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313)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313화(313/608)
제313화
“……원인을 없애야 해.”
스스로 묻고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그게 정말로 자신이 내린 결론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지금 당장 주군을 괴롭히고 있는 원인을 없애야 했다. 그러면 그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다. 이전의 강건하고, 아름다웠던 저의 주군으로.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존경받을 수밖에 없었던 고결한 모두의 제왕으로.
“그러니 황제를 죽여야 한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생겼었더라? 아마 금발에 푸른색 눈동자였던 것 같다. 나이가 어떻게 되었었지? 기억이 맞다면 지금 십 대 후반쯤 되었을 터다.
카리브디스는 홀린 듯이 몸을 일으켜, 비척비척 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 건지 본인도 몰랐다. 제 손에 어느새 검이 쥐어져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그 검신이 시리듯이 새하얀 빛을 품고 있다는 것 역시.
모든 것을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
당신이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난 무엇이든 해요.
……그렇지요, 미네르바 님?
* * *
“아.”
내딛던 발걸음이 멈췄다. 앞서 걷는 이를 따라가던 여인이 이동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 뒤에는 지금까지 걸어온 길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을 부른 것 같았는데, 착각이었을까? 여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앞서 있던 남자가 여인의 걸음이 멈춘 걸 느끼고 물었다. 여인은 어떻게 설명할지 망설이다 그냥 솔직하게 대답했다.
“……무언가가 저를 부른 것 같았습니다.”
“아아.”
남자는 상황을 바로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는 한동안 그런 느낌을 계속 받으실 겁니다. 당신의 영향을 받아 신관들이 태어나고 있을 테니까요.”
“아, 그런 거군요.”
“예, 상급신은 영향력이 크다 보니 사명을 받는 신관의 숫자도 그만큼 많습니다. 그래서 임기 초반에는 그 감각에 적응하시느라 고생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당신도 그 점은 미리 각오해 두시는 게 좋으실 겁니다.”
그 말과 함께 남자가 여인의 모습을 새삼 다시 살폈다. 우유처럼 티끌 없이 새하얀 피부. 그와는 반대로 어깨 아래까지 내려온 긴 머리카락은 밤하늘보다 깊은 검은색이었다. 단아하게 드리운 속눈썹 아래 투명하게 반짝이는 화려한 눈동자는 라벤더를 연상시키는 보라색. 모양 좋은 입술은 잘 익은 복숭아보다 더 깨끗한 분홍빛을 머금었다. 우아하고 기품 있는 그녀의 성정을 고스란히 드러낸 조합이라고, 남자―아레히스는 속으로 남몰래 생각했다.
“페르데스 님.”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이름에 여인의 표정이 어색해졌다. 사실 이름만이 아니라 자신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이 낯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다른 호칭으로 불리는 것이 더 익숙한 존재였다. 바람의 정령왕 미네르바. 자연을 관장하는 최고위 지체 중 하나이자, 정령계를 다스리는 네 명의 왕 중 하나. 인간에게는 영겁에 가까운 세월을 살면서 꽤 많은 것들을 보고 경험했었다. 그런 그도 신이 된 것은 처음이다 보니 생경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 탓에 긴장하고 있는 그녀와는 달리, 안내를 맡은 아레히스는 시종일관 싱글벙글한 얼굴이었다.
‘죽음과 망자(亡子)의 여신 페르데스.’
신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새로운 직함을 갖게 된 그녀는 부여받은 명칭에 걸맞게 명계에 배속되었다. 정령왕 출신의 상급신이다 보니 중급신인 아레히스보다 당연히 직분도 높았다. 그에겐 모셔야 할 상사가 늘어난 셈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미네르바 출신은 대체로 명계에 배속되시죠. 요즘 같은 때에 임기가 끝난 정령왕이 마침 미네르바라니. 제가 당신을 뵙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르실 겁니다. 지금 명계는 손 하나가 아쉬울 지경이라고 말씀드려도 과언이 아니거든요.”
“일이 꽤 많나 보군요.”
“말도 마십시오. 원래도 바쁜 편이긴 합니다만 최근엔 정말 심각할 정도입니다. 이유는 페르데스 님도 아실 겁니다. 현 엘퀴네스 님의 탄생이 늦어진 것과 관계된, 모종의 일들 말입니다.”
한층 진지해진 음성에 맞춰, 페르데스 역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왕으로서 마지막 남은 기간. 누군가와 거의 어울리는 일 없이 온종일 바람의 영역에서만 머무르긴 했지만 시야를 아예 닫아 두고 있던 건 아니었다. 아크아돈을 장악하고 있는 큰 사건들과 동료들에게 벌어지고 있는 상황 정도는 어느 정도 파악해 두고 있었다. 부족한 부분은 명계에 도착한 이후에 아레히스가 직접 설명해 준 바였다.
“정말 악신이 태어나는 겁니까?”
“저도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돌아가는 상황이 그다지 좋다고는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일단 최고신들이 상급신분들과 협력하여 포획 봉인진을 구축하고 있는 중이긴 합니다.”
“소멸이 아니라 봉인진인가요?”
“사로잡아 정화한 후에 제거하는 것이 우선 목표입니다. 그게 실패하면 소멸진을 짜겠지만요.”
“그렇군요.”
“가급적이면 지금 준비하는 것이 통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악신을 소멸시키는 건 저희 쪽에서도 실이 매우 크거든요. 듣기로는, 상급신 하나가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 같습니다.”
“……그럴 수가.”
“그 때문에 얼마 전 만약을 대비해 적합자를 선정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운명의 여신이 직접 주관하셨고, 몇 가지 해당 조건을 추려내셨죠. 그렇다 해도 워낙 추상적인지라 많은 것들이 불분명하긴 합니다만.”
설명하는 아레히스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린 표정이라 페르데스는 의아해졌다.
“아레히스?”
“아, 죄송합니다. 잠시 생각이 많아져서…….”
“뭔가 문제가 생겼습니까?”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아마 적합자 조건 중에 ‘아버지’가 들어가서 그런 것 같은데.”
대답을 이은 건 다른 목소리였다. 놀라서 고개를 돌린 페르데스는 기둥 뒤에 서 있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훤칠하게 큰 키며, 여러모로 풍채가 좋은 남신이었다. 어깨를 살짝 덮은 새카만 흑발, 그보다 더 짙은 흑안이 몹시 강렬해서 멀리서도 눈에 띌 것 같았다.
“카, 카노스 님.”
당황한 아레히스가 외친 말이 아니었더라도, 페르데스는 그의 정체를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전신에서 느껴지는 섬뜩하리만치 거대한 신력. 이만큼이나 강대한 권능을 가진 건 마신뿐일 테니까.
“새로운 상급신이군. 만나서 반가워, 페르데스.”
“……반갑습니다.”
유쾌하게 건네 오는 인사에 페르데스도 마주 화답했다. 마신 카노스는 워낙 두문불출하여 만나기가 쉽지 않다고 들었다. 그런 그를 신계에 오자마자 보게 되다니 얼떨떨한 마음이 컸다. 조금 전에 그가 했던 말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 묻는 것보다 카노스의 용건이 이어지는 것이 더 빨랐다.
“오자마자 미안한데, 힘 좀 보태줬으면 좋겠어.”
“예?”
“상황은 들었을 거 아냐. 봉인진에 들어가야 하는 신력이 좀 많이 부족하거든.”
“헉!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카노스 님! 설마 이제 막 태어나신 페르데스 님까지 합류해야 하는 겁니까?”
흘러가는 사태를 짐작한 아레히스가 황급히 끼어들었다. 이미 그 봉인진에 수많은 인력을 빼앗긴 참이었다. 페르데스가 나타나 겨우 한숨 돌리나 했더니 그나마도 다시 빼앗길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렇게 됐어. 그러게 그전의 정령왕들도 신이 되도록 잘 설득해 주지 그랬어. 그럼 상급신 숫자가 이렇게 부족하진 않았을 거 아냐.”
“아니, 하지만 그땐 권고할 일이 아니었는걸요. 상황이 갑자기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안 되겠으면 지금이라도 흩어져 있는 놈들을 모아오든가.”
“모아오라니! 인세에 있는 신의 영혼들의 생명부를 강제로 지워서 데려오란 말씀이십니까? 그 원망을 어떻게 감당하라고요!”
“안 돼?”
“당연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럼 어쩔 수 없네. 역시 페르데스를 데려가는 걸로 합의할 수밖에.”
“……!”
두말할 여지없는 아레히스의 패배였다. 비틀거리면서 무너지는 그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페르데스를 향해, 카노스가 빙글거리고 웃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래? 도와줄 거야?”
“……알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착한 아이로군. 협조적이라서 다행이야. 뭐, 아니어도 해야 했을 테지만. 내가 요즘 인내심이 짧아져서 쓸데없는 데 시간 소비하고 싶진 않았거든.”
필요하다면 강제로 끌고 갔을 거라는 말이군. 그 말뜻에 들어있는 의도를 모를 수가 없었기에 페르데스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마신의 드높은 악명은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본 그는 생각하는 것보다도 위험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럼 이 기특하고 쓸모 많을 것 같은 망자의 여신은 내가 인계받는 걸로 하지. 딱히 쓸데없는 아레히스 넌 이만 가 봐도 좋아. 명계 인력이 가장 많이 빠졌으니까 지금 엄청 바쁠 거 아냐.”
“그걸 알고 계시면서 이러시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정말 너무 하십니다.”
“흐음. 잊고 있는 모양인데, 아레히스. 지금 봉인진의 중심핵을 만들고 있는 게 섀넌이거든? 얠 데려가야 걔가 더 편해져. 지금도 거의 다 죽어가고 있는데 완전히 골로 보내주고 싶어? 뭐, 어떤 의미에서는 예언이 맞아떨어지는 셈이겠네.”
“……그럼 페르데스 님, 부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넙죽 인사를 한 아레히스가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그 빠른 태세 전환에 페르데스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곧 ‘섀넌’이 누군지 깨닫고 납득했다. 마신 카노스, 천신 이오웬, 운명의 신 라데카와 더불어 모를 수가 없는 명계의 신이었다. 명계에 소속되어 있는 상급신은 그 외에도 여럿이 있지만(상급신이 배속된 비율이 가장 높았다) 섀넌은 명계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보니 명계인이라면 모두가 그를 흠모하고 추앙한다고 들었다. 지금 아레히스의 태도를 보니 확실히 그런 것 같았다.
“지금 상관을 위하는 마음이 지극하다고 생각했지?”
“네? 아…….”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페르데스는 고개를 들었다가 카노스와 시선을 마주하고 흠칫했다. 인상이 차가운 편이라 그런 걸까. 표정은 부드러운데 그다지 온화한 느낌은 아니었다. 짓고 있는 미소조차 내심을 감추는 수단으로만 보였다. 거기에 타고난 기세 자체가 날카롭다 보니 시선을 맞출 때마다 날에 베이는 기분이 들었다. 상급신인 그가 이럴 정도면 다른 자들은 그 앞에서 발언하는 것도 힘겨울 것이다. 조금 전까지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던 아레히스가 대단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것을 억누르기 위해 페르데스는 생각을 몇 번이나 정리해야 했다. 그녀의 굳어 있는 표정을 보고 카노스가 묘하게 웃었다.
“내가 불편한가 보네.”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아. 오히려 미안하지. 요즘 내 기분이 좀 안 좋아. 그래서 평소보다 기운을 잘 제어하지 못하고 있어. 이해해 주면 고맙겠어.”
양해를 구하긴 하지만 딱히 이해 안 해 주면 뭐 어쩌겠냐는 투였다. 페르데스는 그 점을 지적하고 싶었지만 구태여 말씨름을 하고 싶지는 않아 차분히 인내했다. 그녀는 몰랐지만, 카노스가 무엇보다 가장 환영하는 자세였다.
“미네르바들은 이래서 좋아.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선 밖으로 일을 키우지 않거든. 아레히스도 그 성정을 물려받아서 그런지 눈치가 꽤 좋은 편이지.”
“……물려받았다고요?”
“역시 모르고 있었구나? 아레히스 저 녀석, 중급신치고는 담력이 꽤 크지 않아? 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래.”
“무슨…….”
“섀넌의 아들이야.”
“……!”
생각지도 못한 사실에 페르데스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섀넌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지만, 그 아들이 아레히스라니 더 충격이 컸다. 그러고 나니 카노스가 처음에 등장하면서 했던 말도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적합자 조건에 ‘아버지’가 들어간다는 것에…….”
“라데카의 운명의 시계가 점지한 마지막 사항이라더군. ‘아버지’라고는 하지만 딱히 성별을 지정한 의미는 아닐 거야. 누군가의 부모에 해당하는 자들은 지금 다 찝찝한 기분이겠지. 누군가를 부모로 둔 이들도 그렇고. 그걸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빌어먹을 녀석도 있긴 하지만.”
“……?”
마지막 문장에 사감이 깊게 서렸다고 느낀 건 페르데스만의 착각이 아닐 터였다. 의아해져서 고개를 들자 싸늘하게 식어 있는 카노스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린 것처럼 의식적으로 짓고 있던 미소는 어느새 지운 채였다.
“너, 엘뤼엔과 동시대의 미네르바지?”
“네, 그렇습니다.”
“지금 그 녀석, 엘을 찾으러 떠난 거 알아?”
“……네?”
“엘은 악신과 가장 밀접하게 엮여 있는 존재나 다름없어. 그 녀석은 엘을 지키려고 간 거야. 그 거침없는 성격에 무슨 짓이든 불사할 게 분명해.”
“그 말뜻은…….”
“부모라는 게 꼭 핏줄이 이어진 관계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닐 테지.”
가만히 숨을 멈춘 페르데스의 눈동자에 동요가 일었다. 카노스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녀 또한 알 것 같았다. 아마도 엘이 가장 바라지 않는 결과일 것이라는 것도.
“그건, 안 됩니다. 엘은 크게 상처받을 거예요. 대체 엘뤼엔은 무슨 생각으로…….”
“그 말, 엘뤼엔을 만나면 꼭 해줘.”
씩 웃은 카노스가 페르데스의 머리를 문질렀다. 기특한 꼬마 아이를 대하는 듯한 태도에 페르데스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항의로 이어가진 못했다. 곧 이어진 나직한 음성 때문이었다.
“염려할 거 없어. 그렇게 놔두진 않을 테니. 나도 더는 잃을 생각 없거든.”
속삭이듯이 울리는 목소리는 몹시 작아서 귀를 기울여도 잘 들리지 않았다. 그저 혼잣말일 뿐, 애초에 누군가에게 전하려고 하는 말이 아닌 것 같았다. 그 자신에게 하는 다짐 같기도 했다.
“……카노스?”
조심스러운 부름에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하늘을 향하는 시선이 텅 빈 것처럼 공허했다.
“잃어가는 건 이제 지긋지긋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