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34)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34화(34/608)
제34화
“뭐, 뭐하는 거예요? 위험하게.”
이런 산 속에 또 다른 인간이 있었을 줄이야.
찔린다고 죽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생전 처음 보는 진검에 나는 조금 당황해서 말했다. 그러자 뒤쪽에서 나를 위협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사내(목소리가 남자였기 때문이다)가 싸늘한 어조로 대꾸했다.
“질문은 내가 먼저 건넸다. 넌 누구지? 누구의 사주를 받고 이곳에 있는 거냐. 네가 안고 있는 그분에게는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무슨 짓이라니…… 그냥 잠든 것뿐인데요?”
“잠든 거라고?”
“의심스러우면 직접 확인해 보면 되잖아요. 저기, 그전에 이 칼은 좀 치우고 말하면 안 될까요?”
그러자 남자는 검을 거두더니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덕분에 제대로 보게 된 그는 조끼로 된 윗옷에 통이 큰 바지, 어깨와 팔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차림을 한 채 코끝까지 복면을 눌러쓰고 있었다. 그 때문에 얼굴을 알아보기는 어려웠지만, 존재감이 상당한 걸 보니 그저 평범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멋대로 빼앗아 가듯 이사나를 안아 들고는 다급히 녀석의 여기저기를 살피기 시작했다. 아마도 상당히 걱정하며 찾았던 듯했다.
‘헤에, 뭐야. 일행이 있었잖아.’
그런데 인제 보니 기척이 그 한 명만이 아니었다. 조금 멀리 떨어진 장소는 물론, 바로 가까운 지척에도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런 내 예상을 증명하듯 곧 수풀 사이에서 또 다른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알렉! 이사나 님을 찾았습니까?”
“아아, 페리스. 와서 좀 살펴보겠나? 의식이 없으신 것 같다.”
페리스라 불린 남자는 훤칠한 키에 마른 체구, 전체적으로 유약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였다. 지나치게 단정해 보여서 이런 험한 산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그저 한가로이 방 안에서 두꺼운 책을 펴놓고 차를 마시고 있으면 딱 어울릴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사나 님이라……. 다들 그렇게 부르는 걸 보면 꽤 신분이 높은 녀석인가 보지?’
그러자 살피는 내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정체 모를 남자의 얼굴이 더욱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재밌다’라고만 생각했을 뿐, 두렵다거나 곤란하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그동안 엘뤼엔이며 정령왕들의 존재감을 매일같이 겪고 지냈는데, 인간이 뿜어내는 위압감 정도에 기죽을 리가 없나?’
어느새 벌써 정령왕이 다 되어 버렸나 보다.
나는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사나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몸이 지친 상태라 쇼크를 일으킨 것뿐이니까요.”
“이 자식! 감히 누구의 이름을 함부로!”
“알렉! 잠시만요! 이사나 님의 상태가 이상합니다.”
흥분한 알렉을 진정시킨 것은 이어진 페리스의 한마디였다. 그는 이사나를 살피느라 내 존재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분주히 살피는 얼굴이 점점 새하얗게 질려 가는 것이 보였다.
“이런 탈진 상태라니, 서, 설마……!”
“왜 그러나, 페리스? 무언가 알아낸 것이라도?”
“큰일입니다, 알렉. 아무래도 이사나 님이 정령 소환을 시도하신 것 같습니다.”
“정령 소환?”
페리스가 죄책감을 느끼는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리자 이번엔 알렉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제 탓입니다. 제가 정령 계약에 대한 말씀만 드리지 않았어도…….”
“그게 무슨 말이지?”
“실은…… 이사나 님께서 정령 소환에 관심을 보이시기에 소환주문을 알려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걸 지금 실행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패했다는 건가?”
알렉의 질문에 페리스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사나 님은 극도의 탈진 상태로 몸 안의 마나가 거의 고갈된 상태입니다. 이것은 정령을 소환하다가 실패한 경우에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지요.”
“그, 그런……. 어째서 그런 무모한 짓을…….”
“…….”
멀쩡히 소환되어 계약까지 한 나로선 그저 황당한 심경이었다. 아니, 이봐. 왜 너희 멋대로 이사나가 소환에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눈앞에 있는 나는 대체 뭐로 보이는 거냐고?
페리스란 남자의 진단이 틀린 것은 아니다. 정령의 소환에 실패하면 그 반동으로 몸 안에 있던 마나가 급속도로 소모되어 탈진하는 경우가 일어나긴 하니까.
하지만 이것은 성공하게 돼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시전자가 지니고 있는 마나가 의식에 필요한 최소한의 수준에도 못 미치는 경우, 생명을 유지하는 마나까지 함께 소진하기 때문에 시전자는 계약에 성공하더라도 당연히 극도의 탈진 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 이사나가 바로 이런 경우였다.
그런데도 페리스가 그런 가능성을 전혀 제시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는 처음부터 이사나에게 정령 소환이 무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대체 뭐하는 녀석이기에 내 계약자를…… 어라?’
잠시간 불만스럽게 페리스를 살핀 나는 곧 눈을 크게 떴다. 그에게서 미약한 바람의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뭐야. 당신, 정령사야?”
아니나 다를까. 그의 이마에 투명하게 새겨진 소용돌이무늬가 보였다. 바람의 정령을 상징하는 인장이었다.
“어, 어떻게 그걸? 아니, 그보다 당신은 누굽니까?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지요?”
자신의 정체를 한눈에 간파한 것에 놀랐는지 그는 경직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이사나를 바닥에 눕힌 알렉이 내 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의식을 잃은 이사나 님과 함께 있었다. 수상한 녀석이야.”
“예에, 이사나 님을?”
“페리스, 이사나 님을 모시고 뒤쪽으로 피해 있어라.”
그는 나를 노려보는 상태에서 말한 다음, 다시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새하얀 검신 위에 달빛이 부서지는 광경은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멋있었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느낄 감상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는 뽑아 든 검을 내게 직각으로 겨누며 말했다.
“이런 깊은 산중에서 설마 우연히 마주쳤다고 변명하지는 않겠지. 너를 이곳으로 보낸 자의 이름을 고해라.”
“……보낸 사람 없는데요?”
“모른 척할 셈인가?”
“아니, 정말 누가 보내서 온 게 아니거든요. 정 못 믿겠으면 저기 잠든 녀석 깨워서 물어봐요. 제 말이 전부 사실일 테니까.”
“저 녀석이라니…… 설마 이사나 님을 향한 말은 아니겠지?”
“맞아요, 이사나. 여기서 잠든 사람이 저 녀석밖에 더 있나요?”
“……감히!”
―와하하하하하!
쏴아아―!
“……!”
그 순간 쾌활한 웃음소리와 함께 내 앞으로 강한 돌풍이 스치고 지나갔다.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그 사이에서 나는 반투명한 모습을 한 청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람의 상급 정령인 ‘진’이었다.
그들의 왕인 미네르바와는 달리, 바람의 정령들은 대개 성정이 난폭하고 거친 편이다. 좋게 말하면 담대하고 활기차다고 해야 하나. 어쨌거나 진은 그중에서도 유독 난봉꾼 기질이 강한 존재였다. 아무리 인간들의 눈엔 보이지 않는다지만, 정령왕의 앞을 이런 식으로 아무렇지 않게 지나갈 수 있는 정령은 아마 진이 유일할 것이다.
“우왓! 뭐, 뭐야?”
“갑자기 웬 바람이…….”
녀석이 지나가면서 일으킨 바람은 하늘을 가리고 있던 나뭇가지들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그 때문에 벌어진 틈 사이로 눈부신 달빛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덕분에 주위가 환해지자, 그제야 알렉과 페리스는 내 모습을 제대로 알아본 듯했다. 왠지 모르게 굳어진 두 남자를 향해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뜻밖의 방해꾼이 있었네요. 음, 그러니까…… 어디까지 말했었죠?”
“너, 너는 혹시 엘프인가?”
“예? 아닌데요?”
“아니라고? 아, 하긴 귀의 모양을 보니 엘프는 아닌 것 같군. 그렇다면 혹시 숲의 요정……? 아니면 달빛을 타고 내려온 신의 천사라거나……?”
“예에?”
“알렉,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방금 한 말들은 못 들은 것으로 해라. 그냥 해 본 헛소리니까.”
스스로 내뱉은 말이 민망했는지 알렉은 귓불까지 달아오른 얼굴로 연방 헛기침을 내뱉었다. 헤에, 뭐야. 그런 걸 믿는 사람이었구나. 딱딱하고 냉정한 성격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실은 감수성이 상당히 풍부한 사람인가 보다. 페리스란 그의 동료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는지 황당하게 그를 바라보다가 이제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러자 더욱 크게 헛기침을 연발한 알렉이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아, 아무튼 네 정체가 인간이 아닌 다른 무엇이라 해도 일단 수상하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 정확한 신원을 알 수 없는 자를 그냥 처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그런 의미에서 넌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와 함께 가 줘야겠다.”
“에? 당신들과요?”
“너에 대해서 이사나 님께 직접 물어보라고 한 건 바로 네가 아닌가. 그 말 그대로 해 주려는 거다. 차후 이사나 님께서 깨어나신 뒤에 네 처우를 결정하실 것이다.”
‘으음, 괜찮으려나?’
계약을 하긴 했지만, 이대로 쭉 그를 따라다니기로 한 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조금 망설였다. 유희란 것이 반드시 계약자와 함께해야 한다는 규정 같은 것이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사실 정령계로 돌아가 아직 못다 잔 잠을 더 이루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기도 했다. 그러자 내 얼굴에 서린 불만의 기색을 읽었는지 알렉의 표정이 대번에 험악해졌다.
“저항할 생각이라면……!”
“아, 아뇨. 알았어요. 에휴. 할 수 없죠, 뭐. 어차피 할 일도 없었는데 그냥 따라갈게요. 그러면 되는 거죠?”
“……이해를 잘 못 하는 모양인데, 우리가 네 신병을 구속하겠다는 소리다만?”
“네, 그러니까 따라가겠다고요.”
내 대답에 두 남자는 만족하면서도 어딘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좀 더 저항하거나 겁을 먹을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는 것이 영 껄끄러운 듯했다.
어쨌거나 그들은 나를 데리고 어두컴컴한 숲 안쪽으로 들어섰다. 혹여 중도에 도망칠 것을 우려했는지 겉옷을 벗어 둘둘 만 다음, 내 팔을 뒤에서 묶어 결박까지 한 채였다.
‘이거야 완전 죄인 취급이네.’
지금이라도 정령인 것을 밝힐까 싶었지만 나는 애써 눌러 참았다. 계약자인 이사나가 잠든 사이에 내가 먼저 그 사실을 밝혀 버리는 것이 왠지 반칙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엘퀴네스 최초의 인간 계약자인 거잖아? 좀 더 주인공 대접을 해 줘야지. 암, 그렇고말고.’
잠시 후 그들이 이른 곳은 입구가 좁아 잘 눈에 뜨이지 않는 작은 동굴 앞이었다. 그 안엔 알렉과 비슷한 덩치의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 있었는데, 하나같이 눈빛이 매섭고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알렉에게 대강의 경위를 전해 들은 그들은 단번에 두꺼운 밧줄을 가져와선 나를 둘둘 말아 동굴의 한구석에 처박아 두었다. 그리고 두 명의 보초를 붙여 번갈아 가며 나를 감시하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살벌한 협박 문구가 같이 이어졌다.
“쓸데없는 행동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다, 꼬마야. 조금이라도 수상한 짓을 했다간 이 검이 네 목과 몸 사이를 영원히 분리해 줄 테니까. 무슨 소린지 알아듣겠지?”
“……아하하, 네에.”
으음, 역시 반칙이고 뭐고 그냥 정령인 걸 밝힐 걸 그랬나? 왠지 그래 봤자 믿어 줄 것 같지도 않지만, 지조 없게도 나는 벌써 후회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사나 녀석, 대체 뭐하는 놈이기에 저런 남자들을 졸래졸래 달고 다니는 거야? 설마 산적의 아들인가?’
제대로 걸친 둥 마는 둥 후줄근한 옷차림들만 보면 가능성이 아주 없진 않은 것 같다. 하지만 그런 것치곤 그들의 행동이나 말투가 상당히 점잖았다. 육체는 균일하게 단련된 느낌이었고, 사소한 움직임에서도 절도가 느껴졌다. 마치 훈련받은 군인에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들은 기절한 이사나를 극진히 모셔 자리에 눕혔다. 그래 봤자 그냥 찬 바닥에 마른 천 하나 달랑 깔아 두었을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호사인 걸 증명하듯, 대부분의 사람은 그냥 맨바닥에 몸을 눕힌 상태였다.
군데군데 타다 만 모닥불 자국이 있는 걸 보면 아마도 이 안에서 계속 머물고 있었던 모양인데, 이제껏 뭘 하느라 제대로 된 모포 하나 준비해 놓지 않은 걸까? 시큐엘이 말했던 것처럼 마을에 내려가서는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궁금한 것투성이였지만 나는 잠자코 상황을 주시했다. 그것이 더욱 사람들의 의심을 부추긴 것 같았지만, 밧줄이 단단히 묶여 있다는 것을 몇 번이나 확인했기 때문인지 시비를 걸어오는 자들은 없었다.
계약의 첫날이 그렇게 허무하게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