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519)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519화(519/608)
제519화
“오, 역시 효과가 좋네요.”
움찔한 아인 이드리스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을 본 카류안이 다 이해한다는 듯이 나긋하게 웃었다.
“정령이 소환 안 돼서 이상하죠? 괜찮아요. 네가 이상해진 게 아니에요. 결계를 쳐서 그래요.”
“……결계?”
“무형의 기운이 이 저택 전반을 둘러싸고 있죠. 이 안에선 다른 차원과 교신할 수 없어요. 나도 정령왕은 곤란하거든요. 아무렴 내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고 왔겠어요?”
말도 안 돼. 나도 모르게 반박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하지만 정말로 정령이 소환되지 않았다. 자연체의 정령들 역시 어디에도 없었다. 그간 결계에 갇힐 때마다 일관적으로 겪었던 바로 그 현상이었다. 내가 폭우를 내릴 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징후가 없었으니 불과 조금 전에 펼쳤다는 소리다. 아무리 고위 마족이라도 이런 결계는 간단히 펼칠 수 없었다. 갓 어린 티를 벗은 지금의 카류안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건 신의 영역이었다.
‘카노스.’
설마 그가 여기에 있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반사적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 무의미한 일에 내가 온 신경을 쏟는 동안 카류안은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아인 이드리스를 향해 다가섰다. 친히 눈을 맞추고 그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기까지 하는 동안, 이미 넋을 잃은 사람들은 아무도 막아설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정령왕의 계약자. 물론 굉장히 강하죠. 흔치도 않고요. 하지만 정령사의 발을 묶는 건 생각보다 쉬워요. 소환만 못 하게 하면 되니까요. 네 정령이 아무리 대단해도 넌 결국 인간이잖아요. 그렇죠?”
고요히 굳어 숨만 삼키고 있던 아인 이드리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이런 게 싫으면 미네르바 옆에 바짝 붙어 다녔어야죠.” 속삭이듯 이어진 말에 그의 얼굴이 울 듯이 일그러졌다.
“나는, 난…….”
“이해했으면 나대지 마요. 얌전히 있으면 너까진 건드리지 않아요. 나도 미네르바의 화를 사고 싶진 않거든요. 뭐, 그래 봤자 그냥 내 세계로 도망가면 되긴 하지만요. 넌 그냥 개죽음으로 기억될 거예요. 그러긴 싫잖아요?”
“난…….”
벙긋거리던 입에서 끝내 탄식의 숨이 흘러나왔다. 탁해진 두 눈에 떠오른 절망의 순간이 선명히 읽혔다. 그걸 바라보는 카류안의 붉은 눈동자가 전율하듯 반짝거렸다. 누가 최종 보스 아니랄까 봐 정말 싹수부터 노란 놈이었다.
“자, 그럼 넌 계속해요.”
지시를 받은 왕세자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비명을 터트리는 순간, 퍼뜩 정신을 차린 아인 이드리스가 달려들어 왕세자의 다리를 붙잡았다. 그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몸으로 막으려는 것이다. 덕분에 왕세자의 몸이 휘청거리자 주위의 몇 명도 달려와 함께 다리에 매달렸다.
“푸하하! 마지막 발악이에요? 뭐, 좋아. 어디 해봐요.”
카류안은 이 상황이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모두가 괴로워하는데 한 사람의 웃음소리는 점점 더 커진다. 다급하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한 현장을 그 혼자서만 즐기고 있었다. 마치 그가 주관하는 공포 게임 속에 갇힌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건 정말이지, 더러운 기분이었다.
‘여길 돌아오는 게 아니었는데.’
의심을 받든, 그래서 더 일이 골치 아파지든. 문제 될 일들만 가득했더라도 와선 안 되는 거였다. 그래 봤자 이미 한참이나 늦은 후회였지만.
긴 한숨을 내쉰 후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가까운 곳에 적당한 것이 보였다. 쿠궁! 콰지직! 창가로 다가가 휘장을 강제로 뜯어내자 요란한 소리에 깜짝 놀란 사람들이 돌아보았다. 내내 느긋하던 카류안의 표정도 처음으로 찌푸려졌다. 주시하는 시선을 무시한 채 휘장에서 분리해 낸 봉을 들고 왕세자 앞으로 나갔다. 봉에 기운을 밀어 넣으니 약한 떨림과 함께 푸른 빛이 일었다. 카류안이 낮게 혀를 찼다.
“……방해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어요? 말을 참 안 듣네요.”
“네가 하는 짓이 도가 지나치지 않았다면 고려는 해봤겠지.”
“도가 지나쳐? 뭐가요? 아, 오라비 손으로 동생을 죽이라고 한 거요? 왜요? 재밌지 않아요?”
“이딴 게 재밌다고?”
“네, 재밌어요. 난 이런 거 참 좋던데. 소중한 사람을 다른 이도 아닌 자기 손으로 죽이게 하는 거. 가장 최고의 벌이자 저주 아닌가?”
얘는 어쩌다 성격이 이 모양으로 태어났을까. 그래도 한때는 천사였다고 하지 않았나? 그 시절의 상황을 전부 다 아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봐도 신족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정작 전생에도 후생에도 마왕인 아스는 그렇게나 순하고 착하잖아. 인성이 종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보여줄 일인가 싶다. 이런 놈에게 기회를 주겠답시고 거둔 데다가 지금도 도와주고 있는 카노스를 생각하니 속이 더 갑갑해졌다.
“근데 괜찮겠어요? 그거 그냥 평범한 나무 막대잖아요. 그게 검기를 버틸 수나 있나?”
말하기 무섭게 봉이 파스스 부서지기 시작했다. 먼지처럼 흩어지는 가루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적어도 금속 종류는 되어야 했나. 그래도 잠깐은 버텨줄 줄 알았는데 망가지는 속도가 생각보다 더 빨랐다.
“그것 봐요.”
하지만 카류안의 미소는 그리 오래 유지되지 않았다. 나도 조금 당황해서 손을 내려다보았다. 부서진 봉과 함께 그대로 사라질 줄 알았던 검기가 손 안에서 여전히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마치 빛으로 만들어진 검을 쥐고 있는 기분이었다.
“검성이다…….”
누군가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내가 검성, 그러니까 소드 마스터가 된 거다. 시벨리우스한테 들은 말도 있고 해서, 언제고 된다는 건 알고 있었기에 크게 놀랍진 않았다. 근데 그게 이렇게 간단히 되는 거였어? 황당했지만 어쨌든 무기가 없어도 된다 싶으니 긴장은 한결 풀렸다. 정 안 되면 맨손으로 해야지 싶었는데 그럴 필요까진 없게 됐다.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가 왕세자가 들고 있는 검을 강하게 쳤다. 불시의 공격이었는데도 그는 곧장 방어해왔다. 정작 왕세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놀란 얼굴인 걸 보니 역시 검 자체의 능력인 모양이었다. 다행히 검술 실력은 내가 더 위였다. 몇 번 공방을 주고받은 끝에 마침내 왕세자가 쥐고 있던 검을 놓쳤다. 바닥에 떨궈진 검은 다시 까만 마력이 되어 카류안의 손 안으로 되돌아갔다.
“……이거 참, 당신은 여러모로 날 놀라게 하네요.”
중얼거리는 카류안은 이제 여유가 사라진 얼굴이었다.
“아닌 거 알면서 묻는 거긴 한데요. 드래곤인 건 아니죠?”
“아니야.”
“근데 왜 그렇게 강해요? 당신을 보면 인간이란 종족의 상식이 무너지는 기분이라고요.”
내 알 바 아니라는 생각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내가 견제하며 서자 그는 분한 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배신감을 느꼈다는 얼굴로 원망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정말 이해가 안 되네요. 당신은 이 인간들 편도 아니잖아요. 왜 날 막는 거예요? 이미 경고도 했잖아. 당신은 내 일에 끼어들면 안 돼요. 그렇게 후회하고 싶어요?”
“별로 너한테 듣고 싶은 말은 아니네.”
“정말 끝까지 날 막을 거라는 말이죠?”
“그래.”
카류안은 나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러다 이내 체념하듯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좋아요, 좋아. 솔직히 당신과는 싸우고 싶지 않아요. 물러서지 않는다니 어쩔 수 없네요. 최선책은 내가 포기할게요.”
최선책이라는 건 차선책도 있다는 말인가? 어감에서 느껴지는 불길함에 눈썹을 찌푸릴 때였다. 별안간 손가락을 깨물어 상처를 낸 캐류안이 새어 나온 핏방울을 튕겼다. 기습인가 싶어 방어하는데 당황스럽게도 핏방울이 향한 곳은 나도 아니고 왕녀도 아닌 전혀 다른 쪽이었다.
“컥!”
“태자 전하!”
“전하!”
목을 움켜쥔 황태자가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공격에 다들 얼이 빠졌다. 황급히 황태자를 살피니 다행히 숨은 쉬고 있었다. 하지만 온몸에 짙은 마기가 가득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냥 가벼운 저주예요.”
“저주?”
“영원한 잠에 빠지는 저주죠. 해주 방법은 간단해요. 저 여자를 죽이면 저절로 풀릴 거예요.”
카류안이 손가락으로 지목한 여자는 이제 와선 새삼스럽다고 할 수 없는 아나이스 왕녀였다. 참 악의적일 만큼 일관된 목표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왕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째서……. 대체 왜 이런 짓을……?”
“딱히 너한테 유감은 없어요. 그냥 화근을 없애려는 거죠. 인간은 과거를 쉽게 잊으니까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그게 무슨 뜻이죠?”
“모르겠으면 네가 직접 알아봐요. 아, 물론 그 전에 살아남아야겠지만.”
창백해진 왕녀의 얼굴에 결국 눈물이 흘러내렸다. 카류안은 그 모습을 감흥 없이 바라보았다. 조금 전 아인 이드리스의 절망을 탐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반응이었다. 마치 그녀의 절망 따위는 자신을 즐겁게 할 가치조차도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럼 잘 있어요, 특별한 정령사님. 다음에 마주쳤을 땐 마음을 바꿨길 바랄게요.”
나를 돌아본 카류안이 장난스러운 인사를 건넸다. 무어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의 모습이 눈앞에서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은 공간에 남은 건 흐려진 웃음소리뿐이었다.
시야가 일렁이는 듯하더니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조금 전까지 보이지 않았던 정령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카류안이 있어야 유지되는 결계였나 보다. 사라진 건 확실한지 곧 조종에서 풀려난 왕세자가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오라버니!”
“아나이스…….”
표정이 엉망으로 흐트러진 두 남매가 서로를 다급히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이번 일에서 내내 위협받은 피해자였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에게 다가가 괜찮냐고 묻지 않았다.
이미 회장 안에는 껄끄러운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잠시간 바라보다 숨을 길게 내뱉었다. 이상한 꿈을 꿨을 때부터 사나운 일진이 될 줄은 알았지만 이건 지나쳐도 너무 지나쳤다.
정말 최악의 하루였다.
* * *
멀쩡하던 황태자가 하루아침에 식물인간 상태가 됐다. 심지어 저주를 풀기 위해선 타국에서 유학 온 어린 왕녀를 죽여야 한단다.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간 소문은 황실에서 아무리 입을 단속해도 소용이 없었다. 제국은 말 그대로 발칵 뒤집혔다.
<마신의 분노가 유구한 황실의 혈통을 끊다!>
신문 전면에 크게 박힌 제목이 눈에 아플 정도로 선명했다. 로마 천 년 제국의 역사를 배우고 자란 지구인 출신이라 그런가. 4백 년 좀 넘는 역사가 유구한 건지에 대한 의문이 드는 건 둘째치고. 아직 황태자는 죽지도 않았는데 자극적인 표현에 집착한 나머지 이미 황실의 혈통을 끊어놓고 있다. 최근 발행하는 신문마다 다 이런 식이라 딱히 새삼스러울 건 없긴 하지만 그걸 단속하는 이의 기분은 또 다른 모양이었다.
“젠장! 이 신문사는 또 뭐야? 이것들이 죄다 간이 부어터졌나! 너흰 일을 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한참 동안 길길이 날뛰는 소리가 들렸다. 폭격처럼 터지는 잔소리를 배경음 삼아 주인 없는 자리에서 조용히 차를 홀짝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기죽은 사람들이 줄줄이 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제야 자리의 주인도 다시 돌아왔다.
“진짜 골치 아프게 됐어.”
긴 한숨을 내쉰 라미아스가 푸념했다. 사태 이후 근 열흘 만에 보는 그는 연이어진 철야에 매우 지친 모습이었다. 드래곤이니 몸 하나는 튼튼할 텐데 정신적인 피로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많이 바쁘신가 보네요.”
“당연히 바쁘지. 그런 일이 벌어졌는데 정보국이 한가하겠냐? 지금도 잠깐 시간 낸 거라 또 들어가 봐야 해. 황제 놈이고 부하 놈들이고 갓 부화한 새 새끼들처럼 죄다 나만 찾아대. 젠장할 놈들! 이 제국엔 다들 돌대가리들밖에 없나? 왜 스스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거야? 미쳐버리겠네, 진짜!”
“……이왕이면 새끼 새라고 해요.”
“새 새끼나 새끼 새나.”
“전자는 욕처럼 들리잖아요.”
“알아.”
음, 알고 사용한 거구나. 그럼 어쩔 수 없지. 하긴 이어진 말들도 죄다 험악하긴 했다. 새삼 새끼라는 표현 정도를 지적할 건 아니었지. 고개를 끄덕이며 얌전히 마시고 있던 차나 마저 마셨다. 그동안 씩씩대던 라미아스는 혼자 알아서 진정했다. 역시 화난 사람은 건드리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게 상책이다. 대신 불퉁한 시선이 와 닿기는 했다.
“넌 어떻게 된 애가 사람이 이렇게 힘들어하고 있는데 위로의 말 하나 안 하냐?”
“해드려요?”
“됐거든?”
“어차피 싫다고 할 거면서.”
입을 다문 라미아스가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뭐 이런 게 다 있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세상에서 가장 희한한 걸 보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더는 따지고 들 기력이 없는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식은 차를 술인 양 단숨에 쭉 들이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연회에 널 보내는 게 아니었어. 넌 이상하게 큰 사건에만 휘말리는 재주가 있어.”
“오, 그걸 이제야 아셨다니 유감.”
“……그렇게 태연하게 받아치니까 좀 열 받는다?”
“난 가기 싫은 티 냈어요. 억지로 보낸 건 라미아스고요.”
“오냐, 그래. 내가 내 발등을 찍었다. 동태 좀 살피라고 보냈더니 그런 대어를 낚아올 줄 누가 짐작이나 했겠냐. 대어도 그냥 대어야? 아주 어선을 파괴하는 초대형이지.”
황태자가 쓰러졌으니 확실히 어선을 파괴하는 수준이긴 하다. 딱히 부정할 마음은 없어서 그냥 어깨를 으쓱였다. 뭐 이미 일이 이렇게 된 걸 어쩌겠어. 나라고 좋아서 그런 일에 휘말린 것도 아니고.
그 묘하게 건성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라미아스가 미간을 잔뜩 좁힌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까지 실망했냐?”
그런데 화를 낼 거란 예상과 달리 이어진 건 다른 질문이었다. 담담히 건네온 말에 눈동자만 굴려 그를 바라보다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평소처럼 타박하고 넘겼으면 나도 깨닫지 못했을 텐데. 진지하게 물어보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됐다. 이럴 땐 라미아스가 확실히 어른이긴 했다.
“네.”
“쯧쯧, 애썼는데 상심할 만도 하지. 이번에도 네가 찾던 게 아니어서 나도 유감이야.”
“……네.”
꾸역꾸역 몰려드는 이상한 기분을 감추기 위해 가볍게 마른세수를 했다. 그랬다. 이번 일을 돕는 대가로 받은 영혼의 보석은 이번에도 라피스가 아니었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기대했던 모양이다. 기분 나쁠 정도로 가슴 속이 휑했다.
대체 왜 라피스가 아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영혼의 보석이 그렇게 흔한 건 아닐 텐데. 그 얼마 되지도 않은 대부분은 다 라미아스가 갖고 있었고, 다른 드래곤에게 있던 나머지 하나까지 가져온 거였다. 그런데도 없다는 건 여기에 라피스가 없다는 뜻 아닐까. 이쯤 되면 엘뤼엔이 장소를 잘못 보낸 건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든다. 만약 그런 거라면 여기서 보낸 내 시간은 대체 무슨 의미였나 싶어 멍해지는데 혀를 찬 라미아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단 좀 더 기다려 봐. 가지고 있는 녀석이 또 있다는 것 같으니까.”
“어? 정말요?”
“그래, 근데 이번엔 드래곤이 아니라 인간이야. 다른 제국 놈인데 특이한 광물을 모으는 수집가인 것 같더라고. 어쨌든 인간이라 오히려 접근이 좀 까다로워. 그래도 잘 설득하는 중이니까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정 안되면 훔쳐서라도 가져다줄게.”
“……고마워요.”
“이제야 얼굴이 좀 피네.”
피식 웃는 라미아스의 얼굴에 안도감이 드러났다. 내가 그렇게까지 시무룩해져 있었나 싶어 조금 머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