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30)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30화(30/608)
제30화
“드래곤들은 힘의 지배를 강하게 받아. 나이가 어려도 자신보다 힘이 강하면 굴복할 수밖에 없지. 그런 녀석의 독단적인 행동에 유일하게 벗어날 수 있는 존재는 이유를 불문하고 무조건 보호받아야 할 ‘헤츨링’밖에는 없는데, 아쉽게도 물의 계열 쪽의 헤츨링이 한 마리도 없었어. 다른 헤츨링들은 엘퀴네스를 소환할 힘이 없고, 소환할 수 있는 성룡들은 라피스라즐리의 협박 때문에 엄두도 못 내고…… 그런 상황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거야.”
“……나, 난 엘뤼엔이 아닌데?”
“음, 근데 아직 라피스라즐리가 세대교체 사실을 모르거든. 알려 주려고 했지만 유희를 떠난 이후로 소식이 끊겨서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다나 봐. 나도 그 녀석이 작정하고 숨으면 찾기가 힘들어서 말이야.”
“녀석이 없다면 더 잘된 거 아니야? 없는 사이에 계약해 버리면 되잖아.”
그러나 유일한 희망은 이어지는 트로웰의 말에 간단히 무너져 내렸다.
“드래곤들이 녀석을 너무 무서워해서 안 될 것 같아. 나도 몇 번이나 상황을 설명해 줬는데 다들 고개를 흔들더라고. 아무래도 라피스라즐리가 유희에서 돌아와야 말이 통할 것 같아.”
“……그게 언젠데?”
멍하니 되묻는 내게 트로웰은 미안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글쎄…… 이번 10년 가뭄이 시작되기 전에 출발한 유희였다고 하니까, 이제 겨우 17년 남짓 됐나? 드래곤의 유희는 대부분 짧게는 백 년, 길게는 몇백 년까지도 이어진다고 하니까 앞으로도 몇백 년은 더 기다려야 할지도…….”
“…….”
몇백 년?
몇 년도 아니고 몇십 년도 아니고…… 몇백 년이라고?
‘이 망할 놈의 드래곤 같으니! 만나기만 해 봐라!’
그날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를 향해 살의를 품었다.
성격 나쁜 레드 드래곤, 라피스라즐리와의 악연이 시작되던 순간이었다.
* * *
에바스 에덴은 시간을 때우기 참 적합한 장소다. 정령들의 춤을 보거나 그들의 수다를 듣는 것도 즐겁고, 보석으로 된 꽃잎을 하나씩 수집해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금전적인 것에 관심이 없는 다른 정령왕들은 이런 내 심리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로선 돈덩어리를 보고도 차마 그냥 넘어갈 양심(?)은 가질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귀한 도자기라도 가치를 아는 사람의 손에 있어야 빛나는 법! 자, 그런 의미에서 내가 마구마구 뽑아서 간직해 주마, 내 사랑스러운 꽃들아!
신기한 것은 에바스 에덴의 꽃은 아무리 꺾거나 짓밟아도 금세 다시 피어나고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한다는 점이었다. 즉, 이곳 자체가 무한한 보물 창고와 다름이 없는 것이다.
“흐흐흐…… 부자네, 부자야. 이것만 한 개 있으면 몇십 년을 놀고먹겠네그려…….”
나는 루비로 된 장미 꽃잎을 쓰다듬으며 음침하게 웃었다. 그러자 뒤쪽에서 혀를 차는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쯧쯧, 그런 인간적인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네가 오늘날 이 꼴인 거야. 이러고 있을 시간에 그 라피스라즐리인지 뭔지 하는 드래곤을 찾으러 가면 되잖아. 다들 유희를 즐기는데 혼자 궁상맞게 이런 데서 놀다니. 너도 앞날이 참 뻔하다, 뻔해.”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차며 나를 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이프리트였다. 벌써 며칠째 보석 꽃잎 수집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내가 어지간히 불쌍했는지, 그는 늘 이런 식으로 꼬투리를 잡으며 구박을 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가끔은 옆에 나란히 앉아 보석 따는 걸 도와주기도 했다. 이프리트가 건네주는 다이아몬드로 된 방울꽃을 받으며 나는 샐쭉하게 투덜거렸다.
“숨었다는 놈을 어디 가서 찾아? 그리고 그런 건 자존심 상해서 싫다, 뭐.”
“어휴, 그래도 꼴에 정령왕이랍시고 자존심은 있니?”
“당연하지! 내가 뭐 아무한테나 헤헤거리는 줄 알아? 그리고 또 모르잖아? 드래곤이 아니라 다른 종족이 나를 소환할 수 있게 될지.”
“그게 바로 허황한 꿈이라는 거야. 트로웰한테 못 들었니? 엘퀴네스의 소환은 보통의 정령왕보다 훨씬 더 힘들단 말이야. 그만한 자연 친화력과 마나를 몸에 담을 수 있는 인간은 없어. 아마 소환하는 순간 바짝 말라 죽어 버릴걸?”
“……아크아돈의 종족에 인간만 있는 건 아니잖아?”
“설마 엘프들한테 기대를 걸려고? 아서라, 아서. 정령왕의 소환을 뭐로 보는 거야? 그건 하나의 ‘기적’이라고. 엘프들은 조화의 종족이라 세상의 균형을 깨는 ‘기적’과 같은 일은 벌이지 못해. 정령들과 가장 친숙한 존재이긴 하지만 그들로서도 어쩔 수 없는 게 있다고.”
“으으. 그럼, 물의 계열 쪽의 드래곤이 태어나기를 기다리지, 뭐…….”
체념에 가까운 말투에 질렸는지 이프리트는 더 이상 상관하지 않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몸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마음대로 해. 난 다시 유희를 나갈 생각이니까. 몇 년 전부터 공들인 일이 드디어 성과를 보이고 있거든. 나도 한동안은 돌아오지 못할 거야.”
“넌 어디서 뭘 하는데?”
“그건 비밀. 남의 유희에 대해서 꼬치꼬치 묻는 건 실례라는 거 모르니? 아무튼 돌아다니다가 혹시 라피스라즐리라는 드래곤을 만나게 되면 잘 얘기해 줄게. 저도 양심이 있다면 정령왕의 세대교체가 있었다는 말까지 들었는데도 그냥 내버려 두겠어? 뭐하면 녀석이 다시 소환을 시도해 볼지도 모르지.”
“……그 녀석한테 소환되고 싶지는 않아.”
“네가 지금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야? 이대로 가다간 정령왕 최초로 유희 한 번 못 하고 생을 마감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쳇!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삼천 년 전에 태어났다면 지금 그 드래곤 나이가 그 정도 됐다는 건데, 이제 겨우 태어난 지 두 달 넘어가는 나와 수명이 같을 리가 없잖아?
듣기론 드래곤의 평균 수명은 만 년에 조금 못 미친다고 한다. 즉, 녀석이 죽을 때까지 칠천 년만 참아도 나머지 내 수명 동안은 얼마든지 유희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라고 해도 사실은 하나도 반갑지는 않다. 칠천 년이라니! 고작 유희 하나 해 보겠답시고 그 어마어마한 세월을 여기서 이렇게 있어야 한단 말인가! 그럴 바엔 차라리 그 라피스라즐리라는 놈에게 달려가 계약을 부탁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그런데 이프리트 너는 그 레드 드래곤을 본 적이 없는 거야?”
“응, 삼천 년 전에는 내가 태어나지 않았을 때니까. 게다가 그 드래곤이 워낙 두문불출하는 타입이라 만나보기는커녕 얼굴도 본 적 없어. 내가 아니라 전대의 이프리트를 소환한 적은 한 번 있는 모양이던데.”
“어, 그래?”
“주변 드래곤의 권유로 억지로 시험 삼아서 딱 한 번인가? 근데 글쎄, 날라리같이 생겼다느니 뭐라느니. 자기 취향이 아니라고 그 자리에서 찼다는 거 있지? 그것만 봐도 확실해. 그 녀석은 정말 재수 없는 성격일 거야.”
“헐…….”
나는 이프리트의 말에 크게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그 녀석하고 엮여서 좋을 게 없는 것 같다. 최대한 다른 종족이랑 계약할 방법을 연구해 봐야지. 설마 천 년이 되기 전엔 그래도 좋은 소식이 생기지 않겠어?
그때 문득 떠오른 의문에 나는 불쑥 이프리트를 향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프리트 네 나이가 이천이라고 했지? 다른 애들은 어떻게 돼?”
“트로웰이랑 미네르바 말이야? 트로웰은 사천 세고, 미네르바는 만 육천 좀 넘었나?”
“헉! 마, 만 육천?”
예상했던 것보다 더 어마어마한 수치에 나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프리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소멸 전의 엘뤼엔과 나이 차이가 거의 나지 않았으니까 아마 맞을 거야. 어머, 그러고 보니 미네르바, 어느새 평균 수명을 넘었네. 조금 있으면 소멸하게 될지도 모르겠는걸?”
“헉…….”
정령왕이라 그런가? 누가 들으면 소멸이 마치 옆집에 놀러 간다는 말인가 싶을 정도로 가벼운 태도였다. 나는 깜짝 놀라 얼굴을 바로 굳혔다.
“이프리트, 아무리 친한 사이라지만 그런 이야길 그렇게 태연하게 말해도 돼?”
“뭐가 어때서? 소멸하면 소멸하는 거지.”
“그렇지만…… 슬프잖아.”
“수명도 다 채우고 가는 건데 슬프긴 뭐가 슬프니? 오히려 미네르바는 소멸을 맞으면 홀가분한 기분일걸? 게다가 이젠 딱히 소멸 뒤에 어떻게 되는 건지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그렇지만이라니? 아직 닥치지도 않은 일을 겁내는 건 그만둬. 그런다고 일어날 일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까.”
“…….”
이프리트의 충고에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대로 내가 지금 이런다고 해서 미래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이후 그가 떠난 후에도 나는 왠지 모를 허전함과 두려운 마음에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아직 누구도 떠나지 않았건만 나는 벌써 미래에 예정된 이별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것이 아무리 다음 만남을 기약하는 이별이라 해도 말이다.
“마음이 어지럽군. 여기서 혼자 뭘 하는 거냐?”
“……!”
심란한 마음이 흐트러진 건 그 뒤에 찾아온 뜻밖의 방문자 덕분이었다. 고개를 든 순간 보인 낯익은 얼굴에 나는 깜짝 놀랐다. 엘뤼엔이었기 때문이었다.
“어, 어서 와, 엘뤼엔. 오랜만이네.”
그는 최근 들어 정령계를 방문하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어든 참이었다. 며칠 만에 만나니 아무리 그라도 반가운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엘뤼엔이 하는 말에 나는 곧장 실망감을 느꼈다.
“한동안은 바쁠 것 같아서 찾아오기 힘들 거라는 말을 하려고 왔다.”
“어? 그, 그래? 얼마나?”
“최대한 빨리 끝내 보려고 노력하겠지만, 생각보다 좀 더 길어질 것 같다. 다른 녀석들은 다들 유희를 나간 것 같더군. 너도 계속 정령계에만 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 보는 게 어때.”
“으음. 아니, 나도 유희를 가고 싶기는 한데…….”
“가면 되잖아.”
뭐가 문제냐는 듯이 바라보는 그에게 나는 살짝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
“엘뤼엔, 혹시 라피스라즐리라는 드래곤 기억나?”
“……그게 누구지?”
“어? 아, 그러니까 레드 드래곤인데…… 몇 번이나 엘뤼엔을 소환해서 계약하려고 한 드래곤 있지? 그 녀석 이름이야.”
“나와 계약하려고 한 드래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되물어 오는 그의 모습에 오히려 내가 더 당황하고 말았다. 뭐야, 저 아무것도 모르겠단 표정은? 설마 기억을 못 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혹시나 싶은 기분에 차근차근 트로웰에게 들었던 대로 설명했다.
“그러니까 삼천 년 전쯤인가. 그때 헤츨링이었던 레드 드래곤이 엘퀴네스를 소환해서 꽤 이슈가 됐다고 하던데…… 아니었어?”
“삼천 년 전? 흐음, 그런 일이 있었나? 그러고 보니 생각이 날 것 같기도 하고.”
허걱! 정말 기억을 못 하잖아!
이게 뭐야! 나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사건 때문에 지금 유희도 못 나가게 생겼는데. 정작 당사자인 엘뤼엔은 기억조차 하지 못하다니, 너무한 거 아니야? 억울하다기보다는 기가 막힌 심정에 말을 못 잇고 있자 엘뤼엔이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걸 왜 물어보는 거냐?”
“아하하…… 그, 그게…… 그 레드 드래곤이 나와 드래곤들의 계약을 방해하고 있다고 하더라고.”
“참 할 일도 없는 녀석이군.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지?”
왜긴 왜야! 너한테 차인 분풀이를 하는 거잖아!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뭐, 나도 잘은 모르겠는데…… 자기가 갖지 못하는 것은 남한테도 못 준다는 심리인지 뭔지. 정확히는 엘뤼엔에게 계약을 거절당한 복수 심리 같기도 하고.”
“복수 심리?”
“그러니까, 삼천 년 전에 엘뤼엔이 계약을 거절해서 그것 때문에 독이 바짝 올랐다고 하더라고. 자신과 계약하기 전까진 그 어떤 드래곤도 엘퀴네스와 계약할 수 없다고 주변을 윽박지른 모양이야. 근데 정작 그 장본인은 어디로 갔는지 요즘 통 보이지 않는 상태고. 덕분에 난 아무도 소환해 주지 않아서 독수공방인 신세랄까.”
“결국 나 때문이라는 거군.”
다행히 그는 손쉽게 내 말을 이해했다.
잠시간 미간을 찌푸린 엘뤼엔은 곧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피스라즐리라고? 잠깐만 기다려라, 아들아. 죽이고 오마.”
“헉! 왜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건데?!”
“골치 아픈 놈은 재빨리 제거해 버리는 게 상책이다. 천사들을 동원하면 현재 있는 위치쯤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을 테니 적당히 우연을 가장해서 없애 버리면…….”
“제발 참아 줘…….”
결국 당장 계획을 실행하려는 엘뤼엔을 만류하고 설득하기까지, 나는 상당한 시간을 소요해야 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혼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내가 조금 편하게 놀고 싶다고 멀쩡한 드래곤을 죽일 수야 없는 일 아닌가? 조금 괘씸한 녀석이긴 하나, 나중에 만나서 내 손으로 직접 복수해 줘도 늦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만 년이 넘는 삶인데 지금 미리 유희를 떠날 필요는 없잖아? 조급해하지 않아도 나중엔 질릴 정도로 나가 보게 될 것이다. 그러니 한동안은 정령계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엘뤼엔은 그런 내 생각이 너무 안이하다며 혀를 차긴 했지만 말이다.
* * *
심리적으로 피곤한 하루를 마치고 물의 영역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스산한 어둠이 가라앉아 있는 상태였다.
잠시간 침대 위에 누워 있었을까. 나는 어느새 깜빡 잠이 들어 버리고 말았다. 내가 그것을 의식하게 된 것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의해서였다.
『엘퀴네스.』
“우웅…… 뭐야…….”
한창 잘 자던 중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부스스한 눈을 비볐다. 분명히 사람의 목소리인 것 같긴 한데, 이상한 건 귀로 들리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서 직접 울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정령들의 대화도 비슷한 방식이라 머리에서 울리는 기분이 들긴 했지만, 이 정도로 강렬하게 다가온 적은 없었다.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았기 때문이라 치부하며 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자 그새를 참지 못한 목소리가 다시 나를 재촉했다.
『엘퀴네스!』
“으으, 알았어. 일어나고 있으니까 그만 불러…….”
대체 이런 시각에 누가 나를 찾는 거지? 인간일 때의 습관 때문에 밤이 되면 꼬박꼬박 잠을 자는 편이다. 그런 나를 잘 아는 정령왕들은 나에게 용건이 있더라도 늦은 시간에는 되도록 다음날로 미루곤 했다. 그런데도 오늘은 이렇게 부르는 걸 보면, 어지간히 중요한 일이 분명했다.
하지만 머릿속의 생각과는 다르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계속 미적거리자 이번에도 기다리지 못한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제발, 엘퀴네스!』
“하아아, 그러니까, 알았어! 알았으니까…… 으으, 일어나면 되잖아. 일어날게.”
어라, 그런데 지금 호칭이 좀 이상한데. 왜 나를 엘퀴네스라고 부르는 거지?
트로웰이 애칭을 지어 준 이후, 정령왕들은 모두 나를 ‘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편이 더 간단하고 부르기 쉽다는 이유에서였다. 게다가 인제 보니 목소리도 조금 낯선 것 같다. 확연하게 여성 특유의 음색을 지닌 미네르바나 이프리트에 비해서는 상당히 낮았고, 트로웰과는 비슷했지만 그보다 좀 더 굵은 느낌이다.
이런 목소리가 내 주위에 있었던가?
그것에 조금 의문을 가진 순간 나를 깨우는 음성이 더욱 간절한 느낌으로 울렸다.
『나에게 와 줘, 엘퀴네스!』
……와 달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짜증이 난 나는 아직도 눈꺼풀을 잡고 놓지 않는 잠 귀신들을 한 번에 떨쳐 버리곤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기가 막히게도 막상 눈을 뜨고 바라본 내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뭐, 뭐야……? 설마 귀신?”
나는 황당한 심정으로 중얼거리며 여전히 스산한 어둠 속에 가라앉은 물의 영역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무심코 돌아본 근처에서 상당히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
마치 도넛처럼 생긴 거대한 원형의 테가, 홀로그램처럼 둥실둥실 흔들리며 내 눈앞에서 황금색 빛을 발하고 있었다. 금색의 테두리 안에는 복잡한 무늬와 도형들이 가득했다. 거대한 거울이 세워진 느낌이었다.
“이건 뭐야……?”
분명 잠들기 전까지, 아니 그 이전에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현상이다. 당황스러운 기분에 나는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소리 없이 자리에 굳어 있었다. 그때 그 둥그런 홀로그램 안에서 조금 전 나를 깨운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제발 날 도와줘, 엘퀴네스! 내 부름에 응답해 줘! 제발!』
“……!”
그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원형의 정체를 깨달았다.
헉, 하고 터져 나오려는 숨을 간신히 삼킨 나는 떨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믿을 수 없었다.
“소환……마법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