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518)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518화(518/608)
제518화
“세피온 공작이라니, 이게 다 무슨 말입니까?”
“으음, 나중에 다 설명해 줄게요. 일단은 안심해도 괜찮아요.”
당황하는 아이라를 진정시킨 후, 진중한 척 새침하게 서 있는 라미아스를 돌아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묻고 싶은데 나도 멋대로 일을 저지른 거라 할 말은 없었다. 아니, 그치만 애초에 이 연회에 날 보낸 건 그쪽이잖아. 라미아스는 입이 열 개라도 전부 다물어야 한다.
그보다 이 드래곤이 내가 여기에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위치 추적 장치라도 달아놨나?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고 넘기기엔 솔직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긴 했다. 떨떠름한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라미아스는 아이라와 에디스를 느긋하게 살피고 있었다. 그가 눈을 휘어 접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제가 두 분을 세피온 저까지 모시겠습니다. 당신은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가세요.”
“윽, 다시 돌아가라고요?”
“당신 혼자 말없이 회장에서 사라진 걸 알면 의심받을 겁니다.”
아, 그건 그랬다. 안 그래도 왕세자는 날 주시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냥 사라졌다간 이번 일에 내가 관여했다고 대대적으로 광고하는 꼴이었다. 물론 부재증명을 해도 의심받는 건 크게 달라지진 않겠지만. 구태여 일을 더 복잡하게 할 필요는 없겠지. 그쪽 상황을 살피기 위해서라도 돌아가 보는 게 좋을 듯했다.
“전 마무리하고 갈 테니 먼저 가 있어요.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죠.”
“하지만…….”
“괜찮아요. 당장은 별다른 꿍꿍이는 없을 테니 따라가요. 가면 다비안이 있을 거예요.”
내키지 않아 하던 아이라는 다비안을 언급하니 한결 누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둘이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도 나중에 물어봐야지.
“그럼 나중에 봐요.”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려는데 다급한 손길이 내 팔을 붙잡았다. 의아한 시선을 보내니 짧게 호흡을 고른 아이라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전 아이라라고 합니다.”
이미 알고 있는 이름을 왜 새삼 말하나 했다가, 이제껏 정식으로 통성명한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 혼자 일방적으로 내적 친밀감을 쌓았지, 정작 아이라 쪽에선 내 이름을 알지도 못한다는 것도. 그 간단한 사실조차 생각지 못했다니. 정말 정신이 없기는 했구나.
“엘이에요.”
우리는 잠시간 실없이 마주 보고 웃었다. 이 간단한 자기소개가 왜 그동안 이렇게 힘겨웠는지 모르겠다. 멀고 먼 길을 돌고 돌아 드디어 출발점에 선 기분이었다.
* * *
돌아가는 길은 시큐엘의 도움을 받아 간단히 해결했다. 빠르게 날아올라 저택 지붕 위에 안착한 시큐엘은 테라스와 연결된 뒤뜰 안에 나를 안전히 내려주었다. 옷차림을 점검하고 회장으로 들어가니 시선이 쏟아졌다. 느긋한 연주가 흐르는 연회장은 내가 떠났을 때와 분위기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하긴 침입자가 있었다는 티를 냈다간 저택 보안이 형편없다고 고백하는 꼴이니 최대한 감출 만도 했다.
“엘, 아직 계셨군요.”
왕세자 놈도 있는지 확인해 보려는데 아인 이드리스가 허둥지둥 다가왔다.
“한참 안 보이셔서 돌아가신 줄 알았습니다.”
“인사도 안 하고 그냥 갈 리가요. 그냥 뒤뜰을 구경하고 있었어요.”
“그런 것치곤 비에 전혀 젖지 않았군.”
대답을 이은 건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다가온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놀란 듯이 당황하며 돌아보았다. 왕세자가 평소보다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탐색하듯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태연히 웃는 낯으로 대응했다.
“젖지 않도록 조심했으니까요.”
“물의 정령사라 이미 젖은 걸 말린 건 아니고?”
“그런 방법도 쓸 수는 있죠.”
어디 말리다 뿐인가. 흙이 묻어 더러워진 걸 즉석에서 세탁할 수도 있다. 뭘 고작 이런 걸 떠보는 거라고. 아무렇지 않게 받아치니 시선이 더 집요해졌다. 다른 사람의 눈에도 노골적이었는지 중간에서 눈치를 보던 아인 이드리스가 난처해하는 미소를 지었다.
“실은 루시엘 님이 엘을 찾으셨었습니다.”
“아, 그러셨어요? 찾으실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들어올 걸 그랬네요. 제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아무것도.”
식어 있는 눈동자 속에 흉흉한 분노가 읽혔다. 심증은 있는데 확신이 없으니 약이 잔뜩 오른 모양이다.
“어디까지 멋대로 굴 수 있는지 한번 지켜보지.”
왕세자 놈은 다음에 두고 보자는 말을 참 이상하게 전하는 재주가 있었다. 정황을 파악하고 있으니 망정이지,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었다면 대체 무슨 헛소리인가 했을 거다. 아무리 그래도 멋대로 사람을 의심하는 건 좀 너무한 거 아냐? 물론 내가 한 게 맞기는 하지만.
‘사람을 납치해서 고문한 주제에 되게 당당하네.’
당장 쏘아붙이고 싶은 걸 참으려니 이게 더 고역이었다. 제 말만 마치고 휙 돌아서는 뒤통수를 한 대만 때리고 싶었다. 아인 이드리스가 무슨 일이냐는 시선을 보내와서 모르겠다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였다.
“드시겠습니까?”
때마침 고용인이 다가와 내게 음료가 든 쟁반을 내밀었다. 왠지 공교로운 시점이라는 생각에 힐끔 왕세자 쪽을 살피니, 아니나 다를까 은밀히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음료에 무슨 짓을 했구나. 됐다고 물릴까 하다가 그래 봤자 또 다른 방법으로 접근할 게 뻔해서 일단 아무 잔이나 집어 들었다. 방비할 거라면 물 종류가 차라리 나았다. 목을 축일 만큼만 살짝 마셔보니 나른한 감각이 퍼졌다. 수면제인가 보다.
내가 순순히 음료수를 마시니 왕세자는 퍽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 됐다. 다시 말해 두지만 사람들은 정령사에 대해 잘 모른다. 왜 내가 물의 정령사라는 걸 알면서 독에 강하다는 건 생각하지 못하는 걸까. 노예 상단에서도 환각제가 제일 늦게 돌아서 날 잡느라 고생했었는데(그나마도 이프리트만 아니었음 안 잡혔을 거다). 악당들끼리는 서로 대화를 안 하나? 하긴 그러니 악당을 하지.
어디까지 멋대로 구는지 보자고 했던가. 어디까지 어울려줘야 저놈이 더 약이 오를까. 일단 좀 더 마시는 척을 해서 완전히 방심하게 해 볼까 싶었다. 그런데 돌연 누군가가 내게서 잔을 휙 낚아채 갔다. 웬 처음 보는 남자였다.
“이런 맛없는 걸 왜 먹고 있어요.”
“……네?”
얜 또 뭐야? 아는 사람인가 싶어 자세히 봤지만 역시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황당해서 눈을 깜박이니 싱긋 웃은 남자가 그대로 잔을 기울여 음료를 바닥에 쏟아부었다. 난데없는 돌발 행동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당황해 술렁거렸다. “엘, 괜찮습니까? 당신 뭡니까?” 아인 이드리스가 나를 보호하듯이 감싸며 상대를 경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냥 보기엔 대놓고 시비 거는 행동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나는 그냥 차분히 남자를 바라보았다. 얘가 누군지 알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아주 강하고 싫은 직감이. 내가 자신을 알아봤다는 걸 그도 알아본 것 같았다. 즐거워 죽겠다는 눈빛이 더 진해졌다.
“그냥 그대로 가지 왜 다시 오고 그래요. 그러니까 나쁜 일을 당할 뻔하죠.”
“……그러는 넌 왜 여기에 있는데?”
카류안.
뱉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것 같은 이름을 입 안으로 짓이겼다.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던 놈을 여기서 마주치게 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내가 나갔다 돌아온 걸 알고 있다는 건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었다는 거겠지. 나간 이유도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혹시 아이라에게 밀실 위치를 알려준 게 이 녀석인가? 불덩이를 삼킨 듯 속이 뜨거웠다.
“적당히 분위기도 무르익었으니 슬슬 판을 깨볼까 해서요.”
“됐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마. 그냥 가.”
“싫은데요?”
……그래, 얠 보니까 알겠다. 악당은 대화를 안 하는 게 아니라 상대의 말을 그냥 무시하는 거다. 혈압이 오르는 것 같아 깊게 숨을 삼키고 있자니 아인 이드리스가 물었다.
“엘, 아는 사람입니까?”
“……저걸 아냐고요?”
어떻게 저런 놈과 나를 아는 사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 황당한 기분으로 바라보니 아인 이드리스가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아는 사이인 줄 알고…….” 조심스럽게 건네오는 사과의 말에 다시금 황당해졌다. 뭘 또 사과까지 해. 가만 보면 이 녀석은 은근히 소심한 구석이 있다.
“그렇게 정색하기에요? 도와줬는데 너무하네.”
서운해하는 태도에 기가 찼다. 안 도와줘도 됐거든? 날 도와주는 카류안이라니,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그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는지 카류안이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와, 진짜 내가 싫은가 보네. 대놓고 혐오하는 표정인 거 알아요? 너무 솔직하니까 오히려 싫지가 않네. 찌푸린 것도 미인이라 그런가?”
“헛소리 말고 당장 꺼져.”
“걱정하지 말아요. 내 용건 다 마치면 알아서 잘 꺼질 거니까. 내 일을 방해하지나 말아요.”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불안감에 심장 뛰는 속도가 빨라졌다.
“자네는 어느 가문의 누구인가? 즐거운 자리에서 갑자기 이게 무슨 행패지?”
가까이 다가온 황태자가 엄중한 얼굴로 물었다. 모두가 지켜보는 자리에서 대놓고 음료수를 바닥에 버렸으니 가장 높은 신분으로서 주목할 만도 했다. 물론 황태자의 권위란 상대가 같은 인간일 때나 통하는 것이었다. 카류안은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넌 빠져요.”
“……뭐?”
“내 용건은 옆쪽에 있거든.”
대국의 태자에게 향한 것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는 오만불손한 막말에 사방에서 경악한 숨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나는 다른 의미로 긴장했다. 용건이 있다고 말하는 카류안의 시선이 닿은 건 아나이스 왕녀였다. 그 시선을 눈치챈 왕세자가 빠르게 동생의 앞을 막아섰다.
“무슨 목적이냐. 뭐하는 놈이지?”
“내가 누구일 것 같아요?”
“하루살이 같은 놈이군. 이런 미친 짓거리가 용납될 것 같은가?”
역시 이번에도 씨알도 먹히지 않는 협박이었다. 어깨를 으쓱한 카류안은 별다른 대답 대신 언젠가처럼 얼굴 가죽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생각지 못한 광경을 맞닥뜨린 사람들 사이에서 짧은 비명이 터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류안은 태연히 자신을 덮고 있던 것들을 하나씩 벗어 내렸다.
누구인지도 모를 얼굴이 사라지고 한눈에도 화려한 얼굴이 나타났다. 쓰고 있던 가발이 떨어지면서 감춰져 있던 짙은 흑발이 드러났다. 마지막으로 붉은 눈동자가 드러났을 땐 사방이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해졌다.
“마, 마족…….”
한참 만에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제야 마법에서 풀려난 것처럼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우르르 뒤로 대피했다. 황태자와 왕녀 역시 호위들의 보호를 받으며 뒤쪽으로 물러섰다. 움직이지 못한 건 카류안의 시선에 사로잡힌 듯한 왕세자밖에 없었다.
“오라버니!”
“왕세자 저하!”
안타까워하는 음성들이 애타게 왕세자를 찾았으나, 이미 두 존재 사이에 형성된 무형의 공간을 무시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왕세자의 낯빛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매사에 능구렁이 같은 놈이 이렇게까지 여유 없는 얼굴을 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이제 내 용건을 좀 알겠어요? 다른 놈은 몰라도 넌 당연히 알 거예요.”
“……왜 고위 마족이.”
“우리는 관여 안 할 줄 알았죠? 맞아요. 원래는 그래요. 근데 이번엔 너희가 좀 많이 까불었잖아요. 욕심은 부리더라도 분수는 알아야죠. 눈치를 줬더니 영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그래서 친히 경고 좀 하려고요.”
“경고, 라고?”
“그래요, 경고. 너, 인간 주제에 미혹의 힘을 갖고 있더라구요?”
정곡을 찔린 왕세자의 얼굴이 움찔했다. 카류안은 더 달콤하게 웃었다.
“근데 이런 건 내가 더 잘해요. 마계에서 가장 오래 산 내 스승도 이 방면에선 날 따라올 자가 없을 거라고 했죠. 아직 마음에 드는 수준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인간 하나 정도는 가지고 놀 수 있어요. 한번 확인해 볼래요?”
“……거절하지.”
“사양하지 말아요. 어차피 이미 늦었어요.”
미간을 찌푸리던 왕세자가 다음 순간 경직된 얼굴로 숨을 삼켰다. 일이 틀어진 것을 깨달았을 때 지을 법한 낭패한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는 다음 순간 이어지는 상황으로 알 수밖에 없었다.
“무릎 꿇어.”
카류안이 명령하자 왕세자가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경악한 사람들이 신음을 삼켰다. 왕세자 본인조차 당황한 얼굴이었다. 회장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뻣뻣해졌다.
이후에도 카류안은 계속해서 왕세자에게 지시를 내렸다. 엎드려뻗쳐를 시키기도 하고 제자리 뜀박질을 시키기도 했다. 우스꽝스러운 동작도 지시했으나 지켜보는 사람들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져 갔다. 갈수록 주위가 고요해지자 카류안이 시시하다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거참, 웃으라고 한 건데 아무도 안 웃네. 이런 건 별로 재미가 없나 봐요?”
누군가가 울음을 터트렸다. 적당한 대답 참 고마워요, 카류안이 머쓱해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마족은 저항하지 못하는 자에게 굴욕을 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들인가! 그대에게 강자의 명예가 있다면 당장 그만둬라!”
분노한 황태자가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쳤다. 공포에 질려 있으면서도 할 말은 하는 걸 보니 차기 황제로 내정된 사람답게 참 용감한 사람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왕세자의 음모에 휘말리는 건 아깝다고 여길 만큼.
“명예라…….”
그래서인지 카류안도 이번엔 그 말을 무시하거나 비웃는 대신 매우 그럴듯한 논조를 들었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순한 반응이 더 꺼림칙하긴 했지만.
“하긴 내가 좀 유치했나? 좋아요. 그럼 마족의 명예를 지킬 겸, 모두의 기대에 부합하는 쪽으로 해볼까요?”
짝짝, 공연자가 관중의 시선을 환기하듯 두어 번 손뼉을 친 그가 가볍게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손 안에서 새카만 마력이 일더니 먹색을 띤 검 한 자루가 생겨났다. 카류안은 그 검을 그대로 왕세자의 발치에 던졌다.
“자, 검을 들어요.”
왕세자는 이번에도 시키는 대로 검을 들었다. 무기까지 등장하자 이전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긴장감이 흘렀다. 모두가 다음으로 무슨 말이 이어질 것인지 한껏 긴장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걸로 네 동생을 죽여요.”
“……!”
이어진 명령은 상상을 초월했다. 사방이 경악한 만큼 왕세자의 얼굴 역시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이 순간에도 착실히 명령을 이행하고 있었다.
그가 검을 움켜쥐고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호위들이 왕녀를 지키기 위해 나섰으나 그들에겐 이렇다 할 무기가 없었다. 연회에선 무기를 소지하지 않는 게 예의였다. 마법이나 검기 같은 이능이 난무하는 세계에서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긴 한데, 상대를 위협할 수 있는 도구가 눈에 보이면 안 된다는 논리였다. 고위직일수록 어지간한 공격 마법 정도는 방어하는 마도구를 착용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결국 그들은 맨손으로 제압을 시도했다. 하지만 왕세자는 검도 다룰 줄 아는 편인 것 같았다. 그게 아니면 검 자체가 지닌 능력일까. 순식간에 호위 두 명이 나가떨어졌다. “으아악!” 왕세자가 정말로 사람을 공격하자 사방에 비명이 난무했다. 오히려 위협을 받는 당사자인 왕녀가 제일 침착한 것 같았다.
“오, 오라버니.”
“피해라, 아나이스!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이를 악문 왕세자가 힘겹게 외쳤다. 휘두르려는 걸 어떻게든 버티려는 듯 그의 두 팔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진, 소환!”
아인 이드리스가 왕녀 앞으로 나선 건 바로 그때였다. 그의 외침 소리를 들은 사람들의 얼굴에 희망이 떠올랐다. 나 역시 곧 진이 나타나 이 상황을 마무리 지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진이 나타나기는커녕 희미한 바람조차 일지 않는 것 같았다. 안도하고 있던 모두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태연한 건 카류안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