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470)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470화(470/608)
제470화
두웅! 힘을 주어 내리쳐봤지만 뭉근한 울림만 있을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행여나 내가 단숨에 막을 깨부술까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병사들이 그제야 얼굴을 폈다.
“됐어! 이제 바로 다음 마법을!”
곧 마법사들이 수인을 맺으며 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발동하게 놔두면 안 될 마법인 것 같았다. 그러나 다시 힘을 줘서 내려쳐도 막은 미동하지 않았다. 단순한 근력만으로는 깨부수기 힘든 구조인 것 같았다. 그럴수록 병사들의 얼굴엔 더 자신감이 붙었다.
‘더 세게 내리치면 되겠지. 기합을 넣고 해보자.’
손잡이를 다시 고쳐 쥔 다음 살짝 심호흡했다. 온몸의 힘을 일으켜 검 끝에 모은다는 생각으로 집중했다. 왠지 검신이 울리는 것 같았다. 검이 내 의지에 화답하는 것 같은 게,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대로 팔을 들어 직선으로 내리쳤다. 그러자 아까와는 확연한 다른 느낌이 닿았다. 콰직! 와장창! 단숨에 꿰뚫리는 감각과 함께 유리가 깨지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들었을 땐 막이 산산조각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방패 마법이 이렇게 쉽게 깨지다니!”
안도하고 있던 병사들이 경악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진열이 혼비백산으로 뒤섞이면서, 한창 마법사들이 외우고 있던 주문도 강제로 끊겼다. 역습하라고 누군가가 일부러 마련해준 듯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막상 뛰어들려는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할 정도로 손안이 허전했다. 무심코 시선을 내리다 나는 그대로 당황했다. 검이 재처럼 바스러지고 있었다.
“어?”
이게 무슨 상황인 건지 잠시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순간이었지만 빈틈을 내주기엔 충분한 상황이었다. 기회라는 듯이 병사들이 창을 밀고 들어왔다. 빠르게 피한 후에 곧바로 반격하려는데 빈손만 허공을 휘저었다. 그제야 검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실감이 들었다.
‘뭐지? 마법?’
방어막을 깨부수면 검이 부서지는 역술이라도 걸려있던 건가? 달리 부서진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지만 지금은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내게 무기가 없다는 걸 알아차린 병사들이 우르르 한꺼번에 덮쳐들었기 때문이다.
“엘!”
뒤에 있던 크리스와 네브가 헛숨을 삼켰다.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오히려 병사들 쪽으로 파고들었다. 어차피 원래 갖고 있던 것도 다른 사람 걸 빼앗은 거다. 무기가 없다면 다시 보충하면 그만이었다. 쏟아지는 공격들을 재빨리 피하면서 가장 가까운 병사에게 접근한 다음 때려눕히는 것과 동시에 검을 빼앗았다. 그러자 사납게 들이닥치던 기세가 일순 정지하면서, 다시 거리를 두고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분위기가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을 때였다.
누군가가 빠른 속도로 내게 접근했다. 곧바로 막아낸 다음 엎어 친 후, 그대로 심장을 찌르기 위해 검을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마주친 상대의 얼굴이 예상 밖이었다. 당연히 낯설어야 할 얼굴이 어디서 많이 본 듯이 익숙했다.
“당신…….”
그는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남자였다. 짙은 흑발 아래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희귀한 편은 아니지만 그리 흔한 색도 아니었다. 잠시 멈칫한 틈을 타 남자가 빠르게 빠져나가 훌쩍 뒤로 물러섰다. 무심히 검을 드는 남자를 보고 나는 잠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잘못 본 건가 했는데 역시 내가 아는 얼굴과 똑같았다. 이런 데서 만날 거라곤 상상도 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다비안?”
크리스가 낮게 신음을 흘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역시 당혹감이 가득한 얼굴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충격에 빠진 얼굴을 보니 그의 눈에도 나와 같은 광경이 보이는 모양이다. 역시 내 눈이 잘못된 건 아니었다. 정말로 그였다. 왕국을 떠나는 기차에서 만났던, 내게 수상한 서류를 건네줬던 검은 복장의 남자. 크리스의 동기였다는 사람.
“네가 왜……?”
그렇게 사라져버린 후로 그의 소식은 듣지 못했다. 언젠가는 다시 재회할 거라 생각했지만 그게 이런 방식일 줄은 몰랐다. 남자는 어딘지 눈빛이 멍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저런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이런, 서번트와 아는 사이인가 보지?”
그때 병사들 사이에서 상단주가 느긋하게 걸어 나왔다. 견제하려고 검을 고쳐 쥐다 멈칫했다. 그 뒤에 포진한 병사들이 아는 얼굴들을 끌고 나오고 있었다. 잿빛의 단발머리에 날렵한 체구를 지닌 여자와 짧은 고동색 머리에 덩치가 우람한 남자. 델라와 시몬이었다. 욕이 절로 나온다는 게 바로 이런 상황을 뜻하는 거겠지. 잠시간 흔들리는 시선이 마주 닿았다. 동요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조금 전 들었던 말에 주목했다.
“……서번트?”
“그는 내 충실한 종이지. 아는 사이라니 정말 잘됐군. 준비한 것보다 더 재밌는 걸 보여줄 수 있겠어.”
“저 사람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궁금하다면 지금부터 보여주겠다. 이봐, 서번트.”
“네, 주인님.”
상단주의 명에 서번트라 불린 다비안이 충직하게 답했다.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돌아보는데 청천벽력같은 음성이 떨어졌다.
“지금 당장 자결해라.”
“……무슨……!”
“예, 알겠습니다.”
믿을 수 없게도, 그 말도 안 되는 명령에 다비안이 들고 있던 검을 자신의 목에 가져다 댔다.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쳐내 검을 떨어트리게 하고 몸을 제압해서 바닥에 내리눌렀다. 그러자 이번엔 그의 턱 근육이 부자연스럽게 움직였다. 혀를 깨물려는 게 분명해서 강제로 입을 벌린 후 급한 대로 내 팔을 밀어 넣었다.
“다비안! 그만둬요!”
“다비안! 너 지금 뭐하는 거야!”
경악한 크리스의 목소리가 이어졌지만 그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명을 수행할 생각에만 사로잡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서번트, 더 적극적으로 노력해라.”
그러면서도 상단주가 부추기는 말엔 정확히 반응했다. 다비안이 더 강하게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아무리 내가 잘 막아낸다 한들 이대로는 큰일이 날 게 뻔했다. 기절시키는 편이 가장 간단하겠지만, 힘 조절을 잘못할까 봐 선뜻 손이 나가질 않았다. 일단 명령을 내린 대상을 제거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 들고 있던 검을 상단주 쪽에 던졌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향해 쏘아져 간 검은 곧 보이지 않는 벽에 막혀 튕겨 나왔다. 그 사이에 방어막을 친 모양이었다.
“……유감이지만 날 죽여도 명을 취소할 순 없을 거야.”
상단주는 얼굴이 창백한 상태에서도 거들먹거렸다. 그 말에 옆에 떨어져 있던 다비안의 검을 주우려던 걸 멈췄다. 다비안은 여전히 나를 밀어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중이었다. 혀를 깨무는 게 안 될 것 같다고 여겼는지 다리 쪽에서 단검을 뽑아내 그대로 제 옆구리를 찌르려 했다. 그걸 막고 나니 다음은 스스로 숨을 멈췄다. 그 의지가 얼마나 지독한지 복부를 치고 나서야 강제로 호흡이 이어졌다. 이 모든 노력이 자결하기 위한 거라는 게 참혹했다. 더는 지켜볼 수가 없어서 상단주를 노려보았다.
“그만해!”
“원한다면 명을 철회해줄 수 있다.”
상단주가 비열하게 웃었다.
“그러기 위해 네가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을 텐데?”
혀끝까지 욕설이 치밀어 올랐다. 델라와 시몬이 안타까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크리스의 표정은 돌아보지 않아도 뻔했다. 이미 주위에 있는 병사 중 누구도 나를 공격하려 들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결과가 정해진 기분이었다. 깊은 한숨과 함께 다비안에게서 뺏은 단검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고요해진 공간에 작은 날붙이가 구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항복.”
* * *
철컥, 차가운 금속음이 울렸다.
내려다본 시선 끝엔 손목을 장식하고 있는 두꺼운 수갑이 있었다. 물론 사슬과 마나 봉인구도 함께였다. 기껏 자유로워졌는데 다시 묶인 걸 보려니 마음이 착잡했다. 나만이 아니라 크리스와 일행들도 다시 묶인 상태라서 더욱 그랬다. 미안한 마음으로 바라보니 시선을 맞춰온 그들 모두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들은 신경 쓰지 말라는 표정이라 마음이 더 좋지 않았다.
“너 진짜 굉장하더라.”
한숨을 내쉬려니 익숙한 목소리가 낮게 속삭였다. 고개를 들자 수갑을 채우던 병사와 눈이 마주쳤다. 누가 다가오든 말든 관심도 없어서 몰랐는데 지금 다시 보니 릴이었다. 탁한 금발 아래 선이 흐린 얼굴이 서글서글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왜 그냥 도망가지 않은 거야? 덕분에 좋은 구경은 했다만.”
“시끄러워.”
“진짜 감탄했어. 너 그렇게 안 생겨 갖고 사람들을 진짜 아무렇지 않게 죽이더라.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움직여? 완전 무신이 따로 없던데?”
“시끄럽다고 했지. 지금 너 상대할 기분 아냐.”
안 그래도 마음이 복잡한데 정체도 알 수 없는 수상한 녀석과 입씨름할 생각은 없었다. 릴도 굳이 괴롭힐 생각은 아니라는 듯 피식 웃으며 순순히 물러났다.
“서번트는 걱정하지 마. 좀 쉬면 회복될 것 같으니까.”
이어진 말에 몸이 절로 움찔했다.
시선을 돌리니 병사들 사이에 앉아 있는 다비안이 보였다. 다소 지친 모습이었지만 릴의 말대로 상태는 멀쩡해 보였다. 아니, 진짜 멀쩡한 건 아니었다. 적어도 제정신이 아닌 건 분명했으니까.
‘……대체 저 남자가 왜 여기서 저러고 있는 거냐고.’
다시금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다비안을 기절시키지 않은 건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 항복과 함께 거지 같은 명령이 철회되면서, 드디어 저항을 멈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대신 오히려 축 늘어졌다. 의식은 있는데 숨을 몰아쉬기만 할 뿐 제대로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억지로 제압하는 동안 강하게 눌렀더니 뼈를 다친 모양이었다. 병사 중 하나가 부축해서 일으키자 그 자리에서 울컥 피를 토했다. 이건 아까 친 복부 때문인 것 같았다.
“서번트에게 회복제를 먹여라.”
상단주가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솔직히 나도 충격이었다. 쇳덩이도 끊어내는 힘이니 함부로 쓰면 안 된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조절한 거였는데 그보다 더 줄여야 했다니. 인간의 몸이 이렇게까지 약한 줄은 몰랐다.
정령왕이었을 땐 몸을 직접 쓰는 일이 드물어서 오히려 이런 문제를 경험한 적이 별로 없었다. 적당히 아프게 때리는 트로웰이 정말로 엄청나게 대단한 거였다. 앞으론 나도 힘을 섬세하게 제어하는 법을 익혀야 할 것 같았다. 하마터면 애먼 사람을 잡을 뻔했다 싶으니 눈앞이 다 아찔했다.
물론 무게 가중 장치를 풀고 움직여본 건 오늘이 처음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하필 가장 익숙지 않은 날에 이런 일을 겪은 건 그저 운이 나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운이 좋은 건지도 모른다. 구할 사람을 하나 더 발견한 거니까.
다시금 다비안 쪽을 바라보았다. 회복제를 마시고 상태가 안정됐는데도 그는 여전히 시선이 멍했다. 감옥 안에 갇혀 있는 수많은 사람과 비슷한 표정이었다.
말도 안 되는 명령을 인형처럼 따랐던 것만 봐도 역시 세공을 당한 거겠지. 왕국에서 헤어진 그가 왜 이런 데서 노예가 되어 나타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간 겪은 고초만은 충분히 짐작이 갔다. 크리스는 창백한 얼굴로 계속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구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참 공교로운 인연 아닌가. 설마 내 서번트와 아는 사이였다니 말이야. 우리에겐 행운이었지만, 네겐 유감스러운 일이겠군.”
내가 다비안을 주시하는 걸 지켜보던 상단주가 말을 걸어왔다. 가까이 다가올 때를 노리려 했는데 아쉽게도 놈은 여전히 방어막 속에 숨어있었다. 쓸데없이 조심성이 많은 성격이었다. 아쉬움에 혀를 찼더니 웃고 있는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저 사람은 어디서 데려온 거야?”
“미안하지만 그건 말해줄 수가 없다. 중요한 건 그가 내 노예라는 점이지. 언제 어느 때든 내 명령 하나에 목숨을 걸 수 있는 아주 충실한 노예 말이야.”
“…….”
“서번트의 목숨은 네게 달려 있다. 그가 죽는 게 싫다면 계속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야.”
……역시 아쉽다. 지금 방어막만 없었으면 명령을 내릴 틈도 주지 않고 끝낼 수 있었을 텐데. 하다못해 한 번에 깨부수는 요령만 익혔어도.
손을 가볍게 쥐었다 펴보았다. 분명 처음 방어막을 깨트렸을 때랑 비슷한 힘을 실었던 것 같은데 왜 두 번째 땐 그냥 튕겼는지 모르겠다. 한 번 더 해보면 될까? 근처에 검이 없나 싶어 주위를 훑으려니 눈치 빠른 병사들이 슬그머니 검을 감췄다. 이미 상단주는 한발 짝 더 뒤로 물러난 상태였다. 그가 얼른 손을 휘저었다.
“이만 데려가.”
명을 들은 병사들이 내 몸을 이끌었다. 나가기 전에 돌아본 크리스와 일행들은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괜찮을 거란 시선을 보내긴 했는데 알아들었을지는 의문이었다.
바깥으로 나가니 사방에서 시선이 쏟아졌다. 이곳에 있는 사람은 전부 다 몰려나와 있는 것 같았다. 하도 요란하게 일을 벌여놨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직 장내는 수습되지 않은 채 어수선했다. 덕분에 이동하는 동안 그간의 행적을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이동한 동선을 따라 마치 헨젤과 그레텔이 남긴 표식처럼 핏자국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연행된 곳은 처음 갇혀 있던 붉은 천막이었다. 그런데 당연히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한 공간에 나보다 먼저 자리 잡은 이들이 있었다. 그들이 들어서는 나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 역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사히 도망친 줄 알았던 유니콘 세 명이 원래 그들이 있던 철장 안에 초라한 모습으로 묶여 있었으니까.
……다시 잡혔구나.
그사이 달라진 점이라면 여자 쪽도 의식을 차렸다는 점 정도였다. 짠한 마음으로 바라보니 모두 음울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잠시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들어가.”
병사 중 하나가 내가 있던 철장을 열었다. 잠자코 안으로 들어가니 그들이 내 목과 다리를 연결해서 묶고 온몸에 사슬을 단단히 휘감았다. 그러고도 안심이 안 되는지 철장에도 사슬을 여러 차례 동여맸다.
“다 됐습니다.”
“좋아. 몰핀은 준비됐어?”
“네, 마침 조금 전에 도착했습니다.”
다른 병사가 작은 상자를 가져오더니 둥근 병을 꺼냈다. 그 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름이 들어 있었다. 마개를 열자 풍겨 나오는 싸한 냄새에 머리가 어찔했다. 아무래도 의식을 잃게 하는 종류인 것 같았다. 어지간한 약은 안 통하는 내가 바로 반응을 보일 정도인 걸 보니 단순한 약물은 아닌 것 같았다. 유니콘들도 상황을 알아차린 건지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어쨌든 이대로 얌전히 잠들 생각은 없었다.
“저항 안 할 테니까 그거 쓰지 마.”
그러자 기름에 심지를 넣고 불을 붙이려던 병사가 움찔해서 돌아보았다.
“그 말을 어떻게 믿어?”
“넌 내가 힘이 부족해서 잡힌 것 같아?”
“…….”
“못 믿겠으면 한번 해봐. 내가 다시 작정하고 저항하면 어떻게 될지 보여줄 테니까.”
보란 듯이 강하게 힘을 주니 사슬이 요란한 소음을 냈다. 주위의 병사들이 새파래진 얼굴로 검을 빼 들었다. 유순하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팽팽히 당겨졌다. 나는 기름을 든 병사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적어도 넌 죽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