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29)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29화(29/608)
제29화
“지금은 죽었지만, 한때 미네르바가 인간과 계약을 한 적이 있어. 젊고 능력 있는 청년으로 가난했지만 무척 성실하고 열정을 지닌 인간이었지. 그의 순수한 모습에 반한 미네르바는 계약의 조건으로 자신과 평생 함께해 달라고 말했어.”
“미네르바가 말이야?”
“응, 처음엔 괜찮았어. 하지만 그들의 행복한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지. 그 인간 남자는 날이 갈수록 점점 탐욕스러워졌거든.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에야 미네르바처럼 아름다운 정령이 자신에게 손을 내민 걸 마냥 기쁘게만 생각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현실과 이상이 다르다는 걸 자각하게 된 거야. 정령인 미네르바와는 결혼도, 아이도 낳을 수 없었으니까.”
본격적인 문제는 그로부터 몇 년 후에 벌어졌다. 한 백작가의 소녀가 그에게 반해 열렬히 구애하기 시작한 것이다. 남자는 처음엔 외면했지만 소녀의 아름다움과 그녀의 집안이 가진 재력, 무엇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소녀의 가련한 모습에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심정적으로 완전히 넘어간 후에도 그는 미네르바에게 솔직히 말하지 않았다. 마음이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면 미네르바는 그를 놓아주고 사라질 테니까.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정령왕의 계약자로서 그가 쌓아 왔던 공적 또한 함께 무너질 터였다. 그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 그래서?”
“그래서…… 그는 열심히 거짓말을 했지. 소녀가 자신을 일방적으로 귀찮게 하고 있다. 자신은 다른 여인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다. 오직 미네르바뿐이다. 우습지? 하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는 미네르바는 당연히 그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하고 그의 말을 신뢰했어. 내가 몇 번이나 경고를 했지만 믿지 않았을 정도로.”
그리고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한계에 이르렀을 때, 마침내 비극이 벌어졌다. 자신의 거짓말을 이기지 못한 남자가 미네르바에게 그 소녀의 청부 살인을 부탁한 것이다.
그런 잔혹한 일을 미네르바가 실행할 리가 없다는 안이한 판단과 더불어, 그렇게까지 말함으로써 자신이 소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역으로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혹은 소녀의 처지를 가엾게 여긴 미네르바가 스스로 물러나길 바랐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의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미네르바가 그와 계약한 정령이라는 사실 말이다. 대부분의 정령은 계약자의 의지를 거스르지 않으며, 그가 하는 말을 그 어떤 경우보다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이지를 가진 정령왕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하물며 사랑하는 사람의 부탁이 아닌가.
결국 미네르바는 계약자이자 자신의 연인인 그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소녀를 살해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소녀의 주검을 남자에게 직접 가져가기까지 했다.
“그럼 그 남자는…….”
“물론 큰 충격을 받았지. 차디찬 주검이 된 소녀 앞에서 그 남자는 미네르바를 향해 온갖 저주를 다 퍼부었어. 모든 것이 자신의 말에서 비롯되었으면서도. 그 사실조차 끝까지 인정하지 않던 비겁한 놈이었지. 그리고 그 이후로 바람의 정령왕은 세상 사람들에게 잔학무도하고 냉정한 존재라고 알려지기 시작했어.”
“……그런 녀석을 그냥 놔뒀어?”
듣는 내가 이렇게 화가 날 정돈데 당사자인 미네르바의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굳어진 얼굴로 묻자 트로웰은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물론 계약이 파기됐지. 녀석은 한순간에 가장 강력한 무기를 잃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명예까지 잃은 거야. 죽을 때까지 폐인이 되어 미친 듯이 거리를 돌아다녔어. 그리고 비가 내리는 날 지저분하고 어두운 골목에서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비참한 죽음을 맞았지.”
놈의 마지막을 지켜본 것이 나야.
그렇게 말하며 서늘하게 웃는 그의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차디찬 한기를 뿜었다. 하지만 내가 긴장하자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긋 웃더니 평소 때의 다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아무튼 그렇다는 거야. 미안, 재밌는 이야기를 해 준다고 해 놓고 오히려 지루한 화제를 꺼낸 것 같네.”
“아, 아니야. 미네르바에게 그런 일이 있었구나. 몰랐어. 어쩐지 조금 슬퍼 보인다고 생각했었는데…….”
“미네르바가 슬퍼 보여?”
“응, 눈빛이라든지 분위기가…… 으음, 미안. 이건 너무 실례되는 생각이겠지.”
“아냐, 엘. 실은 나도 조금은 동감하거든.”
씩 웃은 트로웰은 내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다음, 항아리를 이고 한창 무르익은 술자리로 걸어갔다. 그 뒷모습이 어째선지 유독 쓸쓸해 보였다.
나는 잠시간 머뭇거리다가 이내 그를 따라 자리에 합류했다. 그러자 이프리트가 곧장 핀잔부터 건넸다.
“잔 하나 가지러 가는데 뭐 이리 오래 걸리니?”
“하하, 어쩌다 보니. 저어, 근데 엘뤼엔이 여기까진 웬일이야? 일 많이 바쁘지 않아?”
나는 조심스럽게 엘뤼엔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는 술잔을 입에 가져가며 대꾸했다.
“네가 내 쪽으로 올 방법이 없으니 할 수 없지. 모처럼 부자지간이 되었는데 교류가 전혀 없다면 그것도 우스운 것 아닌가?”
“어? 난 괜찮은데…….”
“넌 괜찮아도 난 괜찮지 않다. 이래 봬도 무책임한 아버지가 될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사실은 진작 오려고 했지만, 네가 요즘 바쁜 것 같아서 일부러 한가해질 때를 기다린 거다만?”
“…….”
우와, 솔직히 말해서 조금 감동했다. 자신이 바쁜 것도 개의치 않고 날 만나러 와 주는 아버지라니. 바로 얼마 전까지 그를 다시 만나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던 점도 있었기에 더 신기한 기분이었다.
“그보다 아까 그 엘이라는 호칭은 뭐지?”
“응? 아, 그건 트로웰이 지어 준 거야. 내 애칭이라고 해야 하나.”
“애칭? 흠, 그것도 나쁘진 않군.”
당장에 유치하다고 면박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는 마음에 들었다는 듯이 수긍했다. 겸연쩍게 웃는 나를 향해 엘뤼엔은 가벼운 미소를 보내며 물었다.
“아크아돈의 정비는 이제 다 끝났다고 하던데, 사실이냐?”
“으응, 맞아.”
“그렇군. 그동안 고생 많았다.”
“아, 아니. 내가 뭘…….”
으레 예의적으로 건넬 수 있는 말인데도 왠지 그에게서 들으니 칭찬을 받는 느낌이었다. 엘뤼엔은 쑥스러워하는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앞으론 종종 찾아오마. 부자의 정을 돈독히 하기에 상당히 좋은 시간이 될 것 같군.”
그러나 그 대답에 앞서 대답을 한 건 이프리트였다. 두 눈 가득 초롱초롱 빛을 밝힌 그가 덥석 엘뤼엔에게 얼굴을 들이민 것이다.
“엘뤼엔! 나랑은?”
“뭐가 말이지?”
“돈독한 시간 말이야. 나하고도 돈독한 시간 가져 줘!”
“난 엘퀴네스…… 아니, 이제 엘이라고 했지. 엘 말고 더 아들을 들일 생각이 없는데.”
“아니, 그거 말고! 딸이면 딸이지, 내가 어째서 아들…… 에에잇, 이게 아니잖아! 난 미래의 엘뤼엔 신부 후보란 말이야!”
그러자 묵묵히 듣고 있던 엘뤼엔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누구 마음대로 신부 후보냐.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은 꼬마 주제에 간도 크구나.”
“그, 그래도 나중에 여신이 되면!”
“그건 그때 가서 말하라고 했을 텐데.”
“치이, 치사해.”
툴툴거리던 이프리트는 이윽고 눈에 불을 켠 채 나를 노려보았다. 그리곤 다른 사람에겐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은근히 쏘아붙였다.
“너어, 아들이랍시고 엘뤼엔을 혼자 독점하기만 해 봐. 절대 용서 안 할 테니까, 알았어?”
“아하하…….”
친아버지도 아닌 양부에, 계모도 아닌 계모 ‘후보’의 협박이라…….
도대체 어쩌려고 내 인생은 이렇게 자꾸 꼬이는 걸까? 처음으로 짙은 의문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 * *
처음 찾아온 날 이후로 엘뤼엔은 거의 매일같이 정령계를 방문했다. 오가는 횟수가 늘어나면서부터 머무는 시간은 점차 짧아졌지만, 그의 말처럼 정이 쌓이는 것인지 나는 빠르게 그와의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정령왕들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마냥 어려워하는 느낌뿐이더니 최근엔 정령왕들 쪽에서 먼저 엘뤼엔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들의 평가에 의하면 그는 엘퀴네스 시절보다 성격이 많이 온화해진 편이라고 했다. 이전엔 가벼운 농담에도 정색할 뿐만 아니라 필요 이상으로 가차 없이 보복을 가해 말을 붙이는 것조차 힘들었다는 것이다.
“헤에, 지금보다 더 나빴다고?”
“지금은 많이 좋아진 거라니까? 요즘은 귀찮으면 그냥 무시하는 편이잖아. 그땐 그런 것도 없었어. 꼭 상대방에게 항복 선언을 받아낼 때까지 괴롭혔거든. 온몸에 가시가 잔뜩 돋친 느낌이었달까. 전대의 이프리트가 있을 땐 그래서 하루하루가 전쟁터 같았어.”
“전대의 이프리트?”
“응, 그는 참견하길 좋아하는 성격이었거든. 그래서 곧잘 엘뤼엔의 화를 샀지.”
그때를 회상하듯 잠시 그리운 표정을 짓던 트로웰은 곧 무언가를 상기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 참, 엘. 난 당분간 아크아돈에서 지내게 될 것 같아.”
“응? 인간들 세상에서? 왜?”
“몇 년 전부터 이어 오던 유희가 있는데 이제 이곳의 일도 대부분 안정됐으니 슬슬 본격적으로 지내볼까 해. 주기적으로 들르긴 하겠지만 지금처럼 자주 오진 못할 것 같아. 혹시 내게 연락할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놈’을 통해 전달해 줘.”
“알았어. 근데 유희라면 그거지? 인간 세상의 존재와 계약을 해서 그곳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거.”
“응, 맞아.”
“헤에, 좋겠다. 난 언제쯤 유희를 나가 볼 수 있을까?”
그러자 웃고 있던 트로웰의 얼굴이 얼핏 굳는 것이 보였다. 그는 조금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엘, 너도 유희를 하고 싶다고?”
“응, 물론! 굉장히 재밌을 것 같거든. 그러고 보니 소환은 보통 언제쯤 돼? 나도 얼른 인간 세상에 정식으로 나가 보고 싶은데.”
여행을 다닌다 해도 사람들이 날 알아보지 못하고, 그들과 교류하지 못한다면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누군가와 계약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무척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한껏 기대에 부푼 나를 향해 트로웰이 건넨 건 사과의 말이었다.
“미안, 엘. 아마…… 당분간 유희는 힘들 거야.”
“에? 왜? 누군가 날 소환하면 되는 거 아니야?”
“음, 뭐라고 해야 할까. 정령왕은 소환되는 사례가 정말 드물거든.”
“헉……?”
이어지는 트로웰의 설명에 나는 크게 당황했다. 일반 정령들과는 달리 정령왕의 소환은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많은 양의 마나와 자연 친화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도 자체도 드물뿐더러, 성공하는 경우도 대개 백 년에서 천 년에 한 번꼴에 해당할 만큼 상당히 희박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나를 더 경악하게 한 사실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에, 엘퀴네스를 소환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고?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응, 우리 4대 정령 중에선 물의 정령의 기운이 가장 거친 편이거든. 그래선지 그것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인간이 극히 드문 편이지. 그 때문에 물의 정령사는 상당히 희소한 존재기도 하고.”
“헉, 말도 안 돼……. 그럼 이제껏 엘퀴네스들은 한 명도 유희를 경험해 본 적이 없다는 거야?”
“아니, 아니, 그렇진 않아. 그러니까 일단 지금까지 내가 말한 건 전부 인간들의 경우거든. 다른 종족들은…… 예를 들면 드래곤 같은 종족은 무리 없이 정령왕을 소환할 수 있어. 엘퀴네스라도 마찬가지지. 그래서 지금까지 엘퀴네스들은 드래곤들과 계약을 해서 유희를 즐기는 편이었어. 사실 우리에겐 오히려 그편이 더 낫기도 해. 드래곤은 소유하고 있는 마나가 풍부한 데다 우리의 힘을 의지하는 일도 없어서 편리한 점이 상당히 많거든.”
“헤에, 그렇구나. 어? 그럼 나도 드래곤이랑 계약하면 되는 거 아니야?”
“후우, 바로 그게 힘들다는 거야.”
나는 재차 한숨을 내쉬는 트로웰을 의아하게 바라봤다. 그게 힘들다니. 혹시 드래곤들이 물의 정령왕과는 계약하지 않기로 담합이라도 한 걸까?
“으음, 비슷할지도.”
“헉! 정말 그렇다고? 내가 어수룩해서 싫대?”
“아니, 그건 아니야. 드래곤들은 네가 인간으로 태어났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걸.”
“그런데 어째서……?”
“엘, 물의 속성을 지닌 드래곤이 어떤 일족인지 알지?”
“으응, 알아. 블루 드래곤이랑 화이트 드래곤이잖아?”
트로웰의 질문에 나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수집해 온 정보에 의하면 이곳에 사는 드래곤은 전부 일곱 가지로 종류가 구분된다. 레드, 블루, 그린, 화이트, 실버, 블랙, 골드 일족이 바로 그들을 구분해서 부르는 호칭이었다.
드래곤은 일족마다 고유의 속성을 지니는데, 그 속성이 바로 자연의 4대 속성과 직결된다. 이를테면 레드 드래곤은 불의 속성을, 블루와 화이트 드래곤은 물의 속성을, 실버와 그린 드래곤은 바람을, 그리고 블랙과 골드 드래곤은 땅의 속성을 지니는 것이다.
“그럼 그 드래곤 중에서 어느 일족이 가장 강한지도 알고 있어?”
“음, 레드 일족……이었던가?”
“맞아, 레드 일족이야.”
트로웰은 장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령과는 달리 드래곤은 일족마다 힘의 차이가 크게 벌어지는 종족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포악하고 강한 힘을 지닌 일족이 바로 레드 드래곤으로, 일족들 사이에서 가장 두려움을 사는 대상이라고 들었다.
“문제는 그 레드 드래곤 중에서 한 녀석이…… 드래곤들과 물의 정령왕의 계약을 방해하고 있다는 거야.”
“……왜?”
“그 녀석이 전대의 엘퀴네스. 그러니까 지금의 엘뤼엔한테 홀딱 반했거든.”
“…….”
그,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린데?
황망함에 눈을 깜빡거리자 트로웰은 조금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뺨을 긁었다.
“음, 그러니까 이걸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 지금으로부터 약 삼천 년 전, 레드 드래곤의 일족에서 ‘라피스라즐리’라는 녀석이 태어났어.”
“……라피스라즐리?”
“응, 특이한 이름이지? 드래곤은 성룡이 되는 천 세까지는 아직 어린 드래곤이란 의미로 ‘헤츨링’이라 불리면서 일족의 보호 아래 머물러. 어른들로부터 일족의 일과 살아가는 지혜를 익히는 시기지. 정령들과 계약하는 것도 대부분 이때쯤이야. 솔직히 성룡이 되면 정령들의 도움이 거의 필요 없거든.”
본래 보통의 헤츨링이 소환할 수 있는 정령의 등급은 상급이 한계였다. 우연히 정령왕을 소환하게 되더라도 자신의 속성과 직결되는 정령왕만 가능한 편이었다.
그런데 흔치 않게도 이 ‘라피스라즐리’라는 레드 드래곤은 태어나면서부터 대단한 힘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기존의 상식을 깨고 헤츨링이면서도 자신의 속성과 정반대의 정령왕인 엘퀴네스, 즉 현재의 엘뤼엔을 소환하는 데 성공했다.
“전대미문의 일이었던 만큼 레드 일족은 굉장히 기뻐했어. 일족에 뛰어난 드래곤이 태어난 것만큼 기쁜 일은 없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엘퀴네스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상했던 거야. 아직 성년도 되지 못한 새끼 드래곤이 물의 계열도 아닌 주제에 자신을 소환해낸 게 말이지.”
“그, 그래서?”
“당연히 계약을 거절했지. 엘퀴네스의 성격상 본인이 불쾌한 계약을 받아들일 리가 없었거든.”
하지만 하필이면 그때 라피스라즐리는 이미 물의 정령왕에게 완전히 홀려 버린 뒤였다. 계약을 이루지 못한 충격으로 상심한 그에게 어른 드래곤들은 다른 정령왕과의 계약을 권유했지만, 그는 끝내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후로도 라피스라즐리는 계속해서 엘퀴네스의 소환을 시도했고 그때마다 엘뤼엔은 냉정하게 거절했다. 마지막으로 거절했을 때 그가 싸늘하게 쏘아붙인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너 따위가 아니어도 계약할 드래곤은 넘쳐난다.’
그래, 바로 그게 문제였던 것이다. 그 말에 화가 난 라피스라즐리는 그때부터 다른 드래곤들과 엘퀴네스의 계약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날 때부터 발군의 힘을 자랑하던 그는 성룡이 되었을 땐 아무도 넘볼 수 없을 만큼 강대한 존재가 되어 있었고, 그만큼 성격도 포악했다.
심지어 같은 레드 일족 사이에서도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할 정도였다. 당연히 암묵적으로 엘퀴네스는 그들 사이에서 기피해야 할 대상이 되어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