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54)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54화(54/608)
제54화
오크들은 분노하고 있었다. 그들의 동료가 인간의 전사들에게 거의 일방적으로 참패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은 전투 중 운 좋게 도망친 한 마리의 오크에 의해서였다. 지원 요청을 받고 달려왔을 땐 이미 텅 비어 버린 현장에 처절한 전투의 잔해만 남겨져 있었다. 도망친 한 마리를 제외한 모든 오크가 죽었다. 차마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처참한 모습으로.
오크들은 주변에 널린 동료들의 시체를 보고 크게 울부짖었다.
“취이익! 복수다, 취익!”
“그렇다, 취익! 우리는 싸워야 한다, 취익!”
“더 많은 동료들을 모으자, 취익! 인간들을 취익! 용서 말자, 취이익!”
소문을 듣고 몰려온 오크들이 빠른 속도로 군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인 무리는 모두 한목소리로 소리쳤다.
“인간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자, 취익!”
“그들을 쫓아가자. 취이익!!”
“모두 죽이고 물건을 빼앗자, 취이익!”
본래가 동족 의식이 강한 오크들은 원수에 대해서는 집요할 정도로 복수하려는 습성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들도 긴장했다. 인간들에게 당한 동료들의 숫자가 지금과 같은 백 마리였기 때문이다. 똑같은 숫자로 나섰다간 도리어 희생자만 늘리는 꼴이 될 것이다. 아둔한 머리지만 그 정도는 예측할 수 있었다.
“취익! 대책을 세워야 한다, 취이익! 인간들을 이긴다!”
“인간들 강했다, 취익! 동료들이 순식간에 당했다, 취익!”
오크들은 시끄럽게 떠들면서도 막상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 지금까지 그들은 적에게 무조건 덤벼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들이 제대로 된 전략을 세워 봤을 리가 없었다. 그때 다른 이들과 달리 조용히 사태를 주시하고 있던 오크 한 마리가 입을 열었다.
“후후후, 내게 방법이 있다.”
“방법? 그게 뭐냐, 취익?”
“인간 용병들에게 동료가 쉽게 당한 것은 우리에게 그들을 상대할 만한 훌륭한 무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강도 높은 무기와 그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의 동료들을 모아 공격하면 맥없이 당할 것이다.”
그 오크는 다른 오크들처럼 말투가 어눌하지도, 이상한 숨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수상했지만, 둔감한 오크들은 그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오오! 그렇다, 취익! 하지만 무기…… 구할 수 없다, 취익! 인간들 거, 빼앗아야 한다, 취익!”
오크들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손재주가 없는 그들은 스스로 검과 활을 만들 능력이 없었다. 그들이 얻는 물건은 모두 인간들에게서 약탈한 것뿐이었다. 설명하던 오크도 그 점은 미리 알고 있다는 듯이 히죽 웃었다.
“킬킬. 걱정하지 마라. 나에게 쓸 만한 무기가 있다. 그것을 나누어 주겠다.”
“무기가…… 있다?”
“무기?”
“그렇다. 어지간한 무기는 단번에 두 동강을 낼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단단하고 훌륭한 무기지. 그것으로 공격하면 인간들을 가볍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정말이냐, 취익?”
“취이이익! 이긴다!”
“우리가 이긴다, 취익!”
오크들은 그가 어떻게 수많은 무기를 가지고 있는지 전혀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저 복수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 점에 대해 무기를 줄 것을 제시한 오크는 마음속으로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멍청한 놈들이군. 의심 많은 인간들보다야 다루기는 쉽다만.’
사실 그는 올해로 삼천오백 세의 블랙 드래곤 메세테리우스였다. 그러나 지인들 사이에선 ‘메테’, 혹은 ‘테리우스’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불렸다.
예로부터 드래곤은 손이 귀했다. 워낙 게으른 족속들이라 후세를 남기는 의무조차 귀찮아했기 때문이다.
그런 현상은 블랙 일족이 유독 더 심해서, 그가 태어났을 당시만 해도 삼천 년 만에 나온 헤츨링이라며 전 일족이 축제를 벌였을 정도였다.
그런 사정상 그는 전 드래곤의 따뜻한 관심과 보호 아래에서 자랐다. 그야말로 일국의 왕자 부럽지 않을 대우를 받으며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열등감을 느끼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드래곤이자, 레드 일족인 라피스라즐리에 대한 것이었다.
그가 태어난 후 오백 년 만에 탄생한 ‘라피스라즐리’는 비록 일족은 달랐지만 그와 같은 부모 아래 태어난 형제였다. 그가 블랙 드래곤인 부친의 피를 이어받은 것과 달리, 그는 레드 드래곤인 모친의 피를 승계한 것이다.
하지만 다른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평범한 성장 과정을 거친 그에 비해 라피스라즐리는 헤츨링 시절부터 마나 운용력과 자연 친화력이 여느 성룡들을 가뿐히 뛰어넘었다. 게다가 머리도 아주 비상해서 그 나이 때는 풀지 못하는 어려운 수식들도 단번에 읽고 쓸 줄 알았고, 그것을 넘어 새로운 공식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야말로 자타 공인 천재인 셈이었다.
일족들의 관심이 그에게 집중되자 자연히 메세테리우스는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가 유희를 시작하게 된 계기도 라피스라즐리를 찬양하는 소리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이유가 제일 컸다.
‘흥, 그딴 물의 정령왕에게 미친 녀석이 대체 뭐가 멋지다고.’
그가 유일하게 라피스라즐리보다 잘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대인 관계였다. 그의 동생은 한 가지에 미치면 오직 그것만 파는 독불장군이었다. 더구나 본인이 잘난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걸핏하면 타인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무리와 잘 어울리지도 못했다.
그러나 메세테리우스, 그는 달랐다. 그는 성년이 되자마자 일찌감치 인간들 문화에 섞여 그들과 어울리며 수많은 유희를 겪었다. 그렇게 쌓인 경험들은 그를 드래곤 세계에서 더할 나위 없는 재간둥이와 입담꾼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근래에 들어 그는 라피스라즐리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누가 더 빠른 시일 내에 알찬 유희를 보내는지 내기를 하자고 청한 것이다. 정작 도전장을 받은 상대는 별로 관심 없어 했지만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의욕에 불타올랐다.
‘훗! 설마 위대하신 이 몸이 오크로 폴리모프할 것이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겠지. 두고 보라지. 오크들을 부추겨서 인간들을 몰아내고 새 왕국을 건설하고 말 테다. 그럼 다들 깜짝 놀라겠지?’
그는 벌써 이 세상이 오크들로 가득 차 있다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인간들을 노예로 부리고, 엘프들을 몬스터 취급하는 세상!
그건 이제껏 어느 드래곤도 시도해 보지 못한 유희였다. 성공만 한다면 메세테리우스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드래곤으로 자리매김할 것이 틀림없었다. 이번 인간들을 향한 복수는 그 계획의 초석을 닦는 과정이나 마찬가지였다.
‘후훗, 아무리 무기가 좋아 봤자 실력이 되지 않으면 말짱 꽝이지. 하지만 기뻐해라, 천한 오크 놈들아. 이 위대하신 몸이 너희 편에 있으니 반드시 이길 것이다.’
속으로 음흉한 웃음을 삼킨 메세테리우스는 자신의 레어에 보관 중이던 무기 중에 쓸모 있는 몇 가지를 추려 왔다. 그중에는 보통 인간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만한 마법검도 섞여 있었다. 메세테리우스는 찝찝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오크들에게 빌려 주기에는 너무 과분한가? 이놈들은 마나가 적어서 마법검을 줘 봤자 어차피 다루지도 못할 텐데. 하긴 뭐, 상관없지. 이 정도의 물건이야 내 레어엔 썩어 넘칠 정도로 많으니까.’
본래 무슨 일이든 즐거운 일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후하게 투자(?)하기로 마음먹었다. 오크들은 농기구나 도끼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강도의 날카로운 무기를 쥐어 보고는 크게 환호했다.
“크오오! 좋다! 멋지다! 이 정도면 이긴다, 취익!”
“인간들을 죽인다, 취익! 오크들의 세상이다, 취이익!”
“복수한다! 취익! 복수할 수 있다!”
메세테리우스의 지시에 따라 알맞게 무기를 배분한 오크들은 의기충천했다. 그들은 자신의 동료를 처참하게 죽인 인간의 행렬을 뒤쫓기 시작했다.
“취이익! 우리 숫자 많다! 강한 인간, 이길 수 있다!”
“옳다, 취익! 인간들에게 복수다, 취익!”
“모두 죽이자, 취익!”
기세등등하게 무기를 치켜들고 달려가던 오크들은 잠시 후, 멀리서 홀로 걷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동료들을 살육한 놈들은 아니었지만 인간이었고, 그것만으로도 오크들이 그를 죽일 이유는 충분했다.
“인간이다, 취익! 저 녀석부터 죽이자, 취익!”
“기세 살려야 한다! 취익! 죽여야 한다! 취익!”
커다란 오크들의 함성 때문인지 걷고 있던 남자의 고개가 슬쩍 뒤를 향했다. 샛노란 머리카락에 보라색 눈동자. 전체적으로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는 입고 있는 튜닉 위에 클록을 걸치고 있었다. 옷차림은 수수했지만 허리에 찬 벨트에 롱소드가 고정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평범한 민간인은 아닌 듯했다.
일행의 선두에서 신 나게 지휘하던 드래곤의 눈에 이채로운 기운이 흘렀다. 그의 몸에 흐르는 범상치 않은 기운을 읽었기 때문이다.
‘호오, 상급 기사 정도는 되는 것 같은데? 하지만 나에게는 어림도 없지.’
제아무리 뛰어난 검사라 할지라도 드래곤인 그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자신감 가득한 미소를 지은 메세테리우스는 우선 상황부터 지켜보기로 했다. 마침 지레 흥분한 오크들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남자를 향해 돌격했기 때문에 그가 따로 수작을 벌일 필요도 없었다.
‘후후후, 어리석은 놈들. 미천한 오크들이라는 게 다 그렇겠지만 저렇게 상대를 볼 줄 몰라서야. 어디 열심히들 덤벼 보려무나. 놈에게 처참하게 당하고 있을 때 내가 혜성처럼 나타나 구해 줄 테니.’
메세테리우스의 머릿속은 온통 오크들에게 영웅 대접을 받을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가 실수한 것이 있으니 바로 그들이 싸울 인간 남자가 그의 생각보다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많군.”
백여 마리에 가까운 오크들을 보면서도 남자가 중얼거린 말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뒤돌아선 그는 허리춤에 걸린 롱소드를 천천히 뽑아 들었다. 몬스터가 왜 자신을 공격하려 하는지, 수가 많아 혼자서 상대하기는 무리라는 것 따위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모습이었다.
‘대단한 자신감이군. 아니, 오만한 건가?’
메세테리우스는 속으로 의외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여전히 그가 자신의 하수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 상태였다.
인간 남자가 도망가기는커녕 오히려 가만히 서 있자 오크들은 그저 굴러 들어온 떡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우렁찬 함성을 지르며 무기를 내질렀다. 그곳에 있는 오크 중 인간 남자가 자신들의 공격에 쓰러질 것을 의심하는 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취이익! 죽어라, 인간!”
“복수다, 취익! 죽는다, 인간!”
“동료들, 원한 갚는다! 취이이익!”
오크들이 외치는 소리에서 대강의 상황을 짐작한 남자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어떤 멍청이가 오크와 싸우면서 생존자를 남겨 둔 거지? 재미없군.’
그러나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남자의 대응은 재빨랐다. 뽑아든 롱소드를 고쳐 잡은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수십 마리의 오크 떼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쉬익― 콰직― 퍼어억― 촤악!
“쿠에에엑!”
“크아악!”
그가 검을 내지를 때마다 수십 마리의 오크가 한꺼번에 베어져 쓰러졌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속도였다. 무심한 표정으로 몬스터들을 베어 가는 그의 검에선 어느새 미미한 푸른색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제야 메세테리우스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몸을 긴장시켰다.
‘인간 주제에 꽤 하는군! 하지만 어림없다!’
고작 인간에게 잠시라도 긴장했다는 사실은 그의 자존심을 크게 상처 입혔다. 그는 서둘러 살아 있는 오크들을 향해 명령하기 시작했다.
“멍청이들아! 도망만 치지 말고 활을 날려라! 검을 내지르란 말이다!”
하지만 오크들이 검을 들려고 손을 움직이는 것보다, 남자가 날린 푸른 검풍에 오크들의 몸뚱이가 박살 나는 것이 더욱 빨랐다. 활은 애초부터 무용지물이 된 지 오래였다. 모처럼 내준 무기들이 전혀 빛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드래곤은 경악하느라 그것을 아까워할 겨를도 없었다.
‘검풍? 검풍이라니! 이런 제기랄! 설마 저 인간이 소드 마스터였단 말인가!’
소드 마스터!
그것은 검의 한계를 초월한 경지에 이른 자들을 부르는 극상의 칭호였다. 상급 기사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다. 드래곤조차 이들을 대할 땐 경계해야 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실제로 드래곤을 죽이는 자들에게 내려지는 ‘드래곤 슬레이어’의 칭호를 받는 이들 대부분이 바로 소드 마스터였다. 마법이 주는 편리성에 취해 검술에는 일절 관심 없는 삶을 살던 그로서는 낭패나 마찬가지였다.
긴장한 메세테리우스는 유희 중이라는 사실도 잊고 평소처럼 마법을 시전하려고 했다. 그에게는 숨 쉬는 것보다 더 간단한 것이 마법이었으니, 발동만 한다면 제아무리 소드 마스터라 해도 큰 타격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메세테리우스는 자신이 쏘아 보낸 마법으로 인해 눈앞의 남자가 비참하게 쓰러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만 남자가 쏘아 보낸 검풍이 하필이면 그가 시동어를 내뱉던 순간보다 더 빨랐던 것이 불행이라면 불행이었다.
콰아아앙!
“미, 미디엄 스트라이…… 크어어억!”
최후의 한마디를 완성하지 못한 탓에 마법은 실행되지 못하고 그대로 소멸해 버리고 말았고, 드래곤 메세테리우스 역시 처참하게 쓰러졌다. 드래곤 본신에 비해 한없이 뒤떨어지는 오크의 육체를 미처 계산하지 못한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