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484)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484화(484/608)
제484화
“당신이 정령사 엘이오?”
가까이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깐깐한 인상을 지닌 나이 지긋한 남자가 지팡이를 들고 서 있었다. 천천히 위아래로 훑는 시선엔 탐색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네, 제가 엘인데 무슨 일이시죠?”
“물의 정령사 맞소? 이번에 대형 마물을 잡았다는 그 상급 정령사?”
“네, 그렇긴 한데요…….”
“……흠, 그렇군.”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에 설핏 실망이 스쳤다. 짧게 혀를 찬 그는 건성건성 아무 말이나 건네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이내 자리를 떠났다. 저럴 바엔 왜 굳이 말을 걸었나 싶었지만, 이미 여러 차례 반복된 상황이라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또냐, 진짜 무례하긴.”
옆에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본 크리스가 불쾌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다짜고짜 질문하고는 그냥 휙 가버리는 건 뭐야? 표정 단속이라도 잘하든가.”
“그러게 말이에요.”
나 역시 솔직히 동의했다. 적응했어도 어이없는 기분이 드는 건 사실이니까.
입장할 때는 더 가관이었다. 초대장을 보여주니 문지기가 입구에서 나를 크게 호명했는데, 그 순간 회장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돌아보았다가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한꺼번에 쏟아진 수많은 시선의 주인들이 동시에 다 똑같은 감정을 드러내는 광경은 여러 의미로 꽤 인상적이었다.
‘생각보다 그다지…….’
‘저 정도는 평범…….’
‘소문이 과장…….’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도 이유는 대충 짐작했다. 아무래도 지난 며칠간 대서특필된 화제의 정령사가 기대보다 못한 모습이라 다들 맥이 빠진 모양이었다. 그중 일부는 굳이 다가와서 내 정체를 확인하고는 재차 실망하기도 했다. 조금 전 말을 걸어온 남자도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그래도 이번이 마지막이었는지 남자가 돌아서는 걸 기점으로 힐끔거리는 시선이 확연히 사그라졌다. 자꾸 귀찮게 구는 게 슬슬 짜증 나려는 참이었는데 다행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다행인 건 연회장에 차려진 음식이 참 많다는 거다. 갖가지 고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조리해서 선보인 식사류부터 케이크와 푸딩, 쿠키와 초콜릿을 비롯한 간식류까지. 다양한 음식들을 맛보고 있으니 불쾌한 기분도 오래 안주할 틈이 없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다음엔 뭘 먹을지 고심하고 있자니 크리스가 불퉁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엘, 너 그거 그냥 풀면 안 돼?”
“헛소리인 건 알죠?”
“내가 다 억울해서 그렇지.”
“별 게 다 억울하네요.”
“그치만! 저렇게 대놓고 무례하게 구는데 너무 약오르잖아. 외모가 별로라느니, 사기를 당했다느니. 진짜 네 모습을 보면 얼어붙어서 말도 못 붙여볼 놈들이 제멋대로 떠들긴! 대체 뭘 어떻게 한 거야? 그 화려한 외모를 이렇게 감쪽같이 감추는 게 말이 돼?”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는 시선에 어깨를 으쓱였다. 무심코 매만진 옷 안에서 단단한 감촉이 닿았다. 늘 걸고 다니는 화석 목걸이 외에 오늘은 다른 목걸이가 하나 더 늘어난 참이었다. 레드 드래곤이 직접 제작했다는 외모를 가려주는 마도구. 연회에 간다고 하니 이프리트가 선뜻 빌려줬다. 혹시나 달라붙을지 모를 쓸데없는 시선과 관심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는데, 막상 정말 효과가 있으니 입안이 쓰긴 했다. 기대와 다른 외모에 관심이 멀어졌다는 건 그들이 내게서 기대하던 게 그것뿐이었다는 의미이기도 했으니까.
덕분에 안 그래도 없던 연회에 대한 흥미가 완전히 식었다. 처음부터 세피온 공작― 드래곤 라미아스를 만나려는 목적뿐이긴 했지만, 분위기를 보니 왠지 그조차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친히 옷까지 보내며 초대한 거라 뭔가 의미를 지닌 건가 싶었는데 원래 세피온 공작은 평민을 초대할 땐 옷도 같이 보내주는 편이라고 한다(동반자 자격으로 참석한 크리스는 본인이 직접 마련해야 했지만). 혹시 예복을 마련할 형편이 되지 못하는 경우를 대비한 배려였다.
연회에 와보니 더 확실했다. 회장 안엔 사람이 너무 많았고, 각자 직업과 계층도 다양했다. 제도에서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린 사람은 거의 다 초대받은 것 같았다.
가장 큰 문제는 신분에 따라 동선이 나뉘어 있다는 거다. 대놓고 정해져 있는 건 아니라 처음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조금 지켜보니 구역마다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져 있는 게 뚜렷이 느껴졌다. 서로 두서없이 섞여 있는 것처럼 보여도 중심지로 들어갈 수 있는 건 고위층뿐. 신분이 낮은 이들은 외각을 벗어나지 못했다. 고위층 쪽에서도 외각으로는 거의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가까이할 기회조차 없는 구조였다.
평민 헌터인 나와 크리스 역시 당연히 외각만 서성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연회의 주최자이자 대귀족인 세피온 공작이 나타난다 한들 대면할 수 있을 거란 기대는 눈꼽만큼도 들지 않았다. 시종을 통해 쪽지라도 전할 수 있다면 다행이었다.
“진혼 길드 마스터, 테오 에트 님과 안나 에트 부인이 드십니다!”
이 와중에 반갑지 않은 이름까지 들리니 기분은 더 가라앉았다. 입구에서 이제 막 여인과 함께 안으로 들어서는 낯익은 남자가 보였다. 뻔뻔하게 웃으며 연회장에 들어서는 얼굴을 보니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젠장, 저 자식도 오는 거였나.”
나보다 더 표정을 구긴 크리스가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하기야 이제 막 이름을 알린 신예 헌터도 초대한 연회에서 진혼처럼 유명한 길드 마스터를 빠트릴 리가 없었다. 심지어 맞이하는 사람들의 분위기도 확연히 달랐다. 우리가 들어섰을 땐 힐끔거리기만 하던 이들이 이번엔 앞다투어 다가가 인사를 건네기 바빴다. 그중엔 발걸음 무겁던 고위 귀족들도 몇 섞여 있어서 크리스의 표정이 더 뚱해졌다.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려는데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공기가 퍼져나가는 것 같은. 넘쳐흐른 무언가가 회장 안에 한가득 밀려들어 단숨에 삼키는 듯한 감각.
“아.”
“왜 그래, 엘?”
크리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설마.’
마른침을 삼키는데 주위가 술렁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입구에서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람의 정령사 아인 이드리스 님! 그, 그리고…… 저, 정령왕 미네르바 님이 드십니다!”
주위가 한순간에 고요해졌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모두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나 역시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굳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 존재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하얗다 못해 투명하게 느껴지는 피부, 그 위에 늘어트린 눈부신 은백색의 머리카락. 고요한 달빛을 담아낸 눈동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느낌이 드는 그는 고고하고 드높은 설원의 창공을 떠올리게 했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위의 공기가 둥둥 울렸다. 그로부터 시작된 청아한 바람이 온 사방으로 퍼져나가 스치는 모든 것들을 정화하는 듯했다. 그 존재를 의심할 여지가 없는, 바람의 왕이었다.
‘미네르바.’
긴 정적이 흘렀다. 예상치 못한 바람의 현신 앞에 경악한 사람들은 모두 숨 쉬는 것조차 잊은 듯이 보였다. 끊임없이 흐르던 악기의 연주조차 어느덧 멈춘 상태였다.
“이거 정말 귀한 손님이 오셨군.”
그 영원할 것만 같던 고요를 끝낸 건 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뒤를 돌아보니 계단에서 걸어 내려오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훤칠한 키에 짙은 감청색 머리칼, 사납게 빛나는 푸른색 눈동자가 무척 강렬한 인상을 주는 남자였다. 목까지 단단히 여민 검은색 정복에 푸른 망토를 걸친 그는 한눈에도 높은 신분으로 보였다. 누군지는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고결한 바람의 왕께 인사드리오.”
남자가 정중한 동작으로 예를 취하는 것에 미네르바가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순간 눈이 마주친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워낙 찰나라 어지간하면 위화감을 인지하지도 못할 시간이었다. 남자는 금방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갔다.
“참석자 명단을 봤을 때부터 내 눈을 의심했소. 황성의 연회에서도 뵙기 힘들던 분을 내 집에서 뵐 수 있다니 믿기지 않는군. 존귀한 바람이 들러주시다니 큰 영광이오.”
“제국의 수호자라 불리는 공작께서 직접 주관하시는 연회인데 당연히 참석해야지요. 귀한 자리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세피온 공작님.”
말 없는 미네르바를 대신해 아인 이드리스가 정중히 화답했다. 예상한 대로 남자의 정체는 역시 세피온 공작이었다. 그는 긴장한 듯한 아인 이드리스를 향해 빙긋 웃었다.
“어서 오게, 바람의 동반자여. 매번 연회를 열 때마다 자리를 특별히 빛내는 이들이 나오곤 하지. 오늘은 누가 그 빛을 발할까 궁금했는데 주인공이 이미 정해진 것 같군.”
아인 이드리스가 상기된 얼굴로 미네르바를 바라보았다. 그와 시선을 맞춘 미네르바의 두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입가에 서린 미소에 봄처럼 달큰한 기운이 감돌았다. 왠지 그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었다. 고작 웃는 걸 봤을 뿐이었다. 그가 웃는 걸 보는 게 처음인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마치 넘어가서는 안 되는 선을 넘은 것 같았다. 내가 보면 안 되는 무언가를 엿본 듯한, 알아선 안 되는 걸 깨달은 기분.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헤아리는 동안 세피온 공작이 가볍게 좌중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경직된 분위기를 읽은 그가 짓궂게 웃었다.
“주인공의 등장이 이른 탓인지 분위기도 벌써 무르익었군. 그러나 연회는 이제부터 시작이오. 여기서 지치기엔 모처럼 행한 걸음이 너무 아깝지 않겠소? 준비한 것이 많으니 모두 편히 즐겨주시오.”
공작이 신호하자 멈췄던 연주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경직된 공기가 풀어지며 분위기가 빠르게 편안해졌다. 마법에서 깨어난 것처럼 다시 움직이게 된 사람들은 이번엔 눈을 빛내며 적극적으로 다가서기 바빴다. 미네르바를 비롯한 중심부의 모습은 곧 둘러싸는 무리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도 않게 됐다.
“와아, 진짜 미쳤다. 바람의 정령왕이라니. 내가 지금 정령왕을 눈앞에서 본 거야?”
그제야 정신을 차린 크리스가 뒤늦게 부산을 떨었다. 나는 근처에 있던 과일 음료를 집어 들고 단숨에 잔을 비웠다. 그 행동이 꽤 거칠었는지 크리스가 놀란 시선을 보냈다.
“엘, 갑자기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어, 음, 아니에요. 그냥 좀 목이 마르네요.”
“하하, 뭐야. 정령왕을 만나서 놀란 거야? 너도 긴장이라는 걸 하는구나. 그래도 천천히 마셔. 물도 급하게 마시면 체한다고.”
“네, 조심할게요.”
복잡한 마음을 간신히 정리하고서야 이런 기분이 드는 이유를 깨달았다. 아아, 그래. 이제 보니 처음이었다. 웃는 얼굴이라고 다 같은 게 아니었다. 저런 표정으로 웃는 미네르바의 얼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아는 그는 애초에 잘 웃는 편이 아니었다. 떠들썩한 자리에서도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드물었고, 원래 그런 성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었던 거다. 저렇게 밝고 충만하게, 눈이 시릴 만큼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도 있었다. 그게 왠지 충격이었다. 미네르바가 잃은 것이 뭐였는지. 그에게 새겨진 상흔의 무게를 처음으로 실감하고 만 것 같아서.
“그러고 보니 한 가지 흥미로운 소식을 들었지. 자네가 검술 선생을 알아보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던데, 그게 사실인가?”
그때 온갖 잡음 속에서 목소리 하나가 선명히 와 닿았다. 세피온 공작이 아인 이드리스에게 건넨 질문이었다. 멍하니 고개를 드니 무리 진 사람들 틈새로 어색하게 웃고 있는 아인 이드리스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민망해하면서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순순히 떨어지는 긍정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얼마 전 무기 상점에서 봤던 그의 모습이 다시금 눈앞을 스쳤다. 그때 느꼈던 어떠한 예감도 같이.
“정말 검술을 배우려는 건가? 나라서 하는 말이지만 두 가지 능력을 소화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네. 자네는 정령술로도 이미 대적할 자가 없을 텐데, 굳이 고생을 사서 하려는 이유를 모르겠군.”
“아마 공작님과 같은 이유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흠?”
“그동안 너무 한 자리에 안주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부끄럽지만 지금이라도 뭔가를 더 배워보고 싶어졌습니다. 아직 젊고 건강한데 더 성장할 가능성을 무시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하, 틀린 말은 아니군. 한데 단지 그뿐인가?”
“예?”
의아한 표정을 짓는 그를 향해 세피온 공작이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깨달음이 일어난 기저엔 자극이 존재하는 법이지. 혹시 최근 화제가 된 물의 정령사를 의식한 건 아닌가 해서 말이네. 그가 입검의 경지에 이른 검사라지?”
아인 이드리스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그건 내 표정도 마찬가지일 게 뻔했다.
아니라고 말해.
나도 모르게 낮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쁜 예감은 어긋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차마 아니라고는 말씀 못 드리겠습니다.”
눈앞의 광경이 잠시 일렁거렸다. 한층 멀어진 시야를 느끼고서야 내가 꽤 뒤로 물러섰다는 걸 자각했다. 지나치게 예민해진 청각은 이 순간에도 듣지 않아도 될 것들을 계속 담아내고 있었다.
“솔직하니 오히려 마음에 드는군. 경지에 이르고도 계속 도전을 할 수 있다는 건 축복이지. 나도 응원하겠네. 자네가 어디까지 닿을지 정말 기대가 돼. 원한다면 내가 쓸 만한 검을 선물해주고 싶은데.”
“감사합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제가 쓸 검은 미네르바 님이 준비해주신다고 하셨거든요.”
“이런, 애초에 상대도 되지 않았군. 내 패배를 인정하지.”
공작의 너스레에 주변의 무리가 와르르 웃었다. 미네르바조차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웃을 수가 없었다.
이게 뭐야. 이게 뭐지?
이게 왜 이렇게 되는 거야?
“아, 그러고 보니 오늘 그 정령 검사도 초대했다네.”
“네? 혹시 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가 이 연회에 와 있습니까?”
“그렇네. 아마 어딘가에 있을 텐데.”
세피온 공작의 말에 아인이 급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나를 찾고 있는 거다. 그에 따라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의 간격이 흐트러지며 천천히 공간이 트였다. 여기서 앞으로 나서기만 하면 자연스레 주목을 받을 수 있겠지. 세피온 공작과 정식으로 마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머리로는 분명히 알았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어? 엘, 어디가?”
등 뒤에서 크리스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당혹감이 담겨 있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더 허둥지둥 뛰다시피 했다. 그사이에 공작이나 아인 이드리스가 나를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그들 눈에 내 모습이 달아나는 것처럼 보여도 할 수 없었다. 실제로 달아나는 게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