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363)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363화(363/608)
제363화
“매튜,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사실은 이렇게 작별할 생각은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왜…….”
“뭐,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고 해야 하나. 내가 지금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곧 이유를 알게 될 테니까요.”
“매튜…….”
“너무 서운해하지 말아요. 예정보다 시기가 빨라지긴 했지만 언젠가 다가올 일이었어요. 어차피 계속 같이 있을 건 아니었으니까. 다들 알고 있었잖아요.”
“무슨…….”
“내 모습, 몇 년 전하고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죠.”
그 순간 할 말을 잃은 이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이 자리에서 그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매튜의 모습은 늘 똑같았다. 단순히 상징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외형의 변화가 없었다. 한창 성장기이니 누구보다 무럭무럭 자라야 할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키가 크기는커녕 체형이 달라지지도 않았다. 머리카락 한 올조차 자라지 않는 것 같았다. 처음엔 그보다 작았던 쉐리의 키가 이제 거의 비슷해진 것만 봐도 그 차이는 확실했다. 말라서 발육이 부진한 탓이라 생각해 보려 했지만 느려도 너무 느렸다. 그건 분명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대놓고 이유를 물어볼 자신은 없었기에 이종과의 혼혈일 거라 짐작하고 있었다. 사실 기이하리만치 아름다운 외모라든가,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괴력도 순수한 인간이라고 보기엔 어려운 구석이 많았다. 그러나 막상 매튜 본인이 그 사실을 짚어내니 가슴 속이 울컥거렸다.
그런 건 상관없다고 말하고 싶은데 현실적인 문제들이 입을 가로막았다. 용병의 세계는 몹시 거칠었고, 보수적인 사고방식과 편견에 찌든 자들이 많았다. 그중에선 이종족이나 이종과의 혼혈에게 적대적인 사람도 상당했다. 아니, 차라리 아예 이종족인 경우는 그나마 괜찮았으나 혼혈은 대놓고 배척했다.
종족마다 창조신이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 혼혈은 어느 신에게도 속하지 않는, 신의 가호를 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그런 시선이 자라지 않는 매튜를 앞으로 어떻게 볼지는 뻔했다. 그들이 괜찮다고 해서 정말 괜찮지는 않을 것이다. 그 모든 걸 감수하고 단에 남으라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워낙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 아이니 이미 몇 차례 불편한 상황을 겪었던 걸지도 몰랐다. 그걸 더는 견딜 수 없어서 떠나기로 한 거라면, 그렇게 되기까지 눈치채지 못한 자신들에게 말릴 자격이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생사를 함께한 동료를 이대로 그냥 보내자니 그것도 속이 아렸다. 복잡한 상념으로 얼어붙어 있는 그들을 보며 매튜는 다 안다는 듯이 웃었다.
“이거 받아요.”
그가 품 안에서 호리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마개가 꽉 닫혀 있음에도 단 향이 훅 퍼져 나왔다. 꽃향기를 연상시키는 좋은 향취에 알싸함이 거슬리지 않을 만큼 섞여 있었다. 아무래도 꽤 귀한 술인 것 같았다. 매튜는 미성년이기도 했지만 본인이 그다지 술을 즐기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 그가 술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다들 어리둥절해 했다.
“작별 선물이에요. 마시진 말고 갖고만 있어요.”
“어? 마시지 말라고?”
“당신들은 이미 신주를 마셨으니까요. 지나친 건 부족한 것만 못하죠. 지금의 당신들에게 이건 오히려 독이 될 거예요.”
“어……?”
눈을 멀뚱히 깜박거렸다. 사제에게 술을 받아 마셨을 때나, 그게 신주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나 그 자리에 매튜는 없었다. 그런데 매튜가 당연하다는 듯이 그 사실을 언급하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뭐, 아쉽게 여기진 말아요. 맛은 확실히 이게 더 낫긴 할 텐데, 효과는 당신들이 마신 게 더 좋거든요.”
“그걸 대체 어떻게…… 아니, 그럼 이것도 신주라는 거야? 아, 아니! 그보다 마실 수도 없는데 이걸 왜 가지고 있으라는 거야?”
“밑천이라고 생각해요.”
“미, 밑천?”
“앞으로 당신들은 그걸 원하는 자를 여럿 만나게 될 거예요. 그중 누구에게 넘길지, 그 대가로 무엇을 얻어낼지, 그건 당신들이 알아서 결정해요. 그 결론에 따라 앞날이 열릴 거예요.”
“어? 뭐?”
뜻을 이해하기도 전에 휴센은 제 품속에 떠넘겨지는 술병부터 받아들였다. 두 손에 잡히는 묵직한 감각에 휴센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건네준 신주는 어디서 난 건지, 예언 같은 아리송한 말들은 다 뭔지, 묻고 싶은 것들이 머릿속을 한가득 채우는데 실제로 뱉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영문은 알 수 없었으나 왠지 이런 걸 받고 나니 정말로 이별한다는 실감이 들었다. 매튜가 말한 대로, 그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 예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지금 같은 방식은 아니었다. 몇 년이란 시간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다. 그동안 그들은 피를 나눈 형제이자 가족이었다. 작별할 땐 제대로 된 송별회 정도는 할 생각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떠나지 못하게 붙잡고 싶었다.
“정말 떠날 작정이냐?”
“네.”
“그래, 그렇구나…….”
“그동안 즐거웠어요. 다들 잘 있어요.”
“하아, 잠깐. 잠깐만 기다려 봐, 매튜.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이렇게 헤어지는 건 아닌 것 같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없…….”
염치불구하고 설득할 작정으로 고개를 들었던 휴센은 그러나 다음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앞에 있던 매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황한 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혼비백산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매튜가 사라지는 모습을 목격하지 못했다. 휴센의 손에 들린 호리병이 증거로 남아 있지 않았다면, 단체로 꿈을 꿨다 해도 믿었을 것이다. 마치 귀신에게라도 홀린 기분이었다.
“뭐, 뭐야. 매튜 녀석…… 설마 이렇게 가 버린 거야?”
“그런가 봐.”
“말도 안 돼. 이렇게 허무하게…….”
이릴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들었다. 쉐리도 눈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헤롤과 마이티 역시 눈물을 참기 위해 연신 헛기침을 내뱉었다.
“거참. 기분 되게 묘하네. 매튜 녀석, 원래도 좀 묘한 느낌이긴 했지만…… 마지막이라 그런가? 오늘은 왠지 평소보다 더…….”
“뭔가 기묘한 분위기였지?”
헤롤이 중얼거리던 말을 마이티가 이었다. 마지막이라고 하긴 했지만 사실 아직도 헤어졌다는 실감은 들지 않았다. 본래도 매튜는 종종 훌쩍 어디론가 떠났다가 돌아오는 편이었다. 이번에도 그런 일들의 연장선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젠 지정된 약속 장소에 가도 그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점점 더 빈자리를 확인하게 되리라.
침울해진 그들 사이로 질식할 것처럼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그때 갑자기 주위가 소란스러워지지 않았다면 언제까지고 계속 그렇게 있었을 터였다.
“힉, 진짜다!”
“정말…… 야!”
문득 웅성거림이 퍼진다 싶더니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나가기 시작했다. 하던 일을 멈추는 사람들 사이에 한껏 긴장감이 감돌았다. 샴페인 용병들도 어리둥절해져서 고개를 들었다.
“뭐지? 무슨 일이 생겼나?”
“글쎄?”
비상사태인가 싶었는데 그리 심각한 느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냥 무시하고 넘기기엔 주변의 전조가 심상치 않았다. 신경을 날카롭게 세운 샴페인 용병들은 곧 땅을 울리는 묵직한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무장한 무리가 가까워지고 있는 듯했다. 예상대로 곧 모두의 앞에 은제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걸친 푸른색의 망토가 바람을 타고 위풍당당하게 펄럭거렸다.
“……!”
샴페인 용병들은 자기도 모르게 멍하니 입을 벌렸다. 용병대는 대체로 모든 전투에서 소모품 역할인 만큼 기사단과 접촉할 일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한창 전투를 치르다 보면 이리저리 섞이기 마련이라 마주치는 게 어색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기사단은 단지 그저 평범한 기사단이 아니었다. 그들 중에서 푸른색 망토를 걸치는 기사단은 단 하나뿐이었으니까.
때마침 그들이 들고 있는 깃발이 그 소속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었다. 검붉은 바탕에 황금 실로 새겨진 용과 사자의 문양. 틀림없는 황제의 깃발이었다. 그것을 확인함과 동시에 그들은 기사들 사이에 있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화, 황제 폐하?”
“저분, 황제 폐하 맞지?”
놀랍게도 그곳에 황제 이사나가 있었다. 주위가 소란스러워진 게 당연했다. 황제는 평소 곧잘 병사들과 어울리는 편이었지만 무법지대나 다름없는 용병대까지 오진 않았다. 첩자가 섞여들기에 가장 쉬운 환경인 만큼 신변 안전 차원에서라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같은 선발대 안에 있어도 용병들에게 황제는 그림자도 구경하기 힘든 머나먼 존재였다. 그런 그가 버젓이 눈앞에 서 있으니 다들 제 눈을 의심하기 바빴다.
조금 다른 의미이긴 했지만 그건 샴페인 용병들도 마찬가지였다. 단정한 정복 차림인 황제는 그사이 몰라볼 만큼 자라서 이젠 청년의 태가 물씬 났다. 부드럽기만 하던 인상에도 날카로움이 깃들어 한층 지배자다운 위엄이 느껴졌다. 그래선지 저 황제와 자신들이 한때는 동고동락하던 사이였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사이 부대장이 부랴부랴 뛰어나가 황제를 맞았다. 그 역시 예상하지 못한 방문인 듯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황제는 잠시간 그와 대화를 주고받다가 무언가를 살피듯 고개를 돌렸고, 곧 얼어 있는 샴페인 용병들을 발견했다. 시선이 마주치자 샴페인 용병들은 반사적으로 어깨를 바짝 세웠다. 태연히 반가운 낯을 하기엔 상대의 신분이 너무 높아서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떨리는데 아는 척을 할 배짱 따윈 일찌감치 접어야 했다. 황제 역시 지금쯤이면 그들을 잊었을 터였다.
물론 그게 얼마나 엄청난 착각이었는지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잠시 스치는 거라 생각했던 시선이 오히려 그들에게 고정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황제는 그들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까지 했다. 샴페인 용병들은 뻣뻣하게 굳은 채 숨을 멈췄다. 지금 다가오고 있는 이가 정말 황제인 것이 맞는지, 뻔히 보면서도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마물을 순식간에 해치운 영웅들이 있다 들어서 왔는데……여기서 반가운 얼굴들을 다 보는군요. 모두 오랜만입니다.”
“화,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건네진 목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린 샴페인 용병들이 허둥지둥 대답했다. 황급히 부복하려는 걸 말린 황제가 반가운 표정으로 그들을 살폈다.
“내 군에 지원했었군요. 각 부대의 상세 사항은 소임자들에게 일임한 부분이다 보니 살피는 게 늦었습니다. 서운하지는 않았습니까?”
“아, 아닙니다! 저희를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폐하!”
“덕분에 목숨을 보전했는데 기억하지 않을 리가요. 이 싸움이 끝나고 나면 가장 먼저 챙겨야 할 사람들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갚기도 전에 은인들에게 또 신세를 졌네요.”
“으, 은인이라니. 당치 않으십니다.”
과분한 칭호에 기겁한 휴센이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황제가 입을 열 때마다 수명이 몇 년씩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지켜보는 시선이 점점 강렬해지는 건 단지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마물을 잡은 후로는 어딜 가든 시선이 따라붙는 상태였다. 이 와중에 황제가 다 듣는 자리에서 친분을 드러냈으니 어떤 후폭풍이 따라올지 알 수가 없었다. 적어도 한동안은 유랑 극단과 다름없는 신세로 구경거리가 될 게 뻔했다. 그러나 황제는 그 속을 아는지 마는지 그저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흐음, 그렇군요. 당신들이 여기 있었다니. 마침 잘됐네요.”
“예, 예?”
“휴센, 금패의 용병이었던가요?”
“네, 그렇습니다만……?”
“용병대 보직을 일부 개편할 예정이었거든요. 부대장 선임을 두고 고심 중이었는데 적임자를 찾은 것 같네요. 지금부터 휴센이 이 용병대의 부대장입니다.”
“……예?”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주위가 크게 술렁거렸다. 당사자인 휴센은 입을 벌리기만 할 뿐 소리를 내지 못했다. 순식간에 돌아가는 상황을 좀처럼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가 혼란에 빠져 있는 동안 기존 부대장이었던 로우 남작이 휴센에게 다가와 팔에 무언가를 묶었다. 부대장의 표식인 붉은 리본이었다. 로우 남작은 강단 있고 현명한 지휘관이었지만 전형적인 귀족인 탓에 거칠고 제멋대로인 용병들과는 잘 맞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표식을 넘기는 그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후련해 보였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휴센이 다급하게 황제를 바라보았다.
“폐, 폐하. 이게 다 무슨 말씀이신지…….”
군대에서 지휘관의 자리란 귀족이 맡는 것이 상식이었다. 전투 중에 윗선이 다 죽으면 피치 못하게 평민이 맡을 때도 있지만 그건 극히 드문 사례였다. 더구나 휴센은 가신도 아니고 용병이었다. 계약 관계인 용병이 정식으로 부대장을 맡는다는 건 지금까지 전례가 없는 파격적인 인선이었다. 그러나 그 엄청난 일을 말 한마디로 끝낸 황제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용병계의 생리가 일반적인 군대와 조금 다르다 보니 크고 작은 충돌이 많다 들었습니다. 지금 방식은 비효율적이라는 판단이 들어 관련자 중에서 통솔을 맡길 생각이었습니다. 필요한 선임에, 합당한 적임자를 정한 겁니다. 휴센이라면 잘 해 나갈 거라 믿습니다.”
“아, 아니. 그렇지만, 폐하. 이건 너무…… 저, 저보다 뛰어난 사람도 있을 겁니다.”
“반발이 염려되는 겁니까? 그럼 이렇게 하죠. 그의 부대장 선임에 불만이 있는 자는 지금 나오세요. 본인이 부대장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좋습니다. 모두의 의견을 들어보겠습니다.”
황제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용병은 자신을 홍보하는 데 몹시 능숙한 편이었고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선 선뜻 앞으로 나서는 자가 없었다. 그때 돌연 무리 안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부대장은 휴센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