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342)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342화(342/608)
제342화
어휴, 그러게 날 데려갔어야지. 굳이 남겨 두니까 일이 틀어지잖아. 사람 보는 눈이 없으면 이래서 안 된다니까. 뭐, 난 이렇게 돼서 차라리 잘된 것 같지만요?”
“뭐, 뭐……!”
“아, 그거. 건드리지 마요. 얼려 두긴 했는데 아직 죽은 건 아니거든요. 일단 의식도 살아 있어요. 근데 건드려서 쓰러트리면 부서질 거예요. 아까 그 팔처럼.”
“……!”
그 말에 얼어 있는 동료에게서 반사적으로 물러선 자들이 이내 뻣뻣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에 누가 관여한 건지, 드디어 전후 관계를 인지한 얼굴이었다.
“무, 무슨 짓을 한 거지?”
“그쪽들이 한 짓 그대로요.”
“뭣?”
“사람 하나 살아 있는 시체처럼 만들기 참 쉽죠? 근데 그거 그쪽만 할 수 있는 거 아니거든요. 당하면 기분이 얼마나 더러운지 본인들도 한번 겪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이런 걸 역지사지라고 하죠, 아마?”
“……!”
“아, 그렇다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구요. 나라서 조절할 수 있는 거니까 착한 아이는 따라 하면 안 돼요. 사람은 얼리면 보통 죽거든요.”
“미, 미친……!”
그래, 솔직히 나도 안다. 내가 지금 살짝 평소답지 않다는 것 정도는. 잠겨진 빗장이 풀린 듯, 머리가 통제를 잃어가는 게 느껴졌다. 사실은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내게 살인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만 없었다면, 그 거부감이 완전히 풀어지려는 이성에 아주 작은 제동을 걸지만 않았다면, 이미 저들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대신 무참히 썰린 고깃덩이가 바닥을 구르고 있었겠지.
치미는 짜증을 다스리기 위해 주먹을 천천히 쥐었다 폈다. 죽어 마땅한 놈들이나, 죽이진 않을 거다. 그건 내 앞에 세워져 있는 일종의 제한선이었다. 넘어가도 문제가 생길 일이 없다는 건 아닌데, 왠지 그 선을 넘으면 많은 것들이 바뀔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내 안에 남아 있는 무언가의 마지막 경고였다. 어쩌면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아직은 그걸 무시하는 게 망설여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 순간 치미는 분노를 멈출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행히 죽이지만 않는다고 생각하면 다른 부분엔 거부감이 덜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죽는 것보다도 최악인 경우가 오히려 더 많았다. 굳이 피가 튀지 않아도 잔인해지는 방법 또한 얼마든지 있었다.
“한 사람만 경험하면 억울할 테니. 공평하게 전부 겪는 걸로 하죠.”
다시금 웃어 주자 시종들의 얼굴은 반대로 더 창백해졌다. 이다음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깨달은 게 분명했다. 주춤거리며 조금씩 뒤로 물러서는 행동이 무의식에 의한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단지 그 의도만은 명백하게 들여다보였다.
“소용없을 텐데.”
중얼거렸더니 그들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했다.
“내기할래요? 그쪽들이 도망치는 게 빠를지, 내가 얼리는 게 더 빠를지.”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이 몸을 돌려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평범한 시종은 아닌 것 같더라니, 이동 속도가 정말로 빨랐다. 그 와중에도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함인지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는 것도 대단했다. 따로 신호를 주고받지도 않았는데 동시에 호흡을 맞추는 걸 보면 평소 위급 상황에 대한 훈련을 받아온 자들이었다. 저들에겐 불행하게도, 그래 봤자 나한테는 전혀 소용없는 시도였지만.
곧 네 남자가 동시에 동작을 멈췄다. 아니, 정확히는 강제로 멈춰진 거였다. 달아나던 자세 그대로 뻣뻣하게 굳은 이들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숨을 삼켰다. 헐떡이는 그들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느새 제 몸을 뒤덮은 성에를 확인한 얼굴들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그러게 소용없다고 했잖아요.”
일부러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가 천천히 한 사람 앞에 섰다. 파랗게 질린 얼굴이 끔찍한 것을 보는 것처럼 나를 응시했다. 반대 상황이었을 땐 제게 이런 일이 닥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거다. 당연히 지금 본인이 그들이 도륙하려던 귀족들과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겠지. 그들이 그 절망을 무시했던 것처럼, 나 역시 똑같이 대우하기로 했다.
“이제 조금은 당하는 기분이 들어요?”
“으, 으으……! 사, 살려……!”
“거참, 죽는 건 아니라니까.”
죽지는 않는다. 내버려 두면 천천히 해동되어 언젠가는 풀려나긴 할 거다. 단지 예전 같은 몸 상태로는 두 번 다시 돌아가지 못하게 되는 것뿐이다. 어쩌면 평생 못 움직이게 될지도 모르고, 지능이 크게 떨어질지도 모르겠다. 어떤 결말이든 썩 해피엔딩은 아닐 테지만, 거기까진 내가 알 바 아니었다.
곧 하얀 성에가 그들의 몸을 완전히 뒤덮었다. 얼음 결정이 가득 들어차니 마치 눈 덮인 얼음 동상처럼 보였다. 쓰러트리면 산산 조각날 거라는 점에서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그 모습을 일별한 다음, 나는 회장의 귀족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광경을 목격했을 이들은 이번엔 다른 의미로 충격을 받은 상태인 것 같았다. 고민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나는 구석 쪽으로 걸어가 그곳에 있던 이들에게 치유술을 썼다. 달리 그들을 선택한 이유가 있던 건 아니었다. 그저 다들 대공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일 때, 그들만 불편한 표정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어……?”
다가온 나를 보고 움찔하던 이들이 마비에서 풀려나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들은 몸을 일으키면서도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다들 괜찮아요?”
“예, 예! 괘, 괜찮습니다!”
“다행이네요.”
한동안 몸을 움직여 보던 이들이 곧 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표정이었지만 선뜻 입을 떼지는 못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모르는 척 다음 행동을 개시했다. 근처에 있던 것 중에서 가장 오목한 그릇을 골라낸 다음 안에 있던 내용물을 전부 비웠다. 빈 그릇을 잡은 채 의식을 집중하자 곧 새로운 내용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던 그릇 안에 투명한 액체가 차오르는 것을 보고 내 행동을 주시하던 이들이 마른 침을 삼켰다. 나는 그걸 가장 앞에 있던 이에게 내밀었다.
“받아요. 일시적이지만 성수 같은 거예요.”
“예? 서, 서, 성수?”
“진짜 성수는 아니고, 그 비슷한 거요. 내가 지금 바빠서 뒤처리까지 신경 쓸 정신이 없거든요? 이걸 각자 나눠서 쓰러진 사람들한테 한 모금씩 먹여 주세요. 말해 두겠지만 일시적인 거예요. 아껴 봤자 효과는 곧 사라지니까 괜히 남겨서 챙길 생각은 하지 말아요.”
성수라는 단어에 눈을 빛내던 이가 이어진 말에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그릇을 바라보는 눈길에 아쉬움이 담기는 걸 보려니 픽 웃음이 나왔다. 이 와중에도 탐욕을 부리는 게 인간답다고 해야 할지, 배짱이 좋다고 해야 할지. 조금 어이가 없기는 한데 나쁘진 않았다. 눈치가 빠른 것 같으니 곧 이게 어떤 의미인지도 깨달을 거다. 방금 그들은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권한을 손에 넣었다. 이제부터 누굴 살리고 누굴 내버려 둘지, 순전히 그들의 뜻에 달렸다는 소리였다. 어차피 전부 구하는 결말로 가겠지만, 도움을 받은 쪽에선 마음의 빚을 안게 될 거다. 아무리 작은 편린에 불과해도 그 빚은 관계성에서 엄청난 무기가 된다. 명예를 중시하는 귀족 세계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예상대로 서로 돌아보는 그들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럼 뒷일을 부탁해요. 최대한 여기서 빨리 나가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아, 그러고 보니 경비를 강화한다고 했지. 그럼 이대로는 어려우려나.”
기껏 살려 놨는데 도망치는 길에 경비대한테 붙잡혀 죽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들은 반드시 이곳에서 살아 나가야 했다. 그래야 대공군 쪽에 이 실태가 알려져 내전의 판도가 달라질 테니까. 마침 아까부터 기웃거리고 있던 기척을 느낀 참이라 해결할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저어, 영애는 도대체…….”
“데르온.”
호명하기 무섭게 역시나 기다렸다는 듯이 데르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급변하기 시작한 회장 안의 상황을 보고 근처에서 대기 하고 있었던 듯했다. 갑자기 새카만 차림의 남자가 홀연히 나타나자, 내게 말을 걸려던 이들이 놀란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다물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치료 끝나면 빠져나갈 수 있게 도와 줄래요?”
데르온은 가늘게 뜬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인지를 확인해 본 것 같았다.
“뭐, 그리 어려운 임무는 아니겠군요. 알겠습니다. 최소 인원은 몇입니까?”
“최소 인원이라뇨?”
“혜택을 누릴 최후의 인원 말입니다.”
“혜택? 최후?”
“……다 살려야 합니까?”
“그야 당연하죠?”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서 대꾸했더니 데르온의 얼굴에 조금 불만이 서렸다.
“엘 님, 지금 평소보다 기분 안 좋으신 상태 아닙니까? 아까 인간들 죄다 얼려 버리시는 모습 보고 진짜 근사하다고 생각했는데요. 천신의 손에 죽는 결말도 나쁘지 않지만, 엘 님에게 죽는 최후도 무척이나 짜릿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입니다.”
“……하고자 하는 말이 뭐예요?”
“다 살려 놓으라니, 너무 온화한 방식이잖습니까. 이런 건 서로 경쟁하게 해서 최후의 몇 사람만 살아남게 해야 더 재밌을 텐데요.”
난 화가 난 거지 사이코패스가 된 게 아니거든?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더니 데르온은 그걸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듯했다. 그의 눈빛에 생기가 감돌았다.
“해도 됩니까?”
“그 짜릿한 최후, 당장 당하고 싶지 않으면 닥쳐요.”
“넵.”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데르온은 이상한 만큼 포기도 빠른 편이라는 거다. 그런다고 그가 한 말이 없었던 게 되는 건 아니라서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마족이라는 종족은 왜 이러는 걸까. 데르온이 유난히 특이한 거라고 우기고 싶었지만, 그랬다면 애초에 신들이 마족을 싫어하지도 않았겠지. 이런 종족 안에서 어떻게 아스처럼 사랑스러운 생물이 태어난 건지, 그게 가장 큰 의문이었다.
어쨌거나 이 시점에 손을 빌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잘된 일이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사람들을 돌아봤더니 뚫어지게 지켜보던 시선들이 후다닥 흩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아 나갈 희망에 부풀어 있었던 것 같은데, 왠지 지금은 다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부지런히 구르는 눈동자가 데르온을 연신 힐끔거리는 걸 보고 나는 바로 상황을 이해했다. 짧은 대화 속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난 그의 비상함을 그들 또한 알아본 것이다. 하기야 눈앞에서 대놓고 생존 게임을 운운하는데 미친놈으로 보이지 않았으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했을 거다.
“뭐, 이런 사람이긴 하지만 보기보다는 멀쩡해요. 여기서 나갈 때까지 당신들을 전부 안전하게 보호해 줄 거예요.”
“대, 대체 뭐하시는 분들이십니까?”
조금이라도 안심하라고 건넨 말에 용기를 얻은 듯,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들로서는 당연한 의문이겠지만 딱히 이런 경우를 대비하지 않았던 내게는 달갑지 않은 질문이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고심하다가 나는 아주 적절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다. ……그냥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기로.
“나중에 이사나한테 물어봐요.”
* * *
이사나의 효과는 굉장해서, 이름을 듣는 순간 다들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아직 마비되어 있는 사람들조차 일시에 숨을 멈춘 것이 느껴졌다. 그 짧은 단어에 함축된 의미를 회장의 모두가 충분히 이해한 듯했다. 그들이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동안 나는 마음 편히 데르온에게 뒷일을 일임한 후 자리를 떠날 수 있었다.
가는 길은 미리 살펴두었기에 대공의 뒤를 추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는 쪽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나가 마차에 오르고 있는 참이었다. 먼저 실려 나간 귀족들은 벌써 옮겨졌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장소를 옮긴 거구나. 라피스는 제단 장소가 본성 지하에 있었다고 증언했지만, 지난날 숱하게 대공을 감시하면서 살펴본 바로는 그 밑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근처를 조금이라도 기웃거리는 자가 있었다면 수상하게 여겼을 텐데 완전히 폐쇄한 채 아무도 발길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방심한 면이 없잖아 있기도 해서,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이 새삼 씁쓸했다.
이윽고 그를 태운 마차가 유유히 출발했다. 마차가 향하는 방향을 따라 시야를 확대해 보니 구석진 곳에 숨겨진 듯 존재하는 작은 별궁이 보였다. 거의 방치되다시피 한 쓸쓸한 정경을 보자 얼굴이 절로 굳었다. 저 별궁은 나도 이미 알고 있는 장소였다. 대공이 가끔 업무를 내려놓고 쉬러 가던 곳이었으니까.
별궁은 작은 규모만큼이나 내부도 단조로운 구조였다. 그리 높지 않은 단층에, 방이라 할 수 있는 건 침실과 그에 맞붙어진 거실 하나, 그리고 서재 하나가 전부다. 그나마 넓게 조성된 정원이 유일한 볼거리라 해도 과언이 아닌. 누가 보기에도 한 사람을 위한 휴식 공간이었다. 실제로 대공은 늘 혼자 머물렀고, 그러는 동안엔 기도하거나 책을 읽거나 잠을 자거나 했다. 그 과정에서 딱히 수상한 점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왜 지금, 그가 별궁으로 가는 거지?
“말도 안 돼.”
무심코 흘러나오는 신음을 삼키지도 못하고 나는 서둘러 마차 뒤를 따라갔다. 미행을 들키지 않아야 하는 만큼 형체도 벗어 던졌다. 그런데 본성을 완전히 벗어나는 순간, 뭔가 미묘한 기운이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 얇은 공기막을 통과한 것 같았다.
‘뭐지?’
묘하게 꺼림칙해서 다시 돌아가 볼까 했지만 별다른 영향은 없는 것 같아 일단 확인을 뒤로 미뤘다. 거의 날다시피 부유한 상태로 마차를 따라가고 있는데, 별궁 근처 숲에 수레들이 정렬해 있는 게 보였다. 내용물이 보이지 않도록 두꺼운 천을 덮어뒀지만 보지 않아도 안에 실린 것이 뭔지 정체를 알 것 같았다. 수레는 보급소로 보이는 낡은 창고 안으로 차례차례 들어가는 중이었다. 창고의 크기는 작은 편이었는데, 그에 비해 들어가는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어서 마술쇼를 보는 기분이었다.
‘비밀 통로구나. 지하로 연결된 건가?’
그동안 제물을 어떤 식으로 반입해 왔는지 알 만했다. 나는 그곳을 살피러 가는 대신 대공을 주시했다. 어차피 어느 쪽을 가든 같은 곳에 이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