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340)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340화(340/608)
제340화
“이젠 하다못해 오늘 처음 만난 인간까지 챙기냐? 자원봉사가 취미인 건 알겠는데 상황은 봐가면서 하지? 지금 네가 다른 일에 한눈팔 때야?”
“알아. 하지만 이사나의 관계자였는걸. 이왕이면 화를 피하게 해 주고 싶었어.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하여튼 그놈의 이사나. 그 녀석 일엔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기도 하지. 네 계약자는 이사나뿐이냐? 나나 그렇게 챙겨 봐.”
언젠가도 그에게서 이거랑 비슷한 말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땐 황당하다는 마음뿐이었는데, 이번엔 왠지 모르게 한구석이 찔렸다. 덕분에 대꾸하는 목소리가 절로 작아졌다.
“그치만 넌 내가 도울 일이 없잖아.”
“도울 일이 있으면 돕기나 할 거고?”
“그야 당연하지?”
“…….”
네가 퍽이나 그러겠다며 빈정거릴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라피스는 말문이 막힌 듯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내려다보는 표정이 왠지 묘했다. 그래도 짜증을 드러내고 있던 기색이 한층 누그러진 걸 보면 대답이 마음에 들긴 한 모양이다. 이럴 때만 보면 참 단순한 녀석이었다.
“어쨌든, 저놈들은 이제 신경 꺼. 네가 나서지 않아도 어차피 곧 호된 꼴을 당할 것 같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대충 알아봤는데 여기 있는 녀석들 대부분 미성년이야. 더불어 거의 공신 가문 자제들이고.”
“그게 왜?”
라피스의 설명은 이어지지 못했다. 때마침 자리를 비운 대공이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그가 나타나면서 회장에 흐르던 연주가 멈췄다. 주목을 유도하는 분위기에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대공을 향했다. 우리도 주고받던 대화를 중단해야 했다.
“다들 연회를 즐기고 있는 것 같아서 좋군.”
대공은 몹시 기분 좋은 얼굴이었다. 그가 주위를 둘러볼 때마다 여기저기서 아부의 말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어색한 태도로 시선을 피하는 이들도 있었다. 나는 그들 쪽을 유심히 주시했다.
“이렇게 좋은 날에 축배를 한 번으로 그칠 수는 없지.”
미리 준비한 건지 곧 이동식 선반에 한가득 술잔이 담겨 나왔다. 이번엔 베릴주가 아니라 다른 술이었다. 맑은 푸른색 액체가 가득 담겨 있는 잔에서 짙은 꽃향기가 진동했다. 그걸 발견한 이들의 눈빛이 단숨에 변했다.
“천향주로군요. 베릴주 만큼 좋은 술이죠.”
“역시 대공 전하께선 연회를 즐겁게 하는 방법을 잘 아신다니까요.”
사방에 술렁거림이 퍼져 나갔다. 그저 기분 탓인지 모르겠는데, 술이 나오면서부터 왠지 사람들 사이에 은근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정확히는 지나치게 끈적거린다고 해야 할까, 오가는 시선이 묘해졌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몹시 기묘한 분위기였다. 라피스한테 물어봤더니 그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천향주는 조금 특별한 성분이 있거든.”
“특별한 성분?”
“마시면 몸을 흥분시켜.”
“술이란 게 원래 다 그렇지 않아?”
“뭐, 그렇긴 하지. 근데 저건 좀 더 본능을 충동질하는 쪽이야. 외부 자극에 예민해지게 만들지. 그래서 보통은 첫날밤의 부부가 마시는 합환주로 유명해.”
“……엉?”
“미약이라고.”
……헐.
그럼 지금 연회에서 미약을 풀었다는 거야? 그리고 그걸로 축배를 들겠다고? 드디어 돌아가는 사태가 파악됐다. 저런 술을 버젓이 내놓았으니 사람들의 분위기가 기묘해지는 것도 당연했다. 건전한 만남의 장소가 갑자기 불순한 퇴폐업소로 변한 기분이었다. 내 표정에서 경악한 기분을 읽었는지 라피스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강한 미약은 아냐. 그냥 약간 성감을 돋우는 정도지. 원래 귀족 연회엔 저런 거 많이 풀려. 애들이 죄다 방탕하게 놀거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진짜 미친 거 아냐?”
“뭐, 황성 연회에서 대놓고 이러는 건 흔치 않긴 하지. 저놈의 진짜 목적도 그건 아닐 거고.”
“뭐?”
“너무 예상대로 흘러가니까 시시하다고 해야 하나. 덕분에 대응하기 편하긴 하다만.”
“그게, 무슨 말이야?”
“뭐긴.”
당황해서 물은 말에 라피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흥미롭다는 듯 선명한 빛을 머금은 그의 푸른 눈동자에 붉은빛이 살짝 감도는 것 같았다.
“기다렸던 이프리트가 왔다는 뜻이지.”
* * *
라피스의 설명은 또 중단됐다.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시종들이 모두에게 공평히 한 잔씩 술잔을 건넸기 때문이다. 회장엔 아직 남아 있는 베릴주가 넘쳐났지만, 대공이 직접 권한 술을 마다하고 다른 걸 마실 이가 있을 리 없었다. 곧 회장에 있는 모든 이들이 술잔을 받게 됐다. 멀리서도 짙었던 꽃향기가 가까이 다가오니 더 감미로웠다. 과연 천향주라는 이름에 걸맞은 아름다운 술이긴 했다.
그런 성분만 품고 있지 않았다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어차피 나에겐 별다른 영향이 없겠지만, 그걸 알고 있어도 마시기가 꺼려지는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그에 비해 정작 영향을 받을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아무렇지 않은 기색이었다. 흔히 풀리는 술이라더니 딱히 그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 보였다. 단지 몇몇 사람은 술잔에 뭔가를 슬쩍 담갔다. 아마 독의 여부를 체크 하는 것 같았다. 별다른 반응이 없었는지 그들이 안심하는 표정을 짓자 곧 회장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편안해졌다. 다들 알게 모르게 그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던 거다. 대공 역시 그걸 뻔히 봤으면서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겉으로 위장된 평화라는 느낌이 강렬하게 와 닿았다.
이윽고 예정된 건배가 이어졌다. 대공이 먼저 마셨고, 나머지 이들도 따라 마셨다. 나는 그냥 마시는 척만 할까 했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대공이 지켜보는 게 느껴졌다. 쪼잔한 놈이 누가 제 술을 거절하나 주시하는 게 분명했다. 할 수 없이 억지로 몇 모금 마시고 나서야 시선이 떨어져 나갔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더운 기운에 내가 얼굴을 찌푸릴 때였다.
“야, 쓰러져.”
“음?”
문득 귓가를 스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풀썩 엎어졌다. 당황해서 돌아본 곳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소녀의 모습이 있었다. 조금 전까지 멀쩡하게 술을 마시고 있던 라피스였다.
“라피스?”
다급하게 다가서서 쓰러진 녀석의 어깨를 흔들었다. 축 늘어진 몸이 내가 건드리는 대로 맥없이 흔들렸다. 처음엔 의식을 잃은 건가 했는데 두 눈을 멀쩡히 깜빡거리고 있는 걸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이건…… 설마 마비된 건가? 마치 감전이 된 것처럼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라피스! 왜 그래, 라피스?”
갑자기 벌어진 상황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머릿속이 돌아가지 않았다. 치유술부터 써 봐야 하나 고심하는데 라피스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그 시선에 갑갑해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몸을 움직이지 못해서가 아니라, 내 행동에 짜증이 난 것 같았다. 머릿속에 물음표를 떠올리고 있으려니 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손발이 맞아야 뭘 해 먹지.”
“어?”
“뭐해? 당장 쓰러져.”
“……어?”
“주위를 좀 보는 게 어때?”
“……!”
그제야 급히 돌아봤더니 사람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고 있었다. 사방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와 고통을 호소하는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술에 뭔가 있었구나! 뒤늦은 깨달음에 치솟는 낭패감을 뒤로한 채 나는 서둘러 바닥으로 엎어졌다. 라피스가 연기를 그따위로밖에 못하냐는 듯이 눈을 부라렸지만, 나로서도 너무 급작스러웠던 탓에 어쩔 수가 없었다. 슬쩍 돌아봤더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스도 주위의 상황에 맞춰 쓰러지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그 자세가 나랑 크게 다르지 않아서 그나마 위안이 됐다.
회장에서 멀쩡하게 서 있는 건 대공과 시종들뿐이었다. 이 많은 사람이 갈대처럼 우수수 쓰러지는데도 그들은 조금도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만 봐도 누가 이 상황을 주도했는지는 명백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독이 들어 있던 건 아니었다. 검사하는 모습이며 그 결과를 보기도 했지만, 불순물이 섞였다면 마시는 순간 내가 이미 느꼈을 거다. 게다가 몸을 마비시키기만 할 뿐 생명에 지장이 있는 종류는 아닌 것 같았다. 그 증거로 다들 의식이 있는 데다가 안색도 멀쩡했다. 물론 충격을 받아 혼란한 상태이긴 했지만. 그야 갑자기 온몸이 마비되어 쓰러졌는데 침착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술을 마시자마자 쓰러졌으니 천향주가 원인인 건 분명한데 이유는 모른다. 다행히 내게는 이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이가 있었다. 설명을 종용하는 시선을 보내자 라피스가 귀찮다는 표정을 짓다가 입 모양으로 대답했다.
‘베릴주.’
‘베릴주?’
‘발효된 베릴이랑 천향주에 들어가는 리텐 꽃의 진액이 일정 간격을 두고 섞이면 좀 특이한 마비를 일으키거든. 의식도 있고 감각도 있는데 근육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돼.’
세상에, 그런 게 있었단 말이야? 비놀이니 이프리트니, 모호하기만 하던 설명이 이제야 이해됐다. 두 가지가 섞여야만 발현하는 성질이라니. 그래서 내게는 별다른 위화감을 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베릴주는 거의 마시지도 않았고, 그나마 마신 것도 즉시 정화되어 이미 몸에 남아 있지도 않았을 테니까. 물론 그걸 알았다 해서 돌아가는 상황이 단숨에 파악되는 건 아니었다.
“이런, 이런. 생각했던 것보다도 효과가 빠르군.”
소리를 지르지도 못하고 끙끙거리기만 하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대공은 여유롭게 웃었다. 몸을 움직이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던 자들이 힘겹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마다 짓고 있는 표정은 달랐으나 표현하는 바는 같았다.
<왜?>
지금 내가 대공에게 묻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뭔가 꿍꿍이가 있어 보이긴 했지만 나중에 따로 손을 뻗을 줄 알았지, 설마 대놓고 연회를 뒤집어 놓을 줄은 몰랐다. 이곳에 있는 귀족들은 대부분 대공을 지지하는 자들이었다. 상황이 변하면 마음을 바꿔 돌아설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만은 그를 따르는 시늉을 하고 있다. 그중에는 어떤 상황에서도 변심하지 않을 충성스러운 가문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이 상황에 대한 언질을 받은 이가 없어 보였다. 그들이 보내는 시선의 의미를 뻔히 알아차렸을 대공은 전혀 다른 대답을 했다.
“베릴은 발효하면 무엇이든 흡수하는 성질로 변하지. 하지만 사람의 몸에 들어가 일정 시간이 지나면 반대로 밀어내는 성질로 바뀐다고 하더군. 그때 다른 술을 마시면 좀 안 좋다던가. 대체로는 약간 탈이 나는 정도인데, 가끔 예기치 못한 사고가 일어나기도 하는 모양이야. 예를 들어, 천향주의 최음 성분을 공격한 나머지 몸을 마비시킨다든가.”
“우으으…….”
“방지법은 간단해. 뭐든 베릴주보다 먼저 마시면 되지. 다른 주류가 이미 들어간 상태에서 마시면 밀어내는 성질이 오히려 중화되거든. 그래서 그런가. 다들 의외로 이 효과에 대해 잘 모르더군. 연회에서 같이 풀리는 경우가 잘 없어서일지도 몰라. 다들 알다시피 워낙 비싼 술이긴 하잖나? 그 값을 한 것 같아서 나로서는 매우 만족스럽지만.”
굳어 있던 얼굴들이 더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들은 아우성을 치려 했으나 이미 완전히 마비된 혀는 긁는 듯한 신음 외에는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몇몇 사람이 움직이지 못하는 몸을 억지로 비틀어댔다. 뭐든 입을 열어 추궁하고 싶은데 말을 하지 못해서 갑갑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대공은 그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그림자처럼 따랐다(이제와서는 진짜 황궁의 시종들인지 알 수도 없지만). 그중 한 명은 서류로 보이는 종이뭉치를 들고 있었다. 대공이 향한 곳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엎어져 있던 귀족 남자 앞이었다. 대공이 자신의 눈앞에서 멈춰 서자 신음하고 있던 남자가 더 크게 몸을 비틀었다. 공포를 담은 눈동자가 경직된 채 대공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서류를 들고 있던 시종이 그것을 펼치며 입을 열었다.
“알모르 백작가의 삼남으로, 올해 18세입니다. 공신인 초대 가주가 뛰어난 마법사였고, 지금까지 많은 마법사를 배출했습니다.”
“아아, 알모르 백작가라면 알지. 그 가문의 막내아들이 바로 이 녀석인가. 기대되는군.”
빙긋 웃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신호였는지 다른 시종이 품속에서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그 속에서 나온 건 검은 구슬이 박힌 투박한 펜던트였다. 이어서 날카로운 바늘도 같이 나왔다. 시종이 저항하지 못하는 남자를 붙잡고 그의 손가락에 바늘을 꾹 찔러 넣었다. 공포로 굳어 있던 남자의 눈이 부릅떠졌다.
“크으으!”
바늘이 떨어져 나간 손가락에 붉은 피가 맺혔다. 익숙한 솜씨로 핏방울을 짜낸 시종이 그걸 재빨리 펜던트 위에 떨어트렸다. 그러자 밋밋하게 검기만 하던 구슬이 순식간에 붉은색으로 변했다. 그게 무슨 의미였는지, 지켜보던 대공의 표정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옮겨라.”
이어진 명령에 대기하고 있던 다른 시종들이 다가와 남자를 들어 올렸다. 그는 저항하려 했으나, 혀조차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몸으로 그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지는 자들을 시선으로 좇는 동안, 이미 대공은 또 다른 귀족 앞으로 옮겨가 있었다.
이후로는 계속 비슷비슷한 상황이 이어졌다. 대공이 누군가의 앞에서 멈추면 명단을 든 시종이 가문의 이력을 읊었고, 피를 내어 펜던트에 떨어트렸다. 검은 구슬은 모든 피에 반응하진 않았다. 어떨 때는 선명한 붉은색이 되었지만, 어떨 땐 조금 흐릿한 정도에 불과하기도 했고, 전혀 변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대공은 어쨌든 조금이라도 구슬이 변색되면 전부 옮기도록 지시했다. 평소 안면이 있는 자라도 전부 시험해 보는 듯했으나 어떤 이는 처음부터 곧장 옮기기도 했다. 반대로 아예 무시하고 지나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처음엔 그 기준을 바로 눈치채지 못했는데 몇 번 반복되다 보니 공통점이 금방 발견됐다.
‘성인은 제외하고 있어.’
대상이 여성이든 남성이든, 이십 대 중반을 넘긴 것으로 보이는 이들은 전부 건너뛰고 있었다. 앳된 얼굴에 멈춰 섰다가도 명단을 읊는 시종이 이십 대라고 말하면 혀를 차며 통과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려니 불길한 상상이 짙어지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