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464)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464화(464/608)
제464화
“왜, 왜 그래, 엘?”
“여기에 뭐가 있대?”
여기서 나이아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하지만 내 반응이 심상치 않다 여겼는지 일행이 불안해하며 물어왔다. 나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심하다가 솔직하게 답했다.
“근처에 사람들이 있대요.”
“뭐? 정말?”
“혹시 실종자들인 거 아니야?”
아,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다. 퍼뜩 고개를 들자 발언한 델라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서둘러 장비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만일을 대비해 준비한 치료제와 영양제, 구급 물품들도 꺼냈다.
“나이아스, 그 사람들 지금 어디에 있어?”
―여기서 가까워.
“가깝다고?”
―응, 아까보다 더 가까워졌어.
―지금도 꾸준히 가까워지는 중이야.
……거리가 가까워진다는 건, 그들이 우리 쪽으로 오고 있다는 건가? 뜻 모를 대답에 잠시 손을 들고 일행의 동작을 멈추게 했다. 하던 일을 중단한 일행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볼 때였다. 나이아스가 손가락으로 내 뒤쪽을 가리켰다.
―지금은 저기에.
“……!”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그대로 흠칫했다. 수풀 한가운데 누군가가 우뚝 서 있었다.
“뭐, 뭐야. 사람?”
일행도 그쪽을 발견했는지 당황했다. 소리 없이 나타난 사람은 어딘지 거무죽죽한 분위기를 지닌 남자였다. 연령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마른 얼굴에, 눈두덩이는 시커멓고 얼굴이 창백했다. 입고 있는 옷은 너덜너덜한 데다가 피 같은 것이 묻은 채였다. 그건 마치, 그래, 시체 같은 모습이었다.
“흐읍!”
소스라친 크리스가 황급히 뒷걸음질을 쳤다. 경직된 그만큼이나 놀란 다른 일행들도 숨을 삼켰다.
다음 순간 남자가 입을 벌리고 웃었다. 강제로 벌어지는 듯한 입에서 먹물에 물든 것처럼 시커먼 이가 드러났다. 그 사이에서 주르륵 검붉은 액체가 쏟아져 내렸다. 소름이 돋을 만큼 기괴한 모습이었다. 그 순간 주위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 역할 정도로 퀴퀴한 냄새는 썩은 피 냄새와 비슷했다.
“뭐, 뭐야, 이거…….”
“지, 진짜 귀신이야?”
창백해진 일행이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내 옷을 꽉 붙드는 손들이 모두 덜덜 떨고 있었다.
나는 남자의 모습을 주시한 채, 차분히 머릿속을 정리했다. 귀신을 보는 환각이라든가, 냄새라든가, 모두 사념에 영향을 받으면 경험할 수 있는 현상이다. 예전 아셀만 해도 환각과 함께 역한 냄새를 느꼈다고 했으니까.
정령일 땐 사념에 영향을 받지 않아서 아무리 강해도 내 눈엔 그냥 검붉은 오물 덩어리로만 보였다. 하지만 인간인 지금은 조금이라도 영향을 받긴 할 거다. 오기 전부터 충분히 숙지했고, 각오했던 부분이었다. 그러니 내 눈에 귀신의 환각이 보이는 건 말이 된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조금 이상했다. 나이아스는 조금 전에 분명 인간들을 봤다고 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의 모습도 정확히 가리켰다. 아무리 하급 정령이라지만, 나이아스까지 환각을 본다고?
‘아니, 이건 환후가 아니라…….’
그 순간 어떠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다들 무기 들어요!
“뭐?”
“공격에 대비하라고요! 저거 귀신 아니라 인간이에요! 여기에 매복이 있는……!”
“으아악!”
그때 자지러지게 터져 나온 비명이 내 목소리를 삼켰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누군가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크리스였다.
“크리스?”
“귀, 귀신! 귀신이 오고 있어! 귀신이 온다고!”
“아뇨, 말했잖아요! 저건 귀신이 아니라……!”
“흐으악!”
그런데 또다시 비명이 이어졌다. 이번엔 시몬이었다. 다른 일행도 모두 하얗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모두가 뚫어지게 한 곳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방향을 따라 나 역시 돌아봤지만 내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전에 봤던 남자도 사라진 상태였다. 다시 일행들의 모습을 살폈다. 다들 어딘지 넋이 나간 듯 두 눈이 풀려 있었다. 환각에 빠진 전형적인 상태였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내 판단이 맞다면 남자는 분명 귀신이 아니었고, 어디에도 사념은 없었다. 그러니 환각을 볼 리도 없었다.
‘아, 설마 이 냄새가?’
“나이아스! 지금 풍기는 냄새 좀 잡아줘!”
―응, 해볼게!
냄새라는 것도 결국 미립자 종류다. 바람으로 날려버리는 것보다는 약하겠지만 물에 가두기만 해도 효력을 죽일 수는 있을 터였다. 고개를 끄덕인 나이아스 무리가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 잘게 흩뿌린 물방울들이 안개처럼 퍼져나가 역한 냄새를 가두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 건 바로 그다음이었다. 돌연 한 곳에서 불화살이 날아들더니 정확하게 나이아스의 몸을 꿰뚫었다. 한순간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하지도 못할 만큼,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피할 겨를조차 갖지 못한 나이아스는 그대로 형체를 잃고 흩어졌다.
“흡!”
하급 정령이라도 역소환 되는 충격은 컸다. 숨이 턱 막히면서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곧바로 일어나려 했지만 나머지 나이아스도 연이어 역소환 되는 탓에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으아악! 오지 마! 저리 가!”
“다들 뛰어! 도망가!”
그동안 일행은 완전히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미 환각 외에 다른 건 보지 못하게 된 건지 누구도 내 상태는 눈치채지 못했다. 공포에 사로잡힌 그들은 그저 마구잡이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잠깐! 안 돼! 가지 마! 가면 안 돼요! 지금 보는 건 환각이에요!”
있는 힘껏 소리쳤으나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뒷모습에 내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간신히 몸을 일으켰을 땐 이미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반대로 다른 곳에서 가까워지는 기척이 있었다. 굳이 알아볼 것도 없이, 지금 이 상황을 만들어 낸 작자들일 게 뻔했다.
“젠장…….”
정말 완벽하게 당했다. 지금 이 상태로 저들을 전부 상대할 수 있을까? 휘청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지탱한 채 허리춤을 더듬어 간신히 검을 빼 들었다. 정령을 다시 소환하는 게 먼저겠지만 역소환 된 직후라 몸속의 기류가 너무 엉망이었다. 당장은 무엇도 소환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정찰할 목적으로는 하급 정령이 제일 편해서 일부러 나이아스를 소환한 건데, 처음부터 운디네나 시큐엘을 곁에 둘 걸 그랬다. 숲에서 벌어진 기현상이라는 점만 너무 주목한 게 패착이었다. 상대가 인간인 줄 알았다면 이렇게까지 방심하진 않았을 텐데. 후회가 막심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호흡을 고르면서 일단 날뛰는 마나를 다스리는 것에 집중했다. 그런데 속이 다친 걸 감안하더라도 이상할 정도로 몸이 무거웠다. 내가 검을 제대로 쥐고 있기는 한 건가? 왠지 손끝에서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이 냄새, 마비 효과도 있는 건가?’
저벅, 뒤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힘겹게 돌아보니 수풀 속에서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보였다. 복면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고 있었다. 그 속에는 처음 보았던 시체 같았던 남자도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일부러 그렇게 분장한 상태가 선명히 보였다. 경계하며 검을 겨누자 조금 당황하는 듯하던 남자들이 곧 피식 웃었다. 내 상태가 정상이 아닌 걸 눈치챈 것이다.
“뭐야, 이 녀석은 아직도 버티고 있네?”
“암시도 통하지 않았나 본데?”
암시. 아, 그래서 시체 분장을 한 거구나. 왜 처음에 그런 꼴로 나타났는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환각제를 퍼트릴 동안 시선을 끄는 것만이 아니라 암시를 거는 목적도 있었던 모양이다. 좀 더 쉽게 환각에 빠질 수 있도록 유도한 거겠지. 너희들 뭐냐고, 대꾸해주고 싶은데 혀가 움직이지 않았다. 역시 마취제도 섞인 게 틀림없었다.
“굉장하네. 이렇게 오래 버틴 녀석은 처음이야.”
“나이는 어린 것 같지?”
“조심해. 아마 그 녀석이 정령사일 거야.”
내게 성큼성큼 다가서는 남자들 뒤쪽에서 누군가가 경고했다. 어깨에 메고 있는 거대한 활과 횃불이 보였다. 아마도 그가 불화살을 쏜 사람 같았다.
“물의 정령사는 타고난 자정 능력이 있어. 생명력이 질기다고 하더라고.”
“아, 그래서 약에도 강한 건가?”
“하지만 이미 말도 못 하는 것 같은데? 아무리 강한 정령사라고 해봤자 정령을 소환하지 못하면 아무 쓸모 없잖아.”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이윽고 앞에 멈춰선 이들이 내 후드를 벗기려는 듯 손을 뻗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아무 소리도 낼 수 없는 상태였다. 마취제 효과가 얼마나 강력한지 시야도 점차 뿌옇게 되어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저 남자들이 착각하고 있는 게 하나 있었다.
말을 못 하면 정령을 소환할 수 없다고 누가 그래?
‘시큐엘!’
마침 간신히 마나가 진정된 참이라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주기로 했다. 내 부름에 반응한 정령이 소환에 응하면서, 주위에 물보라가 일어났다.
“뭐, 뭐야!”
방심하고 있던 이들이 깜짝 놀라 주춤거렸다. 나는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얍삽한 수작을 부려서 그렇지, 이들의 능력 자체는 평범한 장정 수준이었다. 시큐엘 하나로 전부 때려눕힐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기척을 느끼지도 못했는데 철컥, 금속음과 함께 손목에 무언가가 채워졌다. 눈을 크게 떴을 땐 이미 상황이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변하는 중이었다. 마나의 운용이 멈추더니 완성되어 가던 힘이 그대로 흩어졌다. 내 주위를 감싸며 용맹하게 솟구치던 물줄기도 한순간에 사그라졌다.
말도 안 돼.
눈앞에서 허무하게 흩뿌려지는 수증기를 보며 나는 그대로 입을 벌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선명했던 시큐엘의 기운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왜 이렇게 된 건지는 알고 있다. 소환진이 사라진 거다. 머리로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해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건 완전히 별개의 영역이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휘유, 큰일 날 뻔했네.”
바로 옆에서 누군가 휘파람을 부는 소리가 들렸다. 멍하니 시선을 돌리니 그제야 내 옆에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볍게 묶어 내린 금발 아래 검은 복면을 쓴 얼굴. 마주친 노란 눈동자가 상쾌하다는 듯이 웃었다. 그가 조금 전 내게 팔찌를 채웠다는 건, 조금 늦게 상기할 수 있었다.
“시동어를 읊지 않아도 정령을 소환할 수 있다니, 너 굉장한 놈이구나? 하지만 이쪽이 이긴 것 같은데 이걸 어쩌지?”
경쾌한 어조로 약 올리듯 말하는 남자는 어깨에 활과 횃불을 메고 있었다. 나이아스를 역소환 시킨 바로 그자였다. 인지한 순간 거의 반사적으로 검부터 휘둘렀다. “이크!”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한 남자가 나와 멀찍이 거리를 벌리고 물러섰다.
“이야, 아직도 움직일 힘이 있는 거야? 역시 굉장하네.”
“뭐야? 지금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방금 정령이 소환되던 거 아니었어?”
다른 이들은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허둥거리는 상태였다. 나를 향해 다시금 씩 웃어 보인 금발의 남자가 쏟아지는 질문에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정령 소환되던 거 맞아. 근데 이것도 중간에서 끊는 요령이 있거든. 마나를 차단해서 얼른 소환을 끊어 버렸지.”
“헉, 그게 정말이야?”
“물이 솟아오르다가 사라진 거 보면 모르겠어? 그래서 내가 아까 조심하라고 했잖아. 아무튼 너희 방금 나 아니었으면 방금 다 죽을 뻔했다는 것만 알아 둬.”
“하핫, 정말 잘했다, 릴!”
“넌 우리 영웅이야!”
“알면 특별수당이나 챙겨줘.”
“염려 마. 든든히 챙겨줄 테니!”
마치 축제라도 치르는 분위기였다. 요란하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 속에서, 다시금 나와 눈이 마주친 남자가 씩 웃었다.
“그럼 슬슬 마무리해야지?”
그러자 다른 남자들도 나를 돌아보았다. 복면 위에서 웃음 짓는 눈동자들이 비열하게 반짝였다. 덕분에 나도 정신이 조금 들었다. 지금 충격에 허덕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죽이려는 것…… 같지는 않아.’
가까이 다가오는 이들을 보면서 천천히 심호흡했다. 살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내 상태가 이래서 방심하는 것도 있겠지만 검을 들지 않은 것만 봐도 나를 제압하는 게 더 목적인 것 같다. 어디론가 끌고 가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정신 차려, 엘.’
이대로 잡히면 죽도 밥도 안된다. 일행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었다. 비록 정령 소환은 막혔지만 그나마 속은 진정된 상태라 아까보단 상태가 나았다. 약 기운 때문에 뻣뻣해진 몸이 얼마나 따라줄지는 몰라도, 무리하면 잠시간은 움직일 순 있을 것 같았다.
여기서 무게 가중 장치만 벗을 수 있으면 상황이 한결 나아질 텐데. 손목과 발목에 차고 있는, 이젠 내 몸의 일부나 마찬가지인 고리의 무게가 오늘따라 새삼 버거웠다. 당장은 어쩔 방법이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자세를 똑바로 하고 검을 쥐니 남자들이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나 본데?”
“정신력 하나만큼은 대단한 녀석이네.”
“하하, 그래도 이렇게 마취된 상태에선…….”
가장 앞에 있던 남자가 웃으며 내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시선이 흐트러진 틈을 타 내가 검을 찔러 넣었기 때문이다.
“으헉!”
깜짝 놀란 남자가 얼른 피했지만 나 역시 그에 맞춰 공격을 이어갔다. 곧바로 따라붙는 검날을 이번엔 피하지 못한 남자가 경악한 얼굴로 두 눈을 부릅떴다. 서걱, 베어드는 감각이 전해지는 것과 동시에 짧은 비명이 터졌다. “울베인!” 다급해진 남자들이 검을 빼 들었다.
“뭐야, 저거? 정령사 주제에 검술도 할 줄 알아?”
“그냥 허세용인 줄 알았더니!”
얼굴을 굳힌 이들이 천천히 주위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언제 시작될지 모를 공격을 견제하면서 나는 숨을 크게 골랐다. 그거 잠깐 움직였다고 벌써 호흡이 벅찼다. 온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다. 다리가 자꾸 휘청거리는 것 같았다.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해.’
상대에게 여유를 주면 내가 당한다. 기합을 단단히 넣은 후 이를 악물고 먼저 뛰어들었다. 이번에도 선공을 놓친 이들이 기겁해서 방어하기 시작했다.
“젠장! 막아!”
“큭, 무슨 힘이!”
“마취된 녀석이 왜 저렇게 잘 움직이는 거야?”
한동안 정신없는 공방이 이어졌다. 다수와 맞서는 상황은 처음이라 괜찮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생각보다 어렵진 않았다. 일단 다들 검술 실력이 낮은 편인 건지, 굼뜨다시피 느린 데다가 동작이 전부 훤히 읽혔다. 이대로 잘 몰아붙이기만 하면 도주할 틈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희망이 보이니 자신감도 붙었다. 그렇게 조금씩 길을 터 가고 있을 때였다.
“큭!”
서두르는 마음에 시야가 좁아진 걸까. 돌연 무언가가 목을 조이더니 강하게 뒤로 당겼다. 한순간 균형을 잃은 나는 속절없이 넘어져 그대로 질질 끌려갔다. 꽉 조여진 목에서 두꺼운 밧줄이 만져졌다. 누군가가 올무 같은 걸 던진 것 같았다. 그 줄 끝에 금발의 남자가 서 있었다. 또 저 녀석이었다.
“잡았다!”
“좋아, 릴! 그대로 잡고 있어!”
“그물! 당장 그물 가져와!”
분주한 소리 끝에 곧 사슬로 만들어진 그물이 내 몸을 덮었다.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했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사이 서둘러 달려든 이들이 그물 속에서 버둥거리는 나를 강제로 짓눌렀다. 옆구리에 틀어박히는 격통에 숨이 턱 막혔다.
“휴우, 이제야 겨우 얌전해졌네.”
“이 녀석 대체 정체가 뭐야? 약 풀었는데 올가미에 그물까지 쓴 건 이번이 처음 아냐?”
“상급 정령사가 정말 굉장하긴 하네.”
“다친 애들은?”
“좀 있어. 그래도 다행히 깊게 베이진 않은 것 같아.”
이제 약 기운이 머리까지 잠식한 모양이다. 위에서 떠드는 소리가 웅웅거리며 울렸다. 어떻게든 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어질어질한 시야 속에 질렸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들이 보였다.
“일단 처리해.”
곧 둔탁한 소리와 함께 머리에서 강렬한 아픔이 일었다.
그 뒤는 암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