군대를 일으키면 곤란하니까.”
“정말 대책 없는 황태자네. 병력을 움직이겠다는 말을 진심으로 하다니, 너무 도가 지나쳐.”
“그만큼 절실하다는 거겠지.”
이사나는 담담한 모습이었다. 잔뜩 도발당한 뒤라서 꽤 마음이 상해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워낙 온화한 성정이라 그런가. 이런 일에도 화가 나지 않는 모양이라고, 나는 속으로 씁쓸히 생각했다. 이어지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카터스 황실에 자기 외에도 적통 황자가 두 명이나 더 있다는 걸 생각해야 할 텐데 말이야.”
“…….”
눈을 크게 뜨고 바라봤더니 이사나는 여전히 부드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황태자라고 해서 다 황제가 되는 건 아니거든.” 그러나 덧붙인 말은 이번에도 의미심장했다. 굉장히 화가 많이 났구나. 나는 조용히 그에 대해 내렸던 판단을 수정했다.
“저 사람, 내 고향에도 들렸었나 봐.”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나와 이사나의 시선이 그곳을 향했다. 알리사가 복잡한 얼굴로 황태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알리사.”
“마주쳤을 때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었어. 반려성의 전설이라는 거, 그냥 팔론이 지어낸 얘기인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 그 전설에 관심을 보인 사람은 많았지만, 그쪽에서 날 반려라고 확신한 적은 없었거든? 근데 저 사람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날 반려라고 불러.”
“…….”
“나 저 사람 따라가야 하는 거 아니지? 그래야 하는 운명인 거야?”
“아냐, 알리사. 그럴 리 없잖아.”
초조한 듯 묻는 말에 이사나가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래야 한다고 정해져 있는 건 없어. 아까도 말했지? 난 네 의사를 최우선으로 생각할 거야. 내가 살아 있는 한, 어느 누구도 네 뜻을 무시하는 일을 벌이거나 강제할 수 없어. 넌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
“하지만……나 때문에 이사나 씨가 피해를 입는 거 아냐?”
“그렇지 않아. 설령 피해를 입는다 해도, 너를 잃어서 입는 피해보다는 나아.”
웬만한 고백보다 가슴을 울리게 만드는 대답이었다. 알리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며, 두 뺨이 장미 꽃잎을 얹은 것처럼 붉어졌다. 그러나 훈훈한 분위기는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이쪽의 상황을 읽었는지 빠른 속도로 다가온 황태자가 성큼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어제 저녁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더니 시장하군요. 조식 시간이 언제인지 알려면 누구에게 물어봐야 합니까?”
자연스레 이사나 앞을 막아선 그가 알리사를 자신의 뒤쪽으로 감추는 과정이 순식간에 이뤄졌다. 춤을 추는 것처럼 우아한 동작에선 빈틈을 찾기가 힘들었다. 이사나의 미간이 약간 꿈틀거렸다.
“……미처 배려하지 못했네요. 곧 식사를 가져오게 하죠, 태자.”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마주 보며 웃는 두 사람에게서 또다시 강렬한 전기가 튀었다. 왠지 앞으로 수없이 보게 될 모습일 것 같아 벌써부터 한숨이 흘러나왔다.
* * *
전쟁 중 병사들은 주로 막사에서 머물며, 취사병이 식사 준비를 맡는다. 승전을 하더라도 그 일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휘부의 경우엔 조금 달랐다. 그들은 마을에 들리거나 성을 점령하는 경우 진영의 막사를 떠나 저택에서 머물렀다. 이때엔 먹는 음식도 그곳에서 일하는 시중인들이 따로 준비하는 편이었다. 지금도 성을 점령한 상태라 지휘부는 그 안에서 머물고 있는 중이었다. 귀빈 자격으로 합류한 황태자 일행도 마찬가지로 성에 들어와 있었다. 그래서일까. 내가 요리가 가득 실린 이동 트레이를 들고 나타나자 아셀 일행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침 식사예요. 맛있게 드세요. 혹시 부족하면 말하시고요.”
“아, 가, 감사합니다. 저어, 그런데 당신은…….”
“네? 아참, 그러고 보니 우리 제대로 인사를 못 했죠? 난 엘이라고 해요.”
“아, 네, 네에. 엘……님.”
“그냥 엘이라고 불러요. 마을에선 알리사라고 속여서 미안했어요. 대공군에게 오해를 산 김에 그냥 내버려두었는데, 설마 그 때문에 찾아오려는 사람들이 있을 줄은 몰랐거든요.”
“아, 아닙니다. 저희도 제대로 알아보지 않았으니……. 그, 그러고 보니 어제는 경황이 없어 인사도 못 드렸습니다. 태자 전하를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으음, 네, 그러니까…… 정말 감사했습니다.”
횡설수설 감사 인사를 전하는 아셀은 민망할 정도로 긴장한 모습이었다. 상당히 쾌활해 보였던 세리엄이란 남자도 입을 조개처럼 꾹 다문 채 연신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머지 두 명은 나와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그들 모두 하고 싶은 말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게 뭔지는 너무나도 뻔해서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 이쯤에서 대화를 마무리하고 돌아설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냥 그들을 빤히 지켜보았다. 저들이 어떻게 나올지 반응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저기…….”
“네, 말하세요.”
“그, 당신은……황제 폐하의 가신으로 보이시는데…… 이런 일을 직접 하십니까?”
끝내 아셀은 용기를 내지 못하고 다른 쪽으로 말을 돌렸다. 질문하면서도 탄식하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웃음이 나왔다. 태도가 몹시 신중한 걸 보니 쉽게 민폐를 끼칠 자들은 아닌 것 같다. 그들을 대하는 시각이 한결 너그러워졌다.
“가신이라기보다는 동료인데. 뭐, 그냥 대충 비슷하다고 하죠. 그런데 이런 일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음식을 가져다주는 것 말입니다. 이런 일을 하는 시중인들이 따로 있을 텐데요…….”
“아아, 이 시간엔 내가 가장 한가하거든요.”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병사들이 하루 중 가장 손꼽아 기다린다는 식사 시간은 내게는 가장 난처해지는 시간이었다. 딱히 사람들과 어울려서 밥을 먹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멀뚱히 서 있자니 이상하게 여길게 뻔했다. 은근슬쩍 자리를 비우는 것도 한두 번이지, 매번 멀리 떠나 있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이 시간엔 일부러 적극적으로 쏘다니며 이것저것 일을 돕는 편이었다. 주방을 기웃거리거나 배식을 돕다 보면 어느 틈에 나도 사람들 사이에 섞여 식사를 한 것처럼 인식됐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건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어, 그런데 황제 폐하는 함께 식사하시지 않으십니까?”
“아, 이사나……폐하는 진영으로 내려갔어요. 거기서 병사들이랑 같이 식사할 거예요.”
이미 이곳 안에서는 일상이 됐지만 아무리 그래도 타국 사람들 앞에서 황제의 이름을 그냥 부를 순 없어서 나는 급히 호칭을 바꿨다. 다행히 전달한 내용 자체에 신경이 쏠린 탓인지 아셀 일행은 호칭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들은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황제 폐하께서 병사들과 같이 밖에서 식사하신단 말이십니까? 황제께서 드시기엔 거친 음식일 텐데…….”
“폐하는 음식 잘 안 가리거든요. 가린다 해도, 병사들이 먹는 음식을 거칠다는 이유로 안 먹을 성격도 아니고요.”
“……그렇군요.”
“유감이지만 황태자 전하한테는 같이 식사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전해주세요.”
“으음,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후 아셀이 조심스럽게 트레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는 바로 들어가지 않고 머뭇거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저어…….”
“더 할 말 있으세요?”
“당신은 대체……으음, 아닙니다. 혹시 알현 시간에 함께 뵀던 붉은 머리카락의 남성분 말입니다. 그분이 어제 마을에서 뵈었던 분과 같은 분입니까?”
“어제요? 아, 시벨리우스 말인가요? 에이, 아니에요. 둘이 전혀 다르게 생겼는데 왜 그런 오해를?”
“아, 아니었군요. 후드를 쓰고 계셔서 그분 얼굴을 보지 못했거든요.”
“아참, 그랬었죠.”
“엘!”
양반은 못 되는지 때마침 나를 부르는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돌아보았더니 시벨리우스가 크게 손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 저기에 오네요, 시벨리우스.” 웃으며 알려줬더니 아셀 일행이 나란히 시선을 보냈다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에, 엘프?”
“게다가 저 피부색은…….”
그들의 경악한 시선이 시벨리우스의 새하얀 은발과 푸르스름한 피부, 인간의 것과는 형태가 확연히 다른 귀를 훑었다. 그가 유니콘이라는 주장을 믿지는 않았지만, 인간이 아닐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다들 당황한 표정이었으나 그중에서도 아셀의 표정이 가장 복잡했다.
한달음에 가까워진 시벨리우스도 분명 그 반응을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얼굴이었다. 마치 그 자리에 아무도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아셀 일행 쪽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본래 낯을 잘 가리는 성격이긴 해도 지금은 의식적으로 더 무시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엘, 여기 있었구나. 이것 좀 먹어봐.”
“응? 뭘 먹어?”
다짜고짜 불쑥 내미는 걸 얼결에 받아들었더니 꽤 큰 유리컵이었다. 그 안에는 찰랑거리는 액체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주스?”
“내가 개발한 자신작이지. 한번 마셔 봐. 마음에 들 거야.”
“설마 나 주려고 일부러 만든 거야?”
“당연하지.”
매번 식사 때마다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나를 보고 도전 의식이 생겼는지, 시벨리우스는 요즘 한창 요리 연구에 몰두해 있던 상태였다. 하지 말라고 말렸는데도 기어코 완성품을 가져와 안기다니. 그 집념만큼은 박수를 보내주고 싶었다.
“나 참, 굳이 그럴 필요 없다니까. 어차피 소용도 없을 텐데.”
“그런 말 하지 마. 나는 이 음료에 사활을 걸었어.”
“뭘 이런 쓸데없는 일에 사활까지……음?”
별 생각 없이 마셔보는데 생각보다 꽤 괜찮았다. 머금은 순간 입 안 가득 달콤한 감각이 가득 채워지는 것 같았다. 맛을 머리로 분석해서 인식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달콤하다’고 느껴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실제로 혀에 닿는 감각은 아무 맛도 없는 게, 그냥 물에 더 가까웠다. 놀라서 눈을 크게 떴더니 시벨리우스가 한껏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괜찮지?”
“뭘 어떻게 한 거야?”
“물은 먹어도 부담스럽지 않잖아? 그래서 후각을 활용하는 방식을 도입해 봤어. 바닐라와 초콜릿 향을 내는 향신료를 만들어 봤지. 이른바 냄새로 먹는 ‘맛’이랄까?”
그러고 보니 후각을 자극하면 진짜로 맛을 느끼는 듯한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들었던 것 같다. 아크아돈, 특히 그중에서도 스왈트 제국은 향신료가 크게 발달한 편이 아니라서 향기를 강조한 조리법이 드물었다. 시벨리우스가 매우 획기적인 개발을 한 셈이었다.
“굉장하다, 시벨. 이거 다른 맛도 있어?”
“마음에 들었어? 다행이다. 이제부터 다른 맛도 하나씩 개발해볼 생각이야.”
본질은 물인데 맛이 느껴지는 효과를 낼 수 있다니. 내 체질에 이보다 적합한 ‘음식’은 없을 거라 단언해도 좋았다. 기쁨을 넘어 감동적이었다. 너무 들뜬 나머지 주위에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잠시 잊을 정도였다. 한참 시시덕거리며 잡담을 나누고 있는데 우리 앞에 긴 그림자가 늘어졌다. 고개를 들었더니 아셀이 딱딱한 얼굴로 서 있었다. 다른 일행들은 태자에게 갔는지 어느새 사라진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