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285)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285화(285/608)
제285화
“덜 귀찮아졌다고?”
“네. 술이 들어가면 잘 보이지 않게 돼서요.”
“그건, 오히려 귀찮아지는 쪽 아닌가?”
“전 그 편이 더 좋더군요.”
묘하게 가라앉은 그의 분위기를 읽었는지 기사들은 더 이상 질문을 잇지 않았다. 그 뒤로는 다시 일상적인 얘기로 돌아갔다. 나는 떠들고 있는 그들을 잠시간 바라보다가 옆에 있는 시벨리우스를 돌아보았다.
“술 마시면 영안이 가려져?”
“……어차피 일시적 현상이야. 유니콘이야 술에 취하지 않으니 상관없지만, 인간의 몸으로 그런 방법을 쓰는 건 자살 행위지. 용케도 멀쩡하게 컸군.”
바로 대답이 이어지는 걸 보면 그도 아셀이 한 말을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면서도 아셀 쪽은 고집스럽게 돌아보지 않으려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형님이 정말 싫었어.」
시린 바람처럼 차가웠던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낯설게만 느껴졌던 굳은 표정도. 내게 한창 쌀쌀맞게 굴었을 때도 그런 식으로 어두웠던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처음으로 시벨리우스의 진짜 얼굴을 본 것 같았다.
신경 쓰고 있던 건 제왕의 별이었는데. 정작 그 일행 쪽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과거가 얽혀들다니. 이래서 앞날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고 하나 보다. 어떤 식으로 파고 들어가야 할지, 내가 건드려도 되는 일인지조차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말을 거는 것도 조심스럽기만 해서 마냥 속으로 삼켜야 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길고도 깊은 한숨을 내쉬는 것뿐이었다.
* * *
한동안 맑았던 날씨가 급격히 나빠지면서 심한 설한풍이 예고됐다. 겨울이 시작된 이래 가장 큰 규모의 폭풍이 될 예정이었다. 온도가 더 떨어진 상태이기도 했기 때문에 부대는 무리하지 않고 당분간 정비 시간을 갖기로 했다. 눈 때문에 대기하는 일은 잦은 편이었지만, 이번엔 꽤 긴 시간이 될 것 같았다.
주둔지로 정한 곳은 근방에 있던 ‘스텔스’라는 영지로, 영주인 바논 백작은 중앙 정계에서 활동하지 않고 조용히 지내는 귀족이었다. 그는 황제군이 머물고 싶다는 뜻을 전하자 가솔들을 이끌고 직접 목전까지 마중 나왔다.
“황제 폐하와 여신의 딸을 모시게 되다니, 다시없을 가문의 영광입니다.”
“반갑습니다, 백작. 잠시 신세 좀 지겠습니다.”
“신세라니, 그런 말씀 거두어 주십시오. 지내시는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올해 40대에 접어들었다는 바논 백작은 단정하고 점잖은 인상이었다. 옷차림도 과하지 않게 고급스러워 기품이 있었고, 말투나 표정에서도 진중함이 묻어났다. 함께한 가솔들 또한 그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이쪽은 제 아내와 여식들입니다.”
백작이 자신의 옆에 서 있던 여인들을 소개했다. 선량하고 다정한 분위기를 지닌 부인과 그녀를 닮은 세 명의 소녀들이었다. 장녀는 이사나 또래인 것 같았고, 자매들끼리는 각자 서너 살 터울로 보였다. 그녀들 모두 금갈색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약간 도톰한 입술 형태며, 얼굴에 주근깨가 있는 것까지도 동일했다. 매우 닮은 여성들이 연령별로 나란히 서 있으니 마치 한 사람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는 기분마저 들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부인이 먼저 무릎을 굽히자 소녀들도 한껏 긴장한 얼굴로 치맛단을 들어올렸다. 몸짓은 우아했지만 눈으로는 다들 이사나를 훔쳐보기에 바빴다. 눈앞에서 황제를 보는 게 흔한 기회는 아닐 테니 호기심이 생길 만도 했다. 이사나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백작 부인의 아름다운 미소를 보니 벌써 제국에 봄이 찾아온 것 같습니다. 딸들도 부인을 닮아 모두 아름답군요.”
“화, 황공합니다.”
의례적인 인사라도 칭찬의 말은 듣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법이다. 그것이 황제의 말이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다. 흐뭇하게 웃는 부인 뒤에서 소녀들 또한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그녀들이 이사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선망이 담기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 내 옆에선 암울한 공기가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알리사의 눈동자가 불이 튀는 것처럼 번뜩거리고 있었다. 그 시선은 세 자매 중에서도 장녀를 향할 때 특히 더 날카로워졌다.
“황제 폐하는 어느 여인에게나 공평하게 친절한 분이신 것 같군. 나라면 아름답다는 칭찬은 내 여인에게만 할 텐데.”
옆에 있던 라온휘젠 황태자가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귀신같은 틈새 공략이었다. 제법 효과가 있었는지 알리사의 눈빛이 더 흉흉해졌다. 다른 의미에서도 힘든 겨울이 되겠구나.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몇 차례 인사가 더 이어진 다음에야 부대는 본격적으로 영지 안으로 이동했다. 성문을 지나 긴 다리를 건너자 아기자기한 건물의 모습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크지는 않아도 제법 잘 정비된 마을이었다. 바논 백작은 관청 건물을 통째로 황제군에게 내주었다. 그러고도 부족한 숙소는 근방 공터에 막사를 짓는 걸로 해결했다. 이사나는 처음엔 병사들과 같은 숙소를 쓰려 했지만, 한사코 권유하는 백작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의 자택에서 머물기로 했다. 알리사와 황태자에게도 같은 층의 방이 배정됐다. 물론 호위들도 마찬가지였다.
“알드레프 경의 호위 분들은 이 방을 쓰시면 됩니다.”
내 일행은 알리사의 바로 옆방을 쓰게 됐다. 집사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들어서자 잘 정돈된 공간이 들어왔다. 백작의 저택이라 그런지 손님방치고는 제법 괜찮은 편이었다. 시벨리우스가 만들어주는 텐트에는 현저히 못 미쳤지만. 온종일 방 안에만 있을 것도 아닌데 굳이 아쉬워할 건 아니었다. 단지 그것과는 별개로 숙소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불편한 곳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친절한 집사의 말에 나는 주위를 둘러보던 것을 잠시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저기, 실례되는 질문이긴 한데요. 혹시 이 저택이 지어지기 전에 이곳에 뭐가 있었는지 아세요?”
“저택이 지어지기 전 말입니까? 그냥 숲이었습니다만.”
“숲? 확실해요?”
“예, 작은 정원수를 키우는 숲이었습니다. 초대 가주님이 투자하시던 사업 중 하나였지요. 후에 3대 가주님이 투자 방향을 바꾸시면서 그 숲을 밀고 지금의 저택을 지으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터의 문제는 아닌가? 그게 오히려 더 싫은데.”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상한 걸 물어서 죄송해요. 신경 쓰지 마세요.”
웃으며 고개를 젓자 집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물러났다. 나는 다시금 주위를 둘러보았다. 객관적으로는 참 아름다운 저택이었다. 실내는 어디를 가도 단정했고, 화사한 분위기로 꾸며져 있었다. 저택 앞쪽에는 넓은 정원이, 뒤편에는 우아하게 장식된 분수가 자리 잡고 있어 어느 쪽에 눈을 둬도 즐거워지는 구조였다. 사람들은 모두 친절했으며 활기가 흘러넘쳤다. 누구라도 쉽게 매력을 느낄 만한 곳이라고 생각하기에 충분한 환경이었다. ―내가 정령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남들보다 보는 것이 더 많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왜 그런 표정이야?”
겉옷을 벗고 있던 라피스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내 표정이 묘하긴 했던 모양이다.
“그냥. 조금 거슬려서.”
“뭐가 거슬리는데?”
“여기 좀 지저분하지 않아?”
“지저분하다고?”
라피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어디를 봐도 깨끗하게 정돈된 곳을 보면서 지저분하다고 하니 그럴 만도 했다. 시벨리우스는 대강 짐작했는지 담담한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나는 다시금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봐도 처음 내렸던 판단이 달라지진 않았다.
문득 창문 밖을 내려다 봤더니 누군가 정문에서 나와 정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를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화려하게 구불거리는 짧은 갈색 머리는 아셀뿐이었다. 그는 체하기라도 했는지 연신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그가 들고 나온 술로 입 안을 여러 번 헹궈내는 모습을, 나는 한동안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무래도 꽤 구린 곳에 온 것 같아.”
* * *
잔류사념이라는 게 있다. 사람이 한(恨) 많은 죽음을 맞이하면 관련 장소에 사념이 새겨지는 현상이다. 영의 세계는 생각보다 심오해서, 죽은 후에도 완전히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혼은 인도자에게 수거되어 명계로 떠나더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품은 한이나 원념은 찌꺼기로 남아 여전히 그 장소에 머물렀다. 내버려두면 점차 흐려져 결국엔 사라지지만, 원인이 해결되지 않는 경우 꽤 오랫동안 잔류하는 편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런 게 보여도 딱히 신경 쓴 적은 없었다. 솔직히 역사가 오래된 건물엔 한두 번쯤 흉흉한 사건들이 있었기 마련이라, 사념이 하나도 없는 곳을 찾는 게 오히려 더 어려웠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보이지도 않는 거라서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적당한 선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사념이라고 해 봤자 보통은 먼지가 굴러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거나, 조금 심하면 지저분한 얼룩이 묻어 있는 듯한 형태에 불과했다. 그러나 바논 백작의 저택에 남아 있는 흔적은 그런 일반적인 수위를 훨씬 넘어섰다. 이 건물엔 가는 곳마다 물풍선이 터진 것처럼 짙은 액체가 퍼져 있었다. 심지어 색깔마저 검붉은 색이라 사방에서 핏물이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심한 형태의 잔류사념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 이런 흔적이 생기려면 적어도 저택의 터에 문제가 있어야 했다. 대량 학살이 은폐된 장소라든가, 한때 처형장이었다든가. 하지만 그저 정원수를 키우는 숲이었다고 하니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듯했다. 결국 저택 안에서 누군가가 살해당했다는 소리였다. 그것도 상당히 처참하게.
“이건 거의 저주받은 수준인데? 자다가 가위 눌리는 사람이 많겠는걸.”
너무 끔찍한 흔적이라 저택 안을 돌아보는 내내 가슴이 몇 번씩 내려앉았다. 이 정도로 강한 사념은 대체로 육의 세계까지 영향을 미친다. 예민하거나 심약한 사람은 사념에 사로잡혀 환각을 볼 수도 있었다. 가끔 장난이 지나친 신들은(주로 하급신들이지만) 이런 사념에 형태를 입혀 인간들에게 피해를 주기도 한다. 귀신이나 요괴라고 알려지는 것들이 보통 이런 경우였다. 나나 정령들한테는 전혀 해가 되지 않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질리는 기분이라 찝찝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구겨진 얼굴을 피지 못하는 내 옆에서 라피스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난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그야 이건 영혼이 남긴 찌꺼기 같은 거니까. 영안도 아닌데 너한테 보일 리가 없지.”
“흠, 그럼 저쪽의 퍼런 엘프에겐 보인단 말이네?”
“아마도?”
시벨리우스의 대답은 따로 들어볼 필요가 없었다. 그 역시 나만큼이나 거북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계의 영역을 본다고 하더니. 정령은 떠도는 기운만 얼핏 느끼던 것에 비해, 이쪽은 확실히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라피스의 얼굴이 와락 찌푸려졌다.
“왠지 기분 나빠졌어.”
“나참, 이런 쓸데없는 걸로 경쟁하지 마. 안 보는 게 더 나은 거니까. 아무튼 이런 곳에서 한동안 묵어야 하다니, 우리도 참 운이 없네. 이따 우리 쪽 사람들이 쓰는 방이나 대충 정화해 둬야겠다.”
“왜 대충이야? 너라면 아예 제거할 수도 있지 않아?”
“응, 그렇긴 해.”
“근데 웬일로?”
비꼬듯이 건네는 말의 의미는 뻔했다. 웬일로 네가 오지랖을 부리지 않고 그냥 넘어가냐는 거다. 거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았기에 나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잔류사념은 억울하게 죽은 피해자가 남기는 거야. 일종의 다잉 메시지라고. 이렇게 처참한 흔적을 남긴 걸 보면 상당히 잔인하게 살해당했을 거야. 심지어 매우 선명한 상태로 남아 있어. 그건 곧 이 사건이 아무도 모르게 은폐되었거나, 최근에 일어났다는 뜻이지. 어쩌면 두 가지 다 해당할지도 몰라. 이곳 사람들의 안색이 멀쩡한 걸 보면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일이라는 건 확실해. 아직 아무도 사념에 영향을 받지 않은 거야. 그러니 지금 치워버리는 건 너무 이르지. 사건이 은폐되어 있다면 이대로 끝나는 게 가엾잖아?””
“뭐야, 오지랖이 죽은 사람 쪽에 있었던 거였군.”
“정의를 지키려는 것뿐이거든? 아무튼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모르니까 그냥 내버려둘 거야. 유령의 집이라고 소문날 때쯤 되면 사건도 더욱 명확해지겠지. 범인이 죗값을 치르지 않으면 사념이 날뛰는 방향이 더 악랄해지거든. 그럼 결국 어떤 식으로든 드러나지 않겠어?”
“뭐, 마음대로 해. 어차피 나한텐 보이지도 않는 거. 내버려두든지 말든지.”
“그렇게 성의 없이 대답할 게 아냐. 이거 꽤 심각한 일이라고.”
“흥. 보이지도 않는데 얼마나 심각한지 알게 뭐야.”
“자꾸 삐딱하게 굴래?”
눈을 흘겼더니 라피스는 콧방귀만 뀌었다. 혼자만 잔류사념을 보지 못하는 게 어지간히도 분한 모양이다. 그가 아무리 마법에 능통해도 이건 어쩔 수 없는 영역이긴 했다.
“야, 퍼런 엘프. 날 위해 희생해라. 네 눈 내놔.”
화풀이는 엉뚱하게도 시벨리우스를 향해 이어졌다. 가만히 있다가 느닷없는 시비를 받은 시벨리우스는 기함하다 못해 기침을 토했다.
“쿨럭, 쿨럭! 이 미친놈이! 독약이라도 삼켰어?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너한테 태어난 의미를 부여해 주는 거잖아. 네 눈도 너한테 붙어 있는 것보단 나한테 와서 쓰임을 받는 걸 더 기뻐할 거다.”
“죽고 싶다는 말을 아주 낭랑하게 돌려 말하는 재주가 있네. 가져갈 수 있으면 어디 가져가 보시지?”
“그런 말 해도 되겠어? 후회할 텐데?”
“내가 왜 후회를 해? 나자빠지는 꼴을 보면 속이 다 시원할 것 같은데.”
“하, 나자빠져? 지금 누구한테 하는 말이냐?”
“너.”
“너겠지.”
“아니, 너야.”
“너거든?”
다 큰 성인 남자들 사이에서 유치한 말싸움이 오가기 시작했다. 한동안 잠자코 듣고 있다가 나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두지 않으면 둘 다 좋은 꼴 못 볼 줄 알아.”
“…….”
“…….”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경고를 무시하는 어리석은 짓은 벌이지 않았다. 그들로서도 실내에서 물벼락을 맞는 경험은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잔소리를 할까 하다가 그것마저 귀찮아져서 그만뒀다. 그러고 나니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 있었다.
“근데 라피스, 너 귀한 보석 같은 거 많이 갖고 있지 않아? 그중에 유니콘의 눈은 없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