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309)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309화(309/608)
제309화
―왜 내가 살아 있을까. 다들 나만 두고 멀리 가 버려. 너무 멀어서 쫓아갈 수도 없어. 내가 지키려는 건 다 사라져 버리는데, 이 삶이 무슨 의미가 있지?
-난 안 가요. 안 갈게요.
자기도 모르게 답해 버렸다. 흐려졌던 눈동자가 놀란 듯이 크게 떠졌다가 이내 천천히 휘어졌다.
―거짓말.
―정말이에요. 난 거짓말 안 해요. 내가 주인님을 지켜줄게요.
―그런 의젓한 말 하는 거 아냐. 꼬마 주제에.
피식 지어지는 미소는 비웃음보다 허무함에 더 가까웠다. 그게 더 참을 수가 없어서 속이 울렁거렸다. 배움이 지나치게 빠르다는 평을 받는 소년은 감정을 깨우치는 속도만은 느렸다. 이게 울고 싶은 기분이라는 걸 조금 뒤늦게 깨달았다.
―금방 클 거예요.
―그때가 되면 이런 건 다 잊어버릴걸.
―안 잊어요. 나 기억력 좋아요. 진짜예요.
―그럼 정말 날 지켜줄 거야?
―응.
―그러려면 내 기사가 되어야겠네.
―응. 나 주인님의 기사 될 거예요.
―좋아. 그럼 이제부터는 기사로 대우해 줘야겠는걸.
드디어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웃는 얼굴은 소년이 가장 좋아하는 광경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표정을 봤음에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울고 있었고, 여전히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 힘껏 내보인 소년의 진심이 그에게는 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걸어가는 뒷모습에 손을 뻗다가 소년은 입술을 악물었다. 갈대처럼 휘청거리는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져 내릴 것 같았다. 부축해 지탱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소년의 몸이 아직 너무나 작았다.
―아아, 그래. 내 작은 기사에게 첫 번째 임무를 줘야지.
돌아보지 않은 상태에서, 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소년은 눈을 크게 깜빡거렸다. 맺혀 있던 눈물이 도르륵, 굴러떨어졌다.
―명령이다.
그 말을 하나라도 놓칠까 봐, 필사적으로 귀를 기울였다. 마르고 추워 보이는 등을 하염없이 응시했다.
―그대는 나보다 먼저 죽지 마라.
똑똑―
밖에서 울리는 소리에 카리브디스는 오랜 상념에서 깨어났다. 가볍게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주위를 확인했다. 제 앞에는 긴 아치형의 소파와 테이블이, 볕이 깃드는 창가 아래쪽으로는 넓은 침대가 놓여 있었다. 자신의 침실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후에야 정신이 조금 들었다.
“공작님. 저 루벤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나직한 음성과 함께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조심스럽게 들어온 중년의 집사가 그를 향해 정중히 목례했다.
“채비를 전부 마쳤습니다.”
“……그래.”
그제야 상념에 빠졌던 이유가 떠올랐다. 고개를 끄덕인 카리브디스는 앉아 있던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집사의 뒤를 따라 들어온 하녀들이 서둘러 다가와 그가 옷을 걸치는 걸 도왔다. 두꺼운 가죽을 덧대어 만든 가벼운 무구 위에 짧은 외투를 입은 뒤 마지막으로 긴 망토를 둘렀다. 장신인 그에게 딱 맞춘 망토는 그 자체로 묵직한 소재인 데다 평균 기장보다도 훨씬 더 길어서 나가는 무게가 상당했다. 하녀 한 사람이 다 들을 수가 없어서 두세 명이 달라붙어야 했다. 그러나 정작 그걸 착용한 장본인의 움직임은 아무런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깃털같이 가볍기만 했다. 그 모습에 감탄하는 한편으로 하녀들은 다른 이유 때문에 얼굴을 붉혔다. 검술로 단련된 데다가 타고난 체형이 워낙 좋다 보니 카리브디스는 아무거나 걸쳐도 눈에 띄는 편이었다. 그저 흔한 여행복 차림일 뿐인데도, 연회에 나가는 영식들의 화려한 차림보다도 화사해 보였다.
“오늘도 몹시 근사하십니다.”
그를 아들처럼 여기는 집사 루벤의 얼굴이 자랑스러움에 벅차오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카리브디스는 말없이 시선을 내려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볼품없이 작았던 소년은 어느새 무럭무럭 자라, 이제는 그 주인보다 한 자는 더 커져 있었다. 예전에는 할 수 없었던 일들도 지금의 그에겐 전부 가뿐한 것들이 됐다. 아무리 크고 무거운 사람이라도 한쪽 팔로 지탱해서 일으켜 세울 수 있을 만큼 강해졌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주인 앞에 서면 아무것도 못 하는 어린 꼬마가 된 것 같았다. 대하는 말투가 달라지고 용어가 바뀌었어도, 주인이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언제나 무력함을 체감하고, 매일같이 상실한다. 그것을 지치는 감정으로 받아들이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인간은 뭐든지 쉽게 잊기 때문에 평생 한결같을 수 없다. 그러니 언젠가 찾아올 그때를 늘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고, 제게 그렇게 말해 줬던 이가 있었다. 그때는 그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았었다. 변심한 배반자의 구차한 변명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세상 모두가 다 변해도, 나만은 그렇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 괜찮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결국은 그도 하나의 인간이었다. 그저 남보다 조금 더 인내심이 좋고, 조금 더 끈기가 있는 것에 불과했을 뿐.
관계라는 건 한 사람의 일방적인 노력으로 유지되는 게 아니었다. 이미 많은 것들이 변했는데 그 혼자 이전과 같은 상태로 버티고 있는 건 불가능했다. 어떤 것을 취하고 어떤 것을 버려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어서 그는 혼란스러웠다. 조언을 했던 이도 이제는 세상에 없는 사람이라 찾아가 물을 수조차 없다.
그녀가 아직 살아 있었다면, 뭔가가 달라졌을까?
영원히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 가슴 속을 공허하게 맴돌다 흩어졌다. 카리브디스는 치밀어 오르는 한숨을 삼켰다. 그가 사랑했던 광경에서, 그의 유일한 주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결한 사람이었다. 그 모습을 영원히 지키고 싶었기에 그의 기사가 되기를 자청했다. 그러나 정신없이 등만 보며 쫓아가던 동안 꽤 많은 것들을 놓치고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이제는 이미 늦어버린 건 아닐까.
―그렇다면, 다시 되돌리면 그만이지.
“……!”
순간 귓가를 스치는 음성에 카리브디스는 얼굴을 굳혔다. 그는 반사적으로 앞에 있는 사람의 팔을 움켜쥐었다.
“고, 공작님?”
“방금, 뭔가 말했나?”
“예?”
주인의 옷차림을 정돈해 주다 봉변을 당한 집사 루벤이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반응만 봐도 이미 대답을 들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환청이었던가. 아니, 그러기엔 너무나 뚜렷했다. 또한 어디선가 들어본 음성인 것 같기도 했다. 카리브디스는 굳은 얼굴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허리 아래 고정해 둔 검집에 이상하리만치 신경이 기울었다. 어디에서나 볼 법한 평범한 검의 손잡이가, 오늘따라 요사스러운 기운을 풍기고 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날카로워진 주인의 분위기에 차림을 돕던 하인들이 서로 불안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기분이 좋지 않은 걸까, 그의 표정을 살핀 루벤이 조심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그나저나 결국 공작님도 출정하시는군요.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내심은 오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내전이 길어지면서 평화롭던 수도에도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 카리브디스가 한동안 저택을 비울 거라고 했을 때 루벤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직접적으로 출정한다는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그가 향하는 곳이 전장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카리브디스도 부정하지 않았다.
“기사에게 전장은 숙명이다.”
“예, 그거야 물론 알고 있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어서요.”
“걱정? 별말을 다 하는군.”
“정말입니다. 제 진심을 너무 몰라주시는군요. 이래 봬도 공작님의 안전을 위해 매일같이 기도드리고 있는데 말입니다.”
투정부리는 듯한 말에 카리브디스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흔치 않은 그의 미소에 분위기가 잠시 가벼워졌다. 하지만 그 순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고 이내 다시 가라앉았다. 카리브디스의 머릿속에서 전날의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전황이 너무 나쁘게 흘러가고 있어. 더는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을 것 같다. 카리브디스, 그대가 나서줘야겠다.”
“하명하십시오.”
전방에 나가 있는 세르피오 백작이 행하는 전술마다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집사 루벤이 예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카리브디스 역시 대공이 이때쯤 저를 찾을 거라는 건 이미 예상하고 있는 바였다. 그러나 대공이 그에게 명한 건 군사를 이끌고 나가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대가 해야 할 일은 간단해. 사람을 몇 붙여 주지. 전부 유능한 자들이니 그대가 다루기에도 쓸 만할 거야.”
“무슨…….”
“애초에 비빌 구석이 있으니 잡음도 나는 거 아니겠나. 원인을 제거하면 모든 게 간단히 해결될 테지. 가능한 한 마지막 장식으로 남겨 두려 했지만 이제 어쩔 수 없게 됐어.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단 말이야. 아무리 아까워도 더 큰 그림을 위해서는 포기하는 수밖에.”
선뜻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의아하게 바라보는 카리브디스를 향해, 대공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사나를 암살해라.”
이미 지나간 일을 회상하는 것뿐임에도 심장이 서늘하게 식었다. 카리브디스는 숨을 깊게 삼켰다. 끝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이라는 건 알았다. 대공과 황제는 결코 같은 길 위에 서 있을 수 없는 관계. 어떻게든 파국을 맞을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황제를 죽이라는 명을 받는 건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가 정말로 황제를 죽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 같다. 이사나는 선황의 핏줄이기도 했지만, 그녀의 하나뿐인 아들이기도 했으니까. 마지막까지 대공을 걱정하다 숨을 거둔 그녀―로아 황후의.
“도련님, 괜찮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내면을 무겁게 짓누르던 공기가 사라진 건 잠시 후 이어진 음성 덕분이었다. 집사 루벤의 말에 카리브디스는 그를 괴롭히는 생각에서 벗어나 고개를 들었다. 문 쪽을 응시하자 그 뒤에서 기웃거리고 있는 작은 기척이 느껴졌다. 카리브디스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레이.”
그의 부름에 집사의 독려에도 용기를 내지 못하던 그림자가 흠칫 몸을 떨었다. 당황한 기색이 여실히 느껴지는 몸짓이었다. 곧이어 문을 부여잡고 빼꼼히 얼굴을 내미는 아이는 두 뺨이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그 수줍은 반응을 본 카리브디스의 표정이 더 풀어졌다.
“이리 오렴.”
잠시 망설이던 아이가 이내 결심을 굳힌 얼굴로 걸음을 내디뎠다. 빠르게 달려와 안겨드는 아이를, 카리브디스는 능숙하게 품에 안아 올렸다. 처음엔 깃털처럼 가볍기만 하던 아이가 이제는 살이 올라 제법 무게가 나갔다. 그 점이 몹시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한 충족감이 들었다.
누가 이런 날을 상상했을까. 카리브디스 그 자신도 가끔은 당황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제 손으로 거둔 아이가 행복해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기분이 될 줄은 몰랐다. 그저 조사를 위해 데려온 것뿐이었는데, 이젠 저택 안에 아이가 없는 삶을 상상하는 게 어려웠다. 자신이 변하는 것은 두려웠지만, 이런 변화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미소 짓는 그와는 다르게 레이의 표정은 침울했다. 사이가 가까워진 후로는 늘 담뿍 웃는 얼굴만을 보였는데 오늘은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카리브디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아이와 시선을 맞췄다.
“레이, 왜 그러지? 무슨 일 있었나?”
“……아저씨.”
“그래, 말해 보거라.”
“아저씨, 떠나요? 사라지는 거예요? 이제 다시는 못 만나요?”
아이의 커다란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눈물이 차오를 것처럼 일렁거렸다. 카리브디스가 아이에게서 시선을 틀어 이 상황을 설명해 줄 사람을 찾았다. 훈훈한 시선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벤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공작님이 한동안 떠나 계신다고 들으신 후에, 도련님이 많이 우울해하셨습니다.”
“……으음.”
카리브디스가 난처한 얼굴로 레이를 돌아보았다. 저택을 떠나 멀리 출타하는 건 그에게는 습관화된 일이었다. 그 자신도 그렇고, 고용인들도 모두 당연하게 여기는 부분이었던지라 누군가가 그 사실을 서운해할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어색하게 아이를 달래기 시작했다.
“완전히 떠나는 게 아니다, 레이. 잠시 일이 있어 멀리 갔다 오는 것뿐이란다. 금방 다녀오겠다.”
“진짜요? 다시 돌아오는 거예요?”
“그래, 정말이다. 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럼 언제 돌아와요? 몇 밤을 자야 해요?”
“……몇 밤? 으음, 백 번 정도일까. 아니, 이삼백 번……?”
“……그렇게나요?”
희망으로 밝아졌던 아이의 얼굴이 다시 빠르게 굳어졌다. 그걸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시면 어떡합니까! 이마를 짚은 루벤이 서둘러 상황을 수습하려 나섰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보다는 훨씬 빨리 돌아오실 겁니다. 그렇지요, 공작님?”
“설마. 오히려…….”
“하하하! 자, 공작님도 그렇다고 하시네요! 그것 보십시오, 도련님! 공작님은 금방 돌아오신다니까요. 이제 안심하실 수 있지요?”
루벤의 필사적인 눈총에 눈치 없이 대답을 이어가려던 카리브디스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레이가 기대 어린 눈으로 응시하는 것을 보고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다시 아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깨끗한 눈동자를 들여다보다, 카리브디스는 내내 망설이고 있던 결심을 굳혔다.
“다녀오면 네 이름 옆에 몇 가지가 더 붙게 될 거다.”
“이름이요?”
“레이 드 카리브디스.”
레이의 눈이 동그래지는 것과 동시에, 사방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가 그 의미를 알았지만 아직 어린아이만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카리브디스는, 아저씨 이름인데.”
“그래. 그걸 너한테도 주마.”
“저한테도요? 그래도 돼요?”
“물론이다. ……그땐 나를 아버지라고 불러 주겠니?”
이보다 더 명확할 수 없는, 노골적인 선언이었다. 고용인들이 다시금 숨을 크게 들이켰다. 출신도 알 수 없는, 그저 고아에 불과하던 꼬마 아이가 하루아침에 카리브디스 공작가의 어린 후계자로 인정받은 것이다.
집사 루벤은 솟아오르는 눈물을 연신 닦아내기에 바빴다. 얼마나 기다려 왔던 날이던가. 누구보다 강하면서도 늘 위태롭게만 보이던 그의 주인이 드디어 안정을 찾게 되려는 모양이었다. 오늘을 가문의 기념일로 제정하자는 건의를 드려야겠다, 그는 마음속으로 굳게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