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482)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482화(482/608)
제482화
겉봉을 뜯고 접힌 카드를 펼치니 수려한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적혀 있는 내용 자체는 다른 초대장과 비슷한데 무시하기 힘들 만큼 존재감이 강렬했다. 잉크에도 금가루가 들어 있어서 그런가 보다.
“어떻게 할 거야? 다른 덴 몰라도 세피온의 초대를 거절하는 건 위험부담이 커. 가주인 테이론 공작은 냉혹한 귀족이야. 그의 눈 밖에 나면 제국에선 살기 힘들다고 봐야 해.”
“가죠, 뭐.”
“괜찮겠어?”
크리스가 불안한 시선을 보내왔다. 날 걱정하느라 근심하는 그에겐 미안한 말이었지만, 당연히 괜찮았다. 솔직히 말하면 오히려 기다려왔던 순간이었다. 지금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혼란스러울 정도로.
‘유명해진 보람이 있긴 하네.’
일이 트이려는 건지, 아니면 더 꼬이려는 건지. 이렇게 기회가 금방 찾아올 줄은 몰랐다. 생각한 방식과는 다르긴 하다만 언제는 계획대로 된 적이 있던가. 어차피 부딪칠 일이라면 이런 식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다시금 겉봉에 찍힌 푸른색 인장을 살피다 카드 쪽을 돌아보았다.
테이론 이스 세피온.
초대 문구 하단에 유려한 필체로 적힌 서명이 눈에 들어왔다. 세피온 가문의 가주이자, 공작 본인의 이름이었다.
블루 드래곤 라미아스.
제국에서 유희 중인 그의 이름이기도 했다.
* * *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다 쉬웠다.
아인 이드리스는 자신의 삶을 비교적 가볍게 정의 내릴 수 있었다. 그의 성장은 평온하고 안정적이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한 번도 형편이 궁핍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의 부모는 성실했으며 자식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필요할 때는 주변에서 도움의 손길도 주어졌다. 이웃들 역시 아인 이드리스에게 모두 친절했다. 엄격하고 깐깐한 영주는 아이들을 싫어하기로 유명했지만, 그런 그조차도 그에게만은 관대했다. 그 이유도 알고 있었다. 그가 바람의 사랑을 받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갓 태어난 순간부터 돋보였던 이적. 기척에 민감하고 흐르는 바람을 다룰 줄 알며, 날씨를 읽을 줄 아는 아이는 어디에서나 눈에 띄었다. 그가 특별하다는 건 누구라도 알 수밖에 없었다.
작고 초라한 마을에서 이능을 타고난 존재는 출세의 상징이었다. 다들 아인 이드리스를 부러워하고, 친해지려고 했으며, 그를 좋아했다. 막상 아카데미에 들어간 후로는 생각보다 성과가 나지 않아 초조해지기도 했지만 그 시기가 그리 길진 않았다. 주어진 결과를 맞이했을 땐 그 과정조차 마땅한 시련이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누구도 감히 맞이할 수 없는, 바람의 왕이 그를 택했으니까.
처음부터 안배된 축복이었다. 생이 주어진 이후로 온전히 순탄히 오르도록 마련된 정상의 여정. 낮게 타고난 신분이 흠이라기엔 정령왕의 계약자가 그 자체로 신분이었다. 그는 어디를 가도 존귀한 대접을 받았다. 다른 신분엔 흥미가 없었고, 같은 길을 걷는 이들 중에선 그보다 높거나 비슷한 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누군가를 부러워하거나 동경할 필요가 없었다. 오직 단 하나, 그 위에 존재하는 미네르바를 제외하고는.
하지만 그건 그가 사랑하는 사람과 온전히 동등해질 수 없다는 점에서 오는 아쉬움에 더 가까웠다. 이따금 닿을 수 없는 장벽을 실감할 때면 무심코 찾아들고 마는 서글픔 같은 거였다. 그래도 자신이 인간이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여겼다. 정령사로서 이를 수 있는, 그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그렇게 생각해 왔었다.
“아인.”
자신을 부르는 음성에 아인은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은빛의 눈동자를 보자 마음속이 차분해졌다. 아니, 들끓는 것 같기도 했다. 정의할 수 없는 감정 탓에 그의 표정은 우는 듯이 웃는 듯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미네르바, 다녀왔습니다.”
“표정이 좋지 않구나.”
“……우연히 그를 만났습니다.”
약간의 간격을 두고 떨어진 말에 미네르바의 표정이 흐려졌다. 누구를 말하는 건지 바로 이해한 것이다. 아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저도 모르게 피하고 말았습니다.”
“아인.”
“제가 좀 이상했습니다. 그의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었어요.”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때의 광경이 선명히 떠올랐다. 곧게 뻗은 검에서 푸른색 기운이 흘렀다. 그 상태로 도약한 소년은 마치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후드가 벗겨지면서 찬란한 금발이 흩날렸다. 어떠한 신호나 말이 없었는데도 물의 늑대가 그의 흐름을 따라 알아서 움직였다. 파도가 일 듯이 물결이 갈라지고, 그가 서슴없이 마물의 몸을 가르고 들어갔다. 자신은 조금도 건드릴 수 없었던 가죽을 단숨에 꿰뚫고 그대로 휘저어 깨끗하게 절반으로 분리했다.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생애 처음 느껴보는 충격에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시큐엘과 한 몸인 것 같았어요. 사람이 그렇게 아름답게 움직일 수 있다는 건 처음 알았습니다.”
더 믿을 수 없는 건 그 순간에 그가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거였다. 시종일관 여유롭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간 그와 관련한 무성한 소식을 듣긴 했지만 전부 과장된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제 보니 오히려 축소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인 이드리스는 혼란스러웠다. 그는, 엘은 상급 정령사였다. 자신보다 낮은 급이었다. 지금까지 만난 상급 정령사는 전부 그 같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비교하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은사 계약에 가까우니까요. 정령술 외에 다른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죠. ……엘만큼 아름다운 외모도 아니군요.”
아인 이드리스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처음엔 눈앞의 위용에 놀라느라 그의 외모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아름다운 금발을 지니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먹물 같은 오염이 흘러내리면서 그 온전한 외모가 드러났을 땐 이번엔 그가 펼친 위용을 잊었다. 모두가 상황을 잊고 넋을 잃었다. 그중에는 아인 이드리스도 있었다.
“아인, 너 역시 충분히 아름다운 사람이다.”
미네르바가 서둘러 그의 두 손을 잡았다. 따스한 온기가 닿았으나 아인의 얼굴은 더 아프게 일그러졌다. 원래 미네르바는 체온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건 그를 위해 일부러 가져온 온기였다.
“엘이 그러더군요. 미네르바를 걱정하게 하지 말라고요. 전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게 사실이었으니까요. 전 언제든지 당신을 근심하게 하는 나약한 존재죠.”
“그렇지 않아, 아인. 넌 충분히 강하다.”
“마물 하나도 제대로 잡지 못하는 형편없는 녀석인걸요.”
꺼질 듯이 시무룩한 음성에 미네르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학하는 말을 잡아주고 싶었으나 이미 상심을 배워버린 연인에겐 위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한심한 소리를 했네요. 지금도 충분히 과분한 것들을 누리고 있으면서 말도 안 되는 투정을 했습니다. 조금 전의 말들은 취소하겠습니다.”
다행히 아인 이드리스는 곧 고개를 저었다. 멋쩍게 웃는 얼굴은 평소의 그와 같았다. 미네르바는 겨우 안도했다.
“안 그러려고 했는데. 당신 앞에선 약한 모습만 보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난 괜찮다, 아인. 얼마든지 약한 모습을 보여도 된다.”
“제가 창피해서 싫어요.”
한결 소탈해진 말투로 아인이 고개를 저었다. 엷게 미소 지은 얼굴은 기분이 나아진 듯 보였다.
“사실 그동안 너무 도전이 없는 평온한 일상이었죠. 차라리 잘된 것 같기도 합니다. 이참에 저도 검술을 배워볼까 싶습니다.”
“……검술을?”
“더 강해지고 싶습니다. 당신에게 좀 더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저도 그처럼, 엘처럼 될 수 있을까요?”
미네르바는 그의 손을 꼭 움켜잡았다. 무골의 자질은 대체로 타고난다. 노력으로 쌓으려면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해야 했다. 아인은 벌써 성인이었고, 검으로 성취를 이룰 수 있는 자질도 아니었다. 하물며 그가 기대하는 모습에 닿는 건, 자질을 가진 자에게도 힘들 것이다. 하지만 미네르바는 연인이 가진 희망을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할 수 있단다, 아인. 네게 어울리는 검을 선물해주마.”
“고맙습니다, 미네르바. 당신이 그렇게 말해 주니 용기가 납니다.”
“그래, 아인. 넌 잘할 수 있을 거다.”
그 말이 퍽 안심이 됐는지 아인 이드리스의 얼굴이 다시금 울 것처럼 흐려졌다. 그런 그를 달래듯 끌어안으면서 미네르바는 닿은 어깨에 가만히 얼굴을 묻었다.
―네 계약의 끝을 봤어.
어린 동료의 지친 목소리가 다시금 머릿속을 스쳤다. 그게 어떤 끝이든, 언젠가는 그 역시 보게 될 터였다.
* * *
유니콘의 터전은 깊은 숲속, 그들만이 이를 수 있는 술법 안에 존재한다. 정의와 분별의 신 루세프가 창조한 유니콘 일족은 본래 신계에 속한 신족의 일족이었다. 그런 그들이 중간계에 자리 잡게 된 건 천마대전이 끝난 직후, 혼돈의 시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았을 무렵이었다.
세간엔 그들 일족이 중간계로 보내진 건 더는 문지기의 역할이 필요 없어진 탓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전쟁의 후유증을 회복하려는 목적이 더 컸다. 일종의 휴양이었다. 그래서 유니콘 일족은 지금 사는 땅을 그저 잠시 머무는 정착지로 여기고 있었다. 그들에겐 언젠가 다시 돌아갈 신계가 진짜 고향이자 터전이었다.
“그걸 위해서라도 룬인 당신이 힘을 써야 합니다.”
장로의 잔소리는 이제 너무 들어서 귀에 박히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이른 오전부터 시작된 설교에 질릴 대로 질린 시벨리우스는 한숨을 내쉬고 싶은 기분을 삼키며 건조하게 대답했다.
“알아.”
“아신다고요? 아신다는 분이 왜 아직도 진척이 없으십니까?”
“…….”
“벌써 천 년이 넘도록 루세프 님의 강신을 뵙지 못했습니다. 그분의 아이들인 우리가 버젓한 제사장을 눈앞에 두고 굳이 인간 세계의 신전을 찾아가야만 그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단 말입니다. 이게 말이 된다고 여기십니까?”
“노력하고 있어.”
“그런 말로 될 게 아닙니다. 시벨리우스 님의 연치가 몇이십니까! 자그마치 천오백 년입니다! 형님이신 리글레오 님은 성년이 되기도 전에 각성하셨습니다!”
“안 되는 걸 어쩌란 거야.”
“시벨리우스 님!”
“그만 나가줘. 쉬고 싶어. 피곤해.”
이마를 짚은 시벨리우스가 문 쪽을 가리켰다. 그에 불만스럽게 고개를 돌린 장로가 문득 근처 식탁에 있던 바구니를 발견했다. 그 안에는 갓 구운 빵과 과자들이 담겨 있는 채였다. 그 옆으로 미처 채 치우지 못한 조리도구들도 늘어져 있었다. 누가 만든 건지 뻔히 짐작되는 상황이었다. 장로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그대로 달려든 그가 바구니를 집어 들어 바닥에 패대기쳤다.
“뭐하는 거야!”
“또 이런 쓸모없는 일에 기운을 소진하신 겁니까? 이런 거나 하고 있으니 각성에 집중을 못 하시는 거 아닙니까!”
“쉴 때만 한 거야! 휴식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든 그건 내 마음이잖아!”
“정신을 차리십시오! 당신은 룬입니다! 하지만 각성하지 않은 룬이 언제까지 룬으로 불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심장이 덜컥 떨어졌다. 시벨리우스는 입술을 악물었다. 자신도 알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 상태로 버틸 수는 없다. 알고는 있지만 안 되는 걸 자신더러 어쩌라는 말인가.
“나가.”
“시벨리우스 님.”
“당장 나가. 제발! 나가란 말 안 들려?”
토하듯이 외친 말에 장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화를 참는 듯이 여러 번 한숨을 토한 후에야 그는 한층 진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쉬십시오. 나중에 다시 얘기하지요.”
“…….”
그제야 시벨리우스의 입속에서도 숨이 흘러나왔다.
“역시 후계를 서두르는 수밖에 없나. 형은 다시없을 천재였건만, 동생의 재능이 이렇게 떨어져서야…….”
장로가 나가면서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선명히 들렸다. 굳이 감추려고 시도하지도 않아 듣고 싶지 않아도 들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주먹을 움켜쥐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어차피 저항과 항변 따위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각성하지 못하는 룬이란 그런 거였다.
몇 년 치 피로가 한 번에 쌓인 기분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다, 시벨리우스는 바닥에 엉망으로 흩어져 있는 빵들을 바라보았다. 더럽혀진 게 아깝긴 했지만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차피 만들어봤자 그밖에 먹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렇다고 방치해 두면 벌레가 꼬일 것이다. 그는 한숨을 내쉰 후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정리하기 위해 손을 뻗었을 때였다. 언젠가 들었던 목소리가 스쳤다.
<나 이 빵 좋아해.>
아, 그 인간 소녀한테 줬던 게 이 빵이었지. 시벨리우스는 멍하니 생각했다. 이곳에선 아무한테도 환영받지 못하는 음식이다 보니 주면서도 내심 조심스러웠는데, 소녀는 정말 기쁘다는 듯이 받아들었었다. 맛있었다고도, 그만두지 않으면 좋겠다고도 해줬었다. 그의 사정 따윈 조금도 모를 텐데도. 마치 다 알고 응원해주는 것처럼 느껴져서 마음이 복잡했었다.
<너 호구야? 왜 저런 취급을 하는데 아무 말도 안 해?>
일순 숨을 삼켰다. 회상한 것뿐인데도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룬은 인간 세계로 나가면 안 된다. 다른 종족과 어울려서도 안 된다. 기억도 나지 않는, 선대 룬이었다는 그의 형이 그 금기를 어기고 인간 세상을 나갔다가 한 여인과 사랑에 빠져서 일족을 버렸다고 했다. 하나뿐인 가족인 자신도 그때 같이 버려졌다.
그걸 일평생 얼마나 원망해왔던가. 시벨리우스는 자신의 형과 똑같은 전철을 밟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모두를 배신한 선대들의 참회를 위해서라도, 자신만은 그래선 안 되었다. 그가 지켜야 할 자리는 여기였다. 그래서 한 번도 인간 세상을 나가볼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얼마 전 납치된 웰디 일행을 구하기 위해 나가본 게 그 일생에서 가장 먼 거리의 외출이었다. 이후로도 다시는 나갈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이곳이 내 자리인가.
각성도 하지 못한 룬이 여기서 뭘 할 수 있지?
<제도에 오면 여명이란 헌터 길드가 있어.>
<혹시 나중에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찾아와.>
<그냥 용건 없이 놀러 와도 돼. 언제든 환영할게.>
몸속에서 울린 파문이 불이 붙은 도화선처럼 빠르게 번져 나갔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 순간을 바랐던 건지도 몰랐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쉽게 흔들릴 리가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시벨리우스는 어느새 짐을 꾸리고 있었다.
“시벨리우스 님?”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문 앞에 풍성한 은발을 지닌 소녀가 서 있었다. 일족 안에서도 손꼽히는 미인이었지만 소녀를 바라보는 시벨리우스의 시선은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는 한 번도 소녀를 편한 시선으로 본 적이 없었다. 그 모습 위에 덧입혀지는 장로의 모습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야, 웰디.”
“할아버님이 역정을 내시는 소리를 들었어요. 시벨리우스 님이 상심하셨을 것 같아서…….”
“장로가 화내는 거야 일상이잖아. 신경 쓸 거 없어.”
“네에, 저어, 그런데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웰디가 불안한 표정으로 시벨리우스가 챙겨놓은 짐들과 그 앞에 떠 있는 종이들을 힐끔거렸다. 그 모습에 잠시 시선을 둔 시벨리우스가 예정된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둥실둥실 떠 있던 종이들이 빛을 머금으며 서로 둥글게 하나로 연결되더니, 다음 순간 눈앞에 있던 것들과 한 번에 사라졌다. 깜짝 놀란 웰디가 입을 벌리자 시벨리우스가 담담히 설명했다.
“아공간 주술이야.”
“세상에, 매개체 없이 발동하는 아공간이요? 그 어려운 주술을 완성하셨군요.”
웰디의 얼굴이 밝아졌다. 저렇게 대단한 술사인데 왜 룬의 각성은 하지 못하는 건지, 안타까움이 깃든 시선이기도 했다. 피식 웃은 시벨리우스가 웰디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어딜 가세요?”
“여길 떠날 거야.”
“네? 무슨……!”
당황한 웰디가 급히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 순간에 맞춰 몸을 돌린 시벨리우스가 웰디의 이마에 글자를 적은 종이를 붙였다. 반사적으로 저항하려는 팔은 이미 가볍게 잡아 멈추게 한 후였다. 웰디의 눈이 동그래졌다.
“킬리다.”
종이에 적힌 글자가 은빛으로 발하기 시작했다.
“퀴에스, 카도, 카스마.”
“인(引)”
“시, 시벨리……우스……님.”
이윽고 힘이 빠진 웰디의 몸이 그대로 무너졌다. 시벨리우스는 깊이 잠든 웰디를 안아 들어 침대 위에 눕혔다.
“푹 쉬어, 웰디.”
낮은 목소리가 이미 듣지 못하는 귓가를 향해 속삭였다.
시벨리우스는 고개를 들고 빛이 드는 문 쪽을 다시 응시했다.
최초의 자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