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43)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43화(43/608)
제43화
“헉……!”
새파란 물의 늑대가 지면에 착지하자 페리스는 금방에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완전한 형태를 갖춘 시큐엘이 가장 먼저 이른 곳은 그가 아닌 바로 내 앞이었다.
―위대하신 물의 왕, 우리의 주군을 뵙습니다.
시큐엘 특유의 낮고 정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확실히 상급 정령은 그 존재감부터가 중하급과는 확연히 다르다. 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시큐엘은 그제야 자신을 소환한 페리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탈진한 채로 주저앉아 있던 페리스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그대가 나를 소환한 자인가?
“그, 그렇습니다.”
―나를 이 땅에 부른 그대의 이름을 고하라.
“페리스 드 젤로……입니다.”
페리스는 약간 경직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런 그를 잠시간 물끄러미 응시하던 시큐엘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는 나와 계약할 자격이 충분하다. 태초의 약속에 의해 그대가 내게 존재의 힘을 부여하면, 나는 이 땅에서 그대의 보필자가 될 것이다. 페리스 드 젤로, 나와 계약하겠는가?
계약의 문구였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페리스는 눈을 부릅뜬 채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지켜보는 내가 다 민망할 정도로 필사적인 모습이었다.
“하, 하겠습니다! 당연히 합니다! 아니, 제발 저와 계약해 주십시오!”
그 처절한 승낙에 시큐엘의 푸른색 눈동자가 얼핏 웃는 것처럼 휘어졌다. 그에 페리스가 민망한 표정을 지을 때였다.
촤아악!
갑자기 시큐엘의 몸이 공중으로 가볍게 떠올랐다. 그가 자리를 박차고 도약한 것이다. 그렇게 거꾸로 반 바퀴를 돈 시큐엘은 그 자리에서 하나의 물덩이로 변했다. 그것은 곧 물줄기가 되어 페리스의 이마에 강렬히 내리꽂혔다.
“허억!”
―계약은 이루어졌다, 페리스!
놀란 페리스가 헛숨을 삼킴과 동시에, 웅장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미 고고한 늑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남은 것은 시큐엘이 남기고 간 짙은 물의 여운뿐이었다.
“페리스? 페리스, 괜찮아요?”
“예? 아아, 예…….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한참을 굳어 있던 페리스는 내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는 얼떨떨해진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고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매만졌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정령인 내 눈엔 똑똑히 보였다. 그의 이마에 새겨진 바람의 인장 옆으로, 새로운 물의 인장이 더해진 것을 말이다. 계약을 무사히 마쳤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저어…… 제가 정말 시큐엘과 계약한 겁니까, 엘퀴네스 님?”
“그럼요. 시큐엘도 마지막에 그렇게 말했잖아요.”
“그, 그렇긴 한데 아무래도 실감이 나지 않아서 말입니다.”
“그럼 지금 이 자리에서 한 번 소환해 보든가요.”
“예? 아아,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으음…… 시, 시큐엘?”
―날 불렀나?
“으헉!”
자신이 불렀으면서도 막상 시큐엘이 모습을 드러내자 페리스는 깜짝 놀라 허둥거렸다. 마치 한 편의 희극을 보는 기분이었다. 어쨌거나 페리스는 자신이 불러낸 물의 늑대를 보며 매우 감동했다.
“저, 정말이군요. 제가 정말 시큐엘과 계약을……! 맙소사, 어떻게 이런 일이!”
“그렇게 기뻐요?”
“기쁘다 뿐입니까? 혹시 이게 전부 꿈인 건 아닌가 의심스러울 지경입니다.”
하지만 그가 소환을 유지한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아직 상급 정령이 소모하는 마나양을 받쳐 줄 만큼 육체가 튼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당분간은 꾸준히 소환 훈련을 하며 적응 기간을 가져야 할 것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페리스는 충분히 만족해했다.
“정말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상급 정령사가 되다니! 감사합니다, 엘퀴네스 님! 모두 엘퀴네스 님 덕분입니다.”
“저한테 고마워할 것 없어요. 그것도 다 페리스한테 자질이 있어서 가능했던 거니까요. 힘들어도 당분간은 시큐엘을 자주 소환해서 적응하도록 해 봐요. 그의 기운에 익숙해지면 곧 바람의 상급 정령인 진도 불러낼 수 있을 거예요.”
“그, 그게 정말입니까?”
전혀 생각지 못한 말이었는지 페리스는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도 말했잖아요. 아무리 제가 도와준다고 해도 자질이 없으면 상급 정령을 소환하긴 힘들어요. 시큐엘을 소환했다는 건 페리스가 이미 상급 정령사가 될 자질이 있는 사람이란 뜻이에요. 오히려 진을 불러내는 건 훨씬 쉬울걸요? 페리스는 본래 바람의 속성을 지닌 정령사니까요.”
“그럴 수가…….”
“그러니까 열심히 해 보세요. 이제부터는 전부 페리스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어요. 다음에 만날 땐 바람과 물 모두 상급이 되어 있길 바랄게요.”
“예! 노력하겠습니다, 엘퀴네스 님! 반드시 그리되어 보이겠습니다.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페리스는 전의를 불태우는 얼굴로 대답했다.
낌새를 보니 당장 오늘부터 수련에 매진할 기세다. 그가 이사나의 수하 중에서 가장 강한 사람으로 꼽힐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 * *
동이 트자마자 나와 기사들은 그동안 머물렀던 흔적부터 말끔히 지웠다. 혹시 있을지 모를 추격자가 이곳까지 다다를 것을 우려해서였다.
이 과정에서 정령들의 활약이 빛을 발했다. 특히 땅의 정령들의 솜씨가 발군이었다. 그들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인위적으로 깎이거나 패인 자국들이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왔다. 마지막으로 바람의 정령까지 움직이자, 사람의 체온으로 달아올랐던 공기마저 서늘하게 식었다. 이제 누군가 우연히 동굴을 발견해도 이곳에 사람이 숨어 있었다는 걸 알아채긴 힘들 것 같았다.
모든 준비를 마친 뒤 기사들은 각자의 짐을 메고 이사나 앞에 정렬했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얼굴에서 사뭇 비장함이 감돌았다.
“다시 뵐 때까지 부디 강녕하십시오, 폐하.”
“……그대들의 무운을 빈다.”
이사나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얼굴로 힘없이 답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기사들의 얼굴에도 안타까운 표정이 서리긴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대장인 케이 역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그들의 분위기는 밝은 편이었다. 특히 어젯밤 페리스가 상급 정령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접한 이후로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힘이 필요한 상황이니만큼 동료의 성취가 반가운 것은 당연하다. 무엇보다 그들은 일일이 물을 구하러 다닐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가장 크게 기뻐했다.
“폐하를 잘 부탁드립니다, 엘퀴네스 님.”
“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다 잘될 거예요.”
“정령왕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한결 마음이 든든합니다.”
이후에도 기사들은 몇 차례나 더 당부의 말을 전한 뒤에야 먼 길을 떠났다.
이윽고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이사나는 그 자리에 서서 못이 박힌 듯 움직이지 못했다. 나는 우리 몫의 배낭을 집어 들고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 이제 우리도 출발하자. 기사들은 괜찮을 테니 너무 염려하지 마.”
“으응.”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인 이사나는 곧 나를 따라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그리곤 우물거리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기, 엘퀴네스…… 고마워.”
“응? 뭐가?”
“경비를 마련해 준 것도 그렇고, 페리스를 상급 정령사로 만들어 준 것도 그렇고…… 그 외에도 이것저것. 전부 고마운 것들뿐이라 어떻게 감사의 인사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
“됐어, 뭘 그런 걸 가지고. 넌 내 계약자잖아. 이 정도는 돕는 게 당연하지. 그리고 그냥 엘이라고 불러.”
“엘?”
“나와 친한 존재들은 다 그렇게 부르거든. 게다가 앞으로 마을이나 도시를 방문하는 일이 많을 텐데 사람들 앞에서도 날 엘퀴네스라고 부를 순 없을 것 아냐.”
어리둥절해하던 이사나는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엘.”
“좋아. 아, 그렇지. 이참에 네 가명도 짓자. ‘라이’라는 이름 어때?”
“난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런데 그게 무슨 뜻이야?”
“거짓말(Lie)이라는 의미야.”
“거짓말?”
놀란 표정을 짓는 그를 향해 나는 생긋 웃었다.
“가짜 이름이잖아. 그러니까 거짓말이란 거지. 즉석에서 지어낸 것치곤 꽤 괜찮지 않아?”
“하하, 응. 정말 그러네.”
“그럼 이제부터 사람들 앞에선 널 ‘라이’라고 부를게. 누가 우리 사이를 물어보면 형제라고 하자. 먼 곳에 사는 친척을 만나기 위해 여행 중인 상태라고 말이야.”
“형제……?”
“응, 내가 형이고 네가 동생. 왜, 싫어?”
“아니…… 그건 아니지만, 사람들이 믿어 줄까?”
“뭐, 어때. 형제라고 꼭 얼굴이 닮을 필요는 없잖아. 정 안 되면 이복형제라고 하면 되지.”
“그런 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해 본 말이었어.”
나는 어색하게 웃는 이사나를 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야, 싱겁긴. 아무튼 아까 제국 전도를 봤는데 여기서 반나절 정도 걸어가면 조금 큰 규모의 도시가 나오는 것 같아. 일단 오늘은 그곳으로 가서 숙박을 잡자. 아,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바깥에선 후드를 절대 벗지 마. 알았지?”
이사나는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내 눈치를 살피는 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왜?”
“저기, 엘도 후드를 쓰고 다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응? 나도?”
이번에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괜찮지 않아? 수배 목록에 오른 것도 아니고, 이곳엔 날 아는 사람도 없는걸.”
“……하지만 눈에 띄니까.”
“눈에 띄어? 아, 이 머리색 때문에?”
나는 머리카락 일부를 들어 보였다. 자극적인 색깔이 꽤 많은 이곳에서도 내 머리색은 흔치 않은 편이다. 그 때문에 식량을 구하러 갔을 때 일부러 후드를 쓰긴 했지만(작은 마을이다 보니 아무에게도 인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굳이 다른 곳에서까지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이사나의 입장은 강경했다.
“어쨌든 난 엘도 후드를 쓰고 다니는 게 좋을 것 같아.”
“으음, 알았어. 그러지 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사나는 환하게 안색을 밝혔다. 왠지 안도에 가까운 표정이다. 혹시 저 혼자 후드를 쓰는 게 싫었던 건가?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이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 *
산에서 내려와 마을 어귀 쪽을 향하던 우리는 그 앞에 진을 치고 있는 한 무리의 병사들을 발견했다. 그들 가운데엔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황갈색 머리칼의 남자가 서 있었다. 한눈에 봐도 차림이나 소지품 같은 것에서 귀족임을 알 수 있는 자였다.
그는 마을 주민으로 보이는 몇 사람과 함께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손에는 길게 늘어진 두루마기를 든 채였다.
그 순간 이사나가 흠칫 몸을 굳히더니 내 옆으로 바짝 몸을 밀착시켰다. 후드에 가려져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겁을 먹은 기색이었다.
“왜 그래, 이사나?”
“세트니오 백작…….”
“뭐?”
“숙부의 수하야.”
“……!”
나는 얼굴을 굳히고 다시 그들 쪽을 응시했다. 세트니오 백작이라는 자는 주민들과 이야기를 하느라 이쪽엔 전혀 시선을 주지 않았다. 병사들 역시 딱히 주변을 감시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나는 낮은 목소리로 이사나에게 속삭였다.
“긴장하지 말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걸어. 알았지?”
이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굳어지는 몸은 어쩔 수 없는지 내 팔을 붙잡고 있는 손에서 가는 떨림이 느껴졌다.
우리는 병사들이 진을 친 장소에서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 걸었다. 마침 활동이 잦은 시각이었기 때문에 우리 외에도 같은 길목을 걷는 사람들이 많았다. 운이 어지간히 나쁘지 않은 이상 들키진 않을 것 같았다.
이윽고 옆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나는 그들이 나누는 대화의 내용을 잠시 엿들을 수 있었다.
“이 산으로 향하는 걸 봤다고?”
“예, 분명히 제 두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수배지의 인상착의와 비슷한 게 확실한가?”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똑같은 특징은 일부러 만들려고 해도 힘들 겁니다.”
“흐음…….”
우리를 겨냥한 것이 분명한 대화였다. 아무래도 밤사이에 신고가 들어간 모양이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이렇게 빨리 뒤를 밟힐 줄이야. 일찌감치 길을 떠나서 천만다행이다. 아마 저들에게 기사들이 발각될 일은 없을 것이다. 수색은커녕 흔적을 발견하는 것조차 힘들 테니까. 간발의 차이로 위험을 면했다고 생각하니 등줄기에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어이, 거기!”
하지만 위기는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때마침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던 병사 하나가 우리를 발견하고 부른 것이다. 놀라서 바라보자 그가 가까이 다가오라는 듯 손짓했다.
“에, 엘…….”
“괜찮아. 침착해.”
긴장하긴 마찬가지였지만 나는 애써 차분한 어조로 이사나를 진정시켰다.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갑자기 무언가 날아들었다. 반사적으로 잡고 보니 빈 나무통이었다. 어리둥절해져서 바라보자 그것을 던진 병사가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가서 물 좀 길어 와라.”
“……네?”
“못 들었냐? 물이 다 떨어졌으니까 가서 새 물을 길어 오라고.”
“…….”
다행히 우리가 수상해서 불러 세웠던 건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안도가 되는 것과는 별개로 불쾌한 기분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지가 뭔데 남한테 물을 길어 오라 마라야? 그러자 그것을 눈치챈 듯 이사나가 옆에서 조심스럽게 내 옷깃을 잡아끌었다. 가급적 자극하지 말라는 눈빛이었다.
나는 꾹 참고 다시 병사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물이야 지금 당장에라도 채울 수 있으니 딱히 번거로울 것도 없다. 그냥 다녀오는 시늉 정도만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때 문득 머릿속에 한 가지 사실이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