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447)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447화(447/608)
제447화
“……허, 그렇군. 어쩐지. 나도 그렇고 이 골목도 그렇고, 분명 엄청 더러운 상태였는데 깨끗해져서 이상하다 했어. 대체 어떻게 된 건가 했는데 정령사였구만. 심지어 상급 정령사라니, 합격은 안 봐도 뻔하긴 하네.”
“네, 하지만 기존 길드에 가입하는 건 번거로워서요.”
“흠, 무슨 소린지 알겠어. 요컨대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간판이 필요하다는 소리지?”
“네, 맞아요. 피해를 주진 않을게요.”
크리스의 표정이 곧 진지해졌다. 그의 고민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좋아.”
“정말요?”
“그래, 대신 나도 제대로 끼워줘.”
“끼워달라는 건?”
“실권은 그쪽한테 줄 테니 운영은 내가 하게 해줘. 길드 명을 짓는 것부터 구성원 관리까지. 이왕 내 이름으로 길드가 생긴다면 제대로 해보고 싶거든.”
“나야 길드 이름만 쓸 수 있다면 상관없긴 한데…….”
“그럼 됐네.”
그렇게 뜻밖의 동업이 이뤄졌다. 내가 설립 자금을 대고 운영은 크리스가 하는 방식으로, 서로 공동 경영권을 갖기로 한 조건이었다. 악시스 급 헌터면 돈이야 금방 벌 테니 실상 그가 일방적으로 나를 도와주는 셈이었다. 크리스는 상급 정령사가 길드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홍보가 되니 당연한 거라고 말하긴 했지만.
“아, 그런데 말했다시피 내가 준비 기간이 필요해. 특히 지난 몇 년간 실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재심사를 받아야 할 거야. 몇 개월은 걸릴 것 같아.”
“네,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나는 품속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얼결에 건네받은 크리스가 안을 열어 보고 당황한 표정을 했다.
“이건?”
“초기 자금으로 쓰세요. 혹시 부족할까요?”
“어어, 아냐. 이 정도면 충분하긴 한데…… 공증도 없이 그냥 주려고? 날 너무 믿는 거 아니야?”
“피차 마찬가지죠. 내가 어디에 길드 간판을 쓸 줄 알고 선뜻 명의를 빌려주겠다고 해요?”
“하하, 그쪽 볼수록 재밌는 사람이네. 알았어. 그럼 편하게 받을게.”
“네, 더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나는 내 이름과 머무는 여관을 말해주었다. 이후엔 서로 간단한 규칙을 정했다. 최소 일주일에 한 번은 상황을 알려줄 것, 서로 자리를 비울 땐 사전에 미리 연락할 것, 위험하거나 불법적인 일은 저지르지 말 것, 등등 아주 기본적인 부분이었다.
“꼭 뭐에 홀린 기분이야.”
논의를 마친 후 크리스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후회되면 지금이라도 물러도 괜찮은데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야. 오히려 너무 좋아서 그래.”
“그래요?”
“그쪽…… 아니, 엘이랬지? 정말 고마워. 덕분에 죽은 줄 알았던 친구의 생사도 알게 됐고, 해야 할 일도 생겼어. 이렇게 즐거운 기분을 느껴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를 거야.”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나도 좋은 동업자를 만난 것 같아서 기뻐요.”
“다시 정식으로 인사할게. 난 라케인 크리스야.”
웃으며 악수를 청하는 그의 눈은 활기로 가득했다. 밝은 얼굴엔 처음 봤을 때 드리웠던 음울한 그림자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 역시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엘이에요.”
* * *
“이제 아주 거리낌 없이 쓰는군.”
크리스와 헤어진 후 들려오는 중얼거림에 어깨가 절로 움찔했다. 음, 너무 아무렇지 않게 내 돈처럼 건네줬나. 하지만 이런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뭘 이제 와 새삼스럽게? 어색하게 웃었더니 엘뤼엔이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딱히 불쾌해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역시 타박하려고 한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냥 내가 염치를 완전히 버린 게 좀 어이가 없었던 모양이다.
“문서와 엮이지 않겠다고도 하지 않았나? 전달받은 자를 곁에 두면 무슨 의미가 있지?”
“아니, 뭐. 원래 사람 일이라는 게 다 그런 거잖아? 아하하. 나도 이 기회에 명의를 빌릴 수 있어 좋고, 꼭 엮일 거란 보장은 없으니까.”
“그냥 그렇게 믿고 싶은 거겠지.”
트로웰이 덧붙인 말은 그냥 듣지 못한 척하기로 했다. 그래도 기뻐하던 크리스의 얼굴을 떠올리면 이런 결정을 내린 게 후회가 되지는 않았다. 물론 그냥 헤어졌더라도 그는 정신을 차렸을 테지만, 아마 내 제안이 아니었다면 평생 길드를 만들 생각까진 하지 못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사실을 내내 미련으로 품고 있었을 거란 기분이 들었다. 의논할 때 유독 생기가 돌던 눈빛을 떠올리면 단지 기분 탓만은 아닐 터였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나는 그날로 다시 헌터 협회를 찾아가 자격시험을 치렀다. 그간 도감을 끼고 산 노력이 헛되진 않았는지 이번엔 손쉽게 필기를 통과했다. 덕분에 드디어 치르게 된 실기는 밀실에서 마법으로 만들어진 인공 몬스터와 싸우는 방식이었다.
가장 낮은 단계에서부터 시작해서 순차적으로 점점 더 강한 몬스터가 나타나는데, 3단계 이상을 통과해야 최종 합격이었다. 그 후엔 마지막으로 잡는 몬스터를 기준으로 등급이 정해진다고 했다. 다행히 심사 과정은 비공개로 치러져서 부담 없이 임할 수 있었다. 물론 두 까칠한 정령왕의 놀림과 참견을 배경으로 삼아야 했지만.
“지원자, 엘 님, 최종 합격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시험을 치르고 나오자 문 앞에서 대기 중이던 직원이 작은 카드를 건네주었다. 합격자의 심사 결과가 새겨지는 카드로, 이걸 접수처에 넘기면 정식 자격증 발급이 진행되는 듯했다. 밖에서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시선을 보냈다.
“와, 합격이래. 좋겠다.”
“심사가 좀 오래 걸렸지? 꽤 높은 단계까지 갔나?”
“그야 모르지. 단계별 시간제한은 없으니까, 하나 잡는 데 오래 걸린 걸 수도 있잖아.”
“아, 하긴.”
수군거리는 소리를 뒤로한 채 접수처로 가니 다른 직원이 웃으며 맞았다. 직원은 내게서 건네받은 카드를 수정구가 달린 물건 입구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우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까맣던 수정 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엘 님,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지금부터 자격증 발급을 도와드릴게요. 엘 님의 등급은…… 헉.”
최종적으로 변한 색은 붉은색이었다. 직원이 잠시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나와 수정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 악시스 등급이시네요.”
주변의 술렁거림이 더 커졌다. 나야 엘뤼엔에게서 들은 말도 있고, 심사를 거치면서도 이미 예상하고 바라 별로 놀라진 않았다. 시큐엘 하나를 소환해서 잡을 수 있는 몬스터란 몬스터는 다 잡아봤으니까. 결국 한계에 이르러 멈추긴 했으나 그게 마지막 단계였다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솔직히 그건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최종 보스였다.
‘아무리 그래도 드래곤이 나오는 건 반칙 아닌가.’
마법으로 만든 조형물이다 보니 진짜보단 많이 약하긴 했지만. 그래도 시큐엘 하나로는 상대할 수 없는 존재였다. 이쯤 되면 레기아 급 헌터는 만들지 않겠다는 선언인 셈이다.
“제도에서 악시스 등급을 받기는 쉽지 않은데, 정말 대단하시네요. 오늘은 일단 합격증서만 발급해드릴게요. 헌터증 발급은 이틀 정도 걸리고요, 그 후로 아무 때나 찾으러 오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받아든 합격증을 품속에 고이 갈무리하고 건물을 나섰다. 왠지 따라붙는 사람들이 많아서 능숙하게 따돌리느라 고생해야 했다.
며칠 후 다시 협회를 찾았을 땐 내부가 한 가지 소문으로 들썩이고 있었다. 헌터 크리스가 예전 여명의 활 길드 사무실이었던 건물을 가계약했다는 내용이었다. 훗날 그가 지을 길드 이름이 뭐가 될지 능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 순간이었다.
* * *
크리스가 정한 길드 이름은 예상대로 ‘여명’이었다. 원래 여명의 활 길드도 궁수만 있던 건 아니라고는 하는데, 좀 더 포괄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 앞글자만 가져왔다고 했다. 사실상 여명의 활 길드가 부활하는 셈이었다.
덕분에 요즘은 어디를 가도 그에 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는 둥, 그래도 망가진 시간이 있는데 재기하는 게 가능하겠냐는 둥, 기대와 우려가 반반씩 섞인 말들이었다. 벌써 누군가와 같이 동업하는 거라는 소문도 돌았다. 그게 나라는 것까진 알려지진 않았지만, 덕분에 크리스가 생각보다 유명인사였다는 걸 톡톡히 실감하는 나날이었다.
다만 그런 것치곤 길드 가입에 관심을 보이는 이들은 없는 것 같았다. 아직 모집하는 시기는 아니라 정식으로 공고를 내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당장은 크리스의 재심사가 먼저였으므로 그쪽 일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드래곤이 나왔다고?”
그동안 나는 크리스와 부쩍 친해졌다. 올해 스물일곱인 그는 남부 출신으로 열다섯 살에 출가해서 혈혈단신으로 제도에 올라왔다고 했다. 상단에서 짐꾼 일을 하다가 헌터 일이 돈벌이가 된다는 걸 깨닫고 전향했는데, 거기서 뜻밖의 재능을 발견한 경우였다.
주 무기는 활과 단검. 무려 가장 낮은 단계인 아르마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등급을 갱신해 악시스까지 올라선 노력파이기도 했다. 그 기질이 변하진 않았는지 처음 봤을 때만 해도 물렁살밖에 없었던 그는 본격적으로 몸을 단련하기 시작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기량이 좋아졌다. 만날 때마다 체형이 달라져 있는 것 같았다.
“마지막 단계가 드래곤이라는 말이 사실이었구나. 난 그거 거짓말인 줄 알았어.”
“몰랐어요? 크리스도 악시스잖아요.”
“너야말로 몰랐어? 한 등급에도 상중하가 있어. 물론 자격증에 거기까지 표시가 되진 않지만 말이야. 어쨌든 각 등급마다 세 단계씩 시험 치르잖아. 난 악시스 두 번째 단계에서 멈췄어.”
헉, 그건 몰랐다. 한 등급마다 세 단계씩이었구나. 어쩐지 너무 끊임없이 나온다 했지. 때늦은 깨달음을 얻으며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조금 전 크리스가 직접 우려온 따끈따끈한 밀크티에선 달콤한 맛이 났다.
한 주에 한 번은 미리 정해둔 정기 만남의 날이었다. 대체로 크리스 쪽에서 내가 있는 곳을 찾아왔지만, 이따금 내가 그를 찾아가기도 했는데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그의 집은 의외로 제3구역의 깨끗한 주택가에 있었다. 술에 절어 산 지난 몇 년간 거의 비워둔 채였다가 정신을 차리면서부터 다시 살기 시작했다고 했다. 하지만 너무 조용하게 지내서 여전히 이웃 주민들은 이곳을 빈집으로 알고 있었다.
유명세치곤 크리스는 대외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자격증 유효 상태를 확인하고 재심사를 신청하기 위해 협회에 한 번 들렀을 뿐, 그 외엔 나가는 일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딱히 알고 지내거나 어울리는 친구도 없는 것 같았다. 그의 활동 전적을 생각하면 조금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긴 했으나,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아 굳이 묻지는 않았다. 다비안과는 무슨 사이인지, 그가 전해준 기밀문서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도 궁금했지만, 그 역시 물어보지 않았다.
“근데 그러면 드래곤 다음도 있다는 건가요?”
“아니, 레기아 시험은 그거 하나일걸. 굳이 최종 등급까지 단계를 나눌 필요는 없으니까.”
“음, 그건 그렇네요.”
“아무튼 너 진짜 대단하다. 예전에 알고 지내던 상급 정령사도 여럿 있었는데 악시스 상까지 간 녀석은 아무도 없었어. 특히 제도의 마법체는 더 정교하고 강해서 단계 올리기가 쉽지 않기로 유명하거든. 너 그 실력으로 다른 곳에서 시험 쳤으면 레기아 등급도 가능했을지도 몰라.”
“내가 아니라 시큐엘이 대단한 거죠.”
“와, 진짜 정령사다운 대답이네.”
아니, 겸양이 아니라 그게 정말인데. 솔직히 나중에 가선 너무 귀찮아서 그냥 시큐엘한테 알아서 하라고 맡기고 난 그냥 앉아서 구경만 했다. 그런데 감탄하는 크리스를 보니 차마 사실대로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근데 그거 알아?”
“뭘요?”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려니 별안간 크리스가 짓궂게 웃었다. 불길한 기분이 들어 슬쩍 뒤로 빠지려는데, 그보다 먼저 손목에 차가운 느낌이 닿았다. 금속으로 된 팔찌가 걸린 걸 확인했을 땐 잠금장치가 잠기는 소리가 울린 뒤였다.
“……? 이게 웬 팔찌예요?”
“마나 봉인 마도구.”
“헐?”
“너 이제 정령 못 쓴다.”
“……헐?”
아, 그래. 그러고 보니 이런 게 있었지? 본 적은 있지만 내가 직접 차본 건 처음이다. 호기심에 나이아스를 소환해보려는데 정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마나가 움직이려다가도 무언가에 막힌 듯 제자리걸음만 했다. 아니, 이게 이렇게 간단히 막힌다고? 어이가 없어서 눈만 깜빡이고 있자니 크리스가 흐뭇하게 웃었다.
“마법 계통은 아무리 강해도 의외로 간단히 제압할 수 있다는 말이지. 정령만 믿고 방심하지 말라고 가르쳐주는 거야.”
“……이런 거 구하기 쉽진 않죠?”
“조금 값이 있긴 한데 못 구할 정도는 아니야. 특히 지금 네가 찬 등급의 팔찌는 헌터라면 대부분 갖고 있을걸? 현상금 걸린 범죄자 잡을 때 요긴하게 쓰거든.”
으음, 헌터가 그런 일도 하는구나. 하긴, 현상금 사냥꾼도 사냥꾼이긴 했다. 마취제에 이어 두 번째로 조심해야 할 게 생겼다. 이렇게 되면 가까이 접근하는 사람은 일단 다 경계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인간의 몸이 불편하다는 사실을 새삼 자각하자니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이건 어떻게 풀어요?”
“아, 기다려. 그거랑 한 벌로 제작된 열쇠로만 열리거든. 지금 바로 풀어줄게.”
웃으며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크리스의 얼굴이 다음 순간 멈칫했다. 다시금 스치는 불길한 기분에 나 역시 얼굴을 굳히고 그를 바라보았다. 크리스는 주위를 온통 헤집으며 뒤지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곤 한참 만에 얼어붙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어, 어떡하지, 엘? 열쇠가 없어.”
“……농담이죠?”
“미안. 나도 농담이면 좋겠는데, 애석하게도 아니야.”
면목 없어 하는 얼굴을 보니 장난은 아닌 모양이다. 할 수 없이 일단 부수고 볼 작정으로 팔찌를 잡은 채 힘을 가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지 깨지기는커녕 금조차 가지 않았다. 나뭇가지도 으스러트리는 힘인데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다니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안 부서지네요?”
“어, 미안. 그거 압력에 저항하는 마법도 걸려있거든. 진짜 어지간한 힘 아니면 강제로는 안 부서질 거야.”
“……혹시 나 골탕 먹이려고 이러는 건 아니죠?”
“아냐, 진짜 아니야! 정말이야!”
만약 그런 거라면 지금 이 순간을 평생 후회하게 해주겠다는 생각으로 웃었더니 크리스가 희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필사적으로 외치는 얼굴에 절박한 진심이 보여서 보복은 그만두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