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548)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548화(548/608)
제548화
“어쨌든 찾아서 다행이야, 엘. 축하해.”
그에 비하면 시벨리우스는 얼마나 착한가. 그간 헛수고를 한 거나 다름없는데도 내 일정을 망치지 않았다는 사실에만 안심했는지 그는 무척 표정이 밝았다. 때마침 주문한 음식이 나오면서 한결 편안한 분위기로 식사가 시작됐다.
“아, 이거 맛있다.”
“그래?”
“내가 좋아하는 맛이야.”
요리를 좋아하는 시벨리우스는 맛에도 까다로운 편이다. 그가 이렇게 말한다는 건 정말 맛있다는 소리였다. 그냥 보이는 대로 들어온 곳인데 다행히 맛집이었나 보다. 대화 소리가 들렸는지 멀찍이서 우리 반응을 살피고 있던 식당 주인이 눈에 띄게 좋아하는 게 보였다.
그때 종소리가 울리며 누군가가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다음 음식을 향해 포크를 움직이던 시벨리우스의 손길이 우뚝 멈췄다. 왜 그러냐고 물으려는데 낯선 이가 우리 좌석에 걸터앉는 게 더 빨랐다. 당황해서 돌아보자마자 보이는 얼굴에 그대로 몸이 굳었다. 예전에 본 적이 있던 사람이었다. 다부진 체격, 짙은 흑발에 보라색 눈동자. 다비안과도 일치하는 조합이었지만 인상이 한층 사납다는 점에서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그날 노예 시장에 잡혀 있던 유니콘 중 한 명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그냥 앉아 계십시오, 시벨리우스 님. 모시러 온 거 아닙니다. 거기, 너도.”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는 순간 무뚝뚝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귀를 의심하게 하는 말에 어정쩡하게 몸이 멈춰 섰다. 다음 행동에 갈피를 잡지 못한 건 시벨리우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자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니까 앉으세요.”
미간을 문지르는 행동에 피로감만 가득한 걸 보면 속일 의도는 없는 모양이다. 내가 먼저 자리에 앉자 시벨리우스도 우물쭈물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오랜만이야, 아렐.” 기어들어 가듯이 이어진 인사를 듣고 나도 남자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 그날 만난 세 유니콘 중에서 제일 까칠한 성격이었다는 것도. 남자, 아렐이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시벨리우스 님. 당신이란 분은 도대체…….”
“내가 여기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지금 그런 게 중요합니까?”
노려보는 눈동자가 형형하게 타올랐다. 안 그래도 어색하게 굳어 있던 시벨리우스의 얼굴이 움찔 떨렸다. 방황하는 시선이 갈 곳을 잃은 걸 보고 아렐을 돌아보았다.
“애 압박하지 말죠?”
“……뭐?”
“험악하게 노려보지 말라고요. 말투도 사납게 하지 말고요. 긴장하잖아요.”
입을 벌린 아렐은 기가 막힌다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래서 네가 뭐 어쩔 건데라는 시선으로 맞받아쳤더니 헛숨을 삼킨 그가 이내 우물거렸다.
“……노려본 게 아니라 원래 이런 인상이고 이런 말투다.”
“좋아요. 마음엔 안 들지만 악의는 없었다니 이해할게요. 그럼 이번엔 질문에 대답해요. 여긴 어떻게 알고 쫓아왔어요?”
“쫓아온 게 아니라 난 원래 이곳에 있었다. 나야말로 시벨리우스 님이 여기로 오실 줄은 몰랐…… 그런데 왜 내가 이런 걸 너한테 설명해야 하지?”
“그러게 말이에요. 처음부터 시벨의 질문에 대답했으면 이런 과정이 필요 없었겠지요?”
일을 번거롭게 만든 건 너라는 뜻으로 웃어주니 아렐은 할 말을 잃은 표정을 지었다. 다시 시벨리우스를 돌아보는 얼굴엔 체념이 가득했다.
“정말 시벨리우스 님이 여기로 오실 줄 몰랐습니다. 저야말로 묻고 싶군요. 엊그제 당신의 마지막 행적이 보고된 게 에펜 왕국이라고 들었습니다. 하루 이틀 만에 넘어올 거리는 아닌데, 대체 어떻게 되신 겁니까?”
“음, 그렇게 됐어.”
“게다가 오셔도 하필이면 이곳에……. 이걸 대체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이 나라는 유니콘 사냥꾼이 가장 많습니다. 알고는 계신 겁니까?”
뭐야, 그렇게 위험한 나라였어? 갑갑하다는 얼굴로 머리를 쓸어넘기는 아렐을 보다 이어진 말에 뜨악해서 엘뤼엔을 돌아보았다. 그는 창밖을 구경하고 있을 뿐 이 상황 자체에 무심한 모습이었다. 그가 일부러 이 나라를 택했다는 상상은 피하기로 했다. 살다 보면 모르는 게 더 약인 일도 있는 법이다.
“몰랐지만 딱히 상관없어. 덕분에 모두가 꺼리는 곳이라면 오히려 더 잘됐네.”
“…하아, 물론 그러시겠죠. 어떻게 이런 점마저…… 아니, 아닙니다. 어쨌든 그동안 잘 지내셨던 것 같군요.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고마워.”
“여전히 돌아오실 생각은 없으신 겁니까?”
멈칫한 시벨리우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심경이 복잡해 보이던 아렐도 그럴 줄 알았는지 그리 실망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대신 나를 불만스럽게 한 번 노려보았다.
“저 인간이 대체 뭐라고 당신을 꼬신 건지 모르겠지만…….”
“마을을 나오기로 한 건 내 의지야. 그리고 엘은 좋은 사람이야. 내 친구고.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설마 영원히 돌아오지 않으시려는 건 아니겠지요?”
“그건 아냐. 하지만 지금은 이대로가 더 좋아.”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시벨리우스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처음으로 살아 숨 쉬는 기분이야.”
“…….”
“부탁해, 아렐. 날 보지 않은 거로 해줘. 때가 되면 내 발로 돌아갈게. 모두가 염려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루세프 님의 이름으로 맹세해.”
얻어맞은 것처럼 굳어 있던 아렐이 겨우 정신을 차린 듯 숨을 내쉬었다. 그는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시벨리우스를 바라보다가 매우 피곤한 낯으로 마른세수했다.
“조건이 너무 빈약하군요. 염려하는 일은 당연히 일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정도의 자각도 없으신 분이었다면 저도 이렇게 얌전히 대화만 하고 있진 않았을 겁니다.”
돌아온 대답은 여전히 쌀쌀맞기만 했다. 바늘 하나 들어가지 못할 것처럼 견고한 태도에 시벨리우스의 표정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그 침울한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렐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순간 그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간간이 소식이나 전해주십시오.”
“……!”
움찔한 시벨리우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가 이렇게 나올 줄은 나도 몰랐다. 아렐이 멋쩍은 듯이 시선을 피했다.
“저와 카리안은 웰디 님의 젖 형제지만 어릴 때부터 쭉 지켜봤던 건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동안 부담감이 크셨겠죠. 저 같은 사람은 상상하지도 못할 의무와 책임감에 짓눌리셨을 거라는 거 잘 압니다.”
“아렐…….”
“그간 어쩔 수 없다는 핑계에 휘둘려 당신께 못 할 짓을 많이 했습니다. 깨닫는 게 너무 늦어서 죄송할 뿐입니다. 제가 책임지고 개선하겠습니다.”
그래도 유니콘 전부가 문제인 건 아니었구나. 시벨리우스가 한순간에 불현듯 내려놓기를 결정한 것처럼, 지난 시간 동안 그에게도 깨달은 바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번에 표정이 흔들린 건 시벨리우스 쪽이었다. 설마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는 듯 당혹감을 드러낸 그는 여러 번 입을 벙긋하다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고마워.”
“인사를 듣자고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마을이 중요한 회의를 앞두고 있다는 건 당신도 알고 계실 테지요. 길어봤자 몇 년 안으로 결정이 날 겁니다. 그전까지 방황은 적당히 하고 돌아오십시오.”
관점이란 참 신기하다. 끝까지 무뚝뚝한 말투에 냉정한 얼굴인데도 이제 그가 하는 말들이 전혀 다르게 들렸다. 하긴 누구라도 빨갛게 달아오른 귀 끝을 발견하면 어쩔 수 없을 거다.
아렐은 그대로 문을 박차고 나가려 했다. 굴러 들어온 기회를 얌전히 떠나 보낼 생각은 없던지라 얼른 다가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갑자기 멈춰 세우는 손길에 당황하던 그가 붙잡은 사람이 나라는 걸 확인하곤 눈을 치켜떴다. 아랑곳하지 않고 방긋 웃어줬다.
“혹시 지금 한가해요?”
“……뭐?”
홉뜬 눈동자에 당혹감이 더 짙어졌다. 위기감을 느꼈는지 억지로 빼내려는 팔을 더 강하게 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사실 바빠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결과는 똑같을 테니까.
“심부름 하나 하지 않을래요?”
* *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내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하나다. 다른 사람을 부리는 거다. 마침 눈앞에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는 적임자까지 있었다. 이걸 놓치는 건 차려진 밥상을 걷어차는 거였다.
“정말 드래곤의 각인이군.”
상황을 설명하는 내내 경계를 멈추지 못하던 아렐은 내가 건네준 란타샤의 서신을 읽어보고서야, 그리고 하단에 새겨진 란타샤의 각인이 진짜라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내 말을 믿었다. 끝까지 못마땅한 표정을 감추지는 못했지만.
“인간인 네가 어떻게 드래곤과 친분을 쌓은 거지?”
“그런 걸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내 교우관계 사정까지 밝혀야 하나요?”
“하긴, 룬도 꼬여낸 인간이니…….”
아렐의 한숨이 깊어졌다. 그들 앞에서 대놓고 시벨리우스에게 찾아오라고까지 말한 전적이 있는 데다가 실제로 지금 같이 다니고 있으니 원망을 사는 것도 어쩔 수 없긴 했다. 그가 엘뤼엔을 힐끔거렸다.
“저자도 인간은 아닌 것 같은데.”
“네, 뭐…….”
인간이 아닌 정도가 아니라 정령왕이지만, 이건 그의 심장 건강을 위해 밝히지 않기로 했다. 같은 생각을 했는지 시벨리우스도 뭐라 말하려다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무슨 배려를 받는지 모르는 아렐은 나를 기묘한 생물인 것처럼 바라보는 중이었다.
“하이튼의 신물은 아직 필요해서 바로 돌려드리긴 어렵다. 애초에 따로 기한을 정하고 빌린 것도 아니라 이 서신을 장로께 가져가 봤자 조금 더 유예를 달라는 답신을 주실 뿐일 거다.”
“음, 그럼 잠깐 빌리는 건 안 될까요? 이삼일 정도면 되는데요.”
“드래곤 란타샤가 네게 신물의 인도를 맡긴다고 했으니 그 정도를 요청할 권리는 있을 것 같군. 이건 내가 장로께 잘 말씀드려 보도록 하지.”
“와, 고맙습니다. 그럼 부탁할게요.”
사람 하나는 잘 골랐다는 생각에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데 어째선지 아렐의 표정은 더욱 복잡해졌다. 그는 불안해하는 시선으로 나와 시벨리우스를 번갈아 바라보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시벨리우스 님, 잠깐 저와 대화 좀 하시겠습니까?”
뜬금없는 요청에 당황한 시벨리우스가 긴장한 얼굴로 그에게 다가갔다. 두 유니콘은 멀찍이 떨어진 자리로 가서 한참을 수군거렸다. 뭔가를 추궁하는 듯하던 아렐이 곧 나를 곁눈질하면서 경악하는 걸 보니 대충 무슨 내용이 오가는 건지 뻔했다. 그러고 보니 그날 만난 세 유니콘은 날 여자로 알고 있다고 했었지. 이제야 그 오해가 풀렸나 보다.
“염색하고 머리도 잘랐는데 왜지?”
“내 머리가 길어도 남성이라 보는 것과 같은 이치겠지.”
“…….”
현실도피 좀 해보겠다는데 하나밖에 없다는 아버지가 도와주질 않는다. 야멸차게 비수를 박고도 무신경한 얼굴을 가만히 노려보다가 근처에서 쭈뼛거리고 있던 식당 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느닷없이 아렐이 나타났을 때부터 싸움이 날 거라 생각한 건지 그는 내내 이쪽을 조마조마하게 주시하던 중이었다.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보내니 당황한 남자가 곧장 다가왔다.
“예, 손님. 뭔가 더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딱히 별건 아니고요. 그냥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네, 말씀하세요.”
목소리를 낮추니 긴장한 식당 주인도 덩달아 목소리를 낮췄다.
“사장님이 보시기엔 제 성별이 뭐인 거 같아요?”
“네? 여성분 아니십니까?”
젠장, 정말 아무런 효과가 없나 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잠시 고민하는 척이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어떻게 저렇게 곧바로 답할 수가 있어! 옆에서 엘뤼엔이 피식 웃는 게 적나라하게 느껴져서 더 심란했다.
“불합격이에요.”
“아, 죄, 죄송합니다?”
“사과는 됐어요. 헷갈리게 생긴 제가 먼저 잘못했죠. 하지만 합격은 못 하셨으니까 다음 질문에도 대답하셔야겠어요.”
“아하하, 알겠습니다. 이번엔 뭘 대답하면 됩니까?”
“아렐을 부른 거 당신이죠?”
어색하게 웃던 가게 주인이 그대로 뻣뻣해졌다. 거짓말은 잘 못 하는 성격이구나, 사시나무처럼 파르르 떠는 남자의 입술을 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짐작대로였다. 아무리 아렐이 이 지역에 머물고 있다지만 때마침 우리와 한 가게에서 우연히 마주친 건 너무 억지스럽다. 그조차 자신이 오게 된 경위를 정확히 설명하지 않고 흐지부지 넘기지 않았던가. 그보다는 시벨리우스를 알아본 누군가가 그에게 몰래 연락했다는 쪽이 더 이치에 맞을 거다. 이 가게 안에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고 말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잘…….”
“계속 모르는 척해도 상관없어요. 대신 시벨한테 당신이 밀고자라고 밝힐 생각인데, 괜찮겠어요?”
“그건 안 됩니다!”
반사적으로 대답한 남자가 깜짝 놀라 얼른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소리를 들은 시벨리우스가 이쪽을 돌아보는 게 느껴졌다.
“아, 그렇구나. 아이스크림은 안 돼요? 그럼 어떤 게 되는 건지 말해주세요.”
“예? 아…….”
대충 상황에 맞추라는 시선을 보내니 남자가 복잡한 얼굴로 마른 침을 삼켰다.
“……사과 파이와 스콘은 됩니다. 푸딩도 되고요.”
“그럼 그거 전부 주시고요. 음료는 뭐가 있을까요?”
“아, 음료 종류라면…….”
주문을 추가하는 것처럼 시간을 끄는 동안 이쪽에 닿았던 시선이 사라졌다. 아렐조차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긴장해서 얼어 있던 남자가 안도한 얼굴로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이제 솔직히 대답할 마음이 생겼어요?”
작은 소리로 물은 말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남자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알린 게 맞습니다. 하지만 위험하게 하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아렐은 제 친구입니다. 저 아이를…… 시벨리우스를 이해하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것 같아서 저도 그냥 넘어가는 거예요. 당신도 유니콘인 거죠?”
남자가 의외라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그걸 알아보시겠습니까?”
“정황상 유추예요. 평범한 인간이 시벨리우스를 한눈에 알아볼 리가 없으니까요. 평생 마을에 갇혀 살던 룬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라면 유니콘밖에 없겠죠.”
“아, 그건 그렇군요.”
“정작 시벨리우스는 당신을 모르는 것 같지만요.”
“저 아이가 어릴 때 보긴 했지만, 기억이 남아 있지는 않을 겁니다.”
씁쓸하게 대답한 남자는 이제 변명은 완전히 단념한 분위기였다. 시벨리우스를 아이라고 표현하는 걸 보면 생각보다 나이가 많은 편인가. 왠지 너무 오래돼서 잊어버렸을 거라는 뜻 같지는 않다. 자신을 잊어버린 게 당연하다는, 강한 확신에 더 가까웠다.
그가 무심결에 머리칼을 쓸어올리면서 덥수룩한 앞머리에 가려져 있던 눈동자가 보였다. 결 좋은 갈색 머리칼과 아주 잘 어울리는 깨끗한 녹안이었다. 후줄근한 차림에 내내 자세를 움츠리고 있어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꽤 단정한 분위기의 미인이다. 그 얼굴에서 누군가가 연상되는 건 그저 기분 탓일까.
“사실 이런 데서 마주칠 줄은 몰라서 저도 조금 얼떨떨합니다. 저 아이가 인간 친구를 만들 줄은 더 몰랐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름을 물어봐도 될까요?”
“그럼요. 전 엘이라고 해요. 당신은요?”
물어보면서도 돌아올 대답은 이미 예상했다. 처음 아렐이 했던 말 중에서 유난히 마음에 걸린 부분들이 있었다. ‘오셔도 하필이면 이곳에.’ ‘어떻게 이런 점마저.’ 그저 평범한 타박이라기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스스로 삼키는 모습에서 누군가를 의식하는 게 느껴졌다. 그 누군가가 꽤 높은 확률로 눈앞에 있는 이 남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 리글레오라고 합니다.”
남자가 제 이름을 선뜻 대답했다. 아마 그 정도로는 자신이 누군지 바로 알아 차라지 못할 거라 여긴 듯하다. 내가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다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모르겠다.
<리글레오 룬.>
언젠가 들었던 낮은 목소리가 떠올랐다. 비틀린 미소를 꾸역꾸역 삼키던 입술이 그다음 말을 내뱉기까지 얼마나 힘겨워했는지도.
<내 형님이야.>
그렇기에 나도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시벨리우스의 일평생을 장악한 사람이자, 그가 싫어했다고 고백한 사람. 하지만 어쩌면 진심은 그렇지도 않았을 사람.
말로만 듣던 아셀의 시조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