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386)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386화(386/608)
제386화
“미안,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사정이 있었어.”
“당연히 그랬겠지. 그래서 누구야?”
“어?”
“널 역소환 시킬 뻔한 놈, 누구냐고.”
차분히 묻는 것과는 달리 라피스의 눈은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제 보니 내가 몰래 다른 걸 했다는 것보다 역소환 될 뻔했단 사실에 더 화가 난 것 같았다. 하긴 내가 다쳤을 때 그에게도 영향이 미쳤겠지. 다른 때보다도 좀 더 위험했었으니 그만큼 받은 피해도 더 컸을 거다.
“그…… 많이 아팠어? 속은 좀 괜찮아? 일단 치료부터…….”
“지금 아픈 것 따위가 문제인 것 같냐? 한순간 계약의 끈이 희미해졌었어.”
“……!”
계약이 희미해졌었다고? 그건 전혀 몰랐다. 헉, 잠깐. 그럼 이사나는? 경악하다 말고 나는 황급히 이사나와 연결된 감각을 살폈다. 라피스가 희미해졌을 정도면 이사나는 아예 해지된 게 아닌가 싶었는데, 다행히 직접 마나를 연결해 두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이사나가 그동안 성장한 덕분인지 무사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해지됐다면 내가 바로 느꼈겠구나. 그런 당연한 걸 생각하지 못하다니, 내가 당황하긴 당황한 모양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라피스가 사나운 시선을 들이밀었다.
“물어 봤자인 것 같지만. 너 설마 그거하고 정면으로 부딪친 건 아니겠지.”
“…….”
이 녀석은 왜 항상 쓸데없이 알아차리는 게 빠른 걸까. 대처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먼저 말문부터 막혔다. 변명조차 하지 못하는 나를 보며 라피스는 이미 스스로 판단을 내린 듯했다. 그의 얼굴에 다시금 화사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빠트리지 말고 설명해.”
* * *
설명이 이어질수록 라피스의 눈빛은 점점 더 살벌해졌다. 머리끝까지 열 받은 게 분명한데, 일단 다 들어 보자는 생각에서인지 화를 꾹꾹 눌러 참는 게 선명히 느껴졌다. 그러다 모든 설명이 끝났을 때쯤엔 오히려 분노할 기력을 잃어버린 듯 그저 고요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기만 했다.
“엘퀴네스가 대체로 수명이 긴 편이라더니. 네 생명력도 끈질기긴 하네. 죽을 짓만 골라 하는데 안 죽는 거 보면 참 신기하단 말이야.”
물론 신랄하게 비꼬는 말이 따라오긴 했지만. 각오했던 거에 비하면 상당히 온건한 반응이었다. 그래도 나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이러다 다시 심기가 상하면 확 불타오를 게 뻔하니까. 꺼진 불도 다시 보자라는 구호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조신하게 대답한 건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다. 조금 멈칫하던 라피스가 한층 누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마신은?”
“일단 거기서 헤어졌어. 넌 바로 안 오면 분명 화낼 거고, 정령 소환 마법진은 나만 통과할 수 있잖아.”
“그럼 아직 그 시퍼런 엘프 놈 안에 있을 수 있다는 거네?”
“엘프가 아니라 유니콘이거든? 그 전에 시벨리우스라는 멀쩡한 이름도 있고.”
“거기까진 내 알 바 아니고.”
“어휴, 너흰 대체 왜 그렇게 사이가 안 좋은 거야? 아무튼 아직 카노스이긴 할 거야. 시벨을 안전한 장소로 데려다 놓은 후에 돌아간다고 했거든.”
“안전한 장소?”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에서 헤어지기 직전 카노스와 나눈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신은 어디서든 ‘문’을 감지할 수 있어. 카류안이 이 몸을 쉽게 포기하진 않을 거야. 계속 접신한 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으니 내가 떠나기를 기다리겠지. ‘문’을 강화하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테니 좀 더 강한 장치를 해 둘까 해.”
“뭘 어떻게 하시려고요?”
“다른 기운을 섞어서 이 몸의 성질을 조금 변화시킬 거야. 그러면 문과 연결되는 길도 흐려지거든. 일종의 가림막을 세우는 거라고 보면 돼.”
“괜찮네요. 근데 다른 기운을 어떻게 섞어요?”
“방법이야 만들면 되지. 가령 누군가와 계약한다거나.”
“아! 그럼 정령 계약을?”
“그것도 나쁘진 않네. 할 수만 있다면.”
“……안 되나요?”
“어떨 것 같아?”
안 되는구나. 싱글싱글 웃는 얼굴을 보자 바로 확신이 섰다. 그러고 나니 자연스레 깨달음이 찾아들었다. 유니콘은 신족에 속하는 종족이고, 신족이나 마족은 정령과 계약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달리 다른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그들이 정령 계약에 가장 필요한 조건―자연의 속성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낭패감에 얼굴을 찌푸리자 카노스도 내가 사실을 깨달았다는 걸 알아차린 듯했다. 그의 얼굴에(정확히는 시벨리우스의 얼굴이지만) 서린 미소가 더 짙어졌다.
“가끔 이런 당연한 걸 물어보면 참 재밌단 말이야.”
“저도 제가 바보인 거 알거든요.”
“괜찮아. 그래도 귀여워.”
그건 즉, 바보라는 건 맞단 말이네?
뚱해져서 쳐다봤더니 카노스가 냐하하 경망스럽게 웃었다. 처음부터 내가 발끈하길 기대하고 한 말인 게 분명했다.
“뭐, 너무 상심하진 마. 사실 정령 계약이 가능했어도 그걸 택하진 않았을 테니까. 나쁘지 않다는 거지, 최선은 아니거든.”
“그럼 뭐가 최선인데요?”
돌아온 건 의미심장한 웃음이었다. 카노스가 들어온 후론 쭉 생소한 표정을 보이는 중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낯선 얼굴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그 모습이 왠지 음험해 보였다.
“성질 변화란 건 극단적일수록 좋은 법이지.”
“흐음, 마신이 그렇게 말했단 말이지. 그럼 그 안전한 장소라는 것도 그와 관련된 곳이겠네?”
“응, 아마도? 그 뒤로는 설명을 더 듣지 못했어.”
대놓고 물어봤지만 카노스는 그저 모호하게 웃어넘기기만 했다. 그때 상황을 생각하며 얼굴을 찌푸리려니 라피스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짐작한 듯한 얼굴이라 나는 급히 물었다.
“혹시 넌 카노스가 어디로 간 건지 알겠어?”
“뭐? 아아, 대충.”
“뭐야, 어딘데?”
“어디긴, 대놓고 다 말해 놨잖아.”
“대놓고……?”
“타인과 계약할 수 있으면서 유니콘과 극단적으로 다른 성질을 가진 존재가 뭐겠냐?”
어, 그게 그런 식으로 축약되는 건가? 이렇게 듣고 나니 머릿속이 한순간에 정리되는 것 같았다. 다른 건 몰라도 유니콘과 반대되는 성질이라면 떠오르는 존재가 하나밖에 없었다.
“……마족?”
“잘 아네.”
시큰둥한 목소리가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눈앞에 친숙한 이들의 모습이 연쇄 고리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아스와 데르온. 헤어진 이후로는 소식이 알 길이 없는 두 마족의 모습이었다.
찾아든 깨달음에 천천히 입이 벌어졌다. 카노스가 어디를 갔는지 이제야 확실히 알 것 같았다.
* * *
남자는 어둠 속을 걷고 있었다. 한 줄기 빛도 스며들지 않는 깊은 동굴의 지하였다. 비탈진 길을 따라 가장 깊숙한 곳까지 내려간 그는 곧 어느 한 곳에 이르러 걸음을 멈췄다. 구석진 부분에 덩어리진 무언가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안쪽에서 붉은빛이 새어 나왔다가 사그라지길 규칙적으로 반복하고 있었다. 마치 이 동굴의 심장 같았다. 남자는 좀 더 가까이 그 앞으로 걸어갔다. 붉은빛 속에 무언가가 잠겨 있었다.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는 소년이었다. 소년은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은 모습이었다. 성에가 내려앉은 것처럼, 하얀 실타래가 그런 소년의 온몸을 덮은 채였다. 거미줄이 감싼 것 같기도, 고치에 들어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단지 어느 쪽이든 소년이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남자가 그 안쪽을 향해 몸을 굽혔다.
“주군.”
그의 낮은 음성에 잠든 것처럼 보였던 소년이 감고 있던 눈을 살짝 떴다. 맑지 않은 붉은색 눈동자가 초점을 잃은 채 방황하다 천천히 그를 응시했다. 무언가를 묻는 듯한 시선이었다.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직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소년이 기다렸던 보고였다. 만족한 듯 휘어진 붉은 눈동자가 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까무룩 감겨들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응시한 남자―데르온이 쓴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더 필요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아스와 데르온, 두 마족은 원래 마왕의 특수군―모르스를 추적하던 중이었다. 처음엔 차원의 틈을 타고 넘어오는 마족들의 존재를 뚜렷하게 잡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묘한 기운에 휩싸인다 싶더니 그 뒤로는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방이 탁 트인 데다가 달리 앞을 가로막은 것도 없는데 어디를 가도 길이 나타나지 않았다. 갇혔다는 걸 인지한 건 그 뒤로도 꽤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나마 그도 이 세계의 구조와 지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던 덕분이라, 처음 방문한 거였다면 지금까지도 갇혔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을 게 분명했다. 시선을 두는 것마다 보이는 건 그저 평범한 산과 들판의 풍경뿐이었지만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지금 미궁에 갇혀 있었다. 잡히지도, 보이지도 않는 투명한 미궁 속에.
처음엔 돌아가는 사태를 이해할 수 없었으나 상황을 파악하기까지 그리 오래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이런 기이한 일을 자연스럽게 일으킬 수 있는 존재가 그들 가까이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한때는 이와 비슷한 힘에 도움을 받은 적도 있었다.
“은신은 바람의 힘이죠. 아무래도 침입자를 인지한 미네르바가 모르스를 대상으로 무언가 조치를 한 듯합니다.”
“그런데 운 나쁘게 우리까지 휘말렸다는 거네.”
데르온이 내린 판단에 아스도 바로 동의했다. 미네르바가 모르스의 시야를 가리기 위해 이 지역에 전반적으로 바람의 장막을 펼친 게 분명했다. 하필 그들을 추격 중이던 아스와 데르온도 마족인 바람에 오해를 산 것 같았다. 말 그대로 정말 운이 나빴다.
이 보이지 않는 미궁이 언제까지 지속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일단 갇힌 이상 그들이 평화적으로 빠져나갈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다. 미네르바 쪽에서 애꿎게 휘말린 그들을 눈치채거나, 그게 아니면 엘이 알아차리거나. 둘 다 당장 일어나기는 요원해 보였다.
“무한정 기다릴 순 없어.”
얼마간 하릴없이 시간을 보낸 끝에 아스가 결정을 내렸다.
“차라리 잘됐어. 어차피 이대론 모르스를 대면해도 죽이는 것밖엔 할 수 없었겠지. 그건 너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거든. 다른 방식으로 해결해야 해.”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마왕의 증표를 얻을 방법.”
담담한 대답에 데르온의 눈빛이 깊어졌다. 누구보다 그가 가장 바라는 일이었으며, 또한 가장 시급한 부분이기도 했다.
“조건은 다 완성했다고 생각해. 이미 힘은 충분히 갖췄어. 마족 중에서 날 능가할 수 있는 이는 없어.”
“제가 판단하기에도 그렇습니다. 주군은 이미 능력 면으로는 더 성장할 부분이 없으십니다.”
“맞아. 여기서 내게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단 하나뿐이지. 그러니 데르온, 네 도움이 필요해.”
“하명하십시오.”
낮게 떨어진 음성에 데르온이 바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스는 묵묵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매끈한 아이의 손이었다.
“내 몸을 완전히 성장시켜야겠어.”
마족의 신체는 늦어도 10년 안에 다 완성된다. 그중에서도 아스는 평균보다 성장 속도가 빠른 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완전히 다 성장하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본래는 원한다 해서 마음대로 신체를 성장시킬 순 없었다. 그러나 지금 아스에겐 지원군이 있었다. 북공작이자 생명의 숲 카르텐의 관리자인 데르온이. 마신의 정수를 만들어 내는 북공작 특유의 고유 마력은 유체를 돌보는 데 특화되어 있다. 그의 기운은 유체를 보호하며 신체의 성장을 돕는다. 그걸 단 하나의 개체에 쏟는다면 단기간에 성장하도록 하는 것도 가능했다. 단지 그동안엔 기운을 받는 쪽도, 주입하는 쪽도 현저히 약해진다는 게 문제였다.
언제 습격당할지 알 수 없는 환경에선 위험을 자초하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누군가가 공격한다면 대응할 겨를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이다. 그런데도 데르온은 망설임 없이 아스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 역시 그게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판단하는 바였다. 새 마왕이 나타나 주권을 잡으면 모르스도 그의 권속에 들어가게 된다. 전대 마왕이 내린 명령 따위는 그 자리에서 무효가 될 것이다. 가장 합리적이고 손해가 적은 방식의 해결이었다. 무엇보다 엉망이 된 마계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새 왕이 필요했다.
물론 신체가 완성된다고 해서 정말 왕의 증표가 나타난다는 보장은 없었다. 루카르엠은, 마신은 단지 때가 이르면 저절로 이뤄질 거라 했을 뿐 완벽한 정답을 알려준 적은 없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시도는 해 봐야 했다.
마침 근방에 빈 굴이 있어서 두 마족은 바로 그곳에 터를 잡고 일을 진행했다. 그러나 막상 본격적으로 시도하고 나니 예상했던 것보다 속도가 더뎠다. 뭔가 순조롭지 않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문제점을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데르온 자체가 북공작이 된 지 얼마 안 된 상태이기도 했고, 처음 해 보는 시도이다 보니 시행착오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
그때 문득 데르온이 얼굴을 굳혔다. 근처에서 낯선 기척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무언가가 동굴 안으로 들어온 듯했다. 데르온은 천천히 검을 꺼내 들고 경계했다. 들어온 것이 길을 잃은 인간이거나 짐승 종류라면 상관없었지만, 만약 모르스 중 하나라면 곤란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상황이 좋게 풀리진 않으려는 듯했다.
근방만 배회하다 다시 돌아나가길 기대했건만 기척이 점점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헤매는 발걸음도 아니라 뚜렷하고 규칙적인 걸음이었다. 이쪽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데르온은 아스가 있는 곳을 등지고 선 채 검집을 더 강하게 움켜쥐었다. 누구든 나타나면 바로 공격부터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상대의 형체가 드러났을 때 그는 아무런 행동도 이을 수 없었다.
“넌…….”
데르온의 눈이 크게 떠졌다. 동굴을 가득 채운 어둠 따윈 마족인 그의 시야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덕분에 한눈에 상대를 알아볼 순 있었으나 그 정체가 너무나 의외였다.
“이런 곳에 있었어? 꼴이 말이 아니네.”
경쾌한 음성에 데르온은 잠시간 눈을 깜빡였다. 졸고 있는 것도 아닌데 선 채로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그는 차분히 상대의 모습을 훑었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곳인데도 새하얀 은발이 선명했다. 푸르스름한 피부 하며 쭉 뻗은 키, 길죽한 귀의 형태까지, 전부 그가 알고 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시벨리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