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501)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501화(501/608)
제501화
이후의 일은 기억나는 게 거의 없었다. 반쯤 넋을 잃은 동안 나머지 일들이 알아서 척척 진행됐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숙소에 돌아와 있었다. 그나마 떠오르는 건 다비안과 얼마간 대화를 나누며 그가 겪은 일들에 대해 들었다는 것, 그리고 마신전 잠입이 나흘 후로 정해졌다는 정도였다.
……내게 남은 삶의 기한이 고작 나흘이라는 소리다. 당장 다음날부터 특별대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된 건 좋았지만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일단 이렇게 된 거, 원만하게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을지 방법부터 한번 모색해보기로 했다.
첫 번째, 엘뤼엔한테 도움을 청한다.
“나 가짜 문장 갖고 있어서 마신전에 가면 죽을지도 몰라. 어떡하지?”
“문장을 지우면 되잖아.”
“이거 술법으로 새긴 거라 안 지워져.”
“내가 살펴보지. 손을 내봐라.”
그리고 문장이 진짜라는 걸 들키고 그대로 망한다. 음, 이건 안 되겠군. 통과.
이어서 두 번째, 트로웰에게 문장을 가려주는 크림을 빌린다.
“이걸로 문장을 가리면 신에게도 안 보일까?”
“지금 시야만 속이는 얄팍한 수법이 신에게도 통하는지를 묻는 거야?”
……역시 시작부터 장렬하게 실패한다. 이것도 통과.
세 번째, 이프리트한테 묘안을 부탁해 본다.
“때론 자수하는 게 가장 좋은 해결책이지. 그냥 엘퀴네스랑 같이 들어가. 그리고 들어가자마자 싹싹 빌어. 그럼 정령왕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죽이진 않을 거야.”
두고 볼 것도 없이 그냥 통과.
“……다 망했네.”
벤치에 등을 기대고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광장에서 바라보는 하늘이 오늘따라 유난히 상쾌해서 마음이 더 착잡했다. 애초에 신의 문장이 진짜인 게 문제다. 뭘 해도 들키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마지막 방법이 하나 남아 있긴 하지만 이건 내가 내키지 않아서 차마 구상도 해보지 못하겠다.
‘아무리 그래도 미네르바한테 부탁은 못 하지.’
바람의 왕 고유 능력인 은신의 장막이라면 신의 문장도 완벽하게 가릴 수 있긴 할 거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방법이라도 시도하지 못하는 바에야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염치는 버릴 수 있어도 양심은 외면하지 못하겠다. 갈 곳 없는 한숨만 다시 푹푹 쏟아져나왔다.
아니,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말자. 어쩌면 별일이 안 생길 수도 있잖아. 마신전 안이라도 기도실까지만 들어가지 않으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의외로 카노스가 내 정체를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냥 신관이면서 정령사가 된 최초의 사례라면서 신기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내게 문장을 내린 기억이 없는 것도 별반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몰랐다. 신관이 그렇게나 많은데 한두 명 정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지.
‘……그 카노스가 그럴 리가 없지만.’
헛된 기대는 도대체 왜 품었던가. 희미하게 차오르던 희망이 다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마주치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다행히 시벨리우스한테 들었던 상황이 아직 다 벌어지진 않았다. 이 위기도 어떻게든 모면하긴 했단 소리다. 대체 내가 뭘 했던 걸까. 정말 염치도 양심도 버리고 미네르바를 찾아가기라도 한 건가? 그게 아니면 그냥 라피스는 다른 곳부터 찾기로 하고 제국에서 튀었나? 둘 중에 뭘 해야 좋을지 누가 정답을 좀 알려줬으면 좋겠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도 아니고. 왜 내가 한 일을 내가 추리하고 있어야 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쿠웅!
하늘이 진동하듯 울린 건 그때쯤이었다. 깜짝 놀라 몸을 바로 세우니 멀찍이서 소란이 이는 게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파랗기만 하던 하늘이 어느새 어두침침했다. 또 균열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평소대로라면 지금이 딱 근무 시간대였다. 어제 이후로 잠잠해지려나 했더니 하루뿐인 평화였던 모양이다.
‘가서 도와야 하나?’
반사적으로 현장을 향하려던 걸음을 멈췄다. 일단 나는 오늘부터 다른 임무에 차출되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여기서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던 게 걸리면 여러모로 곤란해질지도 몰랐다.
할 수 없이 반대 방향 쪽으로 몸을 틀었다. 최대한 빠르게 걸어 골목 쪽으로 들어서는데 곧 주변으로 소동을 피해 달아나온 사람들이 밀어닥쳤다.
“또 마수야?”
“어젠 아무 일 없이 지나가길래 이제 다 끝난 줄 알았더니.”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해?”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얼굴은 불안과 혼란으로 가득했다. 현대로 치면 매일 재해가 일어나는 것과 진배없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특별대가 빠르게 수습한다 해도 이런 일상이 달가울 리는 없었다. 그 사이에서 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 건 말 그대로 우연이었다.
‘……어?’
순간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눈을 비볐다. 멀찍이서 후드를 깊게 눌러쓴 사람이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었다. 얼굴은 가려져 있었지만 익숙한 복장이라 누군지는 한눈에 알아봤다. 아이라였다. 인어일 가능성이 높은 자들에게 쫓겨 다녔던, 어쩌면 마신관일지도 모르는 사람.
다시 보는 건 그날 간발의 차로 놓쳤던 이후로 처음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는 오늘도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들키지 않게 조심하며 뒤를 밟는 동안 인적 없이 한적한 곳에 이르렀다. 어디까지 가려는 건가 싶은데 곧 맞은편에서 한 사람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동료인 듯, 숨을 몰아쉬는 상대를 향해 아이라가 급히 다가섰다.
“찾았어, 미엘?”
“아니, 또 놓친 것 같아.”
“젠장, 어떻게 매번 이리 빈번히…….”
이를 악문 아이라가 낮게 탄식했다. 목소리를 들으니 역시 그가 맞다는 확신이 더해졌다. 더불어 뭔가를 찾고 있는 것도 맞는 모양이다. 두 번 다 균열이 발생할 때 마주친 건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기는 어렵겠지. 어쨌든 이번엔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했다. 어쩌면 마신전에 들어가지 않아도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게 될지도 몰랐다.
“엘 아냐?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
그런데 막 걸음을 내딛으려는 순간 등 뒤에서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었다. 기척을 내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있었던 만큼, 급작스레 끼어든 소리가 더 선명하게 울렸다. 깜짝 놀란 아이라가 얼른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바닥으로 던졌다. 그러자 파란 마법진이 생기더니 두 사람의 모습이 순식간에 빛 속으로 삼켜졌다.
“앗, 잠깐만요!”
당황해서 급히 소리쳤으나 이미 두 사람의 모습은 홀연히 사라진 후였다. 공간이동 마법 장치인가? 이러면 정령을 보내 추격할 수도 없잖아. 망연자실한 마음으로 아무도 없는 허공을 훑고 있자니 머뭇거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미안하다. 우연히 만난 게 반가워서 말을 걸었던 건데…… 혹시 일을 방해한 거야?”
방해하긴 했지. 그것도 정말 뼈아픈 방해였다. 한숨과 함께 몸을 돌리니 난처한 표정으로 서 있는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시몬과 네브였다.
“괜찮아요. 그보다 오랜만이네요.”
“그러게, 진짜 오랜만이다. 안 그래도 균열이 생겼다고 들어서 너도 근처에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정말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 특별대 임무 중이었던 거야?”
“뭐, 비슷해요. 두 사람은요?”
“우린 그냥 지나던 길이었어.”
“그렇구나.”
인적이 드문 길을 우연히 지나가던 사람들이 때마침 그곳에 있던 날 발견하고 또 하필 그 시점에서 내게 말을 걸 확률이 얼마나 될지를 구하시오(10).
머릿속에서 이상한 주관식이 그려졌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 놓쳤을 때도 비슷한 상황 아니었나? 그 당시에 나와 마주쳤던 것도 이 사람들이었다. 빙긋 웃으니 두 사람도 같이 따라 웃었다. 늘 쓰고 다니는 후드가 오늘처럼 의식되는 건 처음인 것 같았다.
“난 어떻게 알아봤어요?”
“응? 어, 사실 난 몰랐어. 그런데 네브가 너 아니냐고 해서…….”
그렇군, 네브란 말이지. 시선을 보내니 그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러고 보니 전에 부딪힌 사람도 그였던가. 그땐 너무 자연스러워서 위화감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물론 느꼈다 해도 의심하지는 못했겠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길드 창설 멤버들이었다. 단아하고 잔잔한 성격이라 특히 편하게 여겼던 사람이었고. 그래서 더 기가 찼다. 그래, 내가 뒤통수를 자주 맞기는 한다. 그런데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당신 뭐야?”
두 사람이 동시에 움찔했다.
“엘, 역시 우리가 중요한 일을 방해한 거였군요. 미안합니다. 체형이 닮은 것 같아서 설마 했었던 것뿐인데,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미안해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네브가 연신 사과를 건넸다. 호감을 사기 쉬운 온순한 인상은 살짝 찌푸려지는 것만으로도 애처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하지만 한번 의식하고 나니 이제 더는 그 모습이 예전처럼 부드럽게만 보이지는 않았다.
“확인할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죠.”
그 순간 흠칫한 네브가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창백해진 그의 얼굴 아래 내가 겨눈 검 끝이 아슬아슬하게 멈춰 섰다. 꿀꺽, 뻣뻣하게 굳은 네브가 목울대를 울렸다.
“에, 엘! 너 지금 뭐하는 거야?”
한발 늦게 상황을 깨달은 시몬이 경악해서 소리쳤다. 혼란한 시선이 닿았지만 네브를 겨눈 검을 물리진 않았다.
“이걸 피하네. 마수의 발톱도 못 피해서 죽을 뻔했던 사람은 어디 갔어요?”
그 말에 시몬이 당황한 얼굴로 네브를 바라보았다. 네브는 동기인 세 사람 중에서 가장 실력이 떨어졌다. 헌터 생활도 늦게 시작한 데다가 훈련을 성실히 하는 편도 아니라 늘 그만그만한 상태를 유지 중이었다. 시몬이 알아차리지도 못한 공격을 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네브, 너…….”
시몬이 신음을 흘리자 그가 곤란하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더는 피할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다시 나를 보는 얼굴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대단한데요. 설마 진심으로 공격할 줄은 몰랐어요. 적당히 시늉만 하는 거였으면 일부러 베였을 텐데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피했잖아요. 이래도 괜찮은 거예요? 만약 아니었으면 어쩌려고.”
“아닐 리가 없죠. 자랑은 아니지만 내가 이런 류의 감은 틀린 적이 없거든요.”
“충분히 자랑할 만한데요. 이렇게 빨리 깨닫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보통은 아무리 수상해도 내가 예민한 거겠거니 넘기기 마련인데 말이죠.”
“아는 사람이 이런 장난을 좋아해서요. 덕분에 수상하면 의심부터 하고 보는 사람으로 성장했죠.”
“하하, 바람직한 스승을 뒀네요. 내게도 그런 스승이 있어서 그런지 반가운데요?”
가벼운 말투와는 달리 네브의 눈빛은 위험하게 빛나고 있었다. 빠르게 닿는 기운을 피해 급히 고개를 튼 다음 거리를 벌렸다. 어느새 그의 손에 검이 쥐어져 있었다. 자루부터 날까지 짙은 먹색을 띤 검에서 익숙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마기였다.
‘마검.’
게다가 상당히 강한 마검이었다. 저렇게 짙은 마기가 실린 검은 평범한 사람은 건드리지도 못한다. 적어도 마신관은 되어야 했다. 아이라에게 접근하는 걸 방해하는 것 같아 관련자겠거니 싶긴 했는데, 확실한 증거를 보고 나니 또 다른 생각이 스쳤다. 그러고 보니 내가 처음 균열을 경험했던 건 에펜 왕국에 있을 때였지. 네브 역시 당시 마수의 습격을 받은 일행 중에 있었다. 아이라보다, 그가 먼저라는 소리였다.
“……혹시 당신이 균열을 만들고 있는 거였어요?”
멈칫한 네브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일순 그의 몸이 흐릿해지는 게 느껴졌다.
“시큐엘!”
푸른 물의 늑대가 그를 덮쳐들었다. 나선으로 솟구친 물줄기가 도망치려는 네브의 몸을 빠르게 휘감아 묶었다. 하지만 완전히 삼켜지기 직전 그가 지닌 검이 물줄기를 갈라냈다. 파지직, 쿠웅! 검은 전류가 일면서 사방으로 물줄기가 튀었다.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충격에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후퇴한 시큐엘이 내 옆에 사뿐히 내려앉는 것과 동시에 물줄기에서 풀려난 네브 역시 바닥에 내려섰다. 상급 정령의 공격을 받아친 것치고는 상당히 멀쩡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과 완전히 똑같지도 않았다.
“말도 안 돼…….”
기겁해서 멀찍이 물러서 있던 시몬이 굳은 얼굴로 신음을 삼켰다. 나 역시 태평한 기분은 아니었다. 검은색이었던 네브의 눈동자가 붉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아아, 이제 정말 못 숨기게 됐네.”
장난스럽게 중얼거린 네브가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자 머리칼이 훌렁 뒤로 넘어가더니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지금까지 봤던 머리가 가발이었다는 사실도 당황스러운데, 갈색 머리칼이 사라진 자리에 나타난 건 흑단같이 새카만 머리칼이었다.
검은 머리에 붉은 눈동자. 흔하지도 않지만, 누구나 다 아는 한 종족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검에서만 느껴지던 마기가 이제 그의 전신에서 풍기고 있었다.
‘마족이었어.’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생긋 웃은 네브가 이번엔 얼굴 가죽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가면으로 다른 이목구비를 덮어쓴 모양이었다. 얼굴까지 가짜일 거라곤 미처 생각지 못해서 이번엔 솔직히 좀 당황했다. 동시에 불길한 기분이 덮쳐들었다. 그나마 얼굴이 달라서 내심 안심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면 내가 아는 사람을 만날 가능성이 너무 높아졌다.
‘설마 정말로…….’
그인 건 아니겠지?
이윽고 하얀 가죽이 떨어져 내리고 그의 진짜 외모가 드러났다. 똑바로 보이는 얼굴에 잠시 숨을 삼켰다.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하는 듯,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짐작했던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차라리 짐작이 이루어진 쪽이 오히려 더 나았던 건지도 모른다. 의식했을 땐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선 후였다. 입술이 떨리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왜…….”
차라리 내가 잘못 본 거였으면 좋겠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깜빡여도 있는 사실이 지워지진 않았다. 지금 바로 앞에 보이는 얼굴도 눈에 익은 생김새였다. 비록 인상이 전혀 달랐고, 내가 알던 모습보다도 많이 어렸지만.
“이왕 이렇게 됐으니 이만 정식으로 인사할까요?”
눈앞에서 전혀 다른 용모가 된 남자가 싱그럽게 웃었다. 길게 늘어진 새카만 머리칼이 그의 어깨를 타고 부드럽게 흔들렸다.
“카류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