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494)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494화(494/608)
제494화
“무슨 일 뭐? 세공 좀 당한 거? 그거 얼마든지 치료할 수 있다는 것도 알지 않나? 치밀한 놈이면 그거 하나 감수하지 못할 거 같아?”
“하지만…….”
“막말로 그놈, 수상한 구석이 전혀 없는 것도 아냐. 그간 파견한 첩보원마다 족족 다 죽었다고 했지? 근데 왜 그놈은 죽이지 않고 그냥 살려놨을까? 이상하지 않아?”
솔직히 거기까진 생각해 보지 못했다.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무니 라미아스가 가볍게 코웃음 쳤다.
“순진하게 생각하지 마. 이 바닥에 믿을 놈 하나 없다.”
“…….”
그가 괜히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정보국장으로 지내는 동안 별의별 상황을 다 겪었으니 할 수 있는 말일 거다. 하지만 내가 내린 결정 또한 변하지 않았다.
“그래도 구할래요. 어딨는지만 알려주세요.”
“너도 남의 말 참 안 듣는 성격이구나?”
“그냥 감옥에 갇히기만 하는 거라면 저도 이렇게 나서진 않아요. 하지만 목숨은 하나잖아요. 죽은 후엔 후회해도 되돌릴 수 없으니까요.”
물론 기본적으로 다비안을 신뢰하는 마음이 깔려 있기도 했다. 그날 기차에서 문서를 건네줬을 때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치밀한 계략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거짓으로만 채워진 사람을 트로웰이 도와줬을 리가 없었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라미아스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였다. 심기가 상한 건 이해하지만 왜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하는 표정을 짓는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마음에 들게 굴지 마라. 그래 봤자 후계자로 삼지도 못하는 넌 그냥 엘퀴네스의 계약자일 뿐이야. 내 맞수라고!”
“……매번 이러는 거 좀 지치지 않나요?”
“지쳐? 끈기 없고 약해빠진 인간인 너나 그렇겠지! 난 백 년이고 천 년이고 이럴 수 있어! 엘퀴네스를 향한 내 마음은 언제나 불타는 활화산이라고!”
그래, 오죽하면 엘퀴네스가 소멸하는 순간을 경험하고 싶지 않다고 수면기에 접어들었겠나. 깊게 한숨을 내쉬려니 라미아스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창가였다. 바로 그 앞 의자에 독서 중인(더불어 이 대화에는 조금도 관심 없는) 엘뤼엔이 앉아 있었다.
“알겠어, 엘퀴네스? 난 진심이야! 그러니까 내 레어에도 와줘! 내 레어에서도 책 읽어줘!”
물론 엘뤼엔은 가차 없었다.
“시끄러워.”
“……조용히 할게.”
불타는 진심은 그렇게 맥없이 진화되었다.
“엘퀴네스한테 화산으로 비유하면 참 기껍게 받아들이겠다. 바보 아냐?”
“…….”
한심하게 바라보던 이프리트의 확인 사살이 이어졌다. 잠시간 많은 걸 내려놓은 얼굴로 하늘을 응시하던 라미아스가 지그시 나를 노려보았다. 워낙 익숙하다 보니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지만.
“좋아. 장소 알려줄 테니 그 녀석 구해와. 내가 직접 구할 생각이야 없지만 구해오면 뒤처리 정도는 해줄게. 대놓고 네 정체를 들키지만 마.”
“정말요? 고맙습니다.”
“대신 실익도 좀 얻자. 사람 하나 붙여줄 거니까 그놈이랑 같이 가.”
“누구요?”
아이기스 쪽 사람을 붙여주려는 건가. 의아해져서 바라보니 그가 히죽 웃었다. 그 눈동자에 떠오른 장난기 때문인가. 노려봤을 때보다 더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적은 가까이 두라는 말 알아?”
* * *
그렇게 말했을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해가 저문 시각, 좁고 으슥한 골목길에 나타난 사람을 나는 떨떠름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파란 불빛은 약속된 표시가 분명한데, 그걸 들고 있는 얼굴이 너무 낯익었다.
“엘? 엘, 맞죠?”
……이 망할 놈의 드래곤을 어쩌지.
상대방 역시 날 알아보는 걸 보니 착각이 아니었다. 치미는 한숨을 눌러 삼키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네요, 아인.”
놀란 표정을 짓고 있던 아인 이드리스의 얼굴이 상기됐다.
“설마 제가 만날 사람이 엘이었다니. 전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아이기스 요원이었습니까?”
“아뇨, 그냥 잠깐 서로 협력하는 사이일 뿐이에요. 오히려 저야말로 놀랐어요. 아인도 아이기스 요원은 아니죠? 여긴 무슨 말을 듣고 온 거예요?”
“세피온 공작님이 제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알려준 장소에서 만나는 사람을 도와 테네브레 감옥에 갇혀 있는 한 인물을 구출하면 된다고요. 공작님께는 평소에 신세 진 것들이 많거든요. 아이기스 활동에도 관심이 많았구요.”
아인 이드리스가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 후계자로 점찍었다더니 밑밥을 엄청 깔아두긴 한 모양이다. 이리저리 바쁘게 굴릴 거라던 게 이런 거였나. 한숨이 다시 나오려고 해서 억지로 삼켰다. 다들 내가 예지를 막아보려 한다고 알고 있으니 대놓고 엮이기 싫다고 할 수도 없고. 어찌 됐든 내가 만든 내 업보였다.
“나인 줄은 어떻게 알았어요?”
“네?”
“설마 바로 알아볼 줄 몰랐어요. 지금 마도구를 착용하고 있거든요.”
감옥에 잠입해야 하다 보니 이프리트한테 다시 빌린 참이었다. 그런데 또 한 번에 알아보다니, 이번엔 솔직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인 이드리스는 별거 아니라는 얼굴로 답했다.
“외형이 아니라 기운으로 알아본 겁니다. 사람마다 고유의 기세라고 해야 할지, 정확히 말하면 호흡하는 공기의 흐름이 각자 다르거든요. 그런 건 마도구로도 잘 가려지지 않죠.”
“와, 바람의 정령사답네요.”
솔직히 말하면 아무리 바람의 정령사라도 그런 세밀한 부분까지 감지하는 일은 드물다. 미네르바와 계약한 사람답게 타고난 재능 자체는 굉장하긴 했다. 순수하게 감탄하니 눈을 조금 크게 뜬 그가 수줍게 웃었다. 귀에 박히도록 받아본 칭찬일 텐데 쑥스러워하는 모습이 나쁘게 보이진 않았다.
“……일단 갈까요.”
“예!”
앞서 걷기 시작한 나를 따라 아인 이드리스가 얼른 걸음을 옮겼다. 가는 동안 구출 계획을 짰는데, 다행히 라미아스가 다비안의 정보를 대충 알려준 덕분에 내가 따로 설명해야 할 건 별로 없었다.
외성을 빠져나가 한참을 걸어가니 투박하게 쌓아 올린 삭막한 건물 하나가 보였다. 다비안이 갇혀 있는 테네브레 감옥이었다. 지옥이란 뜻을 지닌 테네브레 감옥은 사형수나 종신형을 받은 죄수만 수감되는 흉악범 전용 감옥이었다.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지 못하는 영원의 감옥으로도 유명했다. 그만큼 경비가 삼엄했지만 사람이 오가는 곳이다 보니 파고들 틈새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경비대의 교대시간이 있는 새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가 시큐엘을 불러내 먹구름을 일으키게 했다. 하늘이 완전히 캄캄해지는 틈을 타 이번엔 아인 이드리스가 진을 불러냈다. 우리를 양쪽 어깨에 태운 진이 빠른 속도로 하늘로 떠올라 꼭대기에 있는 작은 문 앞에 내려주었다. 지붕을 오가기 위해 만들어둔 문 같았다. 벽에 바짝 붙어 안을 살피니 희미한 불빛이 비치는 복도가 보였다. 아직 순찰하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문제는 내부가 생각보다 너무 넓은 데다가, 두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는 점이었다.
“각자 구역을 나눠서 탐색할까요? 여기서 정령을 풀어서 훑어보죠. 제가 왼쪽을 맡을 테니 아인이 오른쪽을 맡아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아인 이드리스가 아직 돌려보내지 않은 진을 향해 손짓했다. 설마 그대로 진입하게 하려는 건 아니겠지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럴 생각인 것 같다. 당황해서 붙잡으니 동그랗게 떠진 눈이 나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정찰하는 거 처음이에요?”
아인 이드리스가 머쓱한 얼굴을 했다. 역시 처음이었구나. 하긴 정령왕의 계약자 정도 되면 보통 전투 전면에 서지 정찰을 맡을 일은 별로 없긴 할 거다. 전쟁이 있는 시기도 아니고 전투에 나서는 것도 몬스터 토벌이 대부분일 테니까. 좁고 한정된 공간에서 정령을 활용할 일은 거의 없었겠지.
“상급 정령은 덩치도 크고 존재감도 강해서 건물 내부를 정탐하기엔 별로 적합하지 않아요. 여기선 실프를 보내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하지만 실프는 탐색 범위가 너무 좁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요.”
“그만큼 많이 소환하면 되죠. 최대한 넓게 퍼트리면 괜찮을 거예요.”
“아아, 그것도 좋은 방법이네요.”
하지만 수긍한 것과는 달리 그는 여전히 머뭇거리는 기색이었다. 의아해져서 바라보니 바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가 실프를 소환하려는 걸 보고 나 역시 정령을 소환했다.
“나이아스 소환.”
열 마리의 나이아스가 공중에서 포포퐁 튀어나왔다. 요정처럼 작은 인어의 모습을 한 정령들이 눈을 반짝이며 내 주위를 감쌌다. 무슨 부탁을 할지 궁금하다는 듯 기대감을 잔뜩 보이는 얼굴들에 웃음이 나왔다.
“안에 들어가서 사람 하나 찾아줄래? 이십 대 남자고, 검은 머리칼에 보라색 눈동자야.”
고개를 끄덕인 나이아스 무리가 안쪽을 향해 와르르 퍼져나갔다.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니 아인 이드리스가 어딘지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어색하게 웃었다.
“엘은 정령을 굉장히 쉽게 소환하는군요.”
무슨 말인가 했더니 그는 아직 정령 소환을 다 끝내지 못한 상태였다. 그의 주변을 감도는 바람을 타고 실프가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빠른 편이긴 하지만, 그 역시 다수를 한 번에 소환하는 것엔 별로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곧 열 마리의 소환을 마친 아인 이드리스가 민망해하며 정찰을 지시했다.
그래도 바람의 정령이 더 빠르긴 해서, 더 늦게 시작했는데도 먼저 돌아온 건 실프들이었다. 밝은 얼굴로 맞이하는 아인 이드리스에게 부지런히 달려온 정령들이 이것저것 떠들었다. 겹치는 인상착의를 몇 명 발견한 모양인데, 우리가 찾는 사람인지는 확실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일이 쉽게 풀리진 않으려나 보다. 아인 이드리스 역시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단 파악한 사람들 위치만이라도 짚어달라고 해요. 수색 범위가 좁혀지기만 해도 한결 나을 테니까요.”
그 순간 그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요?”
“……실프들이 하는 말을 이해한 겁니까?”
아, 그게 이상했던 거구나. 소환된 중하급 정령들은 음성으로 소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각자 고유의 방식으로 의사를 전달한다. 계약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구조인데, 물의 정령사가 바람의 의사를 파악하니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냥 대강 보는 수준이에요. 실프는 나이아스랑 전달 방식이 비슷하더라고요.”
물론 마음만 먹으면 그냥도 들을 수 있긴 하지만. 이건 밝혀봤자 나만 곤란해지는 부분이라 내색하지 않았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알아보는 건 사실이기도 하고. 실프와 나이아스는 서로 크기와 외모가 비슷해서 그런지 유독 친한 편인데, 그래선지 비슷하게 행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친구끼리 닮는다는 건 정령에게도 해당하는 말인 것 같았다.
아인 이드리스는 잠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딘지 굳어진 듯한 얼굴에 의아해하는데 마침 나이아스 무리도 정찰을 마치고 돌아와서 자연스레 시선이 전환됐다.
“왔구나, 어땠어?”
나이아스들이 바쁘게 두 팔을 움직였다. 전달하는 내용은 실프들이 알려온 것과 그리 큰 차이가 없었다.
“검은 머리에 보라색 눈동자가 그렇게 흔한 조합이야? 왜 그렇게 많아?”
“아, 어두워서 색이 잘 구분이 안 가? 그럼 결국 그냥 가장 어두운 머리 색을 가진 남자 성별만 골라낸 거구나? 음, 할 수 없지. 머리 기장은 다들 어땠어? 긴 머리는 둘? 그 사람들은 어느 쪽에 있어?”
나이아스들이 부지런히 위치를 짚었다. 대략적인 약도를 가늠해보니 역시나 꽤 헤매야 할 모양이었다. 한숨을 내쉬고 아인 이드리스에게 시선을 보냈다.
“거긴 후보가 몇이에요?”
“아…… 셋인 것 같습니다.”
“이것도 따로 움직일까요?”
그 말에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아인 이드리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같이 다녀서 찾는 것보다는 이게 더 낫겠지. 가볍게 결론이 내려졌다.
“찾으면 정령을 보내주는 거로 해요. 혹시 문제가 생기면 탈출을 최우선으로 하고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조심해요.”
짧게 눈인사를 마친 아인 이드리스가 얼굴에 복면을 썼다. 직후 나와 그는 각자 맡은 길로 들어갔다. 은은한 불빛이 흐르는 복도는 고요하고 음침했다. 벽에는 굳게 닫힌 철문이 줄줄이 늘어져 있었다. 나이아스의 설명에 의하면 전부 독방이고, 작은 창문조차 존재하지 않는 밀폐된 공간이었다. 뚫려 있는 부분이라곤 간수가 안쪽을 살피기 위해 철문에 내어둔 가느다란 틈과 맨 아래 식사를 넣는 구멍뿐이었다. 아무리 감옥이라지만 이렇게 척박한 환경이라니. 사형이 내일이라 구출을 서두르게 된 게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다. 이런 곳에선 건강한 사람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게 분명했다.
몇 차례 순찰 중인 경비대와 마주칠 뻔한 위기가 있었지만 다행히 걸리진 않은 채로 무사히 내부를 살폈다. 가장 유력한 사람 둘 외에도 혹시 머리 모양이 달라졌을 경우를 대비해 일단 짚어준 곳은 다 돌아본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다비안은 찾을 수 없었다.
‘아인 쪽에 있는 건가.’
아직 그쪽에서도 별다른 신호는 오지 않았다. 설마 전혀 다른 장소에 있는 건 아니겠지. 내일 오전 집행이니 미리 옮겼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긴 했다.
그 순간 갑자기 주위가 환해지더니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급히 복도 옆으로 몸을 숨기자 곧 전등을 든 병사들이 우르르 스쳐 지나갔다. 멀리서 침입자가 있다는 고함이 들려왔다.
‘뭐지? 들킨 건가?’
병사들이 달려가는 방향을 봐선 아무래도 아인이 발각된 모양이다. 벽에 바짝 몸을 밀착하고 어두운 쪽으로 몸을 좀 더 깊이 숨겼다. 일단 여길 빠져나가서 아인과 합류해야 할 듯했다. 문제가 생기면 탈출하기로 했는데 벌써 잡혔으면 어쩌지? 상황을 살피기 위해 고개를 조금 내밀어 볼 때였다. 누군가가 등 뒤에서 내 어깨를 툭 쳤다.
“……!”
깜짝 놀라 돌아서기 무섭게 다시 숨을 삼켰다. 눈앞에 달빛처럼 새하얀 사람이 서 있었다. 미네르바였다. 반사적으로 입부터 틀어막으니 미네르바가 손을 뻗어 가볍게 주위를 훑었다. 그러자 주위의 공기가 가볍게 진동하며 무언가에 감싸지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멍하니 바라보는 나를 향해 차분한 시선이 떨어졌다.
“들키지 않을 테니 편히 말해도 된다.”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지만 선뜻 입이 떨어지진 않았다. 놀란 심장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어떻게…….”
왜 미네르바가 여기에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