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436)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436화(436/608)
제436화
“아까 시신이 발견됐답니다. 그런데 시신의 상태가 며칠 전에 발견된 변사체와 거의 똑같대요. 흉부와 복부를 관통한 두 개의 치명상, 이마에 빗살 무늬가 새겨져 있는 것까지도요.”
“빗살 무늬?”
“검으로 직접 그어서 새긴 거라네요. 마치 표식을 남겨두듯이요.”
헐, 그 말은 즉…….
“연쇄살인인가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낮아지자 종업원 역시 극도로 조심스러운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경비대는 그렇게 보는 모양입니다. 굉장히 잔인한 놈이라네요. 직접적인 사인은 두 개의 자상이지만 몸에 다른 상처도 많대요. 죽이기 직전까지 잔인하게 고문한 것 같답니다. 손님들도 조심하세요. 요즘 들어 실종 사건도 많다던데, 갈수록 세상이 험악해지네요.”
“용의자는요?”
“조사 중이긴 한데 영 신통치 않나 봅니다. 오늘 발견된 피해자의 사망 추정 시간이 오전이거든요. 그 시간에 그가 누구랑 같이 있는 걸 본 사람이 있었나 봅니다. 근데 상대가 소년이었다나요.”
“소년이요?”
“네, 아마 잘못 본 거겠죠. 죽은 두 사람 다 성인 남자거든요. 특히 며칠 전에 죽은 사람은 7라오에 가까운 거굽니다. 어린애가 범인이라니 말도 안 되죠.”
황당해하며 떠들던 종업원은 다시금 몇 번이고 주의를 당부했다. 그가 이토록 열성적으로 충고하는 이유는 살해당한 두 사람이 전부 귀족이었기 때문이다. 어제 엘뤼엔이 보인 대범한 씀씀이 때문인지 종업원들은 우리를 귀족으로 알고 있었다. 힐끔힐끔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어떻게든 엘뤼엔에게 잘 보여 웃돈을 받아내려는 의도가 만만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창밖만을 응시하고 있는 엘뤼엔은 그쪽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지만.
결국 종업원은 원하는 바를 끝내 이룰 수 없었다. 시무룩해진 그가 쓸쓸하게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다 나는 문득 궁금해진 걸 물었다.
“7라오면 얼마나 큰 거야?”
“……거기부터인가. 갈 길이 멀군.”
“그래서 얼마인데?”
“1라오가 네 아래팔 길이 정도 될 거다.”
아래팔이라, 그 정도면 삼십 센티가량 되려나. 아마도 지구의 피트 단위에 가까운 것 같다. 2미터가 훌쩍 넘는다는 소리였다. 확실히 소년이 그만한 장정을 해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이능력자라 해도 어릴 때부터 공격적인 힘을 내기는 힘들다. 그전에 어린애가 사람을 고문해서 죽일 생각을 하는 건 더 드물 거고.
“그보다 무섭네. 여기도 연쇄살인이 있구나.”
“마치 너는 이곳 사람이 아니라는 말처럼 들리는군.”
“아하하, 그야 이 지역 사람은 아니니까. 이쪽은 좀 더 부유해서 여유롭고 평화로울 줄 알았어. 그래도 역시 사람 사는 곳은 별로 다르지 않네.”
“그런가. 하지만 방금 저자가 말한 건 트로웰일 거다.”
“아, 그래? 트로웰이었…… 뭐?”
여기서 왜 그 이름이 나오는 거지?
반사적으로 고개부터 끄덕이다 뒤늦게 무슨 말인지 깨닫고 머리가 멍해졌다. 반가운 이름인 건 분명한데, 지금 이 흐름에서 나올 만한 이름은 아니다 보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조차 의심스럽다. 덕분에 눈만 깜빡이고 있는 걸 엘뤼엔은 누군지 몰라서 그런다고 여긴 듯했다. 시선을 맞춰온 그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친절을 베풀었다.
“트로웰 말이다. 땅의 정령왕을 부르는 이름은 모르나?”
“……아니, 알아. 그런데 트로웰이 범인이라니?”
“요즘 그 녀석이 이 근방을 서성거리는 중이니까.”
“트로웰이 이 근처에 있다는 게 왜 그가 범인이라는 결과로 이어지는데?”
“이미 전과가 있기 때문이다. 요즘 인간 사냥에 취미를 붙인 모양이더군.”
“……거짓말이지?”
인간 사냥이라니.
트로웰이 인간을 사냥한다고? 내가 아는 그 트로웰이?
지금 내가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건지 모르겠다. 머릿속이 엉망으로 엉켜가는 것 같아 심호흡부터 크게 했다. 혹시 다른 트로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스치긴 했지만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이 시대면 내가 아는 트로웰이 분명했다. 피해자도 소년과 함께 있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더더욱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뭔가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짐작 가는 부분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지금 모습이 그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안 돼.>
언젠가 시벨리우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이 시기의 트로웰을 매우 무서운 존재로 평했었다. 인간을 너무 싫어했다고. 전부 죽여 멸족시킬 계획까지 품었다고 했었지.
당시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해서 그냥 무시했다. 훗날 트로웰이 과거를 직접 인정했을 때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았다. 내가 아는 그는 언제나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이었으니까. 엄격할 때도 있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때뿐이었고, 원칙이나 규범을 벗어나는 모습을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여겼던 모양이다. 드물게 잔인한 마음을 품었어도, 그걸 드러내진 않았으리라고.
‘그런데 이런 거였구나…….’
동요를 감출 수가 없어 입술을 깨물었다. 심장이 아플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내가 얼마나 안이했는지 강제로 실감한 기분이다. 사실은 지금도 믿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지금 사건은 트로웰과 연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조금 전 들었던 말이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 살인범이 시신의 이마에 표식을 남긴다고 했던가. 왜 하필이면 그게 빗살 무늬인 건지 모르겠다. 양쪽으로 대칭된 사선이 아래로 모이는 듯한 형태의 빗살 무늬는, 땅의 정령의 표식이었다.
“활보하던 곳을 놔두고 왜 갑자기 이곳으로 건너온 건지는 모르겠지만……아, 그렇군. 이게 목적인 건가.”
혼잣말을 중얼거린 엘뤼엔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무슨 의미인지 모를 수가 없어서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나? 내가 목적이라고?”
“이변이 되려는지 확인하려는 모양이군.”
“이변?”
“이 시점에 새로운 왕의 계약자가 나타났으니, 그 예민한 성정에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겠지.”
답은 하는데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들뿐이다. 가르쳐줄 생각이 없는 건지,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그런 건지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달라며 부탁해보려던 때였다. 문득 엘뤼엔이 멈칫하더니 싸늘하게 웃었다.
“왜, 왜 그래?”
“……본계로 돌아가 봐야겠다.”
“뭐?”
뜬금없는 말에 당황해하는데 그는 바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내게 묵직한 주머니 하나를 던졌다. 절그럭거리는 안쪽엔 금화가 들어 있었다.
“난 한동안 오지 못할 거다. 그동안 알아서 필요한 데 써라.”
“아니, 왜 이렇게 갑자기…….”
정령계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그보다 한동안이라는 건 얼마간이라는 거지 모르겠다. 기차도 혼자 타야 하는 건가? 복잡해지는 생각에 머리를 부지런히 굴리고 있는데 엘뤼엔이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말했다.
“만일을 위해 경고 하나 해두지. 내가 없는 동안 트로웰과 마주치면 최대한 자극하지 말고 얌전히 굴어라. 생각을 멈추고 최대한 머릿속을 비워. 특히 거짓말은 금지다.”
“어? 트로웰?”
“그 녀석은 나와는 달라서 여유가 없다. 타고나길 느긋한 미네르바와도, 일부러 어리숙하게 구는 이프리트와도 달라. 아직 쉬운 방법밖에 모르는 애송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살 수 있는 법을 알려주는 거다. 네가 자극하지만 않으면 죽이진 않을 거다. 내 화를 살 생각까진 없을 테니.”
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울상을 짓든 말든 엘뤼엔은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동행분은 어디 가셨습니까?”
뒤늦게 주문한 요리를 가져온 종업원이 빈자리를 보고 어리둥절해했다. 두 사람 몫을 혼자서 먹어도 괜찮겠냐는 얼굴이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나 혼자 먹을 거였다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 * *
출발일 전날까지 엘뤼엔은 돌아오지 않았다. 예상대로 기차는 나 혼자 타야 할 모양이었다. 앞으로 이어질 장거리 여행을 대비해 나는 가볍게 상점가를 돌아보기로 했다. 나흘이나 되는 여정이다 보니 기차 안에서도 음식은 살 수 있었지만, 그 외의 것들은 알아서 구비해야 했다. 모포는 오는 동안 마련했기 때문에 망토와 여벌 옷을 준비하는 쪽으로 경로를 잡았다. 그때그때 세탁하는 편이라 굳이 갈아입을 필요는 없었지만 사람의 일은 모르는 거니까. 같은 의미에서 비상식량을 준비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와, 마법 물품이 사방에 널려 있네.”
황금시대는 상점가도 별세계였다. 내 시대에선 사고 싶어도 구하지 못하는 아공간 배낭이 이곳에선 좌판에 그냥 굴러다녔다. 게다가 가격이 그렇게 비싸지도 않았다. 마도구 종류도 워낙 다양해서 조금만 방심하면 넋 놓고 탕진할 것 같았다. 겨우 마음을 다잡고 배낭과 함께 유용해 보이는 것들 위주로만 몇 가지 구매했다. 마침 책방도 있기에 들러서 몬스터 도감도 한 권 샀다. 고작 낙방 한 번에 헌터가 되는 걸 포기할 수는 없지. 다음 시험을 대비해 전부 다 외워둘 생각이었다. 여기까지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어이, 이봐. 거기, 금발!”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한 건 바로 그다음부터였다. 책방을 막 나서는데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무심코 고개를 드니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보였다. 용병인지 병사인지, 가벼운 무장을 한 차림이었다. 시선을 맞추자 남자에게서 살짝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 보는 사람이 분명한데, 이상할 정도로 반가워하는 얼굴이었다.
“지금 절 부르신 건가요?”
“흠흠. 그래, 자네 말이야. 아까부터 보니 혼자 다니던데. 일행이 없나?”
“그걸 왜 물으시죠?”
“혹시 상경해서 일자리를 구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해서 말이야. 내가 직업을 알선하는 사람이거든. 좋은 일자리를 소개해줄까 하는데.”
“아, 그런 거군요. 잘못 보셨네요. 전 그냥 여행객이에요.”
“아아, 그랬군. 여행은 혼자서?”
“네, 뭐. 지금은요.”
대충 고개를 끄덕이니 남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렇군. 일행을 중간지에서 만나기로 한 모양이지? 어디서 왔나? 여기 관광은 충분히 했고? 이곳 알딘 시는 정말 아름다운 도시지. 돌아볼 곳이 정말 많다네. 괜찮다면 내가 안내해주고 싶은데.”
“아뇨, 괜찮습니다. 혼자 다닐 수 있어요.”
“그러지 말고. 괜찮은 식당도 소개해주겠네. 보리주가 끝내주게 맛있는 곳을 알거든.”
아니, 괜찮다는데 왜 이렇게 치근덕거려?
왠지 느낌이 이상해서 남자와 거리를 두려는 때였다. 어디선가 청아한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드넓은 광장이 눈에 들어왔다. 타일이 촘촘하게 깔린 광장은 한눈에도 잘 꾸며진 태가 났다. 둥글게 깎아 모양을 낸 정원수, 한가운데엔 천사의 동상이 세워진 분수대도 있었다.
바로 그 앞에 한 남자가 앉아 피리를 연주하고 있었다. 가볍게 감긴 눈, 쭉 뻗은 몸체 위에 흐르듯이 이어지는 부드러운 손길. 입구를 베어 문 입술이 호흡을 불어 넣을 때마다 맑은 바람 소리가 세상과 공명하는 듯했다. 음악을 잘 모르는 내가 듣기에도 잘한다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사람을 홀리는 듯한 연주였다.
다들 비슷한 감상이었는지 오가던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는 중이었다. 벌써 그 앞으로 다가가 자리를 잡은 이들도 있었다. 나 역시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상할 정도로 귀찮게 굴던 남자의 존재는 이미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단지 연주가 좋아서만은 아니었다. 사람들 사이에 비치는 연주자의 모습이 내가 아는 누군가와 너무 닮았기 때문이었다.
“……설마.”
짙은 갈색 피부와 밤하늘처럼 새카만 머리카락. 조각으로 새긴 듯이 섬세한 이목구비. 풍성하고 긴 속눈썹. 그 아래 드리운, 황금빛으로 찬란히 빛나는 심연의 눈동자.
‘트로웰……?’
결코 착각할 수도, 몰라볼 수도 없는 모습이었다. 이런 분위기와 외모를 지닌 사람이 그 말고 또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뭔가 조금 이상했다. 내가 아는 그라면 소년이어야 하는데, 지금 연주 중인 남자는 아무리 봐도 성인으로 보였다. 키도 훨씬 컸고, 머리카락도 더 길었다. 성숙함이 더해진 미형의 얼굴은 남성이라는 느낌이 더 확고해서 선뜻 다가서기 힘든 위험한 분위기까지 품고 있었다. 성인이 된 트로웰을 구현해낸다면 딱 이런 모습일 것 같다.
그래도 트로웰이 맞냐고 하면 확신해서 대답할 자신은 없었다. 마음먹으면 외형을 조금씩 바꿀 수 있기야 하지만, 아예 연령대까지 바꿀 수 있었던가? 나는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사람들 틈에서 그의 모습을 열심히 살폈다. 그동안 주위를 흠뻑 적셔가던 연주가 끝났다. 사방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오는 가운데 그가 들고 있던 피리를 내려놓았다. 그 순간 고개를 든 그와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아.’
찰나에 불과할 만큼, 아주 잠깐 스치는 시선이었다. 하지만 그 눈을 보는 순간 알 수밖에 없었다. 역시 트로웰이다. 모습은 조금 달라도 틀림없는 그였다. 머뭇거리는 동안 그의 모습은 몰려드는 인파 속에 파묻혔다. 착각일까. 다시 피리를 연주하기 시작한 그가 얼핏 웃는 듯했다.
“와, 정말 대단한 연주야. 외모를 보니 다크 엘프 혼혈인가? 듣던 대로 굉장한 미모로군.”
정신을 차린 건 가까이에서 들려온 걸걸한 목소리 때문이었다. 고개를 드니 큰 덩치가 보였다. 아까 이상할 정도로 귀찮게 굴던 남자가 아직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트로웰을 살피는 동안 같이 옆에서 연주를 구경하고 있었던 듯했다. 남자는 트로웰이 있던 쪽을 탐난다는 듯한 얼굴로 바라보면서 연신 입맛을 다셨다.
“아쉽구만. 나이가 좀 어렸음 좋았을 텐데. 혼혈이라도 성인이라면 안 되겠지…….”
“그게 무슨 소리예요?”
“엉? 아아, 일자리 얘기였어, 일자리. 다크 엘프는 나이가 들수록 성질이 사나운 데다가 이종족에게 경계심이 심하거든. 가까이 다가가면 분명 싫어하겠지. 저렇게 아름다운 외모에 좋은 연주 솜씨까지 갖췄으니 귀족가에 소개해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텐데 말이야.”
언뜻 듣기엔 그럴듯한 대답인데, 왠지 느낌이 묘했다. 그래서 아쉬움을 역력히 드러낸 남자에게 굳이 다크 엘프가 아닐 거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다행히 그는 금방 미련을 접는 것 같았다. 대신 기이한 관심이 다시 내 쪽을 향했지만.
“하지만 외모는 사실 자네가 더 훌륭한 것 같아.”
“……네?”
“솔직히 이렇게 아름다운 금발은 태어나서 처음 봤어. 에메랄드 같은 눈동자 색은 또 어떻고. 피부색은 비칠 듯이 하얀 게 마치 도자기 같군. 솔직히 처음엔 엘프인 줄 알았다니까? 아니, 어지간한 엘프도 자네만큼 아름답진 않을 거야.”
“아, 그런가요…….”
뭐지, 이 사람. 너무 불편하다. 처음 보는 사이에 자꾸 친근한 척 다가오는 것도 그렇고, 뜬금없는 외모 칭찬도 거북하기 짝이 없었다. 사람이 아니라 물건을 품평하는 듯한 태도인데 본인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 게다가 내 표정이 굳는 걸 보았을 텐데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하하, 그럼 좋은 연주도 들었겠다, 이 기분으로 같이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갈까? 아까 말했던 보리주가 맛있는 집으로 안내하지.”
“아뇨, 저는…….”
“자자, 거절하지 말고.”
불편한 마음에 살짝 얼굴을 찌푸리는데 얼핏 남자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꺼내 들 듯 말 듯 꿈질거리는 손가락 사이로 작은 통 같은 게 쥐어져 있었다.
“지금 그건 뭐…….”
그냥 넘어가선 안 될 느낌에 지적하려는데 문득 주위가 고요해졌다. 들려오던 음악 소리가 끊겼다는 건 조금 늦게 깨달았다. 나만큼이나 한발 늦게 반응한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무리가 양쪽으로 갈라지더니 점차 길이 트였다. 그 틈으로 누군가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트로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