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310)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310화(310/608)
제310화
묵직한 소리와 함께 망토가 크게 펄럭거렸다. 이른 아침부터 불려 나온 흑마는 주인을 태우자 가벼운 흥분 상태를 보였다. 워낙 거대한 군마다 보니 투레질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애마를 잘 다독인 카리브디스가 저를 주시하는 시선들에 반응해 고개를 들었다. 배웅을 나온 집사와 식솔들을 차분히 돌아본 후, 마지막으로 그 앞에 서 있는 어린아이를 응시했다.
“그럼 레이, 잘 지내고 있으렴.”
카리브디스가 현관을 나서서 말안장에 오르기까지,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던 레이가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러면 다들 곤란해질 거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눈물을 꾹 참았다.
“이랴!”
고삐를 당기는 소리와 함께 힘찬 기합 소리가 울려 퍼졌다. 카리브디스를 태운 말은 자세를 바꾸기 무섭게 그대로 빠르게 달려 나갔다. 눈앞에 있을 땐 산처럼 거대하기만 하던 모습이 손가락 한 마디보다 작게 줄어드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도련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작님은 무사히 다녀오실 겁니다.”
뿌옇게 일어난 먼지가 가라앉은 후에도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레이를 향해, 집사 루벤이 말했다. 이제는 명실공히 차기 공작으로 내정된 소년이었다. 본래도 친절한 편이었던 집사는 더 극진한 태도로 아이를 살피고 있었다. 그래도 레이의 표정은 여전히 어둡기만 했다.
“맛있는 간식을 내오라 할까요? 사과와 딸기를 곁들인 생크림 케이크와 아몬드가 박힌 초콜렛 쿠키를 준비하게 하겠습니다. 어떠십니까?”
능숙한 집사인 루벤은 침울해진 아이를 달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평소 가장 좋아하는 간식들이 나열되자 레이의 눈동자가 바로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다시 생기를 되찾은 아이의 표정을 본 루벤이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혹시 더 드시고 싶으신 건 없으십니까?”
“……코코아…… 우유도.”
“네, 그럼요. 따뜻하게 데운 코코아 우유도 함께 준비하겠습니다. 지금 바로 주방장에게 말해 두지요. 방 안에서 기다리시겠습니까?”
자신과 함께 들어가겠냐고 묻는 말이었다. 레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정원에 있을래요.”
“그러시겠습니까? 그럼 간식이 다 만들어지면 모시러 가겠습니다. 너무 멀리 나가 계시지는 마십시오.”
레이가 평소에도 정원을 즐겨 찾는다는 걸 알고 있는 집사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곧바로 수긍했다. 알겠다는 의사 표시를 한 뒤 레이는 홀로 정원을 향해 걸어갔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혼자는 아니었다. 언제 어느 때나 항상 함께하는 존재가 있었으니까. 지금 레이가 누구보다도 가장 대화를 나누고 싶은 존재이기도 했다.
<그때는, 나를 아버지라고 불러주겠니?>
아쉬움과 서러움이 걷히고 나니 잊고 있던 목소리가 다시 가슴을 두드렸다. 걸음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너무 달려서 숨이 머리끝까지 올라올 즘이 되어서야 레이는 간신히 달리기를 멈췄다.
“린.”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뒤 이름을 부르자 허공에서 인어의 모습을 한 아름다운 요정이 튀어나왔다. 차가운 물방울이 뺨에 튀었지만 레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요정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린, 나한테 아버지가 생길 것 같아.”
반가워하던 요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얼굴이 너무 귀여워서 레이는 소리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있잖아. 아저씨가 나한테 아저씨의 성을 주겠대. 그럼 나랑 아저씨가 가족이 되는 거래. 이제 아저씨가 내 아버지가 되는 거랬어. 굉장하지 않아?”
숨 가쁘게 이어지는 말들에 린의 눈이 더 동그래졌다. 어차피 대답을 기대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은 레이도 반쯤 흥분한 상태라 반응을 기다리지 않았다. 지금은 누구에게든 일방적으로 떠들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버지.”
왠지 이상한 울림이었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에도 레이에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그에겐 늘 어머니뿐이었다. 아버지의 존재를 궁금해하지도, 곁에 없는 걸 이상하게 여겨본 적도 없었다. 아마 또래와 비교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이겠지만, 그래서 레이에겐 처음 가져 보는 아버지라는 단어가 더 낯설게 느껴졌다.
“아버지.”
익숙하지 않은 단어를 한 번 더 입에 담아 보았다. 가슴속이 간질간질했다. 거대한 물거품이 차올라 한계까지 부풀어진 것만 같았다. 이러다 팍 터져버릴까 봐 겁이 날 정도였다.
“어떡하지, 린? 굉장히 기뻐.”
격정을 감추지 못한 아이의 두 뺨이 발그레하게 상기됐다. 아이의 기쁨은 곧 린의 기쁨이었다. 어린 친구의 흥분한 감정에 따라 춤을 추듯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던 린이 방긋 웃으며 레이의 뺨을 두 팔 가득 포옹했다. 레이도 린의 작은 얼굴에 그 뺨을 한껏 비볐다.
그런데 잠시 후, 닿아 있는 감각이 갑자기 떨어져 나갔다. 허전해진 감각에 레이가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린이 어딘가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다정하던 분위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경계하는 고양이처럼 잔뜩 날카로워진 모습이었다.
“린?”
눈앞에 새하얀 옷자락이 보였다. 레이는 눈을 크게 깜빡거렸다. 누군가가 그 앞에 서 있었다. 꽤 키가 큰 사람이었는데, 햇빛을 등지고 선 탓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쏟아지는 역광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는 레이와는 다르게, 상대방은 그가 비교적 잘 보이는 듯했다. 손을 들어 그늘을 만들고 나서야 간신히 눈이 마주쳤다.
“어…….”
레이는 다시금 눈을 깜빡였다.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일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던 사람이었다. 화사한 금발 아래, 나른하게 가늘어진 남자의 푸른 눈동자가 웃음을 머금고 휘어졌다.
“안녕, 레이. 오랜만이구나.”
* * *
염려했던 것에 비해 이사나는 충격을 잘 다스렸다. 이미 한 번 거친 과정이라 그런지, 모르고 있던 아버지 세대의 비화를 제법 덤덤히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어쩌면 아셀 쪽의 이야기를 그저 떠도는 낭설 중 하나로 취급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화를 내거나 모욕감을 느끼지 않는 것 자체가 수용의 자세라 할 수 있으니, 의연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하아, 하필 그 순간에 황제 폐하가 오실 줄이야. 정말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습니다.”
좋지 않은 순간에 걸리는 바람에 강제로 곤란한 시간을 보내게 된 아셀은 이사나가 별다른 말 없이 떠나자 크게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들은 사실을 그대로 전한 것뿐이라지만, 황실에 대한 건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중죄가 될 수 있는 세상이었다. 아셀의 입장에서는 죽다 살아난 심정에 가까울 터였다.
물론 그런 것치고 그는 금방 아무렇지 않게 괜찮아지긴 했다. 놀랐던 건 놀랐던 거고, 멀쩡히 목숨이 붙어 있으니 그걸로 됐다 싶어진 듯했다. 그러고 보면 황태자를 대하는 태도도 묘하게 격의 없었던 것 같다. 그 긴장감이 감도는 상황에서도 요구 조건은 야무지게 다 챙겼었지. 워낙 비현실적인 환상에 시달려 와서 그런가, 오히려 사람을 대하는 담력 하나는 튼튼한 것 같았다.
내가 그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된 건 다음날이었다. 아침이 되어 다 같이 막사를 나서는데 때마침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던 라온휘젠 황태자 일행과 마주쳤다. 기척을 느낀 황태자가 이쪽을 돌아보았고, 아셀과 시선이 닿았다. 그가 보좌관에서 해임된 이후로 첫 밤이 지난 시간이었다. 뭔가 어색한 대화라도 오가지 않을까 싶었으나 기대는 금방 무너졌다. 황태자가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그냥 고개를 돌려버렸기 때문이다. 그 매몰찬 태도에 내가 더 상처를 입은 기분이었는데, 정작 지켜보는 아셀은 태연했다.
“괜찮아요?”
조심스럽게 물어봤더니 그는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할 수 없죠. 아무튼 태자 전하도 참 소심하셔서 큰일이라니까요. 황제가 되시기 전에 저 성격은 좀 고치셔야 할 텐데 말입니다.”
“……소심하다구요?”
“제 얼굴 보기가 괴로워서 피하시는 거니까 소심한 거죠. 아무렇지 않으면 피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듣고 보니 틀린 말도 아니라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그 말을 반대로 생각하면 시선을 피하지 않은 아셀은 아무렇지 않다는 뜻이었다. “전 잘못한 게 없으니까요.” 실제로 그는 당당하게 대꾸했다. 인간관계라는 게 제 입장만 고수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보니, 막상 잘못한 게 없더라도 자신감을 유지하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셀과 황태자의 관계처럼 신분이 명확히 차이 나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래도 아셀은 전혀 굴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 태도만큼은 본받고 싶었다.
“그보다 엘 님. 저 드디어 엘 님의 정체를 알 것 같습니다.”
“내 정체요?”
어리둥절해져서 돌아봤더니 그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늘 궁금하게 생각했거든요. 비현실적으로 화려한 그 외모하며, 뛰어난 청력과 시력. 지반을 뒤흔드는 엄청난 권능과 신관을 방불케하는 치료 능력까지! 심지어 공간 이동도 하셨죠. 아무리 생각해도 이 조합이 평범한 건 아니잖습니까? 그런데 일행분들이 알고 보니 마족에, 유니콘이라니. 사실을 알고 나니 모든 답이 간단해지더군요. 엘 님도 인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생각하는데요?”
궁금해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대놓고 정면 돌파를 시도할 줄은 몰랐다. 노골적으로 접근하는 게 나쁘진 않아서, 나는 즐거운 기분으로 그가 내릴 답을 기다렸다. 아스와 시벨리우스를 비롯한 다른 일행들도 전부 우리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정체를 알아봤다고 절 죽이시진 않을 거죠?”
“내가 사이코패스인 줄 알아요? 그런 걸로 사람을 죽이게.”
“사이코패스? 그게 뭡니까?”
“아무튼 말해 봐요. 절대 뭐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엘 님의 정체는 바로……!”
“바로?”
“드래곤입니다!”
“풉!”
요란한 소리가 터졌다. 옆에서 물을 마시고 있던 ―드래곤―라피스가 먹던 걸 그대로 뿜어내는 소리였다. 바로 근처에 있던 아스와 알리사가 기겁하며 머리를 털어내느라 부산을 떨었다.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된 현장을 향해 혀를 쯧쯧 차준 다음 나는 다시금 아셀을 돌아보았다. 그는 자신만만하게 서서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다. 만화나 영화를 보면 진실을 밝혀낸 명탐정이 꼭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 같다.
“드래곤이라…….”
뭐, 확실히 드래곤도 다 할 수 있는 일들이긴 하지. 마족과 유니콘에 이어서 자연스레 떠올릴 만한 조합이기도 했다. 실제로 진짜 드래곤이 섞여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거기까지 생각하고 보니 새삼 우리가 평범한 구성은 아니었구나 싶다. 남들은 평생 가도 만나보기 힘들다는 희귀한 종족들을 한꺼번에 모아둔 조합이라니. 일부러 이렇게 모으려고 해도 모으기 힘들지 않을까 싶다. 덕분에 바람 잘 날이 없으니 마냥 좋다고 여길 수도 없지만.
“내가 드래곤인 것 같아요?”
“후후, 그렇습니다. 엘 님의 머리색과 눈동자 색이 푸른 것으로 보아 블루 드래곤이시라 사료됩니다. 덧붙여 왜 이사나 폐하 곁에 계신 건지도 알 것 같습니다.”
“흐음. 계속 말해 봐요.”
“실은 이곳에 건너오자마자 파다하게 퍼져 있는 소문 하나를 들었거든요.”
“소문?”
“유카르테 대공의 기사이자 소드 마스터인 카리브디스 공작이 드래곤을 쓰러트렸다고 하더군요. ‘악룡을 쓰러트린 영웅 카리브디스!’라며 찬양하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던지요. 엘 님도 그 소식을 들으신 겁니다! 그래서 동족의 원수를 갚기 위해 그의 정적인 이사나 황제 폐하를 돕기로 결정하신 거죠!”
“……빌어먹을 메테.”
얼굴을 왕창 찌푸린 라피스가 씨근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그 형님 이름이 메테인 모양이구만. 소문에 연루된 드래곤이 누구인지 모를 수가 없어서 나는 피식 웃었다. 한창 신나서 떠들던 아셀이 그런 나를 보고 이내 시무룩해졌다. 내가 이 상황을 그저 재밌어하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아닙니까?”
“글쎄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아, 정말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저 이러다 궁금해서 잠도 못 잘 겁니다.”
“하하, 미안해요. 알려줘도 딱히 상관은 없는데 나 하나로 끝낼 문제가 아니라서요. 아셀이 말을 옮길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이건 나보다는 이사나한테 물어보는 게 좋겠어요.”
“예? 왜 그걸 황제 폐하께……헉! 역시 그분과 계약한 관계인 거군요!? 설마 엘 님도 마족이신 겁니까?”
“그러니까 이사나한테 가서 물어보래두요.”
거듭된 거부 표현에 아셀도 더는 조를 수 없었는지 매달리는 것을 포기했다. “그럼 저 정말로 폐하께 가서 여쭤볼 겁니다! 그래도 되는 거죠?” 대신 다른 의사를 확인하기에 그러라고 했더니 그걸로 만족한 것 같았다.
직후 아셀은 정말로 이사나에게 가서 물어보겠다며 사라졌다. 알리사와 시벨리우스가 그 뒤를 냉큼 뒤따라갔다. 이사나 쪽에서 솔직하게 대답하든, 아니든, 여러 가지로 복잡해질 그를 구경하고 싶어진 것 같았다. 몇 사람이 곁을 떠나자 시끄럽던 주위가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그래서일까.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왠지 허전한 감각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오는 것 같았다. 그런 나를 향해 라피스가 묘한 시선을 보내왔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
“누구?”
“너.”
“내가? 별로, 아무렇지 않은데.”
“근데 왜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데?”
“어? 그랬나?”
의식하고서야 얼굴이 굳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누군가로 인한 감정 문제는 아닌 것 같고, 그냥 전체적으로 몸 상태가 저조해 활력이 떨어진 기분이었다. 그런데 정령왕도 활력이 떨어질 때가 있던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대부, 기분 안 좋아?”
걱정하는 아스를 향해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고 있으려니 축 처지는 감각이 조금은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런 걸 보면 확실히 지금 기분이 안 좋은 걸지도 모르겠다.
“으음, 그보다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 너무 오랫동안 한 곳에 발이 묶여 있는 것 같지 않아? 왠지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아.”
“지금 답이 나왔는데 뭘 궁금해해.”
“답이 나오다니?”
“이쪽의 진군을 막는 것 자체가 목적이겠지.”
라피스가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