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443)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443화(443/608)
제443화
“억? 아니? 그치만? 사람이 잡혀갔는데…….”
-이미 늦었다. 그 바다엔 없어.
나도 모르게 변명부터 늘어놓으려니 기대하지도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이번에도 엘뤼엔의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시큐엘에게 의사를 전달하는 걸 넘어서서, 그의 의식을 지배해 나를 직접 대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와, 하위 정령을 이런 식으로 다룰 수도 있는 거였구나. 여기 와서 새삼 많은 걸 배우는 것 같다.
“어, 근데, 없다고?”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대체 거길 무슨 생각으로 들어간 거지? 인어는 물속에선 전이 능력을 쓸 수 있다. 사냥하러 몸을 밖으로 내민 순간이면 모를까, 일단 물에 들어가면 인간인 네가 따라잡을 수 있는 게 아니야.
헉, 그렇구나. 그런 능력이 있는 줄은 몰랐다. 낭패감에 혀를 차려니 바라보는 시선이 엄격해졌다.
-당장 돌아와.
할 수 없이 나는 얌전히 배로 돌아갔다. 그때까지도 갑판은 여전히 짙은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그 안에서 승객을 안으로 들여보내려는 선원들과 저항하는 승객들 사이에 벌어진 실랑이가 한창이었다.
“여러분, 모두 선실로 들어가십시오! 갑판 위는 위험합니다! 주위에 인어가 또 있을 수 있습니다!”
“선실 안은 안전한 거 맞아요? 여기가 대체 어딘데 인어가 나타난 겁니까? 이런 위험한 일이 생길 거면 경고를 해줬어야죠!”
“아까부터 우리 애가 보이지 않아요! 누가 빠졌는지만이라도 알려주세요!”
“진정하고 기다려주세요! 지금 신원을 파악 중입니다!”
“진정하게 생겼어? 우리 애가 보이지 않는다니까!”
분개한 사람들은 아무리 설득해도 물러나지 않았다. 만류하는 선원들에겐 고역이겠지만 내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시큐엘의 도움을 받아 물기를 전부 말린 후 슬쩍 그들 틈에 합류하니 아무도 내가 바다에 들어갔다 나왔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잠시 후 자욱하던 안개가 걷히고 새파란 하늘이 나타났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화창하게 맑아지는 날씨에 다투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입을 다물었다. 흠뻑 젖은 선원들이 침울한 얼굴로 갑판 위로 올라서자 주위는 더욱 고요해졌다. 그들 모두가 같은 것을 깨달은 얼굴이었다. 모든 사태가 끝났다. 사라진 사람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터였다.
* * *
피해자는 이삼십 대 남자 세 명으로 확인됐다. 같은 선실을 쓰던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들 모두 한 길드에 소속된 헌터로 보였다고 했다. 다들 이상할 정도로 과묵하고 조용했으며, 사람들과 어울리길 꺼렸다는 게 전반적인 평가였다. 마치 숨어있다시피 내내 안에서만 지내다가 닷새 만에 처음으로 갑판으로 나왔는데, 하필이면 그날 변을 당한 거였다.
그 기묘한 시기를 두고 사람들은 그들이 인어를 사냥한 건 아닌지 의심했다. 선실에서 나오지 않았던 건 인어의 보복을 피하기 위해서였고, 이제 안전해졌다 싶어지자 나왔으나 인어들이 끝까지 추격해온 게 아니냐는 거였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지만, 어쨌든 그 뒤로 제국에 도착할 때까지 인어의 습격이 다시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예상치 못한 사고와는 상관없이 배는 예정한 일정대로 목적지에 도착했다.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한 일은 제도까지의 차편을 알아보는 거였다. 지난번 경험을 교훈 삼아, 배차 시간을 미리 알아보고 동선을 짜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역시나 예상대로 이곳 역시 배차 간격이 매우 넓었다. 제도까지 직행도 아니고 중간지까지만 가는데도 적게는 하루 이틀, 많게는 열흘씩도 기다려야 하는 간격이었다. 그래도 이번엔 운이 따라주는지 바로 오늘 저녁에 출발하는 기차가 있었다. 게다가 남은 객실도 준비라도 해둔 듯한 이인실이었다.
“운이 좋으시네요, 손님. 마침 이인실 객실 딱 하나만 남아 있었거든요.”
“그래요? 다행이다. 이인실에 세 명이 타도 되나요?”
“네, 그건 상관없습니다만 추가 인원은 그만큼 비용을 더 내셔야 합니다. 그리고 침대도 같이 쓰셔야 하고요.”
“그건 괜찮아요. 추가 비용까지 합하면 모두 얼마예요?”
친절한 역무원이 세 명분의 객실 비용을 알려주었다. 반가운 마음으로 막 계산을 하려는 때였다.
“표가 없습니까?”
바로 옆에서 절박한 목소리가 울렸다. 무심코 돌아보니 긴 망토를 걸친 장신의 여자가 보였다. 그녀를 상대하던 다른 역무원이 곤란한 표정으로 나를 힐끔거렸다.
“죄송합니다, 손님. 다른 객실은 일반실까지 전부 매진이고 지금 이분이 사가시는 이인실이 마지막이에요.”
“그럴 수가…….”
무겁게 신음을 흘린 여자가 역무원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나를 응시했다. 나 역시 얼결에 시선을 마주했다. 덕분에 자세히 보게 된 여자는 트로웰만큼은 아니지만 짙은 색의 피부에 검은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후드를 눌러 쓰고 있어 머리칼은 보이지 않았으나 눈썹 색을 보면 회색인 것 같았다.
내가 살펴보는 만큼 여자도 나를 살피는 듯했다. 조금 당황한 듯한 시선이 내 얼굴에 고정되어 한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본래 용건을 상기했는지 곧 근심 어린 얼굴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 실례합니다. 염치없는 부탁인 줄은 압니다만, 혹시 제게 표를 양보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음, 다음 열차는 언제 있죠?”
“나흘 후입니다.”
상황을 살피고 있던 역무원이 친절하게 답했다. 나흘 후라니, 생각보다는 멀었지만 기다리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 내내 배에만 있다가 이제 간신히 땅을 밟은 참인데 곧바로 기차를 타는 게 살짝 꺼려지긴 했다. 선실은 넓기라도 하지, 기차 객실은 아무리 좋은 좌석이라도 비좁다. 그걸 몇 날 며칠 타고 가다 보면 차라리 걸어가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조금 미뤄보고 싶은 게 사실이었다. 그래도 어차피 고생할 거 한 번에 다 몰아서 해치우고 제도에 도착해서 쉬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어쩔까 망설이니 여자가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사정이 굉장히 급해서 그렇습니다. 양보해주신다면 두 배의 비용으로 사례하겠습니다.”
“아, 아뇨,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냥 제가 다음 열차를 타죠, 뭐.”
“정말이십니까?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얼굴에 화색이 돈 여자가 연신 고개를 숙이며 고마워했다. 흐뭇한 표정을 지은 역무원이 내가 양보한 표를 여자에게 건네주었다. 인원을 추가한 비용이니 수정하겠냐는 말에 여자는 그대로 하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아마 나처럼 세 명으로 구성된 일행인 모양이었다. 나 역시 다음 열차 표를 미리 사두었다. 승차권을 받아들고 돌아서려는데 눈이 마주친 여자가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정말 고맙습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아니에요. 편안한 여행 되시길 바랄게요.”
“예, 자애로운 분께도 신의 자비가 함께 하시길.”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창백하던 얼굴이 표를 구해서 그런지 한층 밝았다. 기분 좋게 헤어지는데 여자가 몸을 돌리면서 혼잣말로 떠들기 시작했다.
“예, 안 그래도 연락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예, 조금 전에 배에서 내렸습니다. 마침 오늘 출발하는 기차가 있어서 표를 구했습니다. 예, 일정대로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세히 보니 손에 로켓 같은 걸 쥐고 있었다. 휴대용 통신 기구인 것 같았다. 왕국에선 공중전화 형식은 있었지만 휴대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런데 여기선 여자 외에도 비슷한 물건을 들고 떠들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확실히 제국은 제국인지 더 부유한 모양이었다.
그보다 조금 전 배에서 내렸다면 나와 같은 배를 타고 있었던 걸까. 그 긴 시간 동안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는 걸 보면 다른 층 선실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유달리 밖을 안 나가기도 했으니 어긋난 걸 수도 있겠지만.
“예, 저와 미엘뿐입니다. 다른 셋은 당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뇨, 아닙니다. 에디스 님은 잘 견디고 계십니다. 예, 예, 알겠습니다.”
그 순간 들려온 내용엔 잠시 멈칫했다. 슬쩍 돌아보니 다시 눈이 마주친 여자가 어색하게 고개를 꾸벅거렸다. 따라서 인사해주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몸을 돌렸다.
왠지 들어선 안 되는 내용을 들은 것 같다. 세 명이 당했다니, 마침 인어에게 잡혀간 사람들과 딱 맞는 숫자인 건 우연에 불과한 걸까.
설마 뭔가 관계가 있는 건 아니겠지. 피해자들에게 다른 일행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남은 누군가가 있었다면 유품이라도 수습하려고 했을 거다. 하지만 선실에 남겨져 있던 그들의 짐은 모두 선원들이 수거했고, 따로 인계받을 자가 없어 그대로 관공서에 넘겨질 거라 들었다. 만약 일행이라면 그걸 왜 그렇게 처리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으음, 뭔가 사정이 있겠지.’
궁금하다고 따라가서 물어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상관할 일도 아니라는 생각에 찜찜한 마음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그동안 여자의 모습은 완전히 멀어져 어느덧 보이지 않게 됐다. 시야에서 사라지니 차라리 마음이 편해져서 긴 숨을 내쉬었다.
“개입하는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고, 아는 것 같으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단 말이지.”
그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언제 나타난 건지 트로웰과 엘뤼엔이 서 있었다. 나 혼자 다녀오라고 하더니 근방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 미안. 오늘 출발하는 표가 있었는데 다른 사람한테 양보해줬어. 일정이 너무 급한 것 같더라고.”
“알아, 봤어.”
“근데 방금 전 한 말은 무슨 소리야? 나한테 한 말이야?”
“봐, 이런 면이 재밌다니까.”
트로웰이 웃으며 중얼거리자 엘뤼엔 역시 기묘한 표정을 짓는다. 서로 무슨 말인지 아는 것 같은데 나만 뭔지 모르겠다. 어리둥절해하며 바라보자 트로웰이 생긋 웃었다. 의미심장한 미소에 나도 모르게 긴장할 때였다.
“일단 신의 은총을 받은 자애로운 분에게 특별히 예언 하나를 해줄게. 넌 오늘 일을 매우 후회하게 될 거야.”
“어?”
“네가 타게 될 다음 열차는 가는 길에 원인 모를 고장으로 멈출 예정이거든.”
“……어?”
“열차가 멈추는 곳은 아무것도 없는 첩첩산중이고, 구조대가 도착하는 건 닷새 후. 철길을 따라 걸어가도 역까지 나흘은 걸려. 산을 타면 이틀이면 될 거야. 참고로 넌 산을 타야 해. 다른 선택지는 없어. 그래야 그때 그 역에 도착하는 다른 노선의 기차를 탈 수 있기 때문이지. 다음 열차는 안 와. 그 일대에 몬스터 떼의 공습이 일어나서 한동안 모든 철도가 폐쇄되거든.”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멍해져 있는 나를 향해 트로웰이 다시금 웃었다.
“벌써 후회되지?”
누가 예지의 정령왕 아니랄까 봐, 아주 족집게였다.
* * *
“네, 알겠습니다.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통화를 종료한 후에야 여자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세이크 제국에서만 활성화된다는 통신기가 제대로 작동되는 걸 확인하니 이제야 정말로 도착했다는 실감이 들었다. 고개를 들자 강렬한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하늘은 파랗고 바람은 선선했다. 가을 날씨가 지나치게 온화해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이미 시들었어야 할 수풀도 이곳에선 아직 푸르렀다.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활기에 가득 차 있었다. 타고난 생김새조차도 부드러운 것 같았다.
그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담고 있으니 잊고 있던 진득한 피로가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여자는 구겨진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 문질렀다. 지난 몇 개월은 모두에게 악몽 같은 시간이었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혼란한 상황에 속절없이 휘말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었다. 지금도 그 과정의 연장선에 불과했다. 이 혼돈의 끝이 어디쯤일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
“아이라, 여기야.”
시가를 따라 걸어가던 여자가 자신을 부르는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두리번거리던 시선이 광장의 화단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긴 후드 망토에 외형이 거의 가려진 모습이었으나, 두 사람 쪽에서 선뜻 알아보았듯이 여자 또한 충분히 그들을 알아보았다. 얼굴을 굳히고 있던 여자, 아이라의 표정이 약간 풀렸다.
“미엘, 에디스 님.”
하지만 그 얼굴은 다시 금방 굳어졌다. 한달음에 그들 앞으로 다가간 아이라가 주위를 경계하며 물었다.
“왜 여기까지 나와 계십니까? 다실에서 쉬고 계시지 않으시고요.”
“미안해요. 하지만 날이 너무 좋아 걷고 싶더라고요.”
에디스라 불린 여자가 맑은 얼굴로 답했다. 후드 안에 가려져 있는 연두색 눈동자가 오랜만에 생기를 담고 반짝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차마 탓할 수 없던 아이라는 대신 다른 쪽의 여자, 미엘을 노려보았다. 그 시선을 자연스럽게 외면한 미엘이 은근슬쩍 딴청을 피웠다. 아이라는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꼬리는 제대로 확인한 거겠지?”
“그야 물론이지. 그건 걱정하지 마. 내가 이래 봬도 감각 하나만큼은 예민하잖아. 미행 같은 건 전혀 없었어.”
“정말이지 너란 녀석은…….”
“좀 봐줘. 열흘 넘게 그 답답한 선실 안에서만 있었잖아. 햇빛이 얼마나 그리웠다고. 안에 또 들어가 있으려니 죽을 것 같았단 말이야. 그쵸, 에디스 님?”
“맞아요, 아이라. 내가 먼저 나가자고 한 거니 미엘을 탓하지 말아줘요.”
에디스까지 미엘의 편을 들고 나서자 아이라는 더는 할 말이 없어졌다. 사실 자신도 비슷한 상태라 그 기분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조용히 다물어지는 입을 보고 더는 정색하지 않을 것을 확신한 미엘이 생글생글 웃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