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356)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356화(356/608)
제356화
깨달음은 늘 불시에 찾아온다. 지금 내게 닥친 순간도 그랬다. 갑자기 퍼뜩 스친 어떤 예감에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 전류에 감전된 듯, 머릿속이 일시에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왜 그래, 엘?”
앞에서 한창 작업(?) 중이던 트로웰이 날 돌아보았다. 그는 한 손으로 눈꺼풀을 하얗게 뒤집은 남자의 멱살을 잡은 채였다. 다른 쪽 손에 쥐어져 있던 건 와작 소리를 내며 짓이겨졌다. 부서진 조각들 사이에서 새카만 마력이 연기처럼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방금 기절한 사람의 몸속에서 꺼낸 것이었다.
“……아, 망했다. 이사나한테 상황을 말해 주는 걸 잊었어.”
“저런.”
애석하다는 듯한 목소리와는 달리 트로웰의 얼굴은 전혀 안타까워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가 손바닥에 남은 잔여물을 털어내는 동안, 발치에 쓰러져 있는 걸 툭하고 밀어낸 엘뤼엔이 물었다.
“뭔가 느낀 거냐?”
“이사나가 시큐엘을 불러냈어. 마물을 잡은 것 같아.”
조금 전 손끝에 이질적인 감각이 스쳤다. 이사나가 소환한 시큐엘들이 전해 준 감각이었다. 무언가를 제압한 것 같았는데, 그 형질이 탁한 마기로 가득했다. 폐수의 찌꺼기에 닿은 것 같은 이 느낌은 마물을 상대할 때나 느끼는 것이다. 과거 정령왕이었으며 현재는 신인 존재답게, 엘뤼엔은 내가 하는 말을 금방 이해했다.
“시기가 맞지 않았군.”
“으으, 어떡하지. 엄청 놀랐을 텐데.”
시큐엘을 둘이나 소환했을 정도면 상황이 무척 나빴던 모양이다. 상황이 그렇게 되기 전에 미리 경고해 주지 못했다는 자책이 나를 괴롭혔다. 이런 중요한 사실을 왜 잊었냐고 묻는다면 그동안 너무 바쁜 탓이었다고 변명할 수밖에 없다. 이사나가 그의 전쟁을 하는 동안, 우리도 지난 며칠간 우리만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처음 마목의 씨앗을 제거하려고 할 때만 해도 그다지 상황을 어렵게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파고 들어가기 시작하니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했다. 마목의 씨앗은 그저 한두 명 정도가 아니라 대중에 무작위로 퍼져 있었다. 미친 대공 놈이 시장을 통해 일반인들에게까지 풀어둔 것이다. 풀린 지 얼마 되진 않았는지 범위가 크진 않았으나 대신 숫자가 많았다. 어떤 마을은 거주민 전부가 해당하기도 했다. 그간 우리가 돌아다니면서 제거한 씨앗이 족히 한 트럭 분은 되고도 남을 것이다. 이쯤 되면 마계에 있는 모든 마목의 씨앗을 다 가져온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치료 대상엔 대공군도 포함되어 있어서, 마틴성 부근은 이미 초저녁에 거쳐 간 후였다. 이사나의 군대는 그 이후에 도착한 거라 엘뤼엔의 말대로 시기가 맞지 못했다. 황성 부근으로부터 퍼지기 시작한 마기가 이제 그 부근까지 영역을 넓혔다는 뜻이기도 했다. 지금쯤이면 후발대와도 합류할 무렵이고, 다른 지역군에서 새로 참여한 군대도 있을 테니 앞으로 몇 명 더 나올지도 모르겠다. 정작 대공군 쪽은 모두 정화된 덕분에 평화롭게 지내고 있을 거라는 게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이사나가 정령사라는 게 밝혀졌겠네. 시큐엘을 둘이나 소환했으니 정령왕과 계약했다는 사실을 알아보는 사람도 있을 텐데. 괜찮으려나?”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쩔 거야. 알아서 수습하게 내버려 둬.”
조금 떨어진 곳에서 라피스가 시큰둥하게 쏘아붙였다. 내가 멈춰 있는 동안에도 나머지 상황은 차곡차곡 정리되어 가고 있어서, 이제 막바지에 이른 참이었다. 라피스가 구석에 바짝 붙어 있던 남자를 강제로 끌어내어 일으켜 세웠다. 겁에 잔뜩 질린 남자가 부들부들 떨며 애원의 시선을 보내왔다.
“흐으으, 사, 살려…….”
“살려주는 거잖아. 얌전히 있어.”
자꾸만 버둥거리는 몸을 고정하기 위해 라피스가 남자의 멱살을 단단히 틀어잡았다. 그리곤 강한 기운을 일으켜 그의 몸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헛숨을 삼킨 남자의 입에서 그르륵,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압력이 강해질수록 그의 상태는 점점 더 나빠져 갔다. 호흡이 가늘어지면서 눈꺼풀이 하얗게 뒤집히고 입에서는 거품이 흘렀다. 조금 전 트로웰에게 잡혀 있던 자가 그랬던 것처럼.
“우욱!”
남자는 거의 기절할 무렵이 되어서야 덩어리진 붉은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라피스가 기다려왔던 순간이기도 했다. 그때쯤 압력이 중단되었으나 더는 버티지 못한 남자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축 늘어진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차가운 맨바닥이었다. 그곳엔 이미 같은 과정을 거친 이들이 인사불성으로 늘어져 있는 중이었다. ……정말 오해하기 쉬운 광경이긴 한데, 저래 봬도 일단 치료하는 거다. 죽이려는 게 아니라.
어쩌다 이런 게 치료법이 되었냐면 나도 할 말이 많다. 사람을 마물로 만드는 무시무시한 씨앗도 발화하기 전까진 그저 식물일 뿐이라 몸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곡물이나 마찬가지다 보니 당연히 정화나 치유의 대상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몸속에 둔 채로 제거할 경우 조금이라도 파편이 남을 우려가 있었다. 덕분에 가장 최선의 치료가 씨앗을 몸 밖으로 꺼내는 거였다. 일일이 상황을 설명하고 설득하기도 귀찮아서 일단 발견하면 그 즉시 붙잡아 끄집어내기부터 했다. 과정은 여러 방법으로 이뤄지지만 대체로 자주 쓰는 건 압력을 가해 몸속을 헤집어 강제로 토해내게 하는 방식이다. 그렇게 해결(?)한 후에는 엉망이 된 내장을 치료하고 후유증이 남지 않도록 엘뤼엔이 그들의 기억을 지웠다. 내가 생각해도 참 환상적으로 궁합이 잘 맞고 매정한 콤비였다.
그리고 조금 전 이 근방의 마지막 씨앗 보유자가 치료된 참이었다. 그가 토해낸 붉은 덩어리를 라피스가 발로 잘근잘근 짓밟았다. 밟히는 대로 와지직 소리를 내던 것이 곧 마지막 숨을 토해내듯 마력을 내보냈다.
“이제 다 끝났네.”
“모두 정말 고생 많았어.”
“엘, 너도.”
아직 아무것도 해결된 건 없지만 가장 급한 불은 껐다. 이 순간만큼은 모두의 얼굴이 만족감으로 충만했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황성에서 동남쪽으로 떨어진 지역으로 거리상으로는 황제군의 뒤쪽이었다. 이 지역 너머부터는 마기가 퍼지기 전에 차원막이 다시 닫힐 거라 내버려 둬도 당장은 문제가 되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만일의 상황을 위해 엘뤼엔이 대비책을 세우기로 했다. 사람들의 꿈에 관여해서 형벌의 신전을 찾아가도록 유도하는, 지극히 신다운 방식이었다. 몸속에 씨앗이 있는 이들은 저절로 마음이 동하게 될 거라고 했다. 일단 신전을 찾아가기만 하면 사제들이 치료법을 저절로 깨달을 테니 알아서 대처해 줄 것이다. 우리가 직접 하는 것보다는 느린 속도겠지만 원만히 해결될 것으로 보였다.
“그럼 신전이 좀 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엘뤼엔의 신전은 수가 너무 적은 데다가 다 높은 곳에 있잖아.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도 있을 텐데.”
“그런 문제라면, 신전 쪽에 경계의 길을 만들어 두지.”
“경계의 길? 그게 뭐야?”
“신이 열 수 있는 그림자 통로. 인간들 사이에선 신기루 길이라고도 불려.”
설명은 옆에 있던 트로웰이 이었다. 우리가 이 부근까지 이동한 것도, 이후를 엘뤼엔에게 맡기기로 한 것도 전부 그가 지닌 예지력에 따른 결과였다.
“신기루 길?”
“응, 그 통로가 열리면 거리나 위치와는 상관없이 어느 곳에서든 그 장소로 갈 수 있는 길이 연결돼. 아무나 볼 수 있는 건 아니고 조건과 자격이 맞아 떨어지는 경우에만 보이지만. 하루아침에 모르던 건물이 생겨서 가 봤는데 다음날 다시 가봤더니 사라졌더라, 이런 이야기 들어본 적 있지? 그게 그런 거야.”
“앗, 그거 뭔지 알 것 같아. 그러고 보니 다크 엘프 마을이 그런 식으로 사라졌다가 나타났다가 한다는 것도 들어봤는데.”
“응, 비슷해. 엘프의 신 크레아가 사막 쪽에 그들의 왕국으로 갈 수 있는 경계의 길을 만들어 뒀거든. 진짜 그들의 세상은 지하에 있어. 햇빛을 보는 걸 싫어하는 종족이라.”
“우와, 그렇구나.”
역시 이 세계는 아직도 배울 게 많은 것 같다. 아직도 해결할 일이 천 근처럼 남아 있건만 속도 없이 다크 엘프 마을을 보러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 쪽에 터전이 있다는 블루 엘프의 마을도 궁금했다. 시벨리우스는 유니콘이니까 실제 블루 엘프는 그와 다른 모습일 것이다. 나중에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나면, 그때쯤에 모두와 함께 유람을 해 봐도 좋을 것 같았다. 제국이 안정된 후엔 이사나는 쉽게 움직이기 힘든 몸이 되겠지만. 꼼수를 쓰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고 보니 이젠 이사나와 여행 다니기는 쉽지 않겠구나. 전쟁이 시작된 후로 늘 그래 왔듯이, 앞으로는 개인인 이사나보다 황제인 이사나의 역할이 더 커지게 될 거다. 데르온과 아스도 마계로 돌아가야 하겠지. 모두와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벌써 아쉬워졌다. 하지만 말 그대로 나중의 일이니까. 지금 걱정하기엔 너무 이른 부분이기는 했다. 끝이 오려면 일단 대공과 카류안부터 찾아야 하는데, 아직 어디로 숨었는지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당장 시급한 마목의 씨앗은 해결했지만 차원막이 닫히지 않았으니 다른 문제들도 산재할 것이다.
덕분에 아스와 데르온을 보지 못한 지도 며칠이 지났다. 두 마족은 사람들의 안내를 맡긴 그 시각 이후로 돌아오지 않는 상태였다. 정령을 보내 소식을 찾아봤더니 차원 틈으로 들어오는 마족들을 처리하러 갔다고 했다. 밖으로 나가자마자 때마침 건너온 마족과 우연히 마주친 모양이었다. 자세한 얘기는 듣지 못했지만 카류안 쪽에서 마족들이 아크아돈에서 난동을 피우도록 유도한 듯했는데, 아스는 그걸 제 선에서 해결하고자 했다. 마왕이 될 아이라 그런지 마족에 관한 일은 본인이 직접 주관하고 싶은 것 같았다. 이후로 마족이 나타났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으니 알아서 잘 해결하고 있는 듯하다. 그에 관해서는 다른 쪽에서도 관여하고 있는 이가 있긴 하지만.
휘이잉―
세찬 바람에 머리카락이 요동쳤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창을 거머쥔 진들이 정렬해서 날아가고 있었다. 그 뒤를 슈리엘과 실프들이 우르르 따르는 모습이 마지 잘 정비된 군대를 보는 듯했다. 정령이거나 한때 정령이었던 존재에게만 보이는, 일부에게만 허락된 광경이다.
“오늘도 미네가 바쁘네.”
같은 광경을 바라본 트로웰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요즘 사방엔 짙은 바람길이 생긴 상태였다. 본래 예정된 것이 아니라 미네가 일부러 만든 흐름이다. 바람 고유의 능력인 은신의 장막과도 관련되어 있는 것 같은데 정확히 뭘 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다만 차원막을 중심으로 생긴 걸 보면 마족 방어 차원에서 뭔가 조치를 해둔 것만은 분명했다. 사실 미네의 개입은 생각지 못한 거라 처음엔 조금 당황스러웠다. 블레스터의 정화에 들어간 상태니 당연히 쉬고 있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차원막이 깨진 걸 느끼고 일어난 건가.”
“혹은 누군가가 깨운 걸 수도 있겠지.”
엘뤼엔이 무미건조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한 표정이라 나는 조금 긴장했다. 그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땐 대개 높은 확률로 누군가가 얽혀 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어봐도 돼?”
“바람 본인의 의지였다면 얌전히 방어만 할 리가 없으니까. 누군가가 사전에 요청한 바가 있다는 뜻이지. 마계와 관련해서 발 빠르게 나설 놈은 하나밖에 없고.”
“그거, 혹시 카노스를 말하는 거 아니지?”
조심스럽게 물어본 말에 그가 입술 끝을 삐뚜름하게 올렸다. 왜 아니겠냐는 표정이다. 하긴 그 말대로 미네가 직접 수습하려는 생각이었다면 바람이 좀 더 살기를 품었을 것이다. 지금 건너오는 마족들은 초대받지 않은 불순물이나 다름없고, 이 세계의 주인인 우리에겐 그들을 징벌할 의무와 권한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바람은 말 그대로 방어만 하는 상태였다. 마치 어디론가 길을 인도하는 듯한. 그들이 사고를 치지만 못하도록 적당한 장소로 유인하는 의도가 읽혔다.
미네가 굳이 사정을 봐줄 이유가 없으니 정말로 카노스가 관여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가 설마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질 줄은 몰랐다. 바이톤을 방치한다는 걸 보면 마족들이 다른 세계에서 사고 치는 것 자체는 그리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은데. 이번은 규모가 큰 탓일까. 천마대전 때도 마족들을 두고 말이 많았다고 들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아크아돈에서 일을 치면 정령왕 출신인 상급신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그가 이곳의 안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마계가 위험해질까 봐 나선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게 비단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가만히 보면 카노스는 의외로 마족들을 많이 아끼는 것 같아.”
“의외로? 그놈은 그냥 대놓고다. 마족에 관해서는 그놈을 믿지 마라. 언제 갑자기 죄인을 돕겠다고 태세 전환할지도 몰라. 이미 그런 상태일 수도 있고.”
“……설마.”
“원래 모든 일은 방심한 순간에 벌어지는 법이지.”
지극히 맞는 말이었기에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늘 마신에게 가차 없는 엘뤼엔답게, 오늘도 카노스에 대한 평은 박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도 왠지 그게 사이가 나쁜 쪽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원래 서슴없이 평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상대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니까. 엘뤼엔이 허언을 입에 담는 성격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 더불어 잘 알고 있다는 건 관심이 있다는 뜻이다. 그게 설령 나쁜 감정 때문일지라도. 오히려 막말도 주고받을 수 있을 만큼 편한 관계다. 그쯤 되면 그냥 친구로 봐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물론 후환이 두려워서 차마 말할 수는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