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541)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541화(541/608)
제541화
“시벨, 너 절벽 탈 수 있겠어?”
“할 수 있긴 한데…… 그냥 내가 태우고 가는 건 어때?”
“응? 무슨 말이야?”
“나도 하늘을 날 수 있거든. 내가 본체로 돌아가서 널 태우고 날면 될 것 같은데.”
오히려 비조보다 안전하고 더 빠를 거야, 부드럽게 웃으며 설명을 덧붙이는 얼굴에서 후광이 비쳤다. 감격한 나머지 두 손이 절로 입가에 모였다.
“시벨리우스, 넌 혹시 천사야?”
“어? 음? 유니콘이 천군에 속한 건 맞지만, 천사 계급은 아니었는데…….”
“너무 멋지다는 뜻이었어.”
“아, 그래? 그, 그런 뜻이었구나.”
얼굴이 상기된 시벨리우스가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라미아스의 저택에서 주방장으로 지내는 동안 온갖 찬사를 다 받아왔을 텐데도 이런 칭찬엔 약한 모양이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엘뤼엔은 어딘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일단 본체로 변해야 하니까 사람들 없는 곳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응, 여긴 보는 눈이 너무 많지.”
주위를 돌아보다 와 닿는 시선에 살짝 긴장했다. 아까 날 검문했던 기사가 다시 이쪽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그 사이에 일행이 하나 더 늘어 있는 걸 주시한 모양이다. 엘뤼엔 역시 후드를 쓰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워낙 존재감이 강해서 그런지 외모를 가리고 있는데도 눈에 띄었다. 기사가 다른 동료들과 뭔가 두런거리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서둘러야겠어.”
진지한 표정이 된 시벨리우스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엘뤼엔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적지가 너와 내가 처음 만난 그곳이냐?”
“아, 응. 맞아. 일단 거기부터 가보려고.”
“그렇군.”
짧게 답한 그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 순간 바닥에서 푸른 마법진이 떠오르더니 사방에 물줄기가 치솟았다.
“어? 잠깐? 이게 뭐……!”
당황해서 돌아보는 순간 주변의 시야가 크게 이지러졌다. 몸이 붕 뜨는 것 같은 느낌이 이는 것과 동시에 무언가가 휙 스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아니, 스치는 것은 어쩌면 내 쪽이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시야가 선명해졌을 땐 눈앞에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인파로 북적이던 광장이 깨끗이 사라지고, 보이는 거라곤 온통 빼곡한 나무들뿐이었다. 한쪽에선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게 뻗은 강이 고요하게 흐르고 있었다. 한없이 낯선 상황이었지만, 광경 자체는 익숙했다. 전에도 와 본 적이 있던 장소였으니까.
착각이 아니라면 여긴 분명 엘뤼엔을 소환했던 바로 그 강 앞이었다. 에펜 왕국의 달리아 영지, 근원의 숲 안을 가로지르는 르네아 강이라고 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멀거니 눈만 깜빡거렸다. 지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정령왕이 어떻게 공간 이동 마법을…….”
나와 마찬가지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시벨리우스가 당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제야 멈췄던 머리가 간신히 돌아갔다. 아, 그렇구나. 공간 이동 마법이었다. 다리에서 힘이 풀리는 걸 느끼며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엘!” 깜짝 놀란 시벨리우스가 급히 나를 부축했다.
“왜 그래? 괜찮아?”
다급히 살피는 그에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주고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엘뤼엔이 담담한 시선을 보내왔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그걸 왜 잊고 있었을까. 엘뤼엔은, 내 굉장한 아버지는 엘퀴네스 시절에도 공간 이동 마법을 쓸 수 있었다고 했다.
“……아버지.”
“왜.”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그간의 고생길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기나긴 항해에 지쳐 있던 일이나 기차를 놓쳐 험준한 산맥을 타야 했던 일, 비조를 타고 멀미했던 일, 그 외에도 이것저것. 신관들을 구출했을 때도 끝없는 동굴을 하염없이 달려야 했다. 전부 공간 이동 마법 하나면 간단히 해결될 일들이었다.
그가 나를 죽이겠다고 할 때조차 느껴본 적이 없던 배신감이 몽글몽글 차올랐다. 엘뤼엔 역시 내 서러움을 알아본 것 같았다. 그가 짧은 침묵 후에 입을 열었다.
“무엇이든 직접 경험함으로써 얻는 가치가 있지. 전부 쉽게 해결하려고 하면 못쓴다.”
눈물 날 정도로 뼈아픈 훈계였다.
* * *
엘뤼엔에게 배신감을 느낀 건 느낀 거고, 이동 마법 덕분에 일정을 아끼게 된 건 좋은 일이었다. 제국으로 건너왔을 때의 여정을 생각하면 거의 한 달이 넘는 시간을 단축한 셈이었다.
다만 여기서 생각지 못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에펜 왕국은 북쪽이고, 제국보다 온도가 낮다는 사실 말이다. 초겨울에 돌입한 계절은 제국에 있을 땐 겉옷 하나로 충분했지만 여기선 아니었다. 숨만 쉬어도 입김이 하얗게 일어나는 날씨는 이미 영하권에 돌입한 지 오래된 것 같았다.
장거리를 대비해 여러 물품을 준비해 두긴 했지만, 두꺼운 겨울옷은 가면서 장만할 예정이었던지라(예전에 입었던 건 낡아서 버렸다) 한 벌도 없었다. 식료품도 마찬가지였다. 한동안은 도심지를 전전하는 동선이라 야영할 계획이 없다 보니 약간의 비상식량만 마련해둔 참이었다. 시벨리우스도 이런 사정은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근원의 숲은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오지다. 일반적인 방법으론 생필품을 마련하기가 힘들다는 소리다. 혹시 몰라 기억하는 길을 따라 랑시의 집을 찾아가 봤지만 이미 허물고 이사한 건지 터만 덜렁 남아 있었다.
“어느 분께서 공간 이동을 할 수 있다고 미리 말씀해주셨으면 이런 상황도 대비했을 텐데요.”
“그래서 불만이라면 다시 제국에 데려다 놔주지.”
“아하하, 아닙니다. 불만이라뇨. 큰일 날 소리를 하시네요.”
서늘한 눈길에 냉큼 웃으며 대답했다. 제국에 다시 떨어진다니, 이게 결코 빈말이 아니라는 점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래, 준비 없이 오면 좀 어때. 추위는 생각보다 버틸 만하고, 식량이야 정 안 되면 예전처럼 토끼라도 사냥하면 된다. 어차피 단단히 준비해왔어도 언젠가는 떨어질 테니 민가를 들르긴 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애초에 문제 삼을 부분도 아니었다. 게다가 이번 여정엔 치트키까지 있었다.
“일단 오늘은 여기서 야영하는 거지? 천막은 내가 칠게.”
시벨리우스가 빈 공터에 맞춰 말뚝을 박기 시작했다. 언젠가 봤던 것처럼 글자를 적은 종이를 하나씩 깔아둔 채였다. 이윽고 짙은 바람이 불더니 그의 눈동자 색이 변하며 이마에 금빛 뿔이 돋아났다. 주문이 하나씩 뱉어지면서 사방에 빛줄기가 치솟아 올랐다. 이 또한 익숙한 광경이었다. 그 모든 과정이 끝났을 땐 우리는 아늑한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
“진법과 아공간을 활용해서 만들어본 건데 어때?”
“역시 치트키…….”
“치트, 뭐? 그건 무슨 뜻이야?”
“네가 최고라는 뜻이었어.”
그간 노숙할 일이 있을 때마다 이 능력이 얼마나 사무치게 그리웠던가! 두 손을 꼭 잡고 말하니 눈을 동그랗게 뜬 시벨리우스가 상기된 얼굴로 웃었다.
“마,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다. 어쨌든 앞으로 어딜 가든 숙소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응, 너만 믿을게!”
“저건 잘해 주기만 하면 최고래.”
순간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엘뤼엔이 심기가 불편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잘해 주기만 하면 최고라고 한다니. 내가 그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굴었나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그랬던 것 같다. 조금 반성하기로 했다. 그보다 엘뤼엔의 말투가 조금 달랐던 것 같은데, 착각인가? 워낙 스치는 소리라 확실하지 않았다.
“엘, 배고프진 않아?”
“아, 그러고 보니 벌써 점심시간 때네. 뭐 좀 먹을까?”
“그럼 식사를 차릴게. 뭔가 먹고 싶은 거 있어? 재료가 별로 없어서 만들 수 있는 게 얼마 없긴 하지만.”
싱긋 웃은 시벨리우스가 조리도구를 꺼내 들었다. 주방에 서서 허리에 앞치마를 두르는 광경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엘?”
“어어, 아무것도 아냐. 나 콩 수프 먹고 싶은데…….”
“콩 수프? 다행이다. 그건 할 수 있을 것 같아. 콩 수프 좋아해?”
“응, 제일 좋아해.”
“그럼 콩 수프를 식전 음식으로 하고, 그거랑 어울리는 정찬으로 준비할게.”
세상에, 어떡하지. 근래 들어 이보다 감동한 순간이 없는 것 같다. 홀린 기분으로 고개를 멍하니 끄덕이니 엘뤼엔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요물이 달라붙었군.” 불만스러운 중얼거림이 이어졌으나 듣지 못한 척했다. 이 와중에도 얼굴이 실실거리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어쨌든 시벨리우스가 차려준 식사는 매우 훌륭했다. 이프리트가 정령계에 돌아간(?) 후로는 누군가와 식사 시간을 함께하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아 점심을 먹으며 우리는 앞으로 이어질 일정을 의논했다.
“이 숲을 조사하려는 거야?”
“응, 일단은 그래. 처음엔 숲 위주로만 돌다가 점점 범위를 넓혀가 보려고 해. 그래서 말인데, 식사 당번을 정하자.”
“식사 당번? 내가 한 음식이 질릴까 봐 그래?”
“그럴 리가 있나. 네 요리는 질릴 수가 없어. 마음 같아선 매일 매일 만들어달라고 하고 싶지. 그래도 식사 차리는 게 보통 일은 아니잖아. 한 사람이 다 감당하는 건 불공평한 것 같아.”
“난 매일 해도 상관없는데.”
“안 돼. 오늘 저녁은 내가 할게.”
“으음, 알겠어.”
시벨리우스는 아쉬운 얼굴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엘뤼엔이 고개를 젓는 것이 보였다. 쓸데없는 일에 기력을 소비한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내가 만든 음식을 한 입 먹어본 시벨리우스가 빙긋 웃었다.
“엘, 그냥 식사는 내가 맡을게.”
“……별로야?”
“식사는 내가 맡을게.”
두 번이나 같은 말을 하는 걸 보면 진짜 별로인가 보다. 솔직히 내가 먹어도 맛이 없긴 했다. 대충 괜찮아 보이는 건 다 집어넣었더니 이도 저도 아닌 이상한 맛만 됐다. 원래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너무 욕심을 부린 게 문제였나 보다. 다음엔 더 잘 해보겠다고 말해보려다가 강렬한 눈빛에 압도되어 그냥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잘 만들어봤자 먹을 만한 정도지, 맛있게 할 자신은 없었다.
“네가 제일 문제야, 네가.”
어디선가 타박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마침 나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참이라 이게 내면의 울림인지 또 착각한 건지조차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다음날부터 이어진 일과는 단순했다.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주위를 가볍게 돌아본 다음, 다시 점심을 먹고 좀 더 멀리까지 나가본다. 돌아와서 저녁을 먹으면 그날 하루의 마무리였다. 그렇게 온종일 주위를 탐색하다가 일대를 충분히 돌아봤다 싶어지면 장소를 옮겼다. 그러다 보니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일들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게 몬스터 사냥이었다.
“키이익!”
“엘! 뒤쪽!”
다급히 울리는 경고에 곧장 돌아서며 검을 뻗었다. 뛰어올라 덮쳐들던 원숭이 머리의 몬스터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완전히 숨통을 끊어내고 난 후엔 더는 달려드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주위를 돌아보니 다른 쪽 몬스터를 처리한 시벨리우스가 가까이 다가왔다.
“고생했어, 엘. 나머진 다 도망간 것 같아.”
“응, 너도 고생했어.”
괴물의 숲이라고도 불린다더니. 누가 도착하기 무섭게 몬스터부터 만난 곳 아니랄까 봐 근원의 숲 안에는 정말 몬스터가 많았다. 안으로 들어서면 들어설수록 더 우글거리는 것 같았다. 그만큼 거추장스러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긴 했다. 이래서야 누군가가 지나가는 길에 우연히 라피스를 주워갔을 확률은 거의 없는 셈이었으니까.
‘떨어진 장소도 꼭 자기 같은 곳만 골랐다니까.’
닿지도 않을 푸념을 삼키고 몬스터 시체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쭈그리고 앉아 작업을 시작하니 옆에 따라 앉은 시벨리우스가 도와주면서 물었다.
“이것도 수거하는 거야?”
“응, 원숭이 머리 고블린은 이빨이랑 손톱이랑 꼬리털이 쓸 만하거든. 괜찮은 값에 팔릴 거야.”
헌터가 되기 전부터 알게 된 진실이 있다면, 몬스터는 전부 돈이라는 거다. 원해서 하는 사냥은 아니지만 눈에 뻔히 보이는 재산들을 외면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전투를 마친 후에는 값나가는 것 위주로 부산물들을 빠짐없이 챙기는 중이었다. 자격증 시험을 위해 억지로 공부해둔 지식이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렇게 모은 부산물들은 한 주에 한 번씩 장을 볼 겸 민가로 내려가는 김에 처분했는데, 모은 금액이 벌써 상당했다. 정작 제도에 있을 때보다 여기 와서 더 헌터다운 생활을 하는 것 같았다.
“다 됐어. 이제 그만 돌아가자.”
뒷정리를 마친 후 챙겨 든 부산물을 자루에 쓸어 담고 일어났다. 시벨리우스도 몸을 털고 일어섰다. 그때 문득 나를 돌아보던 그가 한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엘, 장갑이 많이 해졌어.”
“응? 아, 그렇네. 이게 마지막 여분이었는데. 마침 내일이 마을 가는 날이던가? 잘됐다. 장갑도 마련해야겠네.”
“그러고 보니 엘은 항상 장갑을 끼고 있는 것 같아. 잘 때도 벗지 않던데, 불편하지 않아?”
“아, 그냥 습관 같은 거라서. 안 끼고 있는 게 오히려 더 불편하더라고.”
“그렇구나. 그럼 엘, 나중에 내가 장갑 만들어 줄까?”
<저기, 엘. 내가 장갑 만들어 줄까?>
순간 겹치는 광경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했다.
“어? 응?”
“전에 우연히 알게 된 건데, 오래 써도 해지거나 망가지지 않는 가죽이 있다고 들었어. 착용감도 놀라울 정도로 편하대. 그걸로 장갑을 만들면 계속 바꿀 필요가 없잖아.”
“어, 그렇긴 할 텐데…….”
“실은 공작저에 있을 때 재봉을 배웠거든. 아직 어설프지만 본격적으로 연습해보려고 해. 쓸 만한 것을 만들 수 있게 되면 네 장갑도 내가 새로 만들어 줄게.”
수줍게 웃으며 말하는 얼굴에 잠시간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 그래. 그게 그래서였구나.>
언젠가 그가 중얼거렸던 소리가 떠올랐다. 웃고 싶은 건지 울고 싶은 건지 모를 표정을 지은 채 나를 빤히 바라보던 시선도. 시벨리우스는 과거의 내가 장갑을 꼈던 진짜 이유를 그때 알아차렸던 거다. 손등에 있는 마신의 문장을 가리기 위해서였다는 걸.
어쩌면 내가 시간 여행을 한 거였다는 사실도 같이 알아차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에 대해 아무 언급도 하지 않았다.
말해도 믿지 않을 거고, 어떤 식으로든 언급하는 자체에 서로 상처받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 모든 걸 혼자서 감당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