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321)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321화(321/608)
제321화
“방해가 되는 건……모두 없앤다.”
사납게 흘러나오는 음성은 짐승이 으르렁 거리는 소리를 연상시켰다. 그와 동시에 손안의 감각이 허전해졌다. 그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공작이 공간 이동을 한 거다. 가볍게 혀를 찬 후 나는 곧바로 그의 공격 방향으로 이동했다.
쿠우웅!
이번에도 물로 장벽을 만들어 공격을 막아냈다. 사납게 떨어지던 칼날이 로란의 코앞에서 멈췄다. 으득 이를 가는 소리와 함께 맞은편으로 착지한 공작이 나를 노려보았다. 두 번이나 공격이 가로막히자 드디어 나를 제대로 인지한 것 같았다. 떨고 있던 소녀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혼절했다. “로란!” 울음을 터트린 에리나가 얼른 그녀를 받았다. 다행히 에리나는 조금 전보다는 상황을 판단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내가 눈짓을 보내자 그녀는 얼른 로란을 부축해서 틈새의 공간으로 물러섰다.
“크으으!”
울분의 신음을 터트린 공작이 내게 사나운 살기를 보내왔다. 하지만 잔뜩 성이 난 그만큼이나 나 역시 더는 그를 지켜볼 여유가 없었다. 상대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조금 전 사라지던 것을 시작으로 그의 전신에서 본격적으로 바람의 힘이 개방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스멀스멀 기분이 나빠졌다. 감정에 치우치면 손속이 지나쳐질게 뻔하다. 실수로 소멸시키기 전에 얼른 제압해야 할 것 같았다.
“감히 내 앞에서 왕의 힘을 써? 넌 정신 차리면 한 대로 안 끝날 줄 알아.”
가볍게 웃어준 다음 슬슬 몸을 풀었다. 꽤 느닷없는 조우이긴 했지만 덕분에 찾는 시간을 아끼게 됐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행운이었다. 자신을 앞에 두고 여유로운 내 모습이 이상했던 걸까? 검을 겨누고 있던 공작의 표정이 갑자기 흐트러졌다. 새삼스럽게 경계하는 시선에 조금 전에는 없던 초조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 반응이 의미하는 바가 뻔했다.
“이제야 날 알아봤나본데. 이미 늦었어.”
손을 들어 올리자 굳어있던 공작이 움찔하더니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이번에야말로 예상했던 반응과 같아서 헛웃음이 나왔다. 역시나 그대로 달아나려는 모양이었다.
“날 화나게 하지 마, 진. 지금도 엄청 참고 있거든?”
그러니까 그냥 얌전히 잡혀라. 눈으로 보낸 경고에 공작의 몸이 더욱 움찔거렸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녀석은 편한 길을 택할 마음이 없는 듯했다. 이를 악문 공작이 그대로 검을 치켜들더니 바닥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그러자 우르릉 울리는 진동과 함께 바닥이 쩌저적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서 쏟아지는 바람의 폭풍이 온 사방을 휘몰아쳤다.
“어디서 이딴 허접한 수작을!”
당연한 말이겠지만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시도였다. 그러나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인데, 힘을 겨루기에 건물 안은 그리 좋지 않은 장소였다. 여러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건 곧 예기치 못한 복병이 일어날 가능성이 많다는 의미기도 했다. 이어진 상황이 바로 그런 경우 중 하나였다. 공격 범위 안에서 뜻하지 않은 기척이 느껴진 것이다.
‘이런!’
익숙한 기척은 다름 아닌 레이였다. 낭패감에 돌아보자 문을 열고 나오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 근처에서 소음이 일어나니 궁금해서 나와 본 것 같았다.
“……아저씨?”
이쪽을 발견한 아이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수초가 흐르는 동안 나는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어차피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조금 떨어진 상태이긴 했지만 충분히 크게 다칠 만한 거리였다. 연약한 아이의 몸으로는 죽을지도 몰랐다. 나는 빠르게 이동해서 레이를 잡아챈 다음 몸을 감싸 안고 굴렀다. 놀란 아이가 나를 꽉 붙잡는 것이 느껴졌다.
“레이, 괜찮아?”
거센 폭풍은 곧 잦아들었다. 바람이 흐려지는 것이 느껴지자마자 곧바로 아이의 상태부터 살폈다. 품안에 안겨 있던 레이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조금 놀라기만 했을 뿐 별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았다. 그에 안심하고 나니 이번엔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라도 쓰린 기분을 감출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아아.”
공작이 사라져 있었다.
머릿속에서 1차전 패배를 알리는 경적 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아주 잠깐의 틈이었지만 바람의 검이 다시 몸을 꽁꽁 숨기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아무래도 그를 잡는 건 다음을 기약해야 하려는 모양이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더 골치 아파진 것만은 분명했다.
* * *
“바보냐, 너?”
머리 위에서 가차 없이 떨어지는 냉소에 속이 뜨끔해졌다. 평소였다면 울컥했을 말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나도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팔까지 잡고 있었다며. 그럼 일단 제압부터 했어야지. 빠져나가는 걸 그냥 가만히 보기만 하는 것도 모자라서 놓치기까지 해? 방심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아예 그놈한테 미리 서신이라도 보내지 그랬냐? 너 잡으러 왔으니까 얼른 멀리 달아나라고.”
사실에 입각하여 쏟아지는 타박은 구구절절 옳기만 해서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물론 맞는 말이라고 기분이 안 나쁜 건 아니라 굳은 표정까지는 숨기지 않았다. 차마 (싸우게 될까 봐) 시선을 들지도 못하고 애꿎은 바닥만 노려보는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응시하던 라피스가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 넘겼다.
“솔직히 말해. 그냥 잡을 생각이 없는 거지?”
“아, 아냐. 물론 처음에 내가 좀 방심하기는 했어. 솔직히 걔가 그렇게까지 날 무시하고 행동할 줄은 몰랐단 말이야.”
“그게 자랑이냐? 왕씩이나 돼 가지고 하위 정령한테 우습게 보인 게 자랑이야?”
“우습게 보인 거 아니거든! 걔가 날 못 알아본 거라고! 그 녀석이 이상한 거야! 알아본 후에는 몸 사렸어! 그러니까 도망을 갔지!”
“아, 그러세요? 알아보고 달아나서 참으로 뿌듯하시겠습니다?”
“비꼬지 마. 나도 충분히 열 받으니까.”
사실 상황이 이렇게 돼서 가장 화가 난 사람은 바로 나일 거다. 잡을 수 있는데도 놓쳤다. 그건 생각보다 더 억울하고 허탈한 기분이었다. 지금도 그 순간만 생각하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라피스 말대로 보자마자 바로 제압부터 했어야 했다. 날 알아보지 못하는 게 당황스러워서 좀 더 지켜보려던 게 괜히 사건만 더 키웠다. 대체 왜 그렇게 여유를 부렸을까. 놈이 빠져나갈 틈을 내어 준 것도 황당했고, 대응해 오기 전에 미리 선수를 치지 못한 것도 어이없었다. 방심이 가장 큰 적이라더니. 그걸 이렇게 온몸으로 실감하게 될 줄이야. 아무래도 오늘 일은 두고두고 창피한 기억으로 남게 될 것 같았다.
“그래도 흔적을 찾아낸 게 어딥니까. 지난 며칠간 저희 중 아무도 성공하지 못한 일을 엘 님은 바로 해내셨네요.”
한숨만 푹푹 쉬고 있으려니 덤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라피스가 잔소리를 퍼붓는 동안, 문 옆에 서서 귀를 후비고 있던 데르온이었다. 위로하려고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위안이 됐다.
“맞아. 우린 아예 도움도 되지 않았잖아. 계속 엉뚱한 곳만 찾아다니고 있었는걸. 그러니까 은인도 이제 그만해.”
내 옆에 앉아 있던 아스도 본격적으로 내 편을 들고 나섰다. 그에 대해서만은 라피스도 할 말이 없었는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흩어져 있었던 일행의 재회는 불과 몇 분 전에야 이뤄졌다. 장소는 기존에 머무르고 있던 여관 안. 내 쪽에서 모두의 위치를 찾아낸 다음 시큐엘을 전령으로 보내 귀환하도록 연락했다. 아직 수도에 있는 공작을 며칠간 잡아내지 못했다는 건 지금 쓰는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의미였으니까. 굳이 아까운 기력을 낭비해 가며 지금의 방식을 지속할 이유가 없었다.
공작저에서는 혼란한 틈을 타 적당히 빠져나왔다. 레이는 마침 달려오던 집사에게 떠넘기듯이 맡겼다. 다행히 다들 상황을 파악하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상태였기에 아무도 내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부서진 곳이 많은 데다가 공작을 본 목격자가 있으니 한동안은 쉽게 정리가 되지 않을 거다. 나중에 레이에게나 한 번 들러보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아저씨였어요.”
토끼 눈을 한 채 멍하니 말하던 아이가 생각나서 다시 한숨이 흘러나왔다. 상당히 정신없는 상황이었는데도 레이는 공작의 모습을 정확히 알아보았다. 공작 쪽에서 레이를 알아봤을지는 알 길이 없지만. 멈칫하는 기색도 없이 그대로 달아난 걸 보면 미처 못 봤을지도 모르겠다.
“방금 그거 아저씨가 한 거예요?”
저택을 파괴할 만큼 강렬한 공격을 퍼부은 사람이 제가 아는 아저씨라는 사실에 레이는 상당히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공작의 편을 들 생각은 없었지만, 아이의 안정을 위해서 나는 얼른 고개를 저어야 했다.
“네가 잘못 봤을 거야.”
“그치만 얼굴이 같았는걸요.”
“머리 색이랑 눈동자 색도 같았어?”
“그건…… 아니요.”
“그것 봐. 다른 사람이야. 세상엔 닮은 사람이 얼마든지 있거든.”
거듭 강조하는 말을 듣고서야 레이는 겨우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다른 목격자인 로란과 에리나도 최종적으로는 그저 닮은 사람이라고 여기게 될 가능성이 컸다. 사람은 믿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싶어지는 법이니까. 기존과 다른 새하얀 머리색과 눈동자가 훌륭한 핑계거리가 되어 줄 것이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데?”
“그거야 다시 찾아야지.”
이어진 라피스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당연한 걸 왜 묻냐는 의미를 담아 바라보자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사기로 유인하는 방법은 안 된다며. 다른 방도가 있는 거야?”
“보아하니 공작 쪽의 의식이 좀 강한 것 같더라고. 경계가 더 심해지긴 했겠지만 본래 목적을 금방 내려놓지는 않을 거야. 그걸 이용해 보면 되지 않나 싶어.”
“흐음, 금발 벽안을 노린다고 했나? 뭐, 그건 그렇다 쳐도……수도 안에 같은 조건을 갖춘 사람만 해도 수두룩할 텐데. 그중 누구에게 나타날지 어떻게 알고?”
“그거야 나도 모르지. 그래도 이 시기에 대놓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목표가 있다면, 그쪽을 노리려고 하지 않을까?”
“그 말인즉.”
“라피스, 마법으로 머리랑 눈 색 바꿀 수 있지?”
웃으며 묻는 말에 라피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또 미끼가 되라는 말이군. 뭐, 마력으로 유인하나 외형으로 유인하나 그게 그거니까 아무래도 상관없긴 한데. 나만 부려 먹혀지는 건 싫은데?”
“그게 무슨 말이야?”
“뭐긴. 저 마족들 건 변형이 안 된다는 뜻이지.”
“어? 정말?”
놀라서 돌아봤더니 데르온이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족의 머리카락과 눈 색은 일종의 표식 같은 거라서요. 어떤 방법으로도 바뀌지 않습니다. 머리야 가발로 덮을 수 있다 쳐도, 눈동자 색은 건드리기 어려울 겁니다.”
“아, 그렇군요. 그건 생각하지 못했네요. 할 수 없지. 일단 두 명으로 시도해 보죠, 뭐.”
“두 명?”
“나 말이야. 내 머리 색은 바꿀 수 있어?”
의아하게 돌아보던 라피스가 잠시 입을 닫았다. 당황해서가 아니라 곧장 계산부터 해보는 것 같았다. 데르온과 아스가 흥미진진한 눈으로 이쪽을 주시했다.
“안 돼?”
“아니. 가능성을 묻는 거라면 가능하긴 해. 그리 오래 지속하진 못하겠지만.”
“얼마나 지속할 수 있는데?”
“길어봤자 반나절 정도.”
“흠. 그 정도면 괜찮을 것도 같은데. 일단 바꿔 줘.”
우선은 다녀보다가 마법이 풀리면 다시 걸어달라고 하면 될 거다. 나름의 결론을 내린 후 부탁(이라기보다는 요구 같았지만)하자 라피스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근데 넌 그 녀석이 알아보지 않겠어? 이미 한 번 접촉도 했다며.”
“괜찮을 거야. 블레스터가 살짝 맛이 간 상태라 그런지 내 기운도 얼굴도 확실히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더라고. 머리 색만 바꿔도 느낌이 좀 달라지잖아? 지금 그 녀석이라면 속일 수 있을지도 몰라.”
“흐음. 대책 없는 말이긴 한데, 일리는 있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이후 라피스가 가볍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변화는 그 즉시 일어났다. 그의 손이 마치 붓이라도 되는 것처럼, 닿은 부분에서부터 붉은 머리카락이 천천히 화사한 금색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이루고 있는 색이 눈앞에서 서서히 다른 색으로 바뀌어 가는 건 기대 이상으로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머리 위에서 시작된 변색이 순식간에 아래로 뻗어 나가며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빈틈없이 금색으로 채웠다. 얼굴을 쓸어내리자 눈썹과 속눈썹 또한 차례대로 같은 색으로 변했다. 대미를 장식한 건 그 아래 자리 잡은 눈동자였다. 손끝이 스치는 것과 동시에, 루비처럼 붉디붉은 눈동자가 짙푸른 사파이어의 색으로 변한 것이다.
일련의 과정을 끝마친 라피스는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인상이 되어 있었다. 그저 머리와 눈 색만 바뀌었을 뿐인데 심하다 싶을 정도로 느낌이 달랐다. 이제까지가 화려하고 강렬한 태양의 군주였다면, 지금 눈앞의 그는 우아하고 고결한 달의 기사 같았다. 한참을 빤히 바라본 끝에 나는 진지한 결론을 내렸다.
“……마법 소녀 변신 과정 같네. 아니지, 이 경우에는 마법 소년인가. 소년치곤 너무 크니까 마법 청년……?”
“뭐?”
“아무튼 놀라워. 왜 사람들이 변신한 마법 소녀를 못 알아보는지 알겠어. 안면인식장애라고 비웃었는데 지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뭔 소리야?”
“너 분위기가 엄청 달라져서 몰라보겠다고.”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던 라피스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내 위대함을 이제야 깨달았냐는 듯한 표정이라 나는 감탄하던 기분을 빠르게 날려버렸다. 저 녀석은 기껏 쌓은 점수를 왜 유지하지 못할까. 저것도 재주라면 재주인 것 같다.
“자, 너도 바꿨어.”
“아, 고마워.”
그나마 인정할 수밖에 없는 녀석의 장점을 꼽자면 실행력이 빠르다는 점일 거다. 그의 말에 돌아보니 어느새 내 머리카락 색이 변해 있었다. 하늘을 닮은 푸른색이 사라지고 펄을 뿌린 것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연한 꿀 색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대부는 금발도 잘 어울리네.” 아스의 칭찬에 기대감이 솟았다. 마침 근처에 큰 전신 거울이 있어서 그 앞에 서 보니 평소의 푸른 머리칼이 아닌 금발을 한 내 모습이 보였다. 둘 다 밝은 계열이기 때문인가? 내 경우엔 머리 색이 바뀌어도 라피스만큼 극단적으로 다른 느낌은 아니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분위기가 변하긴 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