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362)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362화(362/608)
제362화
좋은 술을 나눠 받는 건 흔히 경험하는 일이었다. 술자리가 차고 넘치는 용병들 세계에선 더욱 그랬다. 심지어 그들 쪽에서 산 술이었고, 그 일부를 나눠준 것뿐이다. 그런데 왠지 가슴이 벅차도록 달아올랐다. 그날따라 술맛도 굉장히 좋았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은 즐기던 술이라 맛이라면 이미 충분히 잘 알고 있는데도, 마치 처음 먹어 보는 것 같은 생소한 느낌에 어리둥절한 기분마저 들었다. 당시엔 오랜만에 마셔서 그런 것이라 생각하고 무심히 넘겼는데, 지금 다시 돌이켜 보니 특별하다고 여기면 충분히 특별하게 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어어, 잠깐 기다려 봐. 나 예전에 이런 얘기 들은 적 있거든? 성력이 엄청난 사제는 신주를 만들 수 있다고.”
“신주?”
“신의 힘이 깃든 술 말이야. 그게 엄청난 영약이래. 한 잔만 있어도 다 죽어 가는 사람을 벌떡 일으킨다나. 건강한 사람이 마시면 신체 능력이 엄청나게 향상된다고…….”
“엇, 나도 들어본 적 있어. 근데 그거 쉽게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대사제 중에서도 만들 수 있는 사제가 극소수인 데다가,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하면서 성력을 쏟아부어야 간신히 만들 수 있다고 하던데. 그렇게 해도 소량밖에 못 만든다고…….”
“그분이 그 극소수인 사제였을 수도 있지. 그중에서도 더 특별한 사제일 수도 있고.”
“하긴, 그분…… 진짜 대단하시긴 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그 사제님 말이야. 식사도 거의 안 하시고 늘 술만 드시는 데도 멀쩡하셨잖아. 신성력이 강한 사제는 먹지 않아도 오랫동안 버티는 게 가능하다지만 그분은 도가 좀 지나쳤었어. 근데 그게 만약 술을 신주로 바꿔서 드신 거라면?”
마지막 이릴의 말에 모두가 숨을 크게 삼켰다. 추리해 가면서도 내내 긴가민가했는데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없어 보였다.
“우와, 미친? 그럼 우리가 그날 신주를 마신 거야?”
“어쩐지 그날따라 술맛이 끝내주더라니!”
“몸을! 몸을 좀 더 움직여 봐야겠어! 이 근처에 몬스터 서식지 없어?”
인지하지도 못한 사이 찾아왔던 기연. 샴페인 용병들은 때늦은 혼란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앞으로 더 엄청난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 * *
“이봐.”
눈앞을 드리운 그림자에 휴센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중년으로 보이는 거대한 사내가 길을 막아선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휴센도 그리 작은 키가 아닌데 상대는 그런 그가 한참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컸다. 단 내 최장신이자, 너무 커서 오거로 오해받는 헤롤보다도 더 큰 것 같았다.
“앗, 저 사람은!”
“비어 용병단의 렉스다!”
“금패의 렉스야!”
어느새 몰려나온 구경꾼들 사이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퍼져나갔다. 상대를 가만히 응시하던 휴센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금패의 렉스는 주변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 그도 익히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한 이름이었다. 현 길드에서 가장 높은 실적을 지닌 비어 용병단의 창립 멤버이자 금패의 용병. 위치는 부단장이지만 비어 용병단이 지금과 같은 명성을 얻기까지 단을 이끌어 온 실질적인 지주이기도 한 사내였다. 다만 휴센이 흥미롭게 여긴 건 조금 다른 부분이었다.
‘비어 용병단은 대공군과 계약했다고 들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정찰대였던 지난번과 달리 샴페인 용병단이 이번에 새로 배속된 부대는 용병으로만 구성된 공격대였다. 외인부대도 포함된 부대이다 보니 아는 얼굴도 많았지만 모르는 이는 그보다 더 많았다. 그렇다 해도 비어 용병단은 예상하지 못한 존재였다.
내전이 막 발발할 당시, 용병 길드 내에선 대공군 쪽을 더 우세하다고 판단하는 추세였다. 계약금이나 보상금도 대공군이 제시한 금액이 더 컸기 때문에 대체로 다들 대공군 쪽에 붙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를 주도한 것이 비어 용병단이기도 했다. 길드 내 최강이라 불리는 용병단이 대공군과 계약하자, 다들 너도나도 그쪽으로 따라붙은 것이다.
‘기존 계약을 파기하고 다시 이쪽으로 붙은 건가.’
원래 용병은 전쟁 중에도 상황에 따라 소속을 옮겨 다니는 편이다. 죽을 때까지 한 주군만 섬기는 기사들은 그 행동을 철새 같다며 비난했지만, 딱히 적을 두지 않는 용병들에겐 그게 당연한 생리였다. 휴센도 용병이다 보니 그 자체의 해석에만 신경이 쏠렸다. 비어 용병단이 이쪽으로 넘어왔다는 건 대공군 쪽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는 의미였다. 판도가 확실히 기울어졌다는 뜻이니 황제군에 소속된 입장에선 나쁠 게 없었다.
“난 렉스다. 그쪽이 샴페인 용병단의 단장인 휴센인가?”
“맞소.”
“금패라고 들었는데?”
“……그렇소만?”
불퉁한 어조의 질문에 휴센의 어조도 자연히 딱딱해졌다. 그를 살피던 사내의 표정에 싸늘한 한기가 스쳤다. 휴센에겐 매우 익숙한 시선이기도 했다. ‘생각보다 별거 아닌데?’ 듣지 않아도 상대가 품고 있는 생각이 훤히 읽혔다.
휴센의 명성을 듣고 접근하는 이들은 대체로 처음 그를 보면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가 수려한 외모를 가진 탓이 컸다. 귀족처럼 곱상한 느낌인 그를 은연중에 만만하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그중엔 대놓고 실망을 표하는 자들도 있었다. 눈앞의 남자는 그 부류에 속했다.
“소문이 워낙 자자해서 한번은 만나보고 싶었지. 하지만 보지 않는 게 더 나을 뻔했어. 길드가 다른 건 형편없어도 승단 시험만큼은 제대로 치르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군. 곰팡이가 구석구석 미치지 않은 곳이 없는 모양이야.”
“대체 무슨 헛소리요?”
“그쪽이 마물을 잡았다지?”
“…….”
“난 실력은 없으면서 허풍떨고 다니는 놈들을 싫어한다. 특히 금패에 먹칠하는 놈들은 질색이지. 딱 그쪽 같은 놈들 말이다.”
“그래서?”
“나랑 한판 하지.”
역시 이건가.
이미 짐작한 사태에 휴센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게, 이런 시비가 오늘만 벌써 세 번째였다. 그들이 마물을 잡았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호승심을 느낀 이들이 여기저기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온 이들은 짜고 친 것처럼 전부 상대로 휴센을 지목했다. 일반적으로는 금패인 용병에게 함부로 덤빌 생각은 안 하겠지만, 그가 보기보다 약해 보이니 해 볼 만하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지금까진 그렇게 승부를 걸어오는 이들을 헤롤 쪽에서 나서서 쳐냈다. 휴센을 배려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상대편을 위한 거였다. 만만히 보던 상대에게 비참하게 깨지면 얼마나 충격이 큰지 그가 경험자로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휴센은 이런 종류의 승부에서 적당히 봐주는 법이 없는 매정한 남자였으므로. 상대가 의기소침해져서 탈영이라도 해 버리면 곤란했다. 하지만 이번엔 상대도 금패의 용병이었다. “여어, 단장. 욕보쇼.” 성의 없는 응원을 보내는 그를 휴센이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를 따라 헤롤에게 시선을 던진 렉스가 피식 웃었다.
“지금까지 걸어오는 승부마다 다 저 친구가 대신 응했다지? 그쪽이 그간 어떤 식으로 단을 꾸려왔는지 알 만하군.”
“글쎄. 뭘 오해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승부를 피한 건 아니오. 저 녀석이 멋대로 가로챈 거지.”
“그렇다면 이 승부는 당연히 임하겠군.”
“원한다면.”
대답과 동시에 휴센이 검을 꺼내 들었다. 일상에선 부드러운 편인 그의 분위기가 검을 잡은 것과 동시에 날카롭게 벼려졌다. 한순간에 달라진 기세에 지켜보던 사람들이 전부 숨을 삼켰다. 렉스 역시 눈을 크게 떴다가 씩 웃었다.
“의당 그렇게 나오셔야지.”
두 사람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마주 서자 어느새 몰려나온 구경꾼들이 순식간에 주위를 둘러쌌다. 부대 내 대련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지만, 용병대는 어차피 외부자라는 시선이 있어서 어지간히 심각한 상황이 아니면 윗선에서도 관여하지 않는 편이었다. 오히려 이런 일들을 단속해야 하는 병사들까지 몰려 들어왔다.
“대박! 휴센과 렉스가 싸운다!”
“금패의 대련이야!”
금패의 용병은 숫자가 적다 보니 서로 마주치는 일이 드물었다. 하물며 그들끼리 대련하는 일은 더더욱 흔치 않은 일이었다. 돈을 주고도 보기 힘든 귀한 구경거리에 현장이 온통 뜨겁게 달아올랐다. 어떤 이들은 서로 판돈을 걸기도 했다.
그러나 흥겨운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잠시 후 대련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곧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대련은 휴센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철퇴를 나뭇가지처럼 휘두르는 렉스의 엄청난 힘은 휴센의 가는 검 앞에 매번 간단히 가로막혔다. 렉스의 실력이 부족했다고 여기기엔 지켜보는 이들 대부분이 휴센의 움직임을 쫓아가지도 못했다. 그저 그가 엄청나게 빠르고, 무언가 현란하게 움직였다는 기억만 남았을 뿐이었다. 넋을 잃고 지켜보던 모두가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휴센의 검 끝이 렉스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
“…….”
할 말을 잃은 좌중 사이로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도 울릴 것 같은 완벽한 고요 속에서, 렉스는 제 목의 아슬아슬한 지점에 멈춰 있는 검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마른 침이 목울대를 울리는 동안 그의 턱 끝으로 주르륵 땀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경악한 그를 마주하고 있는 휴센의 표정은 그저 무심하기만 했다. 너무 당연한 결과라서 새삼 놀랄 것도 없다는 것처럼. 계속할 거냐고 묻는 듯한 시선에 렉스가 떨어지지 않는 입을 벌렸다.
“……내가 졌소.”
“좋은 대련이었소.”
한층 정중해진 화법에 담담히 답한 휴센이 검을 거둬들였다. 그제야 구경꾼들 사이에서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렉스는 목을 문지르다 말고 복잡한 얼굴로 휴센을 바라보았다.
“한 가지만 물읍시다. 그쪽…… 아니, 당신은 왜 용병을 하는 거요?”
“……? 이 생활이 내게 잘 맞기 때문이오.”
“용병 일을 좋아하오?”
“좋아하지 않으면 하고 있을 리가 있겠소?”
“샴페인 용병단 숫자가 몇이었지? 다섯? 여섯? 용병단은 지금의 숫자를 계속 유지할 생각이오? 규모를 더 키울 생각은?”
“글쎄. 아직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소.”
“해 두는 게 좋을 거요.”
“……?”
“큰 힘을 지닌 자는 그만한 사명이 따르는 법이오.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말이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마지막으로 렉스는 묵묵히 몸을 돌렸다. 그가 걸어가는 길 양옆이 파도처럼 갈라지는 것을 보며 휴센은 가만히 얼굴을 찌푸렸다. 그때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던 쉐리가 답싹 달라붙었다.
“수고했어, 휴센. 어디 다친 곳은 없어?”
“보다시피. 그나저나 조금 묘하군.”
“왜?”
“그냥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시비를 건 건가 싶었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아서. 마치 시험당한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흐음, 저 아저씨, 좀 관심을 두긴 해야 할 것 같아. 아까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얘기 들어보니까 혼자 황제군에 왔다던데?”
이릴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주시한 채 말했다. 놀란 표정을 짓는 휴센을 따라 헤롤과 마이티가 눈을 크게 떴다.
“혼자 황제군에 왔다고?”
“그럼 비어 용병단을 나왔다는 건가?”
“그렇지 않겠어? 단에 소속된 용병이 독단적으로 행동할 수는 없을 테니.”
“대체 어째서……. 무슨 일이 있었나?”
“뭐, 난 대충 알 것도 같은데. 용병 길드가 예전부터 여러 가지로 말이 많았잖아. 무능력한 것도 그렇고, 편애하는 용병단에다 보수 좋은 의뢰를 몰아주기도 하고. 중간에서 의뢰비를 착복하거나 뇌물을 받기도 하고.”
“뭐? 그랬어?”
“휴센은 그런 쪽엔 둔하니까. 여하튼 그걸로 가장 큰 수혜를 입고 있는 게 비어 용병단이라고 들었어. 거기 단장이 길드 마스터랑 친하거든. 그래서 단 내에서도 파벌이 갈려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그거랑 관련된 거 아닐까?”
“흠.”
이미 렉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마음에 걸리긴 했으나 휴센은 곧 신경을 끄기로 했다. 어쨌든 대대적으로 일을 벌여 놨으니 앞으로는 시비를 거는 이가 줄어들 터였다. 그 증거로, 그와 눈이 마주치는 사람마다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이 효과를 기대하고 대련에 응했던 휴센으로선 만족스러운 결말이었다.
“그나저나 단장, 진짜 대단하던데. 금패의 렉스를 이렇게 쉽게 이기다니. 나도 빈번히 단장 움직임을 놓쳤다니까. 역시 전보다 더 강해진 거 맞지?”
“아아, 예전이었다면 이렇게 간단하진 않았겠지.”
“그러다 곧 소드 마스터 되는 거 아냐?”
“설마. ……음, 하지만 가능성이 없진 않을지도. 기량이 점점 더 좋아지는 기분이 들거든.”
“미친. 신주 진짜 굉장하네.”
“그 귀한 걸 우리만 마셔서 어쩌냐. 매튜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좋았을걸.”
“그러게 말이야.”
들뜬 기분을 애써 가라앉힌 그들이 같은 혜택을 누리지 못한 동료를 떠올리며 아쉬워할 때였다.
“다들 여기 있었네요.”
그 순간 그들 사이로 낮은 소년의 음성이 끼어들었다. 반사적으로 돌아본 샴페인 용병들은 곧 멍하니 입을 벌렸다. 눈앞에 생각지 못한 사람이 서 있었다. 초콜릿 같은 매혹적인 피부에 새카만 흑발. 별처럼 빛나는 화려한 금안의 소년. 부대로 복귀하기 직전에 헤어졌던 그들의 어린 동료였다.
“매튜?”
“세상에 매튜!”
“네가 어떻게 여기 있어?”
“너도 참전하기로 한 거야?”
진영 안에는 신분 확인을 거친 사람만 들어올 수 있으므로 그들은 당연히 매튜가 군에 지원한 것이라 생각했다. 안 그래도 그의 빈자리가 허전했던 참이라 그들은 반가운 기분에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러나 돌아온 반응은 예상한 것과 달랐다.
“아뇨. 작별 인사를 하러 왔어요.”
“뭐?”
“자, 작별 인사라니?”
“말 그대로예요. 이만 용병단을 나가려고요.”
“……!”
웃고 있던 얼굴들이 굳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특히 그를 단에 영입하는 데 앞장섰던 휴센은 얼빠진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변하지 않는 표정으로 웃고 있는 건 모두를 충격에 빠트린 매튜 본인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