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381)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381화(381/608)
제381화
“근데 어떻게 따라잡아? 저쪽은 말을 타고 갔잖아.”
너무나도 합리적인 알리사의 질문에 나는 뺨을 살짝 긁었다. 이럴 때 공간 이동 마법을 쓸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없는 능력이 갑자기 턱 생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찾는 수밖에 없겠지. 마침 아주 괜찮은 방법이 있었다.
“뭐,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때우면 되지.”
“엉?”
“아니지. 그런 비유는 맞지 않겠네. 오히려 이쪽이 더 좋을 테니까.”
뜻을 이해하지 못한 일행이 어리둥절해 하는 가운데, 난 설명하는 대신 행동으로 선보였다. 인원에 맞춰 시큐엘을 소환하는 것으로.
촤아악! 쏴아아-
공중에서 물줄기를 쏟아내며 나타난 여러 마리의 늑대의 모습은 아무리 조심하려 해도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덩치가 산처럼 크고, 반투명한 형태였기에 더더욱. 덕분에 근방에 있던 병사들이 크게 기함하며 술렁거렸다. 일행들 역시 놀라서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느긋하게 돌아보며 웃었다.
“시큐엘이 말보다 더 빠르거든.”
* * *
기세 좋게 달리긴 했지만 우리는 황궁에 도착할 때까지 근위대장과 라온휘젠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시큐엘의 속도가 아무리 빨라도 출발 시각에서 벌어진 차이가 워낙 큰 탓이었다. 황궁 앞에 도착했을 땐 그들을 태우고 갔던 말들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는 상태였다. 그 앞을 화재를 피해 몰려나온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쏟아지는 비를 하염없이 맞고 있던 그들은 시큐엘을 탄 채 나타난 우리를 보고 경악한 얼굴을 했다.
“태자 전하는 어디로 가셨습니까?”
“아, 안으로 들어가셨…….”
아셀이 다급히 건넨 질문에 멍해 있던 사람들 중 한 명이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그 말을 듣기 무섭게 뛰어들어 가는 아셀을 따라서 나와 다른 일행도 안으로 이동했다. 금방 진압한 덕분에 화재로 인한 피해는 그리 커 보이지 않았는데, 들어찬(정확히는 일부러 쏟아부은) 빗물 탓에 내부가 상당히 엉망이었다. 우리는 질퍽한 계단을 올라 역시나 푹 젖어 있는 복도를 달렸다. 목적지는 황제의 집무실이었다. 이 시각이면 황제가 정무를 보는 시간이니, 아버지를 찾으려는 라온휘젠이 그곳으로 향했을 거란 아셀의 짐작 때문이었다. 그 짐작은 맞아 떨어져, 우리는 곧 한 문 앞에 서 있는 라온휘젠과 근위대장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머지 근위대원들은 다른 곳을 수색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전하!”
부르는 소리에 못 박힌 듯이 서 있던 라온휘젠이 반응을 보였다. 우리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 그는 뭔가에 충격을 받은 듯, 전에 없이 안색이 창백한 상태였다. 그건 근위대장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하, 무사하십니까?”
“아셀…….”
아셀이 서둘러 달려가자 라온휘젠이 곧바로 손을 뻗어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제야 현실을 자각한 것처럼 천천히 숨을 내뱉는 모습이 어딘지 위태로워 보였다.
“아셀…….”
“전하? 대체 무슨…….”
이름을 부르기만 할 뿐 제대로 된 말을 잇지 못하는 라온휘젠을 걱정스럽게 살피던 아셀이 다음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얼굴에서 점점 표정이 사라져가는 것이 뚜렷하게 보였다. 나 역시 그가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멈칫했다. 뒤쪽에 있던 일행이 일제히 헛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열려 있는 문 사이로 방 안의 광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가장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건 바닥이었다. 아무래도 이곳이 발화점이었는지 유난히 탄 부분이 많았는데, 눌어붙은 융단 위에 검붉은 액체가 고여 있었다. 한때는 살아 있는 것의 몸 안에 있었을, 생기를 잃어버린 피였다. 그 사이에 빗물이 섞이면서 복도까지 붉은 시내를 이루는 중이었다. 그 길을 따라가니 곧 사방에 쓰러져 있는 형체들이 보였다. 어림잡아도 열 구는 넘어 보이는 시신이 타다만 상태로 늘어져 있었다.
“…….”
“…….”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도 울릴 듯한 침묵이 흘렀다. 그나마 가장 먼저 정신을 다잡은 건 나였다. 방 안으로 걸음을 옮기자 그제야 멈췄던 숨을 내뱉은 일행이 허둥거리며 따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시신 앞에서 멈추고 상태를 살폈다. 엎어져 있는 몸을 똑바로 눕혀보는 것만으로 사인(死因)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가슴 부근에 새카만 구멍이 나 있었다. 심장이 척출된 상태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참담한데 아셀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나를 더 대경실색하게 했다.
“드미트리 황자 전하…….”
“……!”
맙소사, 이 시신의 정체가 황자라고? 놀라서 바라보았더니 아셀이 비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 황자인 드미트리 님입니다.” 충격을 고스란히 담아낸 목소리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왠지 불길한 예감에 나는 다른 시신들도 돌아보았다. 죽은 황자와 비슷한 연령대의 남자와 여자가 서로 대중없이 섞여 있었는데 그들 전부 좋은 소재의 옷을 입고 있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외모도 전체적으로 다들 닮은 것 같았다. 그러자 내가 한 생각을 짐작한 듯, 아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무래도…… 전부 황자님과 황녀님들이신 것 같습니다.”
“허…….”
설마 했더니 역시나 전부 황족들이었던 모양이다. 황제의 집무실 안에서 발견된 황자와 황녀의 시신들이라니. 이 장소에 이들을 불러모을 수 있는 존재가 하나밖에 없어서 소름이 돋았다. 근위대장의 시선을 피해 뭔가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더라니, 그게 이런 거였다고? 제 자식들을 악신의 제물로 내어주는 것? 어떻게 이런 일을 저지를 수가 있는 거지? 대공도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카터스의 황제는 그보다 더 미친 게 분명했다. 눈으로 보면서도 도저히 이 끔찍한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황자와 황녀가 전부 몇 명이죠?”
“태자 전하를 제외하면 열네 명이십니다.”
“열넷.”
나는 대강 넘겨보았던 시신의 숫자를 빠르게 셌다. 남자가 여섯, 여자가 일곱 명이었다.
‘한 명이 부족해.’
부족한 숫자가 있다는 게 다행이긴 한데, 남은 한 명이 운 좋게 화를 피한 건지 아닌지조차 짐작이 어려웠다. 그동안 비척비척 걸어온 라온휘젠이 천천히 내 옆에 몸을 굽히고 앉았다. 표정은 딱딱했지만 눈동자가 심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오 황자의 시신을 한동안 빤히 살피던 그는 이어서 다른 시신들도 하나하나 눈에 담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그렇게 방 안을 둘러보던 그가 이내 탄식하듯 긴 숨을 내뱉었다.
“……아드리스가 없군.”
“아드리스?”
“이 황자입니다. 현자 다니멜이 그의 장인이 됩니다.”
설명은 이번에도 아셀이 이었다. 열넷이나 되는 단 한 명만 화를 피했는데 그게 하필이면 다니멜과 이어진 황자라니. 그가 이 사태에 관여한 공범 중의 하나라는 건 굳이 짐작해볼 일도 아니었다. 생존자가 없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자들은 어디에 있는 거지?’
화재가 일어난 건 다니멜이 황궁으로 이동한 후였다. 기존 계획이 틀어지자 이쪽 상황을 은폐하기 위해 불을 지르고 달아난 게 분명했다. 내가 없었다면 근위대가 도착할 즘엔 황궁이 거의 다 전소했을 테니까. 시신을 발견해도 제사에 쓰였다는 증거는 남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 역시 전부 라온휘젠이 한 짓으로 뒤집어씌울 작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설마 이렇게 빨리 불이 꺼질 거라곤 생각지 못했겠지. 그들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면 지금쯤 꽤 당황했을 거다. 사태를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알아서 기어 나올 가능성이 있었다. 물론 대공도 함께 있다면 내 존재를 알아차렸을 테니 섣불리 행동하진 않겠지만.
“태자 전하. 일단 여길 나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내가 주위를 살피는 동안 심각한 얼굴로 다가온 근위대장이 라온휘젠에게 권했다. 돌아가는 사태가 심상치 않다 보니 그를 대피시키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듯했다. 멍해 있던 라온휘젠이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축을 받아 일어선 그가 근위대장을 의지해 문을 나설 때였다.
“대장님!”
다급한 외침이 들린다 싶더니 복도 저편에서 근위대 기사들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을 바라보던 근위대장이 다음 순간 얼굴을 굳혔다.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근위대 뒤쪽에서 다니멜이 보이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그는 혼자도 아니었다. 바로 옆에 붉은 망토를 걸친 중년의 남자가 함께한 채였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머리색이 낯익었다. 라온휘젠의 것과 같은, 카터스 제국 황족에게서만 나타난다는 선홍빛의 색깔. 현 카터스 황실에는 단 두 명만이 지니고 있다는 색이었다. 그것만 봐도 남자의 정체는 명백했다.
“폐하.”
“알마스너! 이게 다 무슨 일인가!”
급히 예의를 취하는 근위대장에게 사나운 호통이 울려 퍼졌다. 빠르게 걸어온 황제는 라온휘젠 쪽을 잠시 노려보았다.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바라보는 표정이 아니었다. 자신을 향한 뚜렷한 적의를 고스란히 느낄 텐데도 라온휘젠의 표정은 담담했다. 아직 충격을 떨치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이미 이런 시선에 익숙한 것 같았다. 대신 그는 황제의 뒤쪽을 응시했다. 그곳엔 이사나의 또래로 보이는 소년이 서 있었다. 머리색은 달랐지만 얼굴만은 황제를 붕어빵처럼 닮아 있어 그의 정체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이쪽의 상황을 보며 조소하고 있던 소년―아마도 아드리스 황자일 그는 정작 라온휘젠과 눈이 마주치자 흠칫해서 시선을 피했다.
“수석 마법사에게 전부 들었다. 그대가 짐의 지시를 어기고 회군하다니 무척이나 실망스럽군! 게다가 황궁에 불이 나다니! 별궁에서 아드리스와 산책 중이었다가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는가!”
“……지금까지 별궁에 계셨습니까?”
“그건 무슨 뜻으로 묻는 말이지?”
“무사하셔서 다행이란 생각으로 드린 말씀입니다. 아무래도 발화점이…… 폐하의 집무실로 보이는지라…….”
“집무실? 지금 거길 살피고 나오는 것인가?”
의아해하는 황제의 모습은 태연하기만 했다. 뻔뻔하게 나타났다 싶더니 이 상황을 모르는 척하기로 한 것 같았다. 너무 노골적이라 오히려 의도가 눈에 훤히 읽히는데, 그걸 감출 생각조차 안 하고 있었다. 황제인 자신을 감히 어쩌겠냐고 여기는 듯했다. 최상위 지배자다운 자신감이었고, 실제로 그렇다는 점에서 폭력적이기까지 했다. 그 정도로 명백한 걸 근위대장이라고 몰라볼 리가 없었다. 그는 석상처럼 굳어 있는 상태였다. 방 안을 살피려는 듯 앞으로 나서는 황제를 보고 근위대장의 표정이 더 굳어졌다.
“폐하, 정말 모르시는 일이라면 보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보지 말라니? 내 궁에서 짐이 몰라야 할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충격을 받으실 겁니다.”
“그런 일이라면 짐이 더더욱 알아야 하지 않겠나?”
코웃음을 친 황제가 그를 제치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이후의 전개는 뻔해서 굳이 짐작하고 말 것도 없었다. 헛숨을 삼키는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집무실 안으로 들어간 황제가 기함하며 튀어나왔다.
“이게 다 무엇이야!”
“폐하! 무슨 일이십니까!”
“안에 시신이 있다! 황자와 황녀들이……!”
채 다음 말을 잇지 못하는 황제의 모습에 다니멜과 이황자가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고, 곧 찌를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이 또한 질 나쁜 극의 한 장면처럼 작위적이었다. 그래서일까. 혼비백산하는 현장이 펼쳐지고 있는데, 그런 그들을 지켜보는 시선은 고요하기만 했다. 내 일행은 물론이고, 근위대장과 근위대 기사들의 표정도 무덤덤했다. 눈빛들이 전부 차게 식어 있었다. 그건 기만자를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단지 증거가 없는 데다가 상대가 황제이다 보니 뻔히 보이는 수에도 놀아날 수밖에 없다는 게 문제였다. 주먹을 움켜쥐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황제의 행동도 충분히 거슬렀지만 내가 신경 쓰이는 건 다른 부분이었다.
‘대공은 여기에 없는 건가.’
아무리 집중해도 달리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선뜻 모습을 드러낼 거라 여기진 않았으나 막상 찾을 수 없으니 실망스러웠다. 어쩌면 아카데미 쪽에서 보내올 제물을 기대하고 그 장소에 가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품에 넣어둔 마법 스크롤이 새삼 신경 쓰였다.
“이건 틀림없이 네 짓이렷다!”
그 사이 황제는 라온휘젠의 멱살을 붙잡고 있었다. 예상한 대로 그는 이 모든 상황을 황태자에게 덮어씌우기로 한 것 같았다. 당황한 근위대장이 나서서 말리려 했다.
“폐하, 고정하십시오. 태자 전하는 이 일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도착하셨을 때 이미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닥쳐라, 알마스너! 그대가 검을 바꿔 들었다는 것을 짐이! 내가 모를 것 같은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 명을 어기고 태자를 도왔지 않은가! 아아, 그래! 알마스너, 설마 그대가 태자를 위해 계승권을 지닌 다른 아이들을 전부 죽인 건 아니겠지? 그런 후에 불을 질러 사실을 은폐하려 한 것인가!”
“아닙니다! 어찌 그런 오해를 하십니까! 저와 태자 전하는 화재가 일어난 후에 황궁에 도착했습니다. 목격한 자들이 많으니 그들이 증언해 줄 겁니다!”
“그건 차근차근 조사해 보면 알겠지! 여봐라! 태자와 알마스너 후작을 당장 냉궁에 가둬라! 이 끔찍한 일을 내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야!”
“……!”
누가 봐도 억지스러운 명령이라도 그게 황제의 입에서 떨어지면 무게가 달라지는 법이다. 그러나 갑자기 돌아가는 상황이 당황스러운 것만은 어쩔 수 없었는지 근위대는 명이 떨어진 후에도 바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자 다음 순간 황제의 눈빛이 돌변했다. 아차 하는 사이에 그가 바로 옆에 있던 기사에게 달려들더니 그의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대로 기사를 베어버리려는 걸 막아낸 건 라온휘젠이었다. 그가 간발의 차로 황제의 팔을 붙잡은 덕분에 기사는 뺨에 생채기가 남았을 뿐 무사했다.
“히익!”
잠시 멍하니 서 있던 기사가 뒤늦게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뻔했는지를 자각하고 숨을 삼켰다. 그리고 황제의 분노는 곧바로 라온휘젠에게 쏟아졌다.
“감히!”
둔탁한 소리와 함께 라온휘젠의 고개가 크게 돌아갔다. 황제가 검 손잡이로 그의 얼굴을 내리친 것이다.
“저, 전하!”
당황한 아셀이 거의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라온휘젠은 입술 부근을 가만히 문지르기만 했다. 꽤 심하게 터졌는지 붉은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