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317)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317화(317/608)
제317화
때마침 스치는 바람이 울컥거리는 속을 진정시켰다. 정확히는 더는 생각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창문으로 바짝 다가가 고개를 내밀었다. 올려다본 하늘은 오늘따라 희뿌연 색깔을 띠고 있었다. 세차게 휘몰아치는 바람의 조짐이 그리 좋지 않았다.
“대부, 왜 그래?”
하늘을 주시하는 내 표정이 많이 심각했는지 아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왔다. “아니, 별거 아니야.” 바로 대답하면서도 여전히 하늘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별거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렇게 말해야 속이 나아질 것 같았다. 팔자에 액운이 끼었나? 요즘 들어 연달아 되는 일이 없는 것 같다. 한숨을 내쉰 다음 다시 의자에 걸터앉았다. 표정이 굳어 있는 나를 다들 유심히 지켜보는 것이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폭탄을 대비하는 모습이라 입 안이 씁쓸했다.
“일단 레이의 보호자를 찾아봐야겠어.”
“보호자?”
“레이한테 어머니가 있었어. 남편 없이 홀로 아들을 키우고 있던 여인이었지. 하지만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겠어. 아니, 아마 죽었을 거야.”
“그걸 어떻게 아는데?”
“레이가 너무 빨리 나이아스와 만났어. 내가 계획한 대로라면 조금 더 성장한 후에 계약했어야 하거든. 아무래도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아. 봉인이 풀릴 정도면 꽤 큰 충격을 받았다는 뜻인데, 이만한 아이가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이라면 부모의 죽음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
“그럼 고아라는 거잖아. 보호자를 찾을 것도 없는 거 아냐?”
“근데 또 그런 것치곤 영양 상태가 꽤 좋아. 어머니와 있었을 때보다도 더 건강해진 것 같아. 치아와 손톱도 관리가 잘 되어 있어. 입고 있는 옷도 고급스럽고.”
“따로 보살피는 사람이 있었다는 말이군.”
어렵지 않게 이어진 결론에 고개를 끄덕였다. 데르온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어왔다.
“아이를 원래 보호자에게 보내시려는 겁니까? 귀한 정령이 희생해서 살려낸 아이인데, 그냥 돌려보내시는 건 아쉽지 않으시겠습니까?”
“그야 아쉽기는 하죠. 마음 같아선 내 쪽에서 거두고 싶어요. 하지만 레이도 그걸 원할지는 모르는 거잖아요. 내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깨어나면 분명 보호자부터 찾을걸요? 정령도 잃었는데 또다시 소중한 걸 잃게 할 순 없어요. 아무래도 낯선 사람보다야 아는 사람하고 지내는 게 정서적으로도 더 좋을 거고요.”
“흠, 그건 틀린 말씀은 아니긴 합니다만.”
납득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데르온은 내키지 않아 하는 얼굴이었다. 왠지 나보다 그가 더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북공작이 되어서 그런가, 양육 문제에 상당히 예민해진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내겐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대공 쪽 말씀이십니까?”
“뭐, 그것도 그렇지만.”
휘이이―
다시금 스치는 바람이 뺨을 간질였다. 얼굴이 저절로 굳어지려고 해서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부터 굉장히 바빠질 것 같거든요.”
* * *
“블레스터?”
되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느낌이라 아예 지붕 위에 올라선 참이었다. 가장 높은 곳에서 바람을 맞고 있으려니 이질감이 더 확실히 느껴졌다. 내 옆에서 덩달아 바람을 맞고 있는 라피스도 한가득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 바람의 검이 폭주를 시작했다는 말이지?”
“응, 공기의 흐름이 심상치 않아. 자연스러운 느낌이 아니야.”
“확실히 날카로운 느낌이긴 해. 이건 바람이라기보다는 살기에 더 가깝네. 이보다 더 강해지면 사람도 벨 수 있을 것 같은데?”
“같은데? 정도가 아니라 그게 정말 현실이라는 게 문제야. 내버려 두면 걔가 지나는 곳마다 다 쑥대밭이 될걸. 그야말로 움직이는 재해가 되는 셈이지.”
“그럼 그 전에 잡으면 되잖아.”
뭐가 문제냐는 시선에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게 말처럼 쉬우면 애초에 내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지도 않을 거란 걸 왜 모르는 거냐고 말해 주고 싶었다.
“어딨는지 알아야 잡지. 이 기운이 어디서 시작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는데 잡을 수 있을 리가 있나.”
“그게 말이 돼?”
“숨어 있단 말이야! 걘 지금 미네르바의 고유 능력을 공유하고 있다고! 그것도 정령들의 눈을 피하는 쪽으로 특화됐어! 차라리 폭주가 완전히 진행된 상태면 드러날 텐데, 지금은 그 정도가 아니라서 오히려 안 보여!”
“그럼 폭주가 완전해질 때를 기다렸다가 잡으면 되겠네.”
“안 돼! 그럼 완전히 오염돼서 더는 손 쓸 수 없는 상태가 된다고! 정화고 뭐고 시도할 기회도 없이 그냥 소멸시켜야 한단 말이야!”
“어쩌라는 거야.”
“나도 몰라! 그래서 지금 화내는 거잖아!”
분을 못 이긴 외침에 라피스는 할 말을 잃은 얼굴을 했다. 이 순간에도 바람 속에 섞인 미묘한 이질감이 나를 마구 자극하고 있었다. 왕이 아닌 존재가 왕의 힘을 사용한다는 것. 그에 대한 본능적인 거북함이 일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왜 그동안 정령들이 블레스터를 멀리했는지 알 것 같았다. 자신과 기본적인 형태가 다른 것에 대한 태생적인 거부감. 인간이 벌레를 보면서 혐오감을 느끼는 것과 거의 비슷한 심리였다. 전생에 바퀴벌레를 끔찍하게 싫어했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부득부득 이가 갈렸다.
“아, 젠장. 지금쯤이면 미네도 느꼈을 거야. 가만히 있어도 모자랄 판에 있는 대로 왕을 자극하다니! 아무리 전대의 부탁이 있어도 미네가 마음을 바꿔서 멸하기로 결정하면 나도 어쩔 도리가 없단 말이야. 하긴, 제정신이 아니니까 폭주한 거겠지만! 지금까진 기미도 없더니 왜 갑자기 진행이 빨라진 거야?”
“걱정하는 건지 화를 내는 건지 모르겠는데. 네 성격이 점점 더 거지 같아진다는 건 알겠어.”
“죽을래?”
싸늘하게 노려봤지만 라피스는 시큰둥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약삭빠른 녀석은 상황을 수습하는 것도 능숙했다. 곧바로 질문을 건네어 화제를 전환하는 바람에 응징할 겨를도 없이 대화가 이어져나갔다.
“숨어 있으면 지금은 얌전하다는 소리야? 아직은 괜찮다는 뜻?”
“어? 으음, 아니. 이미 충분히 위험한 상태야. 폭주를 가속화하기 위한 행동을 하려 테니까.”
“그게 뭔데?”
“살인.”
의외의 대답이었는지 라피스의 눈이 살짝 커졌다.
“피를 묻힐수록 사기가 더 강해지니까. 마검화된 정령에겐 최고의 먹이지. 본능적으로 사람을 죽이려고 할 거야.”
“그럼 그 흔적을 찾아가 보면 되겠군요.”
설명은 라피스에게 했는데 반응은 전혀 다른 쪽에서 돌아왔다. 돌아보자 그림처럼 고요히 서 있는 데르온의 모습이 보였다. 그 옆에는 아스도 함께한 채였다. 바람에 섞인 기운을 쫓아다니느라 어느새 두 마족이 지붕 위로 올라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도심이니 살인 사건이 일어나면 소식이 빠르게 퍼질 겁니다. 어쩌면 저희들 쪽으로 유인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유인이요?”
“마족의 기운은 사기와 제법 비슷하니까요. 흩뿌리고 있으면 기운을 느끼고 홀려서 올 수도 있습니다.”
“아.”
그런 방법은 생각해 보지 못했다.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자 아스가 빙긋 웃었다. 그가 보란 듯이 손바닥을 펼쳐 기운을 끌어올렸다. 섬뜩한 한기가 스치는 듯한 느낌이 확실히 사기랑 많이 비슷했다. 이 정도면 반 미쳐 있는 정령 정도는 충분히 속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부터 저희가 주위를 돌아다니면서 기운을 흘려 보겠습니다. 정령검 쪽도 지금쯤이면 감각이 상당히 예민해져 있을 테니 조금 떨어져 있더라도 반응해 올 겁니다. 흔적을 찾는 대로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아, 그럼 나도 같이…….”
“아뇨. 이 계획에서는 엘 님이 떨어져 계시는 게 나을 겁니다. 정말 성공할지도 확신할 수 없고, 그쪽에서 왕의 기운을 느끼고 달아날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레이라는 소년 곁에 있을 사람도 필요하잖습니까?”
확실히 그게 맞는 말이긴 했다. 나는 억지를 부리지 않고 얌전히 물러나는 쪽을 택했다. 신세를 지는 상황에서 민폐까지 될 생각은 없었다.
“라피스. 드래곤의 마력도 사기만큼이나 훌륭한 자극제죠. 당신은 협조해 줘야겠습니다. 빠져나갈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쳇.”
은근슬쩍 물러서고 있던 라피스가 덜미를 잡히곤 나직하게 혀를 찼다. 그 모습에 피식 실소가 흘러나오는데 옆에서 누군가가 나를 폭 끌어안는 것이 느껴졌다. 누군지는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알았다. 내게 이런 식으로 접촉해 오는 사람은 아스뿐이었으니까.
“그럼 다녀올게, 대부. 좋은 소식 들고 올게.”
“응, 고마워, 아스. 혹시 모르니까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
“응응. 성공하면 칭찬해 줘야 해?”
“당연하지. 성공 안 해도 칭찬할 거야.”
“헤헤.”
귀엽게 웃는 아스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 주었다. 이젠 제법 큰 상태다 보니 더는 어린아이로 보이는 모습은 아니었다. 아마 정신 연령 또한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 앞에선 귀여운 대자로 남아 있어 주는 아스가 기특하고 대견했다.
“잘들 논다. 야, 빨리 안 와? 날 부려먹는 만큼 너희들은 두세 배로 힘써야 할 줄 알아.”
멀찍이서 라피스가 팩 소리를 질렀다. 떨떠름하게 아스를 떨어트린 뒤 나는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지금 생각난 건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라피스만큼은 내 성격에 대해 뭐라고 하면 안 돼. 지가 제일 성격 더러우면서.”
“대부도 참. 그런 당연한 소리를 왜 하고 그래.”
“그치?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당연하지.”
아스가 반짝거리는 얼굴로 상큼하게 웃었다. 보는 사람마다 감탄할 것 같은 천사의 미소였다.
“은인은 솔직히 말해서 재수 없어.”
……아무래도 우리들 중 가장 최강은 아스인지도 모르겠다.
* * *
기세 좋게 나선 것과는 다르게 세 사람은 며칠간 아무 소식도 전해 오지 않았다. 한동안은 근방에서 얼쩡거리는 것 같더니 어느새 더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꽤 멀리까지 나간 것 같았다. 그동안에도 레이는 계속 잠들어 있었다. 신체 기능엔 모두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 좀처럼 의식을 차리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새로운 심장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인지 깨어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았다.
레이가 의식을 차린 건 일행들이 블레스터의 행방을 찾아 떠난 뒤, 사흘째가 된 날이었다. 옅은 신음 소리가 들려서 침대 쪽으로 다가가자 꿈틀거리고 있는 레이가 보였다. 평온하던 얼굴이 한껏 찌푸려지더니 눈꺼풀이 파르르 흔들렸다. 천천히 올라가는 속눈썹 밑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눈동자는 새순을 닮은 녹색을 띠고 있었다. 회갈색인 아이의 머리색과 상당히 잘 어울리는 색이었다. 초점 없이 흐릿하기만 하던 눈동자가 점차 선명해지는 것을, 나는 잠자코 지켜보았다. 이윽고 완전히 떠진 커다란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응시해 왔다.
“안녕.”
“…….”
웃으며 말을 걸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처음 레이는 이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멍한 표정으로 눈을 몇 번이나 깜빡이던 아이가 내게서 시선을 떼어내고 천천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천장과 벽면 쪽을 한 번씩, 발끝 쪽도 내다보고는 마지막으로 다시 나한테 다시 시선을 보내왔다.
“……누구세요?”
“난 엘이라고 해. 네 엄마 친구야.”
“엄마…… 친구?”
경계하는 듯 보였던 아이가 그 말에 눈을 크게 깜빡였다. 뚜렷하게 흔들리는 표정 위에 그리움과 슬픔이 차오르는 걸 보고 나는 내 짐작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정말, 우리 엄마 친구예요?”
“응. 네 이름은 레이지? 엄마랑 단둘이 살았었고.”
“……네.”
“우리 예전에 한 번 본 적 있어. 넌 기억 못 하는 것 같지만.”
“그렇구나. 근데 제가 왜 여기에 있어요?”
“혹시 잠들기 전에 뭐 했는지 생각나는 거 있어?”
“잠들기 전에요?”
레이는 조금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 갔다. 깊은 잠에서 막 깨어난 참이라 그런지 생각을 정리하는 게 힘들어보였다.
“아저씨 친구가…… 데리러 왔었는데.”
“아저씨 친구?”
“네에. 아저씨가 급하게 절 찾는다고 했어요. 데려다준다고 해서 따라갔었어요. 마차를 탔는데…… 그동안 린이랑 같이 있어도 된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린이랑 같이 놀았어요. 근데 아저씨 친구가 캄캄한 곳으로 데려갔어요.”
설명하는 어조는 차분했지만 두서없는 내용이라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캄캄한 곳으로 데려갔다는 자가 대공 쪽이라는 것만은 알 것 같았다. 데려다주겠다며 꾀다니. 정말 뻔한 수법의 납치였다.
“으음. 아저씨는 누구고, 린은 누구야?”
“아저씨는 날 구해 준 사람이에요. 나중에…… 아, 아버지가 되어 준댔어요.”
“역시 보호자가 있었구나. 그럼 린은?”
“린은 내 친구예요! 요정이에요. 엄청 예쁘게 생겼어요.”
굳어 있던 레이의 얼굴에 처음으로 환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요정이라는 말을 들으니 누구를 말하는 건지 감이 잡혔다. 아마도 나이아스에게 붙여준 이름인 듯했다. 이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얼굴을 보니 얼마나 깊은 애정을 주었는지 알 것 같았다. 씁쓸한 기분을 삼키는데 레이가 나를 빤히 응시해 왔다. 초롱초롱한 눈빛이 아스를 떠올리게 해서 웃음이 나왔다.
“왜?”
“린이랑 닮은 것 같아요.”
“나 말이야?”
“네. 진짜 많이 닮았어요. 머리카락이랑 눈 색도 똑같이 파랗고. 요정처럼 예뻐요. 린이 보면 신기해할 거예요. 린 불러도 돼요?”
“응? 아니, 그건…….”
“린! 나와 봐! 린, 어딨어? 린!”
벌떡 몸을 일으킨 아이가 열심히 주위를 향해 소리쳤다. 물론 그 대답에 린이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해맑던 레이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기 시작했다.
“……린?”
“레이. 미안해. 린은 이제 오지 못할 거야.”
더는 지켜볼 수가 없어서 나는 곧 사실을 털어놓았다. 레이가 멍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린이 못 와요?
“응.”
“……왜요?”
“린이…… 바쁜 일이 생겼거든. 그래서 멀리 가야 했어.”
내 딴에는 충격을 덜 주기 위해 돌려 말한 거였다. 하지만 레이에겐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동요를 담은 눈이 빠르게 깜빡거리더니 잠깐 사이에 구슬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반응에 당혹감을 느끼고 있는데, 이어지는 말이 더욱 당황스러웠다.
“혹시요. 린이, 죽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