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467)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467화(467/608)
제467화
지금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분명 똑똑히 들리는데 머릿속이 버벅거리는 것처럼 잘 입력이 되지 않았다. 이쪽 사람이 아니라니. 이 남자가 진짜 노예 사냥꾼이 아니라고? 전부 위장한 거라고?
충격적이긴 한데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런지 강한 반응이 나가진 않았다. 오히려 돌이켜볼수록 그렇겠구나 싶어지면서 마음이 차분해졌다. 생각해 보면 유난히 친절한 태도도, 쓸데없을 만큼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주고 묻는 것마다 꼬박꼬박 답해준 것도, 절대 노예 상인이 가질 만한 태도는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남자는 자신들을 지칭할 때 한 번도 ‘우리’라는 표현을 쓴 적이 없었다. 오히려 은근히 막말까지 했었지. 스스럼없이 쓰레기로 평하는 걸 보고 객관적으로 미친놈인가 했더니 그냥 같은 편이 아니라서 그런 거였다.
“그렇다고 널 구해주겠다는 건 아니야.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 나머진 네가 알아서 해.”
“……고마워.”
어쨌든 일이 잘 풀린 셈인가. 복잡한 기분으로 답하자 남자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왜 고마워해? 엄밀히 말하면 네가 잡힌 건 나 때문인데.”
“헉, 맞아. 그건 그래.”
“하하, 너 좀 웃기다. 마음에 들어. 이렇게 만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좀 아쉽네. 뭐, 어쨌든 잘해 봐. 생각만큼 쉽지는 않겠지만.”
가볍게 웃은 남자가 내 어깨를 두드린 후 먼저 나간다면서 몸을 일으켰다. 뭘 할 생각이든 자신이 나가고 난 후에 실행하라는 당부도 덧붙였다. 나는 창살 밖으로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물었다.
“그런데 네가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게 뭔데?”
다소 충동적인 질문이었다. 그러자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선명하게 빛나는 노란 눈동자에 조금 붉은 기가 감도는 듯했다.
“복수.”
“……!”
“자세한 건 알 필요 없어.”
짧은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그의 모습이 장막 너머로 사라졌다. 펄럭이던 천이 잠잠해질 때까지 나는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남자의 설명이 불친절한 건 처음이라고 생각하면서.
남자, 릴이 떠나고 난 후에도 나는 한동안 자리를 지켰다. 문제를 인지한 건 본격적으로 움직여보려고 할 때였다.
“시큐엘.”
이번엔 방심하지 않을 작정으로 처음부터 시큐엘을 불렀는데, 돌아오는 반응이 전혀 없었다. 당황해서 다시 시도해 봤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시큐엘?”
뭐야, 왜 소환이 안 되지? 마나 봉인 팔찌는 확실히 풀렸다. 묶인 듯이 정체되어 있던 마나가 지금은 내가 의도하는 방향으로 편하게 움직이는 게 선명히 느껴졌다. 그런데 소환을 시도해도 모여든 힘이 그저 주위를 맴돌기만 했다.
혹시 이 공간 전체에 결계라도 있는 건가? 그러고 보니 황성 같은 주요 시설에선 이능을 함부로 쓸 수 없도록 방어 결계 같은 걸 설치하기도 한다. 마법 수준이 낮은 편인 현대에서도 썼던 방법이니 이 시대에선 좀 더 보편적일 터였다. 현재로선 가장 합리적인 이유였지만 뭔가 조금 찜찜했다.
팔찌든 결계든 이런 종류는 대체로 기본 구조가 같다. 마나가 모이는 걸 방해해서 원천 자체를 차단하는 방식이다. 그러니 소환을 시도하지도 못하는 게 정상일 텐데 지금은 실행하는 것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정확히는 불러도 닿지 않는 거다. 엘뤼엔이었다면 그쪽에서 거절했다고 여겼겠지만, 보통의 정령은 소환을 거부하지 못한다. 내가 모르는 형식의 결계인 건지,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판단하기가 모호했다.
‘음, 어쨌든 이러면 좀 어려워지겠는데.’
무게 가중 장치는 아직 그대로고, 당장 쓸 수 있는 무기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정령의 도움 없이 일행을 전부 구출할 수 있을지 선뜻 자신할 수가 없었다.
일단 상황을 살펴볼 생각으로 창살에서 벗어나 입구 쪽에 바짝 붙어섰다. 장막을 살짝 들추니 어슴푸레한 하늘이 들어왔다. 의식을 잃기 전만 해도 꽤 많이 기울어져 있던 해가 지금은 반대쪽에 있는 걸 보니 적어도 하룻밤은 지난 게 분명했다.
그다음으로 보이는 건 빼곡한 나무들이었다. 그리 멀리 이동하진 않았는지, 아니면 다른 숲으로 이동한 건지, 장소 자체는 여전히 숲속이었다. 강제로 넓게 터서 만들어 낸 듯한 공터에 각자 색이 다른 천막들이 병렬로 세워져 있었다. 한눈에 파악하기에만 열 채가 넘는 수였다. 그 주위로 무장한 병사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사이사이 돌아다니는 순찰병과 인부들의 숫자도 꽤 돼서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결계를 쳐둔 거면 어딘가에 매개체 같은 게 있을 텐데.’
이런 이동형 진형에 설치한 결계가 튼튼할 리가 없다. 진을 유지하는 주춧돌만 찾는다면 파괴하는 것 자체는 간단할 거다. 그게 어딨는지 몰라서 문제인 거지만.
이럴 때 자연체의 정령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오늘따라 다들 멀리 떨어져 있어서 기대하긴 힘들 것 같았다. 소리를 내서 부르면 들킬 게 뻔하고, 정령의 방식으로 의사를 전달하기는 아직 어려웠다. 방법은 아는데 애초에 영체가 쓰는 방식이다 보니 인간의 몸으로 하기엔 까다로운 부분이 많았다.
그런데 하늘이 도우려는 건가. 때마침 바닥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더니 둥근 얼굴이 빼꼼 나타났다. 땅의 하급 정령인 놈이었다.
“놈! 와, 다행이다. 혹시 지금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반가운 마음에 얼른 몸을 굽혀 대뜸 도움부터 요청했다. 그러자 움찔한 놈이 대답 없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자연체 상태인데 인간이 말을 걸어왔으니 당황스러울 만도 했다.
“아, 너한테 말하는 거 맞아. 실은 내가 좀 곤란한 상황인데…….”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이어진 대답에 이번엔 내가 흠칫했다. 눈앞에 있는 건 놈인데 목소리와 말투는 놈이 아니었다. 심지어 몹시 익숙하기까지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트로웰의 목소리였으니까.
“헐, 트로웰?”
―왜 그러고 있어?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정말 트로웰이었다. 예전에 엘뤼엔이 그랬던 것처럼 정령을 수신기로 쓰는 모양이다. 왜 직접 오지 않고 목소리만 전하는 건지 의아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갑자기 온몸의 긴장이 확 풀렸다.
“허엉, 트로웰, 너무 보고 싶었어…….”
―무슨 일인지 설명해.
황당해하는 그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대강 설명했다. 함정에 빠진 과정을 비롯하여 맥없이 잡힌 순간까지. 깨어나 보니 노예 상단이었다는 얘기를 듣자 놈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지금 트로웰이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어떤 말을 할 것 같아?
“무능해서 죄송합니다아…….”
―난 도와주지 않을 거야. 자기 일은 스스로 해결해.
그럴 줄 알았지만 역시나 냉정한 반응이었다. 예상과 하나도 다르지 않아서 그런지 서운하기보다는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그치만 트로웰. 나 지금 정령 소환이 안 돼.”
―그것만이 아닐 텐데. 물의 정령들이 아예 안 보이지 않아?
그건 또 무슨 소리냐고 되물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트로웰은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오히려 생각지 못한 질문이 돌아와 엉겁결에 주위를 돌아보았다. 지금 보니 정말로 근방에 있는 정령 중에 물의 정령만 보이지 않았다. 보통 정령사 근처엔 같은 속성의 정령들이 몰려든다는 점을 생각하면 매우 기이한 현상이었다.
“혹시 이거 다른 이유가 있는 거야? 결계 때문이 아닌 거지?”
―결계?
“소환이 안 돼서 결계가 있는 거라고 생각했어.”
그 말에 놈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직감적으로 트로웰이 주위를 살피는 중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결계는 없어.” 역시나 담담한 음성이 결론을 내려주었다. 반가운 사실이라 무심코 안도부터 했다. 그러나 트로웰의 말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하지만 결계나 다름없긴 하지.
“어? 무슨 뜻이야?”
―지금 물의 정령들은 중간계로 못 넘어가. 있던 애들도 전부 강제로 귀환했어. 소환이 안 되는 이유도 그래서야. 전체적인 현상이라 너만이 아니라 모든 물의 정령사가 다 같은 상황을 겪고 있을 거야.
“그게 무슨…….”
―이프리트가 물의 영역을 봉쇄해버렸거든. 엘퀴네스도 영역 안에 갇혔어.
그야말로 입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어마어마한 소식이었다. 뭐가 봉쇄되고 누가 영역에 갇혔다고? 엘뤼엔이? 무려 역대 최강의 엘퀴네스로 평가된다는 우리 아버지가?
“……그게 가능해?”
―그 정신 나간 녀석이 상급신과 손을 잡아서…… 아냐. 너한테 할 얘기는 아닌 것 같다. 사실 나도 그리 여유롭진 않아. 그래도 봉쇄된 것까진 아니라서 정령이라도 보낸 거야. 네가 당황해하고 있을 것 같아서 가볍게 상황만 알려주려고 했던 건데…….
네, 그랬는데 제가 이런 꼴로 맞이한 거군요.
나도 모르게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정작 놈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데 괜히 트로웰의 한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혹시 많이 위험한 거야? 다들 무사한 거 맞아?”
―지금 네가 우리를 걱정하는 거야? 네 처지에?
“내 처지는 처지고. 당연히 걱정되지. 어디 다치진 않았어? 지금 아픈데 일부러 멀쩡한 척하는 건 아니지?”
―……그런 건 아냐. 영역만 봉쇄됐을 뿐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모두 멀쩡해. 엘퀴네스가 많이 화났으니, 이프리트는 곧 무사하지 못하겠지만.
“하하…….”
―수습이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일단 몇 시간만 버텨.
그 말과 함께 놈이 손을 뻗었다. 작은 손이 내 손목에 걸린 링을 붙잡자 그대로 부러졌다. 놈은(정확히는 트로웰이지만) 다른 쪽 손목과 발목에 걸려있는 무게 가중 장치도 모두 부러트렸다.
―위급 상황이니까 이 정도는 허가할게.
상당히 선심 쓰는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확실히 링이 사라지니 몸이 한결 가뿐했다. 아니, 단지 그 정도가 아니라 그냥 다른 몸이 된 것 같았다. 일어날 때 저항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바닥을 툭툭 차보는데 둥실둥실 구름을 밟는 듯했다. 마치 다시 정령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이 정도면 날 수도 있는 거 아니야? 신기해서 연신 몸을 움직여보는 내게 웃음기를 담은 목소리가 들렸다.
―실전을 쌓을 좋은 기회야. 잘해 봐.
* * *
정령을 활용한 통신은 그걸로 종료됐다. 트로웰이 관여를 거두면서 놈 역시 빠르게 사라졌다. 다시 혼자가 된 나는 아직 적응되지 않는 몸을 가볍게 주무르며 주변의 동태를 살폈다. 우선 창고에 가서 파이어 버스터부터 되찾아올 생각이었다.
때마침 식사 시간이라 다들 분위기가 흐트러져 있었다. 어차피 모두 꽁꽁 묶어놔서 괜찮을 거라 여기는 건지 감시의 눈길도 느슨했다. 창고까지 동선을 파악한 후 유니콘들이 있는 쪽을 돌아봤다. 이마에 돋아났던 뿔은 다시 사라진 상태다. 같이 데리고 나가는 게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강제로 잠들어 있는 사람들을 깨울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어차피 시벨리우스가 구하러 올 테니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도 있었다.
“으으…….”
그런데 막상 나가려는 순간에 뒤에서 약한 신음이 들려왔다. 유니콘 중에 한 사람이 깨어나고 있었다. 가장 덩치가 큰 흑발의 남자 쪽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의식을 차린 사람을 그냥 방치하는 건 좀 그렇겠지.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다시 발길을 돌려 유니콘들 쪽으로 향했다. 의식을 찾는 중인 남자는 한창 괴로운 얼굴로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이윽고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깨끗한 보라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멍하던 시선에 초점이 잡히는 걸 확인한 후에 나는 차분히 말을 걸었다.
“정신이 들어요?”
“……! 누구……!”
“쉿, 너무 큰 소리는 내지 마요. 밖에 들릴지도 모르니까.”
다행히 상황 파악이 빠른지 발작적으로 소리치려던 남자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부릅뜬 눈으로 나를 노려보다가 황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잔뜩 경직된 얼굴은 옆에 잠들어 있는 이들을 확인하고서야 조금 누그러졌다. 곧 다른 의미로 다시 굳어지긴 했지만.
“카리안. 카리안, 일어나. 웰디 님? 제 말이 들리십니까? 대체 무슨 짓을…….”
호칭을 들으니 다른 남자 쪽은 동료고, 여자 쪽은 신분이 더 높은 모양이다. 두 사람은 남자가 몸을 흔들어도 여전히 반응하지 않았다.
“깊이 잠든 것뿐이에요. 몸에 나쁜 짓은 안 했을 테니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여긴 사람을 해치는 게 목적은 아닌 곳이라서.”
그 말에 남자가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노려보는 시선에 적의가 가득했다.
“그런데 당신이 깨서 좀 곤란하긴 하네요. 그냥 혼자 나가려고 했던 참이었거든요.”
“……넌 누구지?”
“당신들과 같은 처지였던 사람이요.”
내가 갇혀 있던 감옥 쪽을 가리키자 남자가 잠시 멈칫하더니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알만하다는 표정을 짓는 얼굴에 가시처럼 세웠던 경계심이 조금 가시는 게 보였다.
“넌…… 인간인 것 같은데.”
“맞아요. 그쪽은 유니콘이라면서요?”
남자가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자세히 들리진 않았지만 대충 동족조차 납치하는 비정하고 비열한 인간 세상을 향한 개탄이었다. 나도 공감은 했다.
“저 안에선 어떻게 나왔지? 결박은 무슨 수로 푼 건가?”
“음, 사정을 설명하자면 복잡해요. 일단 그쪽의 결박도 풀 수 있을 것 같은데, 원한다면 도와줄까요?”
“……이걸 풀 수 있다고?”
눈을 깜빡인 그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시선이 내 팔과 몸을 노골적으로 훑어내렸다. 시선만으로도 하고자 하는 말을 정확히 전달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나대로 그의 상태를 살폈다. 족쇄만 달려있던 나와는 달리 그들은 손목과 발목, 심지어 목도 구속되어 있었다. 그 와중에 마나 봉인구는 봉인구대로 차고 있으니 빈말로도 괜찮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도 별다른 걱정은 들지 않았다. 사슬이 나한테 채워져 있던 것과 같은 종류라는 건 이미 확인했다. 평범한 쇠였고, 저항 마법도 걸려있지 않았다. 지금처럼 힘이 펄펄 넘치는 상태라면 충분히 해볼 만했다.
“구체를 전부 제거하는 것까진 무리여도 사슬은 끊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아까부터 무슨 무모한 소리인지 모르겠군. 네 눈에는 이 쇳덩이의 두께가 안 보이는 건가?”
“잠깐만 실례할게요.”
입씨름하느니 행동으로 증명하는 게 나을 것 같아 가까이 다가서자 남자가 몸을 움찔했다. 다시 경계하는 시선을 보내는 걸 무시하고 족쇄에 달린 사슬의 이음새를 붙잡았다. 강하게 힘을 줘서 잡아당기니 곧 거친 소리가 울리며 연결 부위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역시 본체 자체를 깨트리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남자는 눈을 크게 뜬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