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336)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336화(336/608)
제336화
게다가 내 경우엔 선택지가 더 까다로웠다. 늘 내 몸처럼 착용하고 다니는 서클렛이며 장갑 한쪽을 반영해야 했으니까. 이건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보니 처음부터 고수하고 들어갔는데, 덕분에 황성의 시녀들은 나를 꽤 예민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된 듯했다. 목욕할 때도 씻는 것 자체는 시중을 전부 거절하고 혼자 해결(?)하고 나온 상태라 더 그랬다. 다행히 그런 문제로 실랑이가 벌어지지는 않았으나, 그만큼 제한되는 부분이 생기는 바람에 시간이 더 걸리게 된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어머나, 정말 아름다우세요.”
“…….”
호들갑스러운 소리에 고개를 들었을 땐 거울 속엔 낯선 이가 존재하고 있었다. 분명 내 얼굴 그대로이건만 아무리 들여다봐도 생전 처음 보는 이였다. 굳어버린 나와는 다르게 제 작품(?)을 바라보는 시녀들의 눈길엔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
“워낙 외모가 고우셔서 조금만 꾸며도 빛이 나네요.”
“오늘 연회에 오시는 영식들이 모두 아가씨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실 거예요.”
“…….”
칭찬 아닌 칭찬을 들으려니 표정이 저절로 썩었다. 거울 속의 낯선 이도 따라서 얼굴을 구겼다.
의상은 수 벌을 입어본 끝에 장갑과 위화감이 거의 없는 물색의 드레스로 정해졌다. 가슴이 없는 체형(이프리트처럼 만들어 볼까도 했지만 차마 거기까진 시도할 자신이 없어서 그냥 그대로 뒀다)을 보완하기 좋도록 상체에 프릴과 리본이 잔뜩 들어가 있고, 허리에서부터 곧장 펼쳐지는 치마가 몇 겹의 레이스 천으로 이뤄져 있는, 한눈에도 무척이나 화려한 형태의 드레스였다. 팔꿈치까지 내려오는 소매는 풍성하게 부풀어 있는 편인데도 속이 얼핏 비치는 재질이라 답답해 보이지 않았다. 이 부분이 특히 장갑의 재질이랑 느낌이 비슷해서 마치 처음부터 맞춤복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인상을 줬다.
목걸이를 비롯한 장신구는 서클렛에 맞춰 그와 같은 색의 보석으로. 구두 역시 같은 색으로 준비됐다. 머리는 둘레만 땋아 가볍게 모양을 내고 나머지는 풀어내리는 쪽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화장에 관해 설명할 땐 솔직히 무슨 말을 하는지 내용의 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알아듣는 언어로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외계어를 듣는 기분이었다.
여하튼 이 모든 과정이 완료되기까지 그야말로 영겁에 가깝게 여겨졌다. 실제로도 엄청난 시간이 흘러 있어서, 창밖을 확인하니 어느새 해가 저물어가는 상태였다. 차림을 돕는다는 핑계가 필요했다고는 해도 굳이 꼭두새벽부터 찾아올 필요가 있었나 싶었는데, 과연 그럴 만했다. 그야말로 세상은 넓었으며, 내가 모르는 세계는 심오했다.
‘여자들은 정말 대단해.’
체험해 보기 전까지는 드레스가 이렇게 불편하고 무거운 건 줄도, 화장이란 게 이만큼이나 갑갑한 느낌인 줄도 전혀 몰랐다. 라피스가 굳이 이 현장에 날 끌어들인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이걸 혼자 하려니 진짜 억울했을 거다. 그렇다고 용서가 되는 건 아니었지만!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라피스가 보이지 않았다. 의상을 입어보기 시작할 때 다른 곳으로 이동했던 것 같은데 워낙 정신이 없어서 기억이 고르지 않았다.
“저…….”
“예, 아가씨. 뭔가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신가요?”
친절하게 웃어 보인 시녀가 눈빛을 빛냈다. 금방이라도 화장 도구를 다시 가져올 기세라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 아뇨! 저기, 제 누나, 아니, 언…… 후우, 동생은……?”
“아, 자매분도 다 되셨어요. 그런데 그분이 동생이셨어요? 전 아가씨가 더 어리신 줄 알았는데.”
“아하하…….”
“내가 왜 네 동생이야?”
때마침 양반은 못 되는지 그 자리에서 반박이 이어졌다. 지친 기분으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나는 그대로 굳었다. 내 모습도 그렇지만, 드레스를 입은 라피스도 정신건강에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직접 고른 드레스를 입은 그는 깔끔하게 머리를 틀어 올린 모습이었다. 장신구와 보석은 현재 금발인 머리칼 색에 맞춘 화려한 금색. 목과 어깨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상아색 드레스가 흰 피부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남성이었을 때도 방심하면 감탄이 나왔던 미모가 선이 더 고와지고 한껏 꾸미기까지 하니 파급력이 엄청났다. 그래 봤자 라피스였지만.
“……그냥 동생 해.”
“웃기시네. 나이를 먹어도 내가 너보다 천 배는 더 먹었거든?”
“정신 연령이나 천 배로 높이시지.”
“이미 그런 것 같은데?”
“하하하! 뭔가 큰 착각을 하고 계시네요. 진짜 정신 연령이 높은 사람은 말이죠. 혼자 힘든 거 하기 싫다고 물귀신 작전을 쓰지 않거든요.”
“물귀신은 너잖아.”
“죽을래?”
위험 수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대화가 오갔지만 시녀들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그저 웃기만 했다.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자매간의 신경전 정도로 보는 듯했다.
“저기, 다 됐어? 나 이제 들어가도 돼?”
때마침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우리의 유치한 다툼을 중단시켰다. 돌아보는 사이 누군가가 문을 열었고, 그 앞에 서 있던 이가 안으로 들어섰다. 짙은 검은색 연회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아스였다. 본래도 귀공자 같았던 외모이다 보니 평소보다 화려한 차림을 했는데도 위화감이 없었다. 늘 자유롭게 풀고 다니던 머리는 단정하게 묶어 뒤로 넘긴 채였는데, 그래선지 평소보다 날카로운 분위기가 좀 더 강해진 느낌이었다.
“아스 왔어?”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아스는 눈을 크게 떴다. 동요를 고스란히 드러낸 붉은 눈동자에 당혹감과 경악이 차례로 떠오르는 것을 나는 조금 심란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전생, 현생을 통틀어 인생에서 가장 한껏 꾸민 날이건만, 그게 하필 여장이다. 라피스가 워낙 태연해서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남이 보기에 충분히 기함할 모습이긴 했다.
“좀 이상하지?”
어색해져서 물었더니 아스가 정색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확실하게 부정하려는 의도는 알겠지만 그건 그것대로 기분이 좀 묘했다. 뚫어지게 응시해 오는 눈동자가 유난히 반짝거려서 부담스럽기도 했다.
“……대부, 정말 예쁘다.”
아, 그래. 고오맙다.
이 순간만큼은 아무리 상대가 아스라도 선뜻 웃어줄 수가 없었다. 내가 대자를 잘못 키웠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시름과도 같은 탄식이 일기도 했다. “야, 꼬맹이. 나는?” 그래도 라피스가 묻는 말을 외면하는 것만은 좀 기특했다.
“후후, 도련님. 호칭이 틀리셨어요. 여성에겐 대부가 아니라 대모님이라고 하셔야 해요.”
“…….”
눈치 없는 시녀 하나가 굳이 끼어들어 안 그래도 심란한 나를 더 심란하게 만들었다. 재밌다는 듯 웃는 얼굴엔 ‘대부’ 쪽이 실언이 아닐 가능성을 생각해 보는 기색은 단 한 톨도 비치지 않았다. 그 단호한 태도에 아스는 그저 묘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현명한 아이답게, 여기서 괜히 호칭을 정정해 내게 빈축을 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런데 대모를 하시기엔 아가씨 나이가 너무 어리시지 않나요? 두 분은 나이 차이도 별로 나지 않으시는 것 같은데.”
“아, 뭐, 어쩌다 보니.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요.”
의아한 시선에 대충 대답해 주고 쓰게 웃었다. 아무렇지 않게 나오는 ‘아가씨’ 호칭에 새삼 가슴이 아렸다.
사실 이 과정에 이르기까지 누구 한 명쯤은 내 성별을 의심할 줄 알았다. 일단 여성치고는 심각할 만큼 상체가 빈약하니까. 게다가 어깨 골격도 넓은 편이고 골반도 거의 없다. 체형만 봐서는 남성의 몸에 가깝다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거다. 내가 나를 남성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도 이 체형 덕분이었다. 목욕을 혼자 한 것도 몸을 감추려는 수상한 행동으로 해석할 수도 있었다. 이만하면 의심할 만한 조건은 거의 다 갖춘 셈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시녀 중 한 명은 처음에 ‘어머, 남자분인 줄 알았어요.’ 라고 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걸로 끝이었다. ‘이렇게 보니 천상 여성분이신데 제가 오해했네요.’ 이후의 말을 들었을 때 내가 얼마나 우울해졌는지, 그 기분은 평생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거다. 물론 의심을 받는 게 훨씬 더 곤란했겠지만.
사실 여성복을 입겠다는 사람을 굳이 남자로 의심하는 것도 실례되는 일이긴 했다. 시녀들로서는 이상하다는 걸 느껴도 말을 못 했을 수도 있었다. 몹시 낙관적인 생각이긴 하나 일단 그렇게 여기고 나니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어차피 위장하는 거, 이왕 할 바에는 어설픈 것보다야 완벽한 편이 낫다는 점도 기분전환에 도움이 됐다.
“이제 슬슬 출발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내려가시지요. 아래에 마차를 준비시켜 두었습니다.”
한껏 꾸며진 우리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시종장이 마침내 기다리던 말을 꺼냈다. 창문 밖으로 짙어진 석양이 어느새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별다른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짧은 순간 라피스와 아스가 나를 바라보았고,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이 본격적으로 틈타는 시각. 운명을 가르는 초읽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 * *
황성이 가까워질수록 소음이 짙어져 갔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음악 소리, 이따금 울리는 축포 소리가 잡다하게 뒤섞인 소리였다. 성의 창문이란 창문은 전부 환하게 밝혀져 있었고, 정문에서부터 길게 뻗어진 도로엔 방문객의 마차가 즐비했다. 점차 어둠 속으로 침잠해 가는 도시에서 홀로 화려하게 빛나는 황성의 모습은 몹시 이질적으로 보였다. 마치 그곳의 시간만 반대로 역행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연회장 장소는 본성의 중앙 홀이었다. 열려 있는 양 문 사이로 춤을 추는 사람들과 잡담을 나누는 사람들이 한데 섞여 있는 광경이 들어왔다. 대체로 젊은 사람이 많았고, 이제 막 시작한 탓인지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조금 어수선했다. 갑자기 여는 연회라 그저 구색 맞추기에 불과할 줄 알았는데, 참석자의 수를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컸다. 사방 곳곳에 마련된 산해진미라든가, 대규모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의 인원만 봐도 제법 신경 쓴 티가 났다.
삼삼오오 모여 떠들고 있던 자들이 막 회장에 이른 우리를 보고 멈칫했다. 떠들썩하던 공간이 조금 조용해지는 것 같았다. 술렁거리는 분위기 속에서 시종장이 문지기에게 카드 같은 것을 건넸다. 왠지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던 문지기가 허둥지둥 그것을 받아들였다.
“알바토 왕국, 미칼란 가문의 자제분들이십니다!”
곧 우렁찬 외침과 함께 회장으로 들어가는 길이 트였다. 아마도 우리 신분이 적힌 카드였던 모양이다. 나조차 처음 들어보는 신분이라는 게 문제이긴 했지만.
“저게 대체 뭔 소리야? 알바토 왕국은 뭐고, 미칼란 가문은 또 뭔데?”
주위를 의식한 채 넌지시 속닥인 말에 라피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제 물어보길래 그냥 대충 지어서 알려줬거든.”
“헐, 그래도 돼? 그거 진짜 있기는 한 거야?”
“알바토 왕국이라면 있어. 미칼란 가문 따위는 없겠지만.”
“야, 그러다 들키면 어떡해!”
“알게 뭐야. 세상에 귀족이 얼마나 많은데, 제 놈들이 전부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기겁하는 나와는 다르게 정작 일을 저지른 라피스는 태연하기만 했다. 드래곤이 유희를 즐길 때 가장 잘하는 게 바로 이런 식의 신분 세탁인데, 지금껏 들킨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어차피 오늘만 쓰고 말 신분인데 아무려면 어떠냐는 식이기도 했다.
“오늘 연회의 주인공들께서 오셨군.”
입장하고 나니 주위가 더 조용해진 것 같았다. 모세의 바다처럼 갈라지는 사람들 틈으로 우리가 완전히 진입했을 때, 회장 상석에 앉아 있던 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화려한 차림을 한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연회에 어울리지 않는 하얀 법복을 걸친 남자였다. 그 머리엔 의상과 더 어울리지 않는 왕관이 씌워져 있었다. 대공 유카르테였다.
‘이 사람이 대공…….’
단정한 얼굴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실물로 처음 접하는 대공은 그간 정령의 눈을 통해 지켜봤던 것과는 느낌이 또 달랐다. 스크린 화면으로만 보던 사람을 실제로 만난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정령의 눈으로 보는 건 그 시각의 주체인 정령들의 주관이 어느 정도 실리는 만큼, 아무래도 직접 보는 거랑은 차이가 있는 편이었다. 그래서일까. 그가 벌레 하나 죽이지 못할 만큼 선량한 인상이라는 것도, 이사나랑 빼닮았다는 것도 모두 다 알고 있는 부분인데도, 왠지 그 사실이 새삼 충격으로 다가왔다.
“대공 전하께 인사드리십시오.”
때마침 옆에서 울리는 시종장의 엄숙한 목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뒤이어 덮쳐드는 건 짙은 낭패감이었다. 인사라니, 이럴 땐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종일 치장에 넋을 빼놓고 있느라 기본적인 부분을 하나도 생각해 두지 않았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위장 신분도 바로 조금 전에 알았는데 제대로 된 인사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리는 나를 진정시킨 건 그린 듯 이어진 라피스의 목소리였다.
“제국의 영광이며 마신의 축복을 받은 아들, 태양의 자리에 오르실 이를 뵙습니다. 미칼란 가의 라즐리와 엘라, 아힐이 귀한 분께 인사드립니다. 오늘 저희를 위한 연회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가 먼저 능숙한 예법으로 인사하며 무릎을 굽혔고, 나와 아스는 그걸 대충 흉내 내어 동작만 취했다. 다행히 제법 그럴싸했는지 불쾌해하는 시선은 느껴지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대공 쪽에서는 우리가 인사를 하건 말건 아예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우리 모습을 집요하게 훑어내리기에 바빴다. 목이 마른 것처럼, 그가 느릿하게 자신의 목을 한 손으로 쓸었다.
“……이거 정말 놀랍군. 수도를 공포에 떨게 한 살인범을 잡은 자들이 대단한 미색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제 보니 그 표현도 한참 부족했던 게 아닌가? 설마하니 이렇게 아름다운 이들일 줄이야.”
“과찬이십니다. 아마도 전하께서 배려해 주신 드레스 덕을 본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감사 인사를 드리려 했습니다.”
이번에도 라피스가 유려하게 대답했다. 화사하게 웃는 얼굴에선 겸손한 대답조차 자신감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느껴질 만큼 능란한 기품이 배어났다. 지켜보고 있던 자들에게서 탄성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대공의 눈이 기분 좋게 휘어졌다.
“어린 영애가 말솜씨가 좋군. 알바토 왕국이면 여인에게도 작위를 계승하는 곳이지. 영애가 장녀인가? 부친이 매우 든든하겠어.”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전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오늘 이 자리를 견문을 넓히는 기회로 삼고 싶습니다.”
“하하, 어디 오늘뿐이겠나. 원한다면 며칠이고 머물러도 좋다, 영애. 그러고 보니 다들 아직 약관이 안 되어 보이는데. 나이가 몇이지?”
“제게 물으시는 거라면, 지난달에 열여덟이 되었습니다. 동생들과는 한 살 터울입니다.”
미리 말을 맞춰둔 것도 아닌데 막힘없이 줄줄 거짓말을 내뱉는 게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다. 저 오만방자한 성격에 안 어울리게 진짜 귀족 여성처럼 우아하고 정중하게 대답하고 있는 것도 놀랍기만 했다. 나이를 열여덟이라 밝힌 건 제물의 조건에 맞추기 위해서겠지. 그가 던진 노골적인 미끼를, 대공은 사양하지 않고 받아 물었다.
“훌륭해, 아주 훌륭하군.”
탐색하듯 살피는 대공의 눈길이 기이할 정도로 번들거렸다. 원하는 답을 들은 것이 기뻤는지 멀쩡한 척 위장하고 있던 얼굴에서 감추지 못한 광기가 비쳤다. 그러자 그게 신호라도 된 것처럼, 그를 둘러싼 독한 향수 냄새 사이로 희미한 악취가 새어 나왔다. 영혼까지 완전히 스며들어 이젠 벗겨지지 않게 된 피 냄새였다. 얼굴이 절로 찌푸려지려는데, 그걸 억지로 참으려니 경련이 일어날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은근슬쩍 날 동생으로 만들었겠다!’
슬쩍 노려보자 라피스가 비웃음으로 맞받아쳤다. 분하지만 비슷한 수법을 먼저 시도했던 건 나라서 할 말이 없었다. 하필 끼어들 수도 없는 틈에 진행하는 게 마치 ‘선공이란 이렇게 하는 거란다’라고 가르치는 듯한 느낌이라 더 약 올랐다.
나와 라피스가 서로 의미 없는 눈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동안 대공은 모두의 앞에서 우리를 소개하며 공헌을 치하했다. 구구절절 긴 말이었는데, 대충 요약하면 수도를 불안하게 만든 범죄자를 잡은 영웅들이라느니, 제국의 은인들이라는 식의 낯간지러운 내용의 열거였다. 장황한 연설의 마무리는 모두가 축배를 들어 올리는 것으로 진행됐다. 라피스는 물론 나와 아스도 술잔을 받게 됐는데, 덕분에 얼결에 마시게 된 술에선 조금 묘한 맛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