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497)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497화(497/608)
제497화
“아니, 나는, 그게…… 일부러 시비를 걸려고 했던 건 아니고…… 내 나름대로는 잘 지내보려 했거든? 근데 나도 모르게 좀 욱해버려서…….”
“하하, 왜 그렇게 쩔쩔매. 정말 잘했다니까? 속 시원하고 너무 좋던데?”
횡설수설 변명하려니 이프리트가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트로웰과 엘뤼엔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냥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경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신기해하는 것 같기도 한데, 그게 어떤 감정에서 기인한 건지 알 수가 없어 불안했다.
“일단 들어가지.”
엘뤼엔의 말이 이어졌고, 우리는 곧 숙소로 이동했다. 좁은 실내로 들어서니 바깥에 있을 때보다 더 긴장됐다. 갈증이 일어서 물이라도 마시려는데 때마침 식탁 위에 물컵이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아무 생각 없이 들고 마셨을 때였다.
“헉! 엘, 그거……!”
기겁한 이프리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알코올 냄새가 코를 훅 찔렀다. 물에서는 결코 날 수 없는 냄새였다. 헐, 이거 술이었어? 왜 술이 여기에 있지? 당황해서 눈을 깜빡이니 황당해하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모두의 얼굴이 보였다.
“어, 나…….”
갑자기 눈앞이 흐릿해지더니 시야가 빠르게 전환됐다. 균형을 잃었다는 건 조금 늦게 자각했다.
“엘!”
누군가 내 몸을 강하게 붙드는 게 느껴졌다.
그 뒤로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 * *
최근 트로웰은 두 가지 꿈을 자주 꿨다. 같은 시점, 같은 장소인데 펼쳐진 상황은 각자 다른 꿈이었다.
앞선 꿈은 그가 지극히 잘 알고 있는 미래였다. 미네르바가 헌신한 연인에게 배신당하고 지독한 절망에 빠지는 광경. 텅 비어 버린 바람은 스스로 소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허무하게 흩어져 결코 막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른 꿈은 정확히 그 반대였다. 그 꿈에서 미네르바는 아무 일 없이 여전히 행복했다. 그의 인간 연인은 타락하지도, 비틀리지도 않은 채로 끊임없이 미네르바를 은애하며 존경했다.
“봐, 트로웰.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
미네르바가 그렇게 말하며 웃는 것이 그 꿈의 마지막 광경이었다.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고 여러 갈래로 얽혀 있다. 그가 혜안으로 볼 수 있는 건 그중에서 가장 선명한 갈래였다. 무리해서 깊이 들어가면 좀 더 많은 갈래를 볼 수도 있긴 했다. 하지만 미네르바와 관련된 일에서만큼은 다른 갈래를 보았던 적이 없었다.
꿈은 그저 꿈일 뿐. 무의식을 통한 것이라 혜안과 연결된 것인지조차 불분명했다. 하지만 이 꿈들이 시작된 시점은 명확히 알고 있었다. 엘을 만나고 난 이후부터였다. 그가 상황을 바꿔보겠냐는 자신의 제안에 응했을 때부터.
뻔히 안 될 걸 알면서도 지켜보는 건 그래서였다. 그 마지막 광경에서 보는 미네르바의 웃는 얼굴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엘을 곁에 두는 동안엔 그 꿈은 계속 이어질 거고,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엘은 포기하거나 약한 소리를 해선 안 됐다. 하지만 이번에 불쾌한 감정이 들었던 건 조금 다른 이유였다.
겁먹은 듯, 시선을 맞추지 못하는 모습이 이상하리만치 거슬렸다. 자신감을 잃은 그가 눈치를 보는 건 당연한 일이고, 그게 아니라도 인간은 원래 정령왕을 두려워하는 것이 맞을 텐데도.
그 이유를 되짚어 보기 위해 트로웰은 한동안 엘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아인 이드리스에게 충고하는 그를 보고 나니 갑자기 모든 것들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조금쯤은 엘의 입을 통해 그가 지닌 생각을 들어보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게 전혀 엉뚱한 방식으로 방해받을 줄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엘!”
긴장했는지 두리번거리던 엘이 갑자기 술을 삼키고 그대로 쓰러졌다. 순간적으로 얼굴에 당황이 스친 걸 보니 본인도 술인 줄 몰랐던 게 분명했다. 뒤로 넘어가는 걸 아슬아슬하게 받아낸 엘퀴네스가 그를 자리에 앉힌 다음 상태를 살폈다.
“으아, 미안. 내가 왜 주저앉았지?”
다행히 기절한 건 아닌지 의식은 있었다. 말하는 목소리도 멀쩡했다. 다만 어딘지 풀어진 듯한 표정이었고, 눈빛이 조금 멍했다.
“엘. 엘?”
“응.”
“너 괜찮은 거야?”
“응응, 괜찮아.”
“이게 몇 개야?”
“네 개!”
당당한 대답이 일말의 고민도 없이 이어졌다. 트로웰이 그 앞에 펼쳐 보인 손가락 두 개를 돌아보았다. 이건 틀렸군,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정령왕들이 동시에 생각했다.
“누가 술을 가져다 놨어?”
어색하게 웃은 이프리트가 얌전히 손을 들어 자수했다. 쏟아지는 경멸의 시선에 그는 난처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향이 좋아서 따라놨는데 도련님이 물로 착각했나 봐.”
“무슨 술인데 애가 맥을 못 추고 한 모금에 뻗어?”
물의 자질을 지닌 이들은 자정 능력을 타고나는 편이라 독에도 강한 게 보통이었다. 그리고 트로웰은 엘만큼 물의 자질을 타고난 인간을 보지 못했다. 지금까지 아무도 소환하지 못한 엘퀴네스와 처음으로 계약한 인간이었다. 그 정도면 어지간해선 취하지 않는 게 정상이었다.
“천년주야. 이번에 라미아스가 부탁한 게 있었는데, 그 대가로 받은 거야.”
하지만 평범한 술이 아니라면 얘기가 달라지긴 했다. 트로웰은 가볍게 혀를 찼다. 블루 드래곤 일족의 비전으로 만들어지는 천년주는 심해 깊은 곳에 고이는 특별한 물로만 만들어진다. 천 년이 되어야만 한 병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천년주라 불리며, 특유의 향과 풍미가 좋아 부르는 게 값인 술 중 하나였다. 다만 드래곤에 맞춰져 있다 보니 희석하지 않은 원액은 인간에겐 독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연하겠지만 이프리트가 마시려고 놔둔 술이 희석된 상태일 리가 없었다. 마신 이가 엘이 아닌 다른 인간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지도 몰랐다.
“아니, 난 설마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몰랐지. 미안. 애가 있는 공간인데 내가 너무 방심했어.”
다시금 경멸의 시선이 쏟아지는 걸 이프리트는 묵묵히 감수했다. 그동안 몸을 일으킨 엘은 주위를 연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서랍을 열었다 뺐다 하는 모습이 무언가를 찾는 모양새였다.
“도련님, 뭘 찾아?”
“……없어.”
“뭐가 없어?”
“마스크 팩.”
“응? 마스……뭐?”
처음 듣는 용어에 정령왕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엘이 횡설수설 설명을 시작했다.
“그게 뭐냐면. 얼굴에 붙이는 건데. 눈이랑 입에 구멍이 뚫렸고. 얇은 천 같은 거로 된 축축한 가면인데. 그거 얼굴에 붙여야 하는데.”
“그걸 왜 붙이는데?”
“왜냐면. 뺨에 불이 났거든. 얼른 꺼야 해.”
정령왕들의 시선이 엘의 얼굴에 닿았다. 과연 술기운에 열이 올라서인지 두 뺨이 발그레했다. 이프리트는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꾹 참고 말했다.
“차가운 거로 식히려는 거구나? 굳이 따로 찾을 게 뭐 있어. 엘퀴네스한테 식혀달라고 하면 되잖아.”
“아, 그렇구나!”
깨달음을 얻은 녹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리곤 누가 말릴 겨를도 없이 엘퀴네스에게 다가서더니 그의 손을 덥썩 붙잡고 자신의 두 뺨에 가져다 댔다.
“헤헤, 시원하다.”
“…….”
더는 참지 못한 이프리트가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혀를 찬 엘퀴네스는 정신을 못 차리는 계약자를 해독하려 했다. 그걸 알아차린 이프리트가 급히 말렸다.
“아니, 엘퀴네스. 그냥 둬보자.”
“뭐?”
“보기 드문 모습인데 귀엽잖아. 이참에 술버릇이나 알아보자고. 천년주가 신주나 특제주만큼 대단한 효능이 있는 건 아니라도 나름 약주라서 인간한텐 도움이 될 거야. 지금 치유하면 약효까지 전부 사라질 텐데 아깝지 않겠어?”
가차 없이 가늘어지던 눈동자가 마지막 말에 누그러졌다. 뻔히 돌아갈 상황을 짐작한 트로웰이 몸을 일으켰다.
“마음대로들 해. 난 남의 술버릇엔 관심이 없어서.”
“가려고?”
“이런 상태에서 무슨 대화를 하겠어.”
그러나 트로웰은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안 돼!” 비명처럼 외친 엘이 몸을 던지다시피 그의 다리에 매달렸기 때문이었다. 이프리트는 자기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었다. 저렇게 당황한 표정을 한 트로웰을 보는 건 처음인 것 같았다.
“뭐하는 거야?”
“가지 마!”
“…….”
“또 가서 안 돌아오려는 거지! 그거 싫어! 가면 안 돼, 트로웰. 가지 마, 응?”
“가지 말라는데?”
한숨을 내쉰 트로웰이 웃고 있는 이프리트를 노려보았다. 엘은 다른 팔을 뻗어 엘퀴네스의 다리도 끌어안았다.
“아버지도 가지 마!”
“……놔라.”
“싫어!”
“안 갈 테니 놔.”
“진짜지? 진짜 안 갈 거지?”
“그래.”
“거짓말! 갈 거잖아! 안 놓을래!”
“…….”
엘퀴네스의 얼굴이 살벌해졌다. 눈빛만으로 죽일 수 있다면 엘은 진작 죽은 목숨일 터였다. 그러면서도 걷어차지는 않고 가만히 있는 게 이프리트는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트로웰이나 엘퀴네스나 주정뱅이라고 봐주는 성격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가차 없다면 모를까. 세상 다시 없을 성격 파탄자들이 오늘따라 모르는 정령처럼 굴고 있었다. 결국 씩씩거리는 엘을 어르고 달래서 떼어낸 건 이프리트의 역할이었다.
“술 취하니까 아주 용감해지네, 도련님.”
“응!”
“근데 도련님, 왜 엘퀴네스를 아버지라고 불러?”
“아버지니까!”
이프리트가 충격에 빠진 얼굴로 엘퀴네스를 돌아보았다. 미간을 찌푸린 엘퀴네스가 그런 그를 발로 걷어차 쓰러트렸다.
“아이고! 애 아버지가 남을 막 폭행한다! 동네 사람드을!”
“닥쳐.”
살벌한 시선이 내리꽂혔다. 하지만 옷 끝을 건드는 감촉이 그 시선을 곧 흐트러트렸다.
“아버지.”
엘이 멍한 표정으로 그의 옷자락을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그렇게 부르는 건 그만둔 거 아니었나?”
“안 그만뒀는데.”
“하지만 너 그동안…….”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뭐?”
“전에,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랬잖아.”
엘퀴네스는 어렵지 않게 무슨 말인지 알아차렸다. 그렇게 말했던 적이 분명히 있었다. 드물게 손과 발이 묶인 동안 엘이 위험에 처했던, 지금 다시 생각해도 불쾌하기 그지없던 상황이었다. 한눈에도 고초를 겪은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신경이 곤두섰는데, 아들이라 생각하면 분노를 자제할 수 없을 것 같아 부르는 걸 그만두게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야유하는 이프리트를 다시금 걷어차 주곤 그는 낮게 혀를 찼다.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내 말을 잘 따랐는지 모르겠군.”
그의 인간 계약자는 맹랑하다 못해 겁을 상실한 성격이었다. 어떻게 된 심장을 가진 건지 정령왕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데다가 뜻을 멋대로 해석하는 취미도 있었다. 허락도 없이 고집하던 호칭이니 그만두라 해도 당연히 무시할 거라 생각했다. 오히려 곧이곧대로 듣고 순순히 따른 게 더 이해되지 않았다. 이유를 물어보려던 엘퀴네스는 다음 순간 멈칫했다. 엘의 두 눈에서 구슬 같은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리고 있었다.
“너…….”
“아버지가 부르지 말라고 하면, 난 그렇게 부를 수 없어.”
“…….”
“근데 아버지잖아. 왜 아버지라고 부르면 안 돼?”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얼굴에 서러움과 원망이 스몄다. 마치 줬던 걸 다시 빼앗아갔다는 듯한 표정이라 엘퀴네스는 잠시 당황했다. 살짝 한숨을 내쉰 후 그는 몸을 굽히고 엘과 시선을 맞췄다.
“너야말로. 왜 내게서 친부를 찾는 거지?”
이전에 했던 것과 연결되는 질문이었다. 엘은 감추고 있는 것들이 많았다. 누가 봐도 수상한 행보를 보면 과거의 일들이나 성장 배경이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단지 스스로 밝히지 않는 걸 캐묻는 것도 내키지 않았을 뿐.
하지만 지난 일 이후로 그는 한 가지를 의심하게 됐다. 아버지라 부르면서도 대리인처럼 여기지는 않던 엘이 처음으로 그자와 자신을 겹쳐보았던 날. 그때 엘이 아버지를 부르는 음성은 명백히 공포에 잠겨 있었다. 그 부분만 봐도 충분했다. 엘은 화목한 가정에서 성장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렇게 부친을 두려워하면서 어째서 자신을 아버지라 불렀는지.
“친부?”
“죽은 친부가 나와 닮았다고 했었지.”
“죽은 친부? 죽은 친부…….”
“네 육친 말이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이던 엘이 그 말에 아, 하고 탄성을 터트렸다. 그리곤 곧 허탈하게 웃었다.
“그 사람이랑 하나도 안 닮았는데.”
“닮지 않았다고?”
“안 닮았어. 진짜 하나도 안 닮았어. 요만큼도 닮은 구석이 없어. 외모도 성격도 전부.”
엘퀴네스는 다시금 얼굴을 찌푸렸다. 용모가 닮았다는 주장이 허무맹랑한 거짓말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성격이나 말투에서 비슷한 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조차 아니었다.
“그럼 왜 날 아버지라고 부른 거지?”
“아버지니까.”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질문에 여전히 뜻 모를 대답이 이어졌다. 말장난으로 판단한 엘퀴네스의 눈빛에 차가운 그늘이 졌다. 왜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눈을 멀뚱거리던 엘이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아버지.”
그다음으로 가리킨 건 트로웰이었다.
“형.”
이어진 호칭에 트로웰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재밌다는 얼굴로 지켜보던 이프리트가 냉큼 끼어들었다.
“엘퀴네스는 아버지고 트로웰은 형이야? 그럼 난?”
“이프리트는…… 누나여야 하는데. 남성체네?”
“응, 남성체지.”
“그럼…… 삼촌?”
“푸하하! 난 삼촌이야?”
아주 마음에 들어 한 이프리트가 박장대소했다. 뿌듯한 얼굴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며 엘퀴네스는 나직하게 혀를 찼다. 처음부터 술 취한 사람과 진지하게 대화하려던 게 잘못이었다.
“가족놀이 할 나이는 지나지 않았나?”
우스워지는 상황이 불쾌한 탓에 내뱉는 말도 냉정해졌다. 다시 몸을 일으키려는데 엘이 곧바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화난 표정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놀이 아니야. 진짜 내 가족이야.”
“네게 아버지와 형제는 원하는 대로 갖다 붙이는 개념인가 보군.”
“아니거든! 당신들밖에 없거든!”
“전에 말한 형제들은?”
“당연히 그것도 당신들을 말한 거지! 트로웰이랑 이프리트랑 미네르바!”
정곡을 찌르기 위해 건넨 말이 전혀 생각지 못한 답변으로 돌아오자 엘퀴네스는 멈칫했다. 트로웰과 이프리트 역시 당황한 얼굴로 눈을 깜빡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