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334)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334화(334/608)
제334화
“그렇게 된 거구나. 이제 좀 이해했어.”
지난 설명을 들은 알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을 뒤죽박죽으로 만들던 혼란은 그사이 한결 가라앉아 지금은 꽤 많이 괜찮아졌다. 그녀로 인해 덩달아 긴장했던 이사나도 덕분에 여유를 되찾아가는 중이었다.
“근데 시체는 다 어딨어? 내 눈엔 하나도 안 보이는데?”
“그 뒤에 깨끗한 곳으로 장소를 옮겼거든.”
“왜 바로 진영으로 돌아가지 않고? 지금쯤 다들 걱정하고 있을 텐데.”
“처음엔 그럴 생각이었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를 찾으러 나온 쪽과 길이 어긋날 거래. 그래서 그냥 얌전히 기다리기로 했어. 그때까지 두 분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기로 하셨고.”
“흐음.”
바람도 일지 않는 고즈넉한 공간에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만 두런두런 울렸다. 엘뤼엔과 트로웰은 대화에 참여할 의사가 없어 보였고, 함께 잡혀온 나머지 두 남자는 아직 깨어나지 못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모든 일이 해결될 때까지 강제로 깨어나지 않을 예정이었다. 알리사는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는 두 남자를 향해 안쓰러운 눈길을 보낸 다음, 엘뤼엔과 트로웰이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각자 떨어진 곳에 기대어 서서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잠들었을 리는 없으니 명백하게 시간을 때우는 모습이었다.
“우릴 찾는 사람들이 언제쯤 도착할 것 같아?”
“글쎄, 오래 걸리진 않을 거라고 하셨는데…….”
“아침이 되기 전엔 오겠지?”
“아마 그렇지 않을까?”
그렇게 얼마나 더 쑥덕거리고 있었을까. 알리사는 문득 자신의 뺨을 간질이는 공기를 느꼈다. 무언가가 팔랑거리면서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빛을 쫓아온 벌레인가 싶었는데, 붙잡고 보니 느낌이 조금 이상했다. 바스락거리면서 뻣뻣한 게 살아 있는 생명체에게선 느낄 수 없는 질감이었다. 조심스럽게 들여다본 끝에 그 정체를 확인한 알리사가 눈을 크게 떴다.
“……종이?”
“왔군.”
반응은 전혀 다른 곳에서 돌아왔다. 어느새인가 눈을 뜬 엘뤼엔이 어딘가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건 트로웰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시하는 방향은 빼곡하게 들어찬 나무 사이, 더 정확히 말하면 가지들이 늘어진 위쪽이었다. 이사나와 알리사가 덩달아 그곳을 바라볼 때였다.
“알리사!”
그와 거의 동시에 가지 사이에서 누군가의 모습이 튀어나왔다. 흐트러진 은발이 달빛 아래 화려하게 나부꼈다. 긴 창을 움켜쥔 시벨리우스였다. 한눈에 정체를 알아본 알리사가 반색했다.
“시벨 씨!”
이사나도 반가움에 손을 흔들려 했다. 그러나 분노에 눈이 돌아간 시벨리우스에겐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다른 판단을 할 겨를도 없이, 지면으로 하강하는 짧은 시간 동안 그의 눈이 제 일행과 그렇지 않은 쪽을 빠르게 구분했다. 진격 방향은 바로 정해졌다.
“이 자식들!”
두 손으로 치켜든 창에서 매서운 파공음이 울렸다. 중력에 내리치는 힘까지 더해진 공격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빨랐다.
“어? 자, 잠깐만……!”
뒤늦게야 사태를 파악한 알리사와 이사나가 당황한 얼굴을 했으나 이미 막기엔 늦은 상태였다. 경악한 그들이 다급한 숨을 삼켰을 땐 응징의 창날이 떨어진 뒤였다.
그 순간, 동요 없이 서 있던 트로웰이 움직였다.
쿠웅! 콰아앙!
대치가 일어난 자리에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람이 해일처럼 몰아쳤으나 그뿐이었다. 진동이 사라진 곳엔 무기를 맞댄 두 사람의 모습만 남았다. 아무도 다치지 않은 평화로운 결말이었다.
이사나와 알리사는 안심했지만, 시벨리우스에겐 예상을 벗어난 전개였다. 그는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채 경계심을 더 높였다. 직전까지 무기가 없는 걸 확인했는데 어느새 상대의 손에 검이 들려있었다. 그래 봤자 금방 나가떨어질 줄 알았더니 의연히 받아내기까지 했다. 심지어 받아내는 힘이 생각했던 것보다 강했다. 손바닥 안으로 가해지는 묵직한 압력은 평범한 인간이 낼 힘이 아니었다. 조금만 방심했다면 나가떨어지는 건 오히려 자신이었을 것이다. 상대의 체구가 소년처럼 가늘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 이해할 수 없었다.
“다짜고짜 창부터 휘두르다니. 손버릇이 나쁘네, 너.”
“뭐야?”
감히 납치범 주제에, 라고 대꾸하려던 마음은 눈앞에 있는 이를 확인하자 그대로 사그라졌다. 부드러워 보이는 흑발, 그 아래 조각처럼 자리 잡은 황금안을 마주한 그때, 시벨리우스는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너……!”
숨도 쉬지 못한 채 굳은 그를, 트로웰 또한 흥미로운 눈으로 살폈다. 상황 판단도 하지 않고 곧바로 돌진부터 하는 얼간이가 누군가 했더니, 그 정체가 꽤 의외였다.
“블루 엘프? 아닌데. 이게 어디서 느껴본 기운이더라. 아아, 유니콘인가? 아직 남아 있는 성마가 있는 줄 몰랐어.”
“뭐?”
“맞잖아? 유니콘.”
“…….”
혼란으로 요동하던 눈동자가 차분해졌다. 시벨리우스는 그때까지 맞대고 있던 창을 내리고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공격 의사를 포기한 행동에 트로웰도 순순히 검을 내렸다. 가벼이 어깨를 으쓱이는 그 모습을, 시벨리우스는 말없이 찬찬히 훑어내렸다. 눈이 망가진 게 아닌 이상에야 잘못 봤을 리는 없지만 그래도 확인해야 했다.
“너, 트로웰이지?”
“제법인데? 맞췄어. 어떻게 알았지? 한눈에 알아보긴 어려울 텐데.”
대답은 선뜻 이어졌다. 빙긋 웃는 얼굴엔 이 상황을 재밌어하는 기색만 가득했다. 그 태도가 드러내고 있는 사실은 명백했다. 긴장한 눈으로 그의 행동을 하나하나 면밀하게 주시하던 시벨리우스가 결국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뭐야.”
벌어진 입에서 허탈한 숨이 흘러나왔다. 남아 있던 희미한 기대감이 그대로 흩어지는 소리였다.
“너도 날 몰라?”
아득해지는 정신을 다잡느라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발밑이 푹 꺼지는 듯한 절망감에 야금야금 삼켜지는 것 같았다.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고 심지어 싫어하기까지 한 정령왕이었지만 그가 거짓말을 하진 않는다는 건 알았다. 그 성격에 굳이 숨기거나 감춰야 할 필요를 느낄 리도 없었다. 그러니 저를 처음 보는 듯이 신기해하는 태도는 진심일 터였다. 그렇기에 더 비참했다.
“또, 나만 기억하는 거야?”
어쩌면, 정말로 모든 게 제 착각과 망상에 불과한 건 아닐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트로웰은, 그만은 반드시 알고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그에게서도 자신의 흔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지워진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새겨진 적조차 없는 것인지, 그 무엇도 분명하지 않았다. 이제 와선 자신의 기억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조차 알 수 없게 된 느낌이었다.
“흐음……?”
혼이 빠진 듯한 얼굴로 망연히 서 있는 그를 트로웰은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이미 오래전에 신계로 떠난 유니콘이 아직 남아 있는 것도 이상했는데 저를 대하는 태도는 더 이상했다. 한눈에 정체를 알아보는 것도 그렇고, 스스럼없는 말투 또한 아는 이를 대하는 투다. 하지만 아무리 되짚어 봐도 기억에 없는 이였다.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선 습관적으로 행하는 버릇이 튀어나오기 마련이라, 그는 곧바로 힘을 개방했다. 색이 짙어진 금안이 상대의 생각을 투시하는 것을 넘어 단숨에 그 과거까지 파고 들어갔다. 그러나 늘 명쾌한 해답을 안겨 주던 능력이 이번엔 그다지 소용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이상한 녀석이네.”
트로웰은 입가에 머금고 있던 미소를 천천히 지웠다. 눈앞의 이를 응시하는 눈길이 차게 식어 갔다.
“망상이 지나친 건가 했더니 그게 아니잖아? 정말 날 알고 있어.”
“……!”
죽은 생선처럼 생기 없던 눈동자가 그 말에 반응해 빛을 품었다. 황급히 바라보는 그를 느릿하게 살핀 트로웰이 탐색하는 어조로 물었다.
“우린 4천 년 전에 만난 적이 있었어. 그것도 꽤 여러 번. 맞아?”
“마, 맞아! 기억나?”
“아니. 전혀.”
“아…….”
“하지만 네가 기억하는 장소와 시각에 내가 거기 있었던 건 맞아. 마주치지 않았다면 이상했을 정도로.”
“……!”
시무룩해지던 얼굴이 다시 급격하게 밝아졌다. 희망에 벅차오르는 표정을 보자 기분이 더 가라앉았다. 트로웰은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그래, 마주치지 않는 게 이상할 만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러나 절 기억하는 상대와는 반대로 자신의 기억엔 그가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얼핏 본 것도 같긴 했다. 하지만 그가 기억하는 것처럼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아니, 조금은 말을 섞기도 했던가. 그런데 무슨 이유였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트로웰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고 머리를 흔들었다. 실밥이 터진 것처럼 중간중간 기억의 연결이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정령왕인 그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자각하기 전까진 그게 잘못된 건지도 모르고 있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상대에게서 익숙한 흔적을 발견하는 건 몹시 낯설고 불쾌한 감각이었다. 통제를 벗어난 무언가가 멋대로 자신을 휘어잡고 헤집는 것 같았다. 모르는 혼에 씌어 강제로 의식을 지배당한 것 같기도 했다. 처음 일어난 일이라도 불쾌했을 텐데, 공교롭게도 그는 얼마 전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
“……그래, 그렇군. 넌 그때 그거랑 관계있구나.”
“뭐?”
“「엘」”
“……!”
뜻밖의 단어에 시벨리우스가 크게 숨을 삼켰다. 트로웰은 경직된 그 반응을 천천히 살폈다. 초조해진 시벨리우스가 안달이 날 정도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다음 말이 이어졌다.
“그 이름을 지닌 이가 누군지, 넌 알고 있어.”
“너……!”
그 말을 듣는 순간, 시벨리우스는 소름이 돋으며 온몸이 전율하는 것을 느꼈다. 입을 뻐끔거렸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알리사와 이사나는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서로를 바라보았다. 왠지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은데 끼어들 수가 없었다.
<……로웰.>
문득 귓가를 스치는 음성에 트로웰은 얼굴을 굳혔다. 의식이 순식간에 과거로 빨려 들어가며, 낯설면서도 익숙한 잔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트로웰!>
눈에 익은 얼굴을 한 이가 자신을 향해 웃었다.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그는 마치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처럼 반색하며 온몸으로 기쁨을 표하곤 했다. 그리운 광경에 자신도 모르게 따라 웃으려다, 트로웰은 흠칫 놀라 입술을 악물었다.
뭐지? 이 기억은 뭐야. 내게 이런 기억은 없었다. 이런 기억은 없었는데…….
<내가 어떻게 하면 돼, 트로웰? 어떻게 하면 될까. 뭐든지 할게. 네가 시키는 일은 전부 다 할게. 제발, 그러니까 제발……!>
시간은 순식간에 건너뛰어 다른 현장으로 의식을 인도했다. 이번엔 제 앞에서 울고 있는 그였다. 무릎을 꿇다시피 몸을 굽힌 이에게서 애원하는 말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자신은 그 모습을 보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땐 그랬었다. 아무리 절박하게 매달리고 빌어도, 그의 감정은 자신과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그의 아픔에 공감할 일도, 그 슬픔이 제 것이 될 일도 없었다. 그에게 제가 했던 매몰찬 대답도 기억났다.
<넌 결국 아무것도 구하지 못할 거야.>
외면하고 또 외면해도 자꾸만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그가 신경에 거슬려서 일부러 더 상처를 줬다. 뻔히 보이는 예언인 것처럼 가장하여 잔인한 말만 골라 읊었다. 그런 저를 창백한 얼굴로 바라보던 그가 서글프게 웃었다.
<나도 예언 하나 할까?>
<……뭐?>
<너와 난 언젠가 정말 많이 친해질 거야. 위험에 빠지면 가장 먼저 떠올리고, 할 일을 젖혀두고 기꺼이 구하러 가는 그런 사이가 될 정도로 말이야.>
<무슨 헛소리를…….>
<우연히 만나면 우리는 너무 기뻐서 웃음을 감추지 못하겠지. 내가 아끼는 이라는 이유만으로 넌 내 일행을 존중할 거고. 내게도 네가 아끼는 이들을 소개해 주겠지. 서로를 가장 친한 친구이자, 형제라고 여기게 될 거야.>
<그러니까, 지금 네가 뭐라고 말해도 난 상처 받지 않아.>
“…….”
고작 몇 분의 시간이 몇 년은 된 것 같았다. 긴 한숨을 내쉰 후 트로웰은 천천히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일그러졌던 표정은 다시 평온을 되찾은 채였다.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좀처럼 짐작할 수 없는 무심한 표정에 시벨리우스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러나 트로웰의 관심은 이미 그를 떠나 다른 곳을 향한 상태였다. 강한 빛을 품은 금안이 조금 떨어진 장소를 노려보자 그곳에 서 있던 남자가 시선을 느끼고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그제야 그의 존재를 눈치챈 시벨리우스가 얼굴을 굳혔다.
“엘퀴……아니, 형벌의 신 엘뤼엔?”
상급신인 그가 왜 지상에 있단 말인가. 돌아가는 상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시벨리우스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문득 지난날에도 자신들이 이런 식으로 종종 마주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기억 속 주체라 할 수 있는 이들이 과거와는 다른 모습을 한 채 같은 구도로 서 있는 건 무척이나 기묘한 기분이었다. 덕분에 그 자리에서 상념에 빠진 그였으나, 트로웰이나 엘뤼엔이나 그 반응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엘뤼엔, 넌 다 알고 있었지.”
“뭘 말이지?”
“균열. 네가 먼저 언급한 거잖아.”
“짐작만 했을 뿐이다.”
“웃기지 마. 너도 저 녀석의 기억을 봤다면 바로 눈치챘을 텐데? 지금은 신이니까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온전하지 않은 기억은 듬성듬성 구멍이 나 있었다. 모르고 있을 땐 몰랐기에 넘어갔지만, 되짚으려 하면 충분히 깨달을 수 있을 정도의 위화감이었다. 저도 깨달은 사실을 신인 그가 알아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예상과 다른 답이 흘러나왔다.
“안 봤다.”
“……기억을 안 봤다고?”
“관심 없으니까.”
단호한 대답에 트로웰이 눈빛이 복잡하게 일렁거렸다. 어처구니없고 황당하긴 한데 지극히 그다운 답변이라 화조차 나지 않았다. 그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라, 이미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바이기도 했다. 트로웰은 무어라 말하려다 말고 그냥 한숨을 토해냈다.
“그만 가자. 일정을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아.”
“드디어 날 방해할 생각을 완전히 접은 모양이지?”
“……엘을 만나봐야겠어.”
서로 시선이 맞닿은 건 잠시에 불과했다. 짧은 침묵 후, 엘뤼엔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