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565)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565화(565/608)
제565화
“그게 아니라 엘…… 사실은 피하는 거죠?”
그런데 랑시가 생각보다 더 눈치가 빨랐다. 곧바로 정곡을 찌르는 말에 심장이 덜컹거렸다. 혹시 내가 진짜 신관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나? 어쩌면 정령왕의 계약자인 걸 알아본 건지도 모른다. 학교에 다닌다고 했으니 왕의 계약자에 관련된 소문을 들어보기는 했겠지. 정령사인데 신의 문장은 어떻게 갖고 있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하지? 어차피 이젠 사라졌는데 위조였다고 말해도 되나? 랑시가 설마 날 신관 사칭으로 고발하진 않겠지?
랑시는 좋은 아이지만 그렇다 해서 내 모든 점을 포용할 거라 생각하면 안 된다. 안 그래도 사이비 신도들한테 크게 데였으니 더 민감하게 굴 수도 있었다. 짧은 순간 머릿속이 온통 혼란해졌다. 하지만 곧 이어진 명랑한 음성에 모든 생각이 멈췄다.
“혹시 엘은 비밀 사제 같은 건가요?”
“으응?”
생각지도 못한 말에 반사적으로 돌아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랑시의 눈동자가 유난히 초롱초롱했다.
“소설책에서 봤어요. 주인공이 신전 감찰관이라고 불리는 비밀 사제단 소속이었거든요. 신의 명에 따라 세상을 방랑하면서 타락한 신전을 징벌하고 사람들을 구하기도 하는 사제래요. 엘이 바로 그런 사제인 거죠? 와아, 그런 게 정말로 있군요!”
“아…….”
상상력이 풍부한 건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구나. 그래도 그새 컸다고 동화책에서 소설책으로 발전했다. 당황해서 대답할 틈을 놓치는 동안 랑시는 확신을 굳힌 것 같았다. 큰 깨달음을 얻은 것 같은 얼굴에 비장한 표정이 서렸다.
“저 이제 알 것 같아요. 엘의 머리 색이 돌아온 것도 임무를 완수했기 때문인 거죠?”
“어, 음, 그럴지도.”
“역시!”
아, 이건 안 되겠다. 너무 해맑게 좋아하는 얼굴을 보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고개를 가볍게 저은 후 허탈한 기분으로 웃었다.
“랑시, 2학년이랬지? 학부에 소식지나 학술지 같은 거 없어?”
“있어요. 늘 챙겨보고 있어요.”
“학부 소식지면 정령사에 관한 이야기도 실리나?”
“그럼요. 유명한 정령사들 이야기는 인기 소재예요. 정령왕의 계약자들과 관련된 건 아예 수집가들까지 있을 정도인걸요. 근데 내용은 별거 없어요. 솔직히 마음대로 지어낸 이야기가 대다수인 것 같아요. 기술된 인상착의도 전부 다르거든요. 진짜 고급 정보는 귀족끼리만 공유한 대요.”
아, 그렇군. 그래서 모르는구나. 어쩐지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눈치라 이상하다 싶었다. 신관이라는 생각이 너무 확고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그런데 그건 왜요?”
“음, 아니 그냥. 너무 놀라지 말라고.”
“네? 뭐가요?”
랑시가 의아해하는 동안 손바닥을 펴게 하곤 그 위에 정령을 소환했다. 처음 나이아스 하나가 나타났을 때 눈을 크게 뜬 랑시는 순식간에 주변을 가득 채운 작은 인어들을 확인하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랑시만큼 똑똑한 아이라면 이 수많은 정령이 무슨 의미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실은 내가 이런 걸 할 수 있거든.”
그리고 장갑을 벗어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맨 손등을 보였다.
“그때 보여줬던 건 지금은 이런 상태고.”
“…….”
“그래서 자리를 피하는 거야. 미안해.”
랑시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충격이 크겠지. 역시 배신감을 느꼈을까. 씁쓸한 기분으로 정령들을 돌려보냈을 때였다.
“역시 제 생각이 맞았어요.”
“……응?”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흠칫해 조심스럽게 표정을 살폈다. 그 순간 랑시가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엘은 정말 특별한 사람이라는 거요. 제가 읽은 책 속의 주인공들처럼요.”
별처럼 빛나는 눈이 여전히 신뢰와 호의를 담고 나를 응시했다. 말갛게 웃는 얼굴을 마주하자 숨이 차는 기분이 들었다. 수많은 감정이 한꺼번에 소용돌이쳐서 무엇 하나 정리가 되지 않았다. 결국 한마디 말만 간신히 내뱉을 수 있었다.
“고마워, 랑시.”
“무슨 말이에요, 엘. 고마운 건 저예요.”
랑시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엘이 아니었으면 저는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어요. 엘은 항상 제 영웅이에요.”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예요. 두 손을 꼭 잡으며 속삭이는 말엔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랑시가 두 팔을 뻗어 그런 나를 꽉 끌어안았다. 전해지는 온기에 안도감과 죄책감이 동시에 들었다. 트로웰을 위한 게 아니더라도 결국 나는 카노스를 택할 순 없었을 거다. 그러기엔 너무 소중한 것들을 많이 받았다.
“저희가 또 만날 수 있을까요?”
“그러길 바라.”
수도에 산다는 걸 알고 있으니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보는 모습이 마지막이 될 가능성이 더 크겠지만 일부러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다시 만날 때까지 어머니 말씀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어. 당부하듯 건넨 말에 랑시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안녕.”
“안녕, 엘.”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얼굴을 향해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어주곤 몸을 돌려 마을을 빠져나왔다. 시린 공기 때문인가. 오늘따라 가슴 속이 텅 빈 것처럼 휑했다. 그래도 마을 어귀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일행을 봤을 땐 조금 괜찮아지는 것도 같았다.
“작별 인사는 다 했어, 엘?”
반갑게 맞이해주는 시벨리우스에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날 기다려주는 사람들이 있다. 하늘은 파랗고 태양은 눈 부셨다. 헤어지는 인연들만 돌아보기엔 아까운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오늘도 견딜 수 있었다.
“이만 가자.”
비록 침잠한 슬픔이 가슴을 저리게 짓누르더라도.
* * *
“넌 쓸데없는 생각이 너무 많아.”
라피스는 계속 투덜거렸다. 전날에 내가 시벨리우스를 붙들고 한동안 서럽게 울었던 게 매우 불만인 거 같았다. 카노스를 만난 건 그 역시 기억하지 못했지만, 내가 겪은 일들을 다 듣고서도 그 평은 변하지 않았다. 아직 백 년도 안 산 녀석이 네 앞가림이나 잘 간수해라, 누가 누구를 안타까워하냐, 주제부터 먼저 파악해라, 시비를 거는 건지 위로를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잔소리가 내내 이어졌다.
‘미안해, 라피스.’
“또 뭔 소리야.”
‘미래를 바꾸면 너도 살릴 수 있을 텐데.’
잠시 아무런 대꾸가 돌아오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 끝에 이어진 건 옅은 한숨이었다.
“내가 언제 살려달라고 했어?”
‘그치만…….’
“야, 엘퀴네스.”
가라앉은 목소리에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라피스가 나를 엘퀴네스라고 부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엘이라는 애칭을 알게 된 후로는 한 번도 이렇게 부른 적이 없었다.
‘화났어?’
“아니, 그게 아니라. 네가 지금 뭔가 크게 착각하는 거 같아서. 너 애칭만 쓰느라 본명을 잊어버린 건 아니지?”
‘누가 그런 걸 잊어먹냐?’
“그럼 말해 봐. 네 본명이 뭔데?”
‘엘퀴네스지…….’
“그래, 넌 엘퀴네스지. 여기서 무슨 생각이 들어?”
무슨 생각이냐니. 이해할 수 없는 질문에 어리둥절해지자 그가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미래가 바뀌면 너도 바뀌는 거야. 말해두지만 난 네 지금 성격은 전생의 공헌이 정말 컸다고 생각하거든? 그냥 태어난 네 성격은 정말 재수 없고 거지 같을 거야. 내 말이 틀린 것 같아?”
‘어, 음…… 그건 아니라고 하기 어렵네.’
“그치? 양심이 있으면 당연히 그렇게 나와야지. 자, 그럼 생각을 해봐. 그런 거지 같은 성격을 가진 네가 나랑 계약을 할 거 같냐?”
아, 이건 솔직히 나도 장담을 못 하겠다. 선뜻 답하지 못하니 그제야 픽 웃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럼 어차피 결과는 같아.”
그는 물의 정령왕과 계약하지 못하면 오래 버티지 못하는 몸이니까. 그런 얘기였다.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간신히 대꾸했다.
‘……그래도 같은 건 아니지. 더 오래 살 수 있는데.’
“됐어, 어차피 재미도 없을 거.”
그가 정말 개의치 않아서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담담한 태도가 위안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조금은 숨을 쉴 곳을 찾은 듯한 기분이었다. 누군가의 불행 덕분에 위로받는다니, 내가 생각해도 너무 추하지만. 자괴감에 한숨을 눌러 삼키자 라피스가 다시 혀를 찼다.
“넌 쓸데없는 생각이 너무 많다고 했지. 엉뚱한 죄책감 느낄 시간에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나 어떻게 할지 생각해. 내가 알기론 트로웰 그거 이 시기에 진짜 완전 개또라이였거든? 인간족 다 죽이려던 걸 그만뒀다길래 웬일인가 했더니… 이건 뭐, 참나. 아무튼 너 진짜 고생 좀 할 거다.”
‘넌 대부한테 개또라이가 뭐냐.’
“이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나중에 나보다 더 심하게 욕하지나 마.”
마을을 떠나서는 한동안 쭉 걸었다. 유니콘들은 내가 도망치듯 길을 서두르는 걸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안 그래도 인간들과 함께 있는 게 거북했는데 오히려 잘됐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웰디와 카리안은 내가 시벨리우스를 찾느라 자리를 비우는 동안에도 사람들과 동떨어져 따로 있었다는 모양이다. 덕분에 내가 주민들에게 보여준 게 신의 문장이었다는 것도 끝까지 몰랐다. 인간에게 배타적인 성향이 이럴 땐 도움이 됐다.
“엘, 이제 어디로 가는 거야?”
“음,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 근데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찾아봐야 해.”
찾아도 트로웰이 날 만나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단 찾기는 해야 한다. 하위 정령들에겐 물어봤자 정령왕의 위치를 알려줄 리가 만무하고, 엘뤼엔은 아직 잠들어 있는 거 같다. 이프리트에게 연락해볼 방법이 없으려나. 란타샤를 다시 찾아가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신물에 관한 답신도 전해줘야 하니 겸사겸사 들르긴 해야 했다.
“엘은 계속 뭔가를 찾는 거 같아.”
“맞아, 그렇네.”
차마 부정할 수가 없어서 쓰게 웃었다. 정말 이곳에 와서는 내내 찾아다니기만 하는 일정인 것 같다. 영혼의 보석만 찾으면 될 줄 알았더니 집에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하고, 이젠 트로웰의 마음을 돌릴 방법도 찾아야 한다. 내 인생이지만 정말 쉽지 않았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있자니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웰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얼굴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왜요, 웰디?”
“저, 그분과는 다시 합류하나요?”
“그분이요?”
“당신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분 말이에요.”
아버지면 아버지지, 참 어렵게도 말한다. 엘뤼엔이 애아버지라는 걸 어떻게든 외면하려는 의지가 느껴지는 표현이라 웃음이 나왔다.
“말도 없이 가신 걸 보면 많이 급한 일이셨나 봐요.”
“아, 네. 그래도 다시 돌아올 거예요.”
“그렇군요.”
긴장하고 있던 얼굴이 밝아졌다. 누가 봐도 안도하는 기색이라 솔직히 조금 의외였다. 대놓고 면박을 당하기도 한 만큼 앙심을 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너무 연애감정에 무지했나 보다.
“그런데 그분은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아, 별다른 의미는 없어요. 인간은 당신 정도의 자녀를 지니려면 노화가 더 진행되지 않나 싶어서요. 굉장히 일찍 성혼하셨나 봐요.”
“아, 제가 양아들이라서 그래요.”
“그 말은…….”
“직접 낳은 자녀는 아니라고요. 당연히 결혼도 아직 안 했고요.”
원하는 대답을 해주니 웰디는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걸 보면 참 단순한 사람이었다. 이 정도로 솔직하면 오히려 귀엽다. 미래의 이프리트가 웰디의 반만 닮았어도 그 사달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본인도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지금은 개과천선하고 태도를 완전히 바꾸긴 했지만.
‘대신 나를 쥐잡듯 잡고 있지.’
그 죄 없는 희생양이 여기서는 시벨리우스인 것 같았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웰디, 엉뚱한 생각하지 마.”
“제, 제가 뭘요.”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그는 네가 그런 류의 호감을 품을 상대가 아니야.”
“혹시 투기하시는 거예요?”
“투……?”
“당연히 내 옆에 있을 거라 생각한 사람이 다른 이성에게 호감을 보이니까 신경 쓰이시는 거잖아요. 시벨 님도 이런 자극이 필요한 분이신 줄 몰랐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본분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제 반려가 될 사람은 여전히 시벨리우스 님이에요.”
“……아니, 됐어. 내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깊은 한숨을 내쉰 시벨리우스가 마른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세상의 모진 바람을 온몸으로 맞은 듯한 모습을 보려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저기, 웰디. 사실 아버지는…….”
“그보다 엘에게 드릴 말이…… 네? 뭐라고요?”
이제라도 사실을 털어놓으려는 계획은 웰디가 동시에 뱉은 말과 섞이면서 실패했다. 우리는 잠시 서로를 멀뚱히 바라보다 쓰게 웃었다.
“먼저 말하세요. 저한테 할 말이 있다고요?”
“네, 실은 아까 숲에서…….”
하지만 이번에도 웰디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문득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 같더니 숨을 크게 삼키곤 뒷걸음질을 치는 게 아닌가. 방금까지 평온했던 얼굴이 갑자기 사색이 되는 게 이상해서 돌아보았다가 나 역시 얼굴을 굳혔다.
……저게 대체 뭐야?
하늘에 새카만 무리가 우글거리고 있었다. 처음엔 새 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빠르게 가까워지는 형태가 생각보다 너무 컸다. 생김새도 괴상한 게, 날개만 달렸을 뿐이지 외형은 왕도마뱀에 더 가까웠다. 깃털 없는 두꺼운 가죽엔 날카로운 뿔이 돋아나 있었고, 크게 벌린 입에선 수백 개는 되어 보이는 듯한 송곳니가 번뜩였다. 시력이 정상이라면 도저히 새라고 생각할 수 없을 생김새였다.
“큰 날개 왕도마뱀이잖아.”
마찬가지로 하늘의 무리를 발견한 시벨리우스가 당황하며 말했다. 실제로 본 건 처음이지만 그게 뭔지는 알았다. 한때 욱여넣다시피 외웠던 몬스터 도감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페이지를 넘겼다. 큰 날개 왕도마뱀. 파충류 변이종으로 비행 몬스터 중에서도 공격성이 매우 강한 상급 몬스터였다.
“저게 왜 여기에 나타났지?”
큰 날개 왕도마뱀은 서식지가 고원에 있는 데다가 영역을 벗어나는 일이 거의 없는 몬스터다. 토벌할 목적으로 일부러 찾아가지 않는 한 민간인이 마주할 일이 없다는 소리다. 지금 이곳은 고원도 아니었고 몬스터의 서식지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냥 이동하는 중인 건…… 아닌 것 같군요.”
카리안이 핼쑥한 얼굴로 검을 뽑아 들었다. 겁에 질린 웰디가 마찬가지로 무기를 꺼낸 시벨리우스의 옆에 매달리다시피 달라붙었다. 그도 그럴 게,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빠른 속도로 하강하는 몬스터는 누가 봐도 공격태세였다.
키에에엑!
강렬한 소음과 함께 날카로운 발톱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