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567)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567화(567/608)
제567화
“지금 무슨 생각해? 내가 너무 나쁘다는 생각?”
아니, 아니다. 정신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트로웰은 나쁘지 않아.”
힘겹게 뱉은 말에 그가 멈칫했다. 이해하지 못한 반응이라 이번엔 더 제대로 말했다.
“넌 누구보다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이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안다. 그는 아무것도 못 하는 무능한 동료를 비웃지 않고 상냥하게 대해준 사람이었다.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도와주고, 자주 찾아와 어울려 줬다. 어설프게 유희를 시작했을 땐 곤경에 빠지지 않도록 아무런 대가 없이 옆에서 챙겨주기도 했다. 라피스를 보듬어 챙긴 것도, 알리사가 정령사가 될 수 있도록 안배한 것도 그였다.
그건 여기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응징하는 건 늘 약자에게 해악을 끼치는 자들뿐이었다. 다비안의 상황도 외면하지 않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줬다. 크리스를 살리도록 인도해주기도 했다. 내가 위험할 땐 구하러 와주고, 내 억지나 다름없는 요청들도 전부 다 들어줬다. 정말 나쁜 사람이라면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가슴 아파. 이렇게 다정한 널 분노하게 한 게 인간이라는 사실이. 그리고 나 역시…… 네게 그런 인간 중 하나일 수밖에 없는 이 현실이.”
“…….”
“미안해, 트로웰. 정말 미안해.”
그가 내게 화내는 건 당연하다. 미래를 바꾸지 못한 탓이라고, 상황을 탓할 것도 없었다. 처음부터 지킬 생각도 없었으면서 무책임하게 약속한 건 나였다. 트로웰이 나한테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있는지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아마 그 역시 내가 건성으로 임했다는 걸 알고 있었을 거다. 단 한 번도 적극적으로 나선 적이 없었는데 모를 리가. 그래도 몰아치거나 화내지 않고 인내심 있게 기다려줬다. 그 믿음이 끝내 배신당했으니 더 화가 난 거다. 그러니까 이건 전부 자업자득이었다.
“너…….”
무언가 말하려던 트로웰이 그 순간 훌쩍 뒤로 물러섰다. 콰과광! 직후 그가 있던 자리에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내리꽂혔다. 사나운 바람과 함께 온 세상을 뒤흔드는 것 같은 강렬한 파장이 밀어닥쳤다. 얼음 조각인지 수증기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시린 바람이 그쳤을 땐 온 사방이 설원이 된 것처럼 새하얬다. 그리고 내 앞엔 누군가가 서 있었다. 어느 때보다 고요해 보이는 엘뤼엔이었다.
“아버지…….”
“…….”
돌아보는 눈동자가 유리처럼 기묘한 질감을 띠었다. 그의 푸른색 머리칼도 단단한 얼음처럼 보였다. 눈이 덮이지 않은 빙하의 아랫부분은 새파란 색이라던데, 그게 저런 느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벨리우스와 유니콘들은 조금 전의 충격으로 의식을 잃은 것 같았다. 내가 무사한 건 엘뤼엔이 보호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무런 말 없이 트로웰을 한 번, 그리고 나를 한 번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스산한 시선이 내 다리에 박혀 있는 돌 가시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늦었잖아, 엘퀴네스. 하마터면 정말 죽일 뻔했어.”
“……그간 내가 너무 관대했나 보군.”
낮게 중얼거린 그가 팔을 뻗었다. 얼음 줄기가 마치 파도처럼 트로웰을 덮쳐갔다. 트로웰은 저항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휘말렸다. 그의 몸에 얼음 파편이 사납게 박혀 들었다.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진 건 멀찍이서 숨어 있던 디아곤이었다. 바닥에 엎드린 그가 연신 헛구역질을 하며 붉은 피를 토해냈다. 혀를 찬 트로웰이 곧 반투명한 느낌으로 변했다. 디아곤과 연결된 마나를 끊고 자연체로 돌아간 거다. 하지만 그 상태에서도 그는 여전히 얼음 속에 박혀 있었다.
“그렇게 죽고 싶다면 소멸시켜주지.”
―하하, 그래. 차라리 그게 더 나을 것 같긴 하네.
트로웰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엘뤼엔을 감싼 기류가 다시 사납게 움직였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살의에 소름이 돋았다. 그가 정말 트로웰을 소멸시키려는 거다.
“안 돼, 아버지!”
다급히 소리쳤지만 전혀 닿지 않았다. 막아서고 싶어도 움직이지 않는 다리 때문에 꼼짝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방황하다 다리에 박힌 돌 가시를 강제로 뽑아냈다. 온몸이 갈라지는 고통에 눈앞이 새하얗게 점멸했다. 비명을 삼키니 당황한 엘뤼엔이 트로웰을 버려두고 급히 내게 다가왔다.
“너 지금 무슨 짓을!”
“그러지 마! 제발 그러지 마!”
필사적으로 팔을 뻗어 엘뤼엔의 옷자락을 꽉 부여잡았다. 다행히 트로웰은 그 틈을 타 몸을 피한 것 같았다. 디아곤 역시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둘이 사라진 걸 확인하고 낮게 혀를 찬 엘뤼엔이 피가 철철 흐르는 환부에 손을 댔다. 시원한 감각이 들면서 고통이 차츰 가셨다. 그런데도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아직도 다리에 가시가 박혀 있는 기분이 들었다. 연신 숨만 몰아쉬고 있는 내게 엘뤼엔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왜 그랬지?”
“미안해.”
“네가 이런다고 그 녀석이 고맙다고 할 것 같나? 그건 또 널 죽이려 할 거다.”
“……알아.”
“알면서 날 막았다라. 자해와 다름없는 짓까지 하면서 말이지.”
기가 막히다는 듯한 시선을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해선 안 되는 짓을 벌였다는 건 알고 있었다. 나를 위하는 그의 호의를 이용했다. 지금 그가 분노한 이유도 나 때문이었는데. 그 모든 상황을 무시하고 트로웰을 구하는 쪽을 택했다. 그가 느꼈을 충격과 배신감을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나를 정말 우습게 만드는군.”
건조한 음성에 몸이 움찔 떨렸다. 급히 고개를 들자 냉담한 시선이 닿았다. 낯선 얼굴이었다. 바로 앞에 있는데도 멀찍이 떨어져 있는 기분이 들 만큼.
“그렇게 죽고 싶다면 네 마음대로 해라. 이제부터 네 일엔 아무것도 관여하지 않겠다.”
“아, 아버지. 나는…….”
“하지만 난 내 계약자가 개죽음당하는 걸 용인하는 호구가 될 생각도 없다.”
아, 이다음 말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사실은 진작 나왔어야 할 말이라 놀랍진 않았다. 오히려 그가 지금까지 인내한 게 더 신기한 일이었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고 숨을 참았다.
“이렇게 말해도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군.”
“…….”
“네 뜻은 잘 알았다.”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그가 곧 몸을 일으켰다. 멀어지는 기척이 초조했지만 차마 붙잡을 수 없었다. 온기가 사라진 만큼 서늘한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이르렀다.
“정령 계약을 파기한다.”
심장과 함께 온몸의 감각이 내려앉았다. 아득한 추락감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몸 안에서 균열이 일면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조각난 파편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리다 그대로 사라지는 게 선명히 와 닿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이미 엘뤼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온 사방을 새하얗게 뒤덮고 있던 눈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치 지금까지 그가 곁에 있었던 게 전부 꿈이었던 것처럼.
문득 온 세상이 소름 끼치게 적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기가 느껴지는 거 같아 두 팔로 몸을 꼭 끌어안았다. 그래도 추위가 가시지 않았다.
“야, 괜찮냐?”
라피스가 평소답지 않게 주저하면서 물었다. 이 녀석도 눈치를 볼 때가 있긴 하구나 싶으니 이 와중에도 웃음이 나왔다.
“고마워, 라피스.”
“…뭐가.”
“내가 지금 혼자가 아닌 걸 알게 해줘서.”
이어지는 답은 없었다. 천천히 숨을 가다듬고 찔끔 나오는 눈물을 얼른 손등으로 닦아냈다. 내가 생각해도 이건 정말 못 할 짓이다. 돌아가면 꼭 한마디 해야지. 이때 너무 힘들고 서러웠다고. 나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라는 게 있는 건데 다들 진짜 나한테 너무했다고. 이 시기의 기억은 다 지워지겠지만, 기억하든 말든 오늘 일들 전부 항의할 거다. 아예 더 심하게 과장해야지. 있는 이야기고 없는 이야기고 죄다 부풀려서 죄책감에 몸부림치게 해줄 거다. 돌아가기만 하면.
……그런데 돌아갈 수는 있나?
아, 이런. 실수했다. 이런 생각은 하면 안 되는데. 다시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엘!”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여기서 들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였다. 당황해서 돌아본 곳엔 붉은 머리칼을 지닌 남자가 있었다.
“이프리트.”
“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어! 괜찮아? 무사해? 젠장, 트로웰 그 자식이……!”
그때 말을 멈춘 이프리트가 눈을 크게 깜빡였다. 그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응시했다.
“엘, 너…… 물의 인장이…….”
그 말을 듣고 멍하니 이마를 매만졌다. 그렇구나. 진짜로 사라졌나 보다. 하긴 엘뤼엔이 이런 걸로 빈말을 할 리가 없지. 계약이 사라지는 감각도 선명하게 느꼈다.
순간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봤어도 그냥 모르는 척해주지. 알고 있어도 다른 사람한테 확인받는 건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쭉 잘 참고 있었는데 갑자기 견딜 수 없게 서러워졌다. 당황한 이프리트가 얼른 나를 끌어안고 다독였다.
“괜찮아, 도련님? 아이고, 이게 다 무슨 일이야!”
그 품을 붙잡고 하염없이 울음을 터트렸다. 이제 정말 돌아가고 싶다. 날 아들이라고 불러주던 아버지가 그리웠다. 아버지가 벌써 너무 보고 싶다. 너무 보고 싶었다.
* * *
트로웰이 만든 바위 감옥은 뭘 어떻게 한 건지 검기로도 잘 잘리지 않았다. 시벨리우스가 그렇게 창살을 흔들어대고 내리쳐도 꿈쩍도 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이 정도면 다이아몬드보다 강한 거 같은데, 원래 있는 광물이긴 한 건가? 나중에 희대의 광물을 발견했다는 기사가 뜨지 않을지나 모르겠다. 어쨌든 이프리트가 도와주고 나서야 간신히 입구를 트고 쓰러져 있는 유니콘들을 빼낼 수 있었다.
“그냥 의식만 잃은 거야. 다들 무사해.”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니 유니콘들을 살피던 이프리트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솔직히 잘 모르겠어.”
“하긴, 도련님도 지금 당장은 정신이 하나도 없겠지.”
진짜 뭐 이런 일이 다 있냐. 한숨을 내쉰 그가 낮은 목소리로 탄식했다.
간신히 진정한 후 지난 상황을 전해 들은 이프리트는 심란해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한숨과 함께 연신 머리를 쓸어넘기다 나직한 목소리로 누구를 향한 건지 모를 욕설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지금도 그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결심을 굳혔는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도련님, 이참에 나랑 계약할래?”
“아니.”
잠깐 정적이 감돌았다.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 있던 이프리트가 곧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잠깐! 잠깐만! 왜 즉답이야? 도련님은 물의 친화력이 제일 강한 거지, 다른 속성이랑도 계약할 수 있다니까? 난 엘퀴네스랑 비교할 수도 없이 친절한 정령왕이거든?”
“그건 알지.”
“아는데 왜 거절해? 내가 걔보다 더 잘해줄게!”
“그러니까 더 안 돼. 이프리트도 날 지키려고 트로웰이랑 싸울 거잖아.”
“앗, 으음.”
차마 아니라고 답할 수는 없었는지 그가 말문이 막힌 표정이 됐다. 정령이 계약자를 지키는 건 너무 당연한 기본 조건이라서, 설령 그가 아니라고 거짓말을 했어도 믿지 않았을 거다.
“생각해 보니 내가 엘퀴네스 입장을 너무 배려하지 않았더라고. 나였더라도 내 계약자가 나 같은 짓을 하면 정말 화나고 속상할 거 같아. 그러니까 계약은 하지 않을 거야.”
“으음,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하지만 도련님, 트로웰이 널 안 죽인 건 네가 정령왕의 계약자이기 때문이야. 엘퀴네스와 계약이 파기된 걸 알면 걔도 더는 적당히 하지 않을 거야.”
“……그렇겠지.”
“그러니까 일단 나와 계약을…….”
“그래도 안 할래.”
웃으며 답한 말에 이프리트는 다시 할 말을 잃은 표정을 지었다.
“결국 이 모든 일은 정령왕의 계약자 때문에 시작된 거잖아. 그런데 나만 안전을 보전하는 건 아닌 것 같아. 날 대하는 문제를 두고 정령왕들끼리 사이가 틀어지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아.”
“……우린 새삼 틀어질 것도 없어. 원래 사이 안 좋아.”
“그렇게 말해도 잘 지낸다는 거 알고 있어. 특히 이프리트가 모두를 많이 아낀다는 것도.”
“…….”
“마음 써줘서 고마워, 이프리트. 난 괜찮아.”
이프리트는 한동안 뭔가 말하려는 듯이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기를 반복했다. 그리곤 복잡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문질렀다.
“이건 뭐라고 말을 할 수도 없네. 하지만 도련님, 난 정령왕들만 아끼는 건 아냐. 도련님 너도 아껴. 도련님이 죽으면 좀 많이 슬플 거야.”
“응, 그래서 고마워. 죽지 않도록 조심할게.”
“……이렇게 신뢰하기 힘든 대답은 또 처음이네. 도련님 실력을 믿는 거야, 아니면 트로웰을 믿는 거야?”
“둘 다?”
“하아, 나도 이제 진짜 모르겠다.”
그래, 이해한다. 솔직히 나도 모르겠으니까. 아는 건 하나뿐이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거.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
“무슨 부탁?”
“트로웰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어.”
이 질문에 이프리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결코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그는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마른세수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를 진짜 어떻게 하면 좋냐…….”
당장은 이프리트도 트로웰의 위치를 모른다고 했다. 정말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가 그렇다고 하니 믿어야 했다. 그래도 파악하는 대로 알려주겠다는 약속은 받아냈다.
유니콘들의 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한 건 이프리트가 우선 상황을 살펴보고 오겠다며 자리를 떠난 후였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시벨리우스였다. 잔잔하던 호흡이 조금씩 흐트러지는 걸 확인하고 가까이 다가가니 그가 눈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곧 앓는 듯한 신음과 함께 굳게 닫혔던 눈꺼풀이 열렸다.
“정신이 들어?”
“……엘?”
멍하니 나를 바라본 그는 잠시간 눈을 깜빡거리다 경악한 얼굴이 되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다급한 시선이 곧장 내 다리를 향했다.
“엘! 어떻게 된 거야? 너 다리는! 괜찮아?”
“응, 괜찮아. 다 나았어.”
“혹시 엘퀴네스가?”
기절하기 전에 얼음이 쏟아진 걸 기억하는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니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너덜너덜해진 바지를 바라보는 표정이 좋지 못했다.