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559)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559화(559/608)
제559화
“그래서 아예 네가 신이 되기로 한 거야?”
아일브라 백작 가문은 세이렌의 혼을 이어받아 왔다고 했다. 세례(흑주술이겠지만)를 통해 계승된다고 했으니 아마 교주의 혼에 깃드는 방식이었을 거다. 부활에 필요한 몸은 따로 필요했던 걸 보면 그 상태에선 완전히 장악할 수 없는 건지도.
어쨌든 그 교주인 왕비의 혼이 사라졌으니 세이렌 역시 사라졌다는 소리다. 그런데도 성역이 온전하다는 건 누군가가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다는 거겠지. 왕비가 눕혀진 제단과도 연결된 기이한 마법진, 여자들을 이용한 찬양가. 인어들이 왕세자를 따르고 있는 것만 봐도 모든 상황이 명백했다.
“세이렌도 어차피 진짜 신은 아니다. 한땐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신적에서 지워진 지금은 그저 능력이 조금 있는 혼에 불과할 뿐이지. 명계의 눈을 피해 인간의 몸에 깃들지 않으면 홀로 살아가지도 못하는 잡귀 말이야. 그런 게 신이 될 수 있다면 나도 될 수 있다는 소리 아닌가?”
히죽 웃는 왕세자는 숨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인질들과 생명이 연결되어 있는 한 내가 죽일 수 없다는 걸 깨달아서인지 다시 자신감을 되찾은 것 같았다.
“세이렌의 힘을 네가 흡수한 거야?”
“그래. 아주 많이 당황하더군. 물론 그럴 거야. 설마 본인이 만들어낸 방법 그대로 자신이 당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을 테니.”
“여자들은 왜 모았어? 여자들만 모은 이유가 있어?”
“인간들의 신앙이 필요했다. 하지만 아무거나 다 되는 건 아니라서, 내가 흡수한 세이렌의 힘과 상성이 맞아야 했지. 마침 어머니가 모아둔 여자들로 시험해봤더니 아주 적합하더군.”
그래서 내친김에 같은 요건을 갖춘 이들을 더 납치하기 시작했다는 소리였다. 말이 좋아 신앙이지 일종의 제물인 셈이다. 카류안이 제물로 삼은 건 흠 없고 재능있는 어린아이들이었던가. 시대를 막론하고 악이 설치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건 늘 약자들이었다. 그 사실이 새삼 씁쓸하게 와 닿았다.
“궁금한 게 해소됐다면 이만 날 놓아주지 않겠나?”
“뭐?”
“난 세이렌처럼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 복수심에 눈이 멀어 세이렌을 누르고 신이 되려 했으나 지금 이 상태도 충분히 만족스러워. 날 풀어주면 인어들과 함께 이곳을 떠나겠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살겠다고 약속하지.”
왕세자가 말끔한 얼굴로 헛소리를 했다.
“너라면 널 풀어주겠어? 네가 하는 말을 어떻게 믿어?”
“그럼 어쩔 텐가. 난 여자들과 연결된 주술을 풀 생각이 없으니 그대가 날 죽이지도 못할 거 아닌가. 혹시 이대로 영원히 함께하자는 건가? 그것도 나쁘진 않지.”
“미쳤어?”
기겁해서 소리치자 왕세자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손목 지혈이 제대로 안 됐나? 실성한 것처럼 보이는 걸 보니 피를 너무 흘린 게 분명하다.
“다시 물을게. 세이렌의 힘을 네가 흡수한 거 맞아?”
“왜, 믿어지지 않나? 하긴 아직은 인어들을 다스리는 것 외에는 큰 능력이 없다. 오히려 그대가 더 신처럼 보일 정도군. 아까 그건 대체 어떻게 한 거지?”
“내 질문에나 대답해. 신도들의 신앙도 다 너한테 모였다는 말이지?”
“물론이다. 신앙의 주체가 나니까. 세이렌은 육신이 없어 우상을 만들어야 했지만 나는 아니지. 그래서 여자들의 생명도 나와 연결된 거다.”
아, 그래. 그렇단 말이지.
매고 있던 배낭을 곧바로 풀어내고 안을 열었다. 아직 가설이긴 하지만 시험할 가치는 충분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니 왕세자가 긴장하며 주춤거렸다. 몇 안 남은 그의 수하들은 막아설 엄두도 내지 못했다. 덕분에 아무런 방해 없이 다다를 수 있었다.
“뭘 하려는 거지?”
“내가 실은 이곳에 있는 사람들만 구하려고 온 게 아니거든.”
“……?”
세이렌의 힘을 정화하면 주술은 저절로 풀릴지 모른다. 그 힘을 정화할 수 있는 물건은 내가 갖고 있고. 그런 의미로 함에서 꺼낸 서클렛을 왕세자의 머리에 씌웠다. 미래의 내 애장품을 더럽히는 기분이라 매우 찝찝했지만 일단 시도해봐서 나쁠 건 없으니까. 물론 나중에 귀환하면 서클렛부터 벗어서 싹싹 씻을 예정이다.
“대체 이건 뭐지?”
얼결에 서클렛을 착용하게 된 왕세자가 눈을 멀뚱거렸다.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걸 보면 딱히 별다른 느낌은 없는 모양이다. 역시 세이렌의 동상에 걸어야 하는 건가. 괜히 눈만 버렸다는 생각에 속으로 탄식할 때였다.
“뭘 시도한 건지 모르겠지만 꽤 이상한 취향이…큭?”
비실거리며 웃던 왕세자가 돌연 눈을 크게 떴다. 나도 덩달아 놀랐다. 서클렛이 닿은 부분이 지글거리며 타들어 가고 있었다. 기겁한 왕세자가 벗기 위해 움켜쥐었지만 서클렛은 고정된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손도 데였는지 더욱 큰 비명만 질러댔다.
“아악! 크아악!”
“저, 전하!”
“뭐, 뭐야! 대체 전하께 무슨 짓을 한 거냐!”
당황한 수하들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서클렛은 왕세자의 피부를 태워가고 있었다. 이마에서 시작된 검은 그을림이 빠른 속도로 얼굴 전체로 번져갔다. 불씨는 있지도 않은데 분신한 사람을 보는 듯했다. 그 보이지도 않는 불씨가 그의 목을 타고 내려가 전신을 전부 뒤덮었을 때였다.
“커어억!”
버둥거리지도 못한 채 입을 벌린 상태로 굳어 있던 왕세자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부릅뜬 눈동자에 핏발이 형형했다. 그 상태에서 왕세자가 내게 천천히 팔을 뻗었다. 다가오려는 듯이 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곤 그 자세로 그대로 허물어졌다.
쓰러진 게 아니다. 말 그대로 정말 ‘허물어졌다.’ 왕세자는 인간의 형상을 남기지도 못했다. 완전히 무너진 자리에 남은 건 새카맣게 쌓인 잿더미뿐이었다. 그 흉한 잿더미 위에, 은빛으로 반짝이는 서클렛이 우아한 모습으로 놓여 있었다. 변색되거나 모양이 변형되는 일조차 없이. 함에서 꺼낼 때 모습 그대로,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그 모습이 의기양양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그저 기분 탓일까.
‘……너 나한테 대체 뭘 준 거야?’
“음, 미안.”
라피스도 놀라긴 했나 보다. 어지간하면 미안해하는 일도 없는 녀석이 사과까지 하는 걸 보면.
“흐으으…….”
이상한 신음을 듣고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공포에 질린 왕세자의 수하들이 허둥거리며 바닥을 기고 있었다. 달아나고 싶은데 다리에 힘이 풀려 움직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눈앞에서 사람 하나가 통째로 태워지는 걸 봤으니 충격이 클 만도 했다. 주인을 잃은 인어들 역시 이미 빠른 속도로 달아나는 중이었다.
‘헉, 그러고 보니 왕세자가 죽으면 안 되는데?’
퍼뜩 떠오른 사실에 황급히 여자들 쪽을 돌아보았다. 모두 쓰러져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들과 마주쳐서 안심했다. 놀란 것 같긴 하지만 다들 멀쩡한 모습이었다. 다행히 정화되면서 주술도 효력을 잃었나 보다. 그걸 증명하듯 바닥에 선명했던 마법진이 흔적도 없이 지워져 있었다.
“다들 괜찮으세요? 움직일 수 있겠어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여자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에 끌어안고 울기 시작하는 이들도 있었다. 자세한 피해 상황은 나중에 확인하기로 하고, 우선 멍하게 앉아 있는 웰디에게 다가갔다.
“어디 다친 곳은 없어요, 웰디?”
폭력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지만 혹시 또 모르는 일이다. 상처라도 있는 건 아닌지 가까이 다가가 살피니 웰디가 붉어진 눈시울로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제가 폐를 끼쳤네요. 미안해요.”
“아뇨, 납치한 놈들이 나쁜 건데 왜 웰디가 사과를 해요. 미리 주의하지 못한 건 모두가 마찬가지고요. 안 그래도 고생했는데 자책까지 하지 마세요. 일단 일어날 수는 있겠어요?”
손을 내밀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웰디가 내 팔을 잡고 일어섰다. 맞잡은 손에서 약한 떨림이 느껴졌다. 안색도 평소보다 몹시 창백해서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여긴 어떻게 찾은 건가요? 다들 숲에서 헤매고 있다고 들었는데…….”
“제가 운이 좀 좋았어요. 저쪽이 방심한 거죠.”
“혹시 당신이 이 숲을 찾은 이유가 이거였나요? 납치된 사람들을 구하려고?”
“음, 뭐, 비슷해요.”
원래 목적은 성역을 정화하려던 거지만, 결과만 좋으면 다 된 거지. 임무를 완수한 건 확실한지 숲에 자욱하던 안개가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가짜 신을 위해 뭉쳐진 힘들이 사라지고 있는 거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동상에도 서클렛을 걸어볼 생각이긴 했다. 이왕이면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게 나을 테니까.
……물론 그러려면 그 전에 먼저 넘어야 할 산이 있긴 하다. 여전히 잿더미 속에서 홀로 빛나고 있는 서클렛을 떨떠름하게 바라봤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는데, 왠지 전보다 활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거 그냥 물건인 건 맞는 거지? 평범한 장신구인 줄 알았던 게 알고 보니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었다는 기분이다. 안에 죄인이 갇혀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찜찜했다. 라피스가 준 거니까 차마 버릴 순 없겠지만, 앞으로 이걸 계속 착용하고 다닐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용기를 내 다시 주워들긴 했다. 잿가루에 닿지 않게 조심스럽게 들어 올린 후 빠르게 털고 있자니 어디선가 쏟아진 물이 서클렛을 씻어냈다. 엘뤼엔이었다.
“앗, 고마워.”
―그건 다시 넣어두려고 회수한 건가?
“아니, 일단 세이렌 동상에도 올려 보려고.”
그러자 휙 떠오른 서클렛이 내 손을 떠나 빠른 속도로 허공을 날아갔다. 잠시 후 안착한 곳은 정확히 세이렌의 동상 머리 위였다.
―이러면 됐나?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아버지 하나는 참 잘 만났지! 감동의 눈길을 보내고 있으려니 옆에서 헛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웰디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사람이 근처에 있었지.
“바, 방금 그건 뭐였죠? 장신구가 혼자 하늘을 날아갔어요. 제가 제대로 본 게 맞나요?”
엘뤼엔이 보이지 않는 웰디로선 그렇게 오해할 만한 광경이긴 했다. 사람을 잿가루로 만들다 못해 혼자 날아다니는 서클렛이라니. 귀신 붙은 물건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아이처럼 놀란 얼굴에 웃음이 나왔다.
“아버지가 한 거예요.”
“아버지? 아, 마법이었군요! 그분도 이 근방에 계신 건가요? 그럼 아까 전에 병사들을 한꺼번에 처리한 것도요? 하지만 그런 마법은 들어보지 못했어요.”
“나중에 다 설명해 줄게요.”
혼란에 빠진 웰디를 대강 진정시키고 있는데 뒤쪽에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한 소녀가 우물쭈물 서 있었다. 미온 누나의 친구, 주술을 방해하다 잡혔던 바로 그 소녀였다. 처음엔 구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그러나 했다. 그런데 소녀의 입에서 나온 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단어였다.
“……엘?”
“음?”
“저기, 아니시면 죄송한데요. 혹시 성함이 엘 아니세요?”
헉, 날 어떻게 아는 거지? 다른 지역에서 왔다더니 혹시 세이크 제국인인가? 술법학부 학생이라고 했으니 나에 대해 알아봤을 수도 있다. 정령왕의 계약자는 어느 나라에서나 관심을 보이는 존재이니까. 날 따라다니던 취재진 중에선 외국에서 온 기자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고작 그런 정도가 아닌 것 같았다.
“혹시 저 모르시겠어요?”
“어? 네?”
나도 아는 사람이라고? 당황해서 눈을 크게 뜨니 소녀가 황급히 머릿수건을 끌어내렸다. 얼굴을 거의 가리고 있던 천이 사라지니 맑은 홍차색 머리카락과 바둑알처럼 검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주근깨가 뽀얗게 핀 얼굴은 무척 하얀 편이었다. 어디서 많이 본, 지나치게 눈에 익은 조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는 누군가에게 언니가 있다면 딱 저런 모습일 것 같다.
아, 설마. 말도 안 돼.
“……랑시?”
소녀의 얼굴이 바로 환해졌다.
“네! 저 랑시 맞아요! 기억하시는군요!”
“헐, 헐? 너 정말 랑시야? 어떻게 된 거야? 너 왜 이렇게 컸어? 꼬마였잖아!”
“그때가 벌써 언제인데요! 당연히 자랐죠!”
하긴 처음 이곳에 떨어진 게 이제 3년 전인가. 성장기에 3년이면 변화가 가장 클 때다. 그래도 믿어지지가 않아 계속 랑시의 모습을 바라봤다. 마른 체형은 그대로였지만 몰라볼 정도로 키가 컸다. 원래도 귀염성 있던 외모는 더 화사해진 것 같았다. 이젠 어딜 봐도 꼬마가 아니라 숙녀였다.
“와, 진짜 놀랐다. 널 여기서 만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어.”
“저도 마찬가지예요. 얼마나 심장이 두근거렸다고요! 설마설마했는데 정말 엘이었다니! 진짜 믿을 수가 없어요! 근데 금발 아니셨어요? 머리 색이 달라서 긴가민가했어요.”
“아, 원랜 금발 맞아. 이건 염색한 거야.”
“앗, 왜요? 긴 금발 너무 예뻤는데! 흑발도 어울리시지만 금발일 땐 엄청 신비로운 분위기였다고요. 그래서 저 처음엔 엘이 인간이 아닌 줄 알았잖아요.”
“맞아, 너 그때 나한테 인어 아니냐고 했었지.”
“으아아! 그걸 말하는 건 반칙이에요! 그땐 제가 진짜 아무것도 몰랐죠. 근데 지금 보니까 말도 안 되는 오해였어요. 인어랑은 비교가 안 돼요. 엘이 훨씬 더 예뻐요.”
창피해서 빨개진 얼굴로 툴툴거리는 랑시를 보고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인어에 대해 처음 알려준 사람이 바로 랑시였다. 그런데 그 인어를 계기로 재회하다니. 이게 무슨 인연인지 모르겠다. 랑시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추억에 빠진 얼굴이었다.
“다시 봐서 정말 기뻐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그럼 잘 지냈지. 나도 널 만나서 너무 기쁘다, 랑시. 넌 어떻게 지냈어? 안 그래도 근원의 숲에 방문할 일이 있어서 네 집에도 찾아가 봤었거든. 그런데 아무것도 없더라고.”
“앗, 그러셨구나! 제 학업 문제도 있고 해서 도시로 이사했거든요. 엘이 다시 오실 줄 알았으면 편지라도 남겨둘 걸 그랬어요.”
거기에 편지를 뒀어도 이미 삭아버리지 않았을까. 물론 그건 그것대로 재밌었을 거란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학교에 다니는 거야?”
“네! 수도에 있는 왕실 교육원에 다니고 있어요. 술법학부 정령학과 2학년이에요.”
자랑스럽게 대답하는 랑시의 눈동자가 별처럼 빛났다. 랑시의 모친인 에리나는 딸이 정령사가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학교부터 알아봤다는 모양이다. 안 그래도 빈집에 어린 딸을 혼자 두는 게 늘 마음에 걸렸던 참에 좋은 전환점으로 삼은 것 같았다. 이미 운영을 중단한 여관을 미련 없이 정리하고 수도로 올라와 작은 가게를 차렸는데, 장사가 잘돼서 지금은 두 식구가 남부럽지 않게 잘 산다고 했다. “모두 엘 덕분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배시시 웃는 얼굴은 3년 전 꼬마일 때와 똑같아서 감회가 새로웠다. 하지만 방긋거리던 랑시의 얼굴은 곧 급격하게 흐려졌다.
“그런데 저 이제 큰일 난 건지도 모르겠어요.”
“어? 왜? 무슨 큰일?”
“실은…… 여기로 온 뒤부터 정령이 소환되지 않아요. 아무리 불러도 나이아스가 반응을 안 해요.”
들어보니 다행스럽게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혹시 아픈 곳이라도 있나 싶어 나도 모르게 긴장한 어깨에 힘을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