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398)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398화(398/608)
제398화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녀가 소멸진이 된 거야.”
“뭐?”
돌아온 이오웬의 답변에 루세프가 숨을 삼켰다. 그는 몇 번이나 페르데스와 이오웬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설마 이렇게 곧바로 완성되는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충격이 컸다.
“운명의 시계를, 시계의 기한이 아직 남았잖아? 아직 돌릴 수 있는 거 아니야?”
“옳은 말이다. 시계는 아직 돌릴 수 있지. 기한은 남아 있긴 하단다.”
이번엔 라데카가 답했다.
“그런데 왜…….”
“말하지 않았느냐. 변수를 대비해야 한다고. 보다시피 이 정화진은 실패하면 바로 소멸진으로 넘어가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 미리 자원자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던 거란다. 그리고 결국 변수가 일어나고 말았지.”
루세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차분한 말투였으나 라데카 또한 표정이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정작 장본인인 페르데스의 표정만은 변함이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되어 유감이다. 후회하지는 않느냐?”
“스스로 바랐던 일입니다. 괜찮습니다.”
그 덤덤한 대답에 오히려 루세프는 얼굴을 더 일그러트렸다. 아직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이었다. 미네르바로서의 기억이 있다곤 하나 신으로 살아갈 길이 더 창창했다. 그런 페르데스가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정화진이 성공할 거라 확신했기 때문에 굳이 나서지 않았던 거야. 하지만 이런 식인 줄 알았으면 내가 한다고 했을 거야.”
“지난 희망은 덧없기만 할 뿐이지.”
루세프는 얄미운 말을 덧붙이는 카노스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끝내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악물고 고개를 떨구기만 했다.
“그럼 최후의 대항전을 시작하도록 하죠.”
분위기가 전환된 건 섀넌의 한마디에 의해서였다. 페르데스가 소멸진이 되긴 했으나 다른 신들이라고 그리 안전한 상황인 건 아니었다. 악신은 놓친 상태였고 당장 어디로 갔는지 행방을 알지 못했다. 추격에 성공한다 해서 소멸진에 얌전히 당해줄 리도 없다. 소멸 자체는 페르데스가 진행할 것이나 완전히 각성하기 전에 악신을 막아서고 붙잡아야 하는 건 나머지 신들의 역할이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는 운명의 여신인 라데카조차 장담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예상보다도 더 큰 혼란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그러나 섀넌은 말해야 했다.
“아크아돈으로 내려가서 악신을 소멸합니다.”
묵중한 한마디가 떨어지고 자리에 있던 신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전 차원의 사활을 건 진정한 전투는 바로 지금부터였다.
* * *
온 사방이 짙은 안개로 자욱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길을 남자는 하염없이 걷고 있었다. 제법 깊은 숲 안이었으나 그는 단 한 번도 방향을 잃지도, 발을 헛디디거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도 않았다. 어차피 남자에게 시야를 방해하는 장애물 같은 건 큰 의미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지금 안개가 끼었다고 느끼는 것 자체가 착각인지도 몰랐다. 그런 구분을 하지 못하게 된 지가 벌써 오래전이었으니까. 실제 날씨가 어떻든 그의 세상은 언제나 깊은 안개 속에 있었다. 그날 이후로부터 늘 변하지 않는 한 가지였다.
「신의 증표다!」
눈을 감으면 잊히지 않는 그날의 광경이 선명해진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이기도 한 날이었다.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아 남자는 머리에 쓰고 있던 후드를 뒤로 젖혔다. 이슬에 젖은 옷깃 위로 옅은 금발이 흐드러졌다.
“후우우―.”
남자―유카르테는 그제야 삼켰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선황제가 불명예스러운 죽음으로 재앙의 황제라 불린다면 그 선대엔 철혈의 황제라 불린 이가 있다. 스왈트 제국 13대 황제이자 뛰어난 검사로서 제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사력과 황권을 거머쥐었던 이젤트 황제다.
젊고 패기로우며 강했던 황제. 그가 통치한 기간은 곧 스왈트 제국이 어느 때보다 큰 번영을 누린 기간이기도 했다. 영원히 정정할 것만 같았던 황제의 기력은 그러나 그의 나이 오십에 이르러 별안간 눈에 띄게 쇠하기 시작했다. 의학과 신학을 전부 동원해도 원인을 찾을 수 없는 불치병이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걸 직감한 이젤트 황제는 그때까지 미뤄두고 있던 황태자 책봉을 서둘렀다.
1황자 카일의 행보가 심상치 않게 흘러간 건 바로 그 시기부터였다. 그가 황제의 여인들과 이복형제들을 싫어한다는 건 익히 유명한 사실이었고, 무언가 보복성 조치를 할 거라는 것도 예감했던 바였다. 하지만 유카르테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황제 자리엔 욕심이 없었다. 변방으로 쫓아내면 쫓겨나는 대로 담담히 받아들이자고, 훗날 오해를 풀어 다시 수도로 올라올 수 있게 되면 좋겠지만 평생 한직으로 삶을 마무리하게 되더라도 그 또한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 바탕에는 카일이 설마 극단적으로 가겠느냐는 마음이 있었다.
비록 형제들에겐 뚱하긴 하지만 카일은 기본적으로 훌륭한 인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늘 백성의 사정을 살피며 빈민 구제에 앞장서는 모범적인 황족이었고, 수하들에게 베푸는 걸 아끼지 않는 자비로운 군주였으며, 약혼자인 로아네즈에겐 더할 나위 없이 애틋한 연인이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분노를 절제할 줄 알았고 다투거나 징벌할 때도 상대에게 지나치게 모멸감을 주는 방식을 택하진 않았다. 그런 사람이니 아무리 싫어하는 이라도 눈앞에서 멀리 치우는 정도로 만족할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유카르테가 헤아렸던 이상으로 혈육을 향한 카일의 증오심은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깊었다. 타인에겐 얼마든지 긍휼할 수 있는 그가 피를 섞은 이에겐 그렇지 못했다. 그걸 깨달았을 땐 이미 모든 일이 벌어진 후였다. 이젤트 황제가 성력을 받기 위해 마신전으로 떠난 날, 후궁전과 황자들의 궁에 피바람이 불었다. 카일 황자를 필두로 한 그의 군사들이 황궁을 돌아다니며 눈에 보이는 족족 사람들을 죽였다. 그나마 유카르테는 좀 더 일찍 상황을 파악하고 자리를 피한 편이었다. 그러나 처지는 먼저 죽임당한 형제들과 썩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카일은 그를 집요하게 추격했다. 매섭게 날아드는 화살을 모친이 대신 맞고 쓰러졌을 땐 둔기로 맞은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를 제외한 모든 식솔이 죽었다. 멍하니 고개를 든 그 앞에 야차처럼 흉흉한 카일의 모습이 자리 잡았다. 그가 들고 있는 검에서 떨어지는 붉은 피가 눈에 아프도록 박혀 들었다. 이 모든 일이 전부 꿈같았다.
“……형님.”
“닥쳐라, 누가 네 형님이냐.”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그건 지옥에 먼저 간 네 어미에게나 물어보거라.”
비수처럼 꽂히는 말에 유카르테는 숨을 삼켰다. 카일은 증오심에 먹혔다. 언제부터, 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마음을 눌러 참아왔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알 수 있는 건 바로잡기엔 이미 너무 많이 늦어버렸다는 것뿐이었다.
“너나 나나 정말 지긋지긋한 시간이었지. 이제 전부 끝내자.”
카일이 검을 치켜들었다. 그 칼날에 살기가 어리는 걸 보면서도 유카르테는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저항할 의지조차 잃어버렸다. 그는 두 눈을 감고 제 생명을 앗아갈 고통을 겸허히 기다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찾아든 건 고통이 아닌 날카로운 쇳소리였다. 가늘게 눈을 뜬 유카르테는 누군가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걸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두 손으로 검을 잡은 채 날아든 카일의 검을 막아선 이는 드레스 차림의 여인이었다. 리본으로 곱게 묶어 내린 화사한 백금발이 바람을 타고 흩날렸다. 평생의 지기를 맹세한 친우이자 혈육이나 다름없는 로아네즈였다.
“로아.”
로아네즈는 또한 카일의 약혼녀이기도 했다. 그녀의 등장엔 카일도 당황하여 굳은 얼굴이었다. 주위에 있던 카일의 기사들도 모두 당황해서 숨을 죽였다. 공기가 가라앉으면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로아네즈는 사방에 무참히 널려 있는 시신들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떨리는 시선은 등에 화살이 꽂힌 채 절명한 테미스 황비의 시신에서 특히 더 오래 머물렀다.
“그대가 어떻게…….”
“제가 여기 있는 게 이상한가요, 전하?”
“……그대를 데리고 클모어로 내려가 있으라고, 카웰에게 말해두었을 텐데.”
“네, 그랬었죠. 저보다 고작 두 살 어린 덩치만 큰 제 조카는 지금 광 속에 갇혀 있을 거랍니다. 아마 오늘은 보실 수 없을 거예요. 그 안에서 나오면 평생 얼굴을 보지 않을 거라고 했거든요.”
“로아.”
“어리석으시네요, 전하. 갑자기 본가에 다녀오라며 보내시는데 제가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셨나요? 혹여 모르는 척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신 거라면 저에 대해서 정말 아무것도 모르셨군요.”
날 선 대답에 카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하는 연인을 보며 로아네즈는 더 강하게 검을 움켜쥐었다. 그 목소리에 원망이 서렸다.
“내가 그렇게 부탁했는데.”
“로아…….”
“하지 말라고, 안 된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유카는 내 형제이기도 하다고 했잖아! 유카는 당신을 위협하지 않을 거라고! 제발 믿어달라고 했잖아! 당신도 믿어 준다고 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아아, 내가 모르는 사이에 너는 날 살리기 위해 애쓰고 있었던가. 유카르테는 신음을 삼켰다. 로아네즈는 평소에도 늘 두 사람을 중재하기 위해 누구보다 애쓰던 사람이었다. 사랑하는 연인과 소중한 친구 사이에서 고심했을 그녀가 지금 이 순간 얼마나 절망하고 있을지, 그 심적 고통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카일도 괴로운 표정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유카르테를 보고 다시 얼굴을 굳혔다.
“……이것만은 안 돼, 로아.”
“카일!”
“이건 나도 양보할 수 없어. 이것만은…… 반드시 내 손에서 다 끝내야 해.”
“……정말 이러셔야겠어요, 전하?”
“미안합니다. 날 이해해 줘요, 로아.”
“아뇨, 이해하지 못해요.”
“로아.”
“전하 역시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실 거예요.”
로아네즈는 다시 검을 치켜들었다. 드레스 차림을 하고 있지만 그녀는 제법 매서운 실력의 검사였다. 소드 마스터까지 노릴 수 있을 거라는 말도 공공연히 들렸다. 카일은 물론 주위에 있던 기사들도 모두 긴장했다.
“유카, 여긴 내가 막을게. 어서 가.”
“로아, 안 돼.”
“난 괜찮아. 어서 달아나.”
그때 유카르테는 로아네즈가 자신의 손을 한 번 꾹 잡는 걸 느꼈다. 그게 마치 마지막 인사처럼 여겨져 심장이 철렁했다. 로아네즈는 카일의 약혼자이니 괜찮을 거라고 안심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카일은 사랑하는 연인이라도 가차 없이 죽일지 모른다. 피를 나눈 혈육들에게도 그토록 잔인하게 나오지 않았던가. 이미 모든 걸 내려놓기로 한 사람이 연인이라 해서 예외로 두지는 않을 것 같았다. 자신 때문에 로아네즈가 죽는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만큼 카일은 음산한 표정으로 로아네즈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다 이내 한숨을 내쉬더니 앞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 거침없는 행동에 검을 겨누고 있던 로아네즈가 당황했다.
“뭐, 뭐하는 거예요? 더 가까이 오지 말아요! 다가오면 찌를 거예요!”
“찔러요.”
“……!”
“그대로 찔러요, 로아. 날 죽이고 그를 선택해요. 그게 날 멈출 수 있는 유일할 방법일 겁니다.”
“카일!”
경악한 로아네즈의 얼굴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런 중에도 카일은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가고 있었다. 이윽고 그의 몸이 검이 닿을 만큼의 거리에 이르렀다. 그러나 로아네즈는 그를 찌르지 못했다. 차마 움직이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만 있는 그녀를 카일은 가만히 바라보다 흐리게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아 부드럽게 검을 떼어냈다.
“모두 뭘 하는 거지?”
조마조마한 얼굴로 주시하고 있던 기사들이 주인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카일은 유카르테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 떠오른 건 명백한 승리자의 미소였다.
“너희 임무를 완수하라.”
“예!”
크게 외친 기사들이 순식간에 유카르테의 주위를 둘러쌌다.
“아, 안 돼! 안 돼, 유카!”
절망한 로아네즈가 카일의 품에서 바둥거리며 유카르테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런 그녀를 카일이 억지로 끌어안은 채 다독였다. 그런 중에서도 제게는 견제의 눈길을 보내는 카일을 보며 유카르테는 피식 웃었다. 돌아가는 상황에 속은 시끄러웠지만, 그래도 카일이 자신의 약혼녀를 죽일 정도로 최악은 아니라서 다행이다 싶었다. 그녀가 자신 때문에 죽었다면 더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이쯤 되면 저항은 좀 해줘야겠지. 순순히 죽어주면 로아가 더 슬퍼할 테니까.”
유카르테는 검을 들었고, 달려드는 기사들과 몇 번 검을 주고받았다. 몇 사람은 밀어냈고 한 사람과는 힘겨루기로 이어졌다. 그런데 그때 검을 마주한 기사가 놀란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이어진 말에 당황한 건 유카르테 쪽이었다.
“시, 신의 증표다!”
이 뜻밖의 외침은 정신없던 현장을 단숨에 소강상태로 만들었다. 유카르테를 포위한 기사들은 물론 카일 역시 놀란 얼굴로 돌아보았다.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서 어리둥절해하던 유카르테는 그들이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자신의 손등에 선명히 찍힌 마신의 문장을 발견했다.
이게 뭐야?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그것뿐이었다. 신의 문장이라는 걸 몰라서 한 생각이 아니었다. 단지 어째서 자신의 손에 이런 게 찍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신의 문장을 지녔다는 건 신관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신관은 보통 어릴 때 결정된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신의 문장이 나타나는 건 누가 보더라도 비현실적이었다. 어렴풋이 그는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로아네즈가 자신의 손을 잡았었다.
“…….”
“…….”
사방이 이미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다들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해 혼란에 빠진 상태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적극적으로 유카르테를 공격하던 자들이 지금은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신성 제국법 제1조 제1항. 신관은 세속의 관념과 법으로 다스리지 않는다.”
침묵을 가르고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느새인가 카일의 품에서 벗어난 로아네즈였다. 그녀의 말은 이곳에 있는 모두가 유카르테를 건드리지 못하는 이유였다.
신관이 된 자는 그 기점으로 다시 태어난 것으로 한다. 과거의 신분과 행적을 전부 덮으며 그의 심판은 신에게 맡긴다.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거의 은원을 행사하려는 자는 교단의 은혜에서 제외되며, 윤리적인 규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유카가 신관이 되었네요. 이제 정말로 유카를 믿으셔도 되겠어요, 전하.”
멍해 있던 카일이 자신의 약혼녀를 돌아보았고…… 천천히 표정을 굳혔다. 그 얼굴에 떠오르는 지독한 배신감이 선명히 읽혔다. 그 역시 로아네즈가 유카르테의 손을 잡는 걸 보았었다. 문장이 가짜라는 것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카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여기서 그 사실을 밝히면 로아네즈가 종교 재판에 회부될 테니까. 그리고 반드시 화형당할 것이다. 신의 문장을 위조한 건 그만한 중죄였다.
“로아, 날 사랑합니까?”
“그래서 전하를 찌를 수 없었죠.”
“……그래요. 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힘없이 대답한 후 카일은 지친 모습으로 돌아섰다. 1황자가 일으켰던 피의 심판은 그렇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날 로아네즈는 유카르테를 끌어안고 한참 울었다. 그러면서도 이제 다 끝났다는 사실에 안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카르테에겐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